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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칼럼-에세이

국제연대에 왕도 없다

김승국

필자는 국제 연대의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평화 운동을 하는 가운데 해외에 나가서 부딪히며 느낀 점을 ‘국제연대’란 틀에 맞춰 겨우 기술할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정색을 하고 말할 때의 ‘국제연대’가 아닌 평화 관련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겨우 의사소통하며 국제적인 연대감을 느낄 정도의 감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좀 섣부른 이야기도 있을 법하다.

국제연대에 관하여 ‘glocal 운동’이란 화두를 던진다. ‘glocal 운동’이란 ‘global 운동’과 ‘local 운동’을 아우르는 말이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지구촌을 누비며 활약하는 운동(global 운동)도 잘 하고,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local 운동)도 잘 해야 한다는 당위가 함축된 뜻이다. 지역의 풀뿌리 local 운동의 기반 없는 global 운동은 사상누각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럼 한국의 경우 민초들의 생활에 입각한 풀뿌리 local 운동을 잘 하면서 global 운동도 잘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두마리 토끼(풀뿌리 local 운동 ・global 운동)를 모두 놓쳐 허둥대는 상태에 빠져 있다. 민중 없는 국내(local)운동을 하다가 가끔 국제무대로 나가 global 운동을 한다고 헤매는 듯하다. 이는 무언가 운동의 좌표 설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흔히 국제연대의 맹점을 지적할 때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표현을 한다. 이 표현은 ‘국제적인 시야를 갖지 않고 우물 안, 즉 국내에서만 꼼지락거리는 운동’을 풍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도 수정되어야 한다. 진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려면 우물 안의 중생들과 친화력을 갖춘 풀뿌리 local 운동을 잘해야 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해도 풀뿌리 운동을 제대로 못 하면 중생들로부터 개구리 취급도 받지 못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 자격도 없는데 어떻게 우물 안을 박차고 우물 밖의 세계를 지향할 수 있는가?

우물 안에서 우물쭈물 운동하는 필자가 자기성찰의 의미에서 몇가지 당돌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처럼 세계적인 운동력을 갖춘 나라가 해외에 나가기만 하면 맥을 못 추는 게 단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은 탓인가? 혹시 운동력은 있으되 운동의 좌표 설정이 잘못된 게 아닌가? 운동력은 있으되 민중 없는 국내(local)운동에 장기간 매몰된 나머지 세계화 시대를 돌파하기 위한 global 운동력을 갖추지 못한 게 아닌가? 한국처럼, 국내 운동력이 세계 최상위권인데 국제연대 운동력이 세계 최하위인 ‘극도의 비대칭’인 경우가 있는가? 얼마 전 홍콩에서의 국제무역기구(WTO) 각료회의 반대 시위 때 한국의 운동권이 이름을 날렸다고 하지만 극도의 비대칭을 극복할 발판은 마련했나?

홍콩의 WTO 반대 시위를 요령 있게 함으로써 국제연대의 모범을 보인 것 같지만 그저 멋진 국제행동의 한 장면을 연출한 데 불과하다.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우물을 박차고 나와 ‘개구리들의 반세계화 짓시늉을 보인 쾌거’라고 겸손하게 말하면 어떨까? 국제무대에서 담론 ・의제 설정 ・운동노선 제기 ・운동조직 구성 ・대중설득 능력을 보이지 않을 때 국제연대의 일주문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홍콩 시위에 관해서도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국제연대의 기본기(基本技) 없이 장외에서 몇 차례 멋진 시위를 했다고 “국제연대를 끝내 주게 했다.”고 자만하면 안 된다.

어쨌든 홍콩 시위는 국제연대의 일주문에 상당히 접근한 쾌거임에 틀림없다. 이는, 시애틀에서의 반세계화 투쟁부터 뭄바이의 세계사회포럼에 이르기까지 ‘좌충우돌’하면서 국제연대 운동력을 축적한 산물이다.

앞에서 언급한 ‘좌충우돌’이란, ‘영어의 청맹’인 한국 운동권이 국제연대 한다고 좌충우돌했으며 필자 역시 엄청난 좌충우돌을 했음을 고백하는 문구이다. 한국의 운동권과 필자가 동시에 좌충우돌한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지면 제약으로 축지법을 쓸 수밖에 없다.

국내 운동권이 좌충우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벙어리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국제회의에 참석한 국내 운동가들이 아예 국제회의장 주변을 맴돌며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심정을 이루다 말할 수 있으랴… 낮에는 국제회의장에서 놀고(?), 저녁에는(이 시간에 다른 나라의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한다) 시내 구경을 하거나 술 한잔으로 국제연대의 쓴맛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나들이 파(派)’의 푸념을 죄다 늘어놓으면 서로 할 말이 많으리라… 그럼에도 ‘나들이 파’의 푸념에서 국제연대의 교훈을 발견해야 하는 게 한국 운동권의 현실이다.

늘 준비 안 된 국제연대이어서 ‘나들이의 좌충우돌’을 강요받는 측면도 있으나, 나들이하기에는 너무나 안쓰러운 사연이 있기에 ‘좌충우돌’이란 표현도 사치스럽다. 그런데 사치스런 좌충우돌을 하는 나들이 국제연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국제회의 적극 참석파’ 역시 귀동냥 수준에 머문다면 이는 심각한 일이다. 이들이 국제회의장에 적극 참석하여 하루 종일 머리가 쥐 날 정도로 들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국제연대의 멀미 현상’을 느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경우에도 “영어만 잘해 가지고 국제연대를 잘 할 수 있다.”는 환상은 금물이다.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국제연대를 잘 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제연대의 기획 ・의제 설정 ・의제 실현 ・담론 형성 ・국제 네트워크 조직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국제연대는 백년하청이다. 이렇게 비관적인 설명을 하면 ‘영어의 청맹이 수두룩한 한국 운동권이 어느 세월에 그런 능력을 겸비하느냐?’는 역공이 대뜸 쏟아질 것이다.

이 역공을 맞받아치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에 왕도가 없듯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국제연대에도 왕도가 없다.”는 댓글을 단다. 끈질기게 국제연대에 매달려 귀가 뚫리고 국제연대의 멀미 현상이 해소되는 ‘그날’, 국제회의장에서의 좌충우돌이 끝나는 ‘그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갖고, 국제연대를 위해 몸으로 때우라고 주문한다.

온몸으로 헌신하듯 국제연대에 임하지 않으면 국제연대의 감각이 갖춰지는 그날이 결코 오지 않음을 강조한다. 국제연대에는 왕도가 없을 뿐 아니라 꾀를 부리며 나아갈 지름길도 없다. 오직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몸으로 때우기’밖에 없다.

국제연대 나들이 파(派)들이여! 일단 ‘몸으로 때우기 국제연대’를 시도하시라! 영어의 청맹을 모면하기 위해 영어회화 공부에 정진하라!
벙어리 영어를 벗어난 국제회의 적극 참가 파들이여! 국제연대의 멀미 현상에서 벗어나라!
국제연대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자칭 ‘꾼’들이여! 국제연대 무대에서 의제 ・담론을 장악하라!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15호(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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