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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칼럼-에세이

‘악동’과 미국의 불행한 만남

나는 왜 평화운동을 하게 되었나


김승국


아무래도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평화’를 역행하는 전쟁 지향적인 생활공간, 시대 상황에서 자랐다. 나는 한국전쟁의 포성이 그치지 않은 1952년 7월 달에 태어났다. 나는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한국전쟁의 공포를 느꼈다. 내가 받은 태아교육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전쟁의 공포)으로부터의 도피’이었다.



1. 태생적으로 ‘전쟁 체제’와 씨름



내가 태어나던 날 밤도 야간 등화관제가 실시 중이어서 ‘왜 이 집은 불을 끄지 않는냐!!’는 성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등화관제 속에서 태어난 나는 태생적으로 ‘전쟁 체제’와 씨름할 수밖에 없다.


내가 두 살 때 우리 집은 금강 하구에 있는 장항(長項)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장항에서 살았다. 장항은 금강 건너편의 군산과 여객선 ・화물 운송선으로 왕래했다. 그 당시 군산은 미군의 군사지배를 위한 핵심지역이었으며 군산을 향한 미군의 군수물자는 거의 모두 장항을 거쳐 보급되었다. 마침 우리 동네가 부두 부근이어서 나는 매일 같이 미군(GI) 특히 흑인 미군 병사들과 조우했다.



2. ‘Give me gum’ ‘God damm’



나이 어린 흑인 병사들이 나와 내 친구들을 야유하면 맞받아치며 실컷 욕을 퍼부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린 시절 내가 배운 첫 영어 문구는 ‘Give me gum’ ‘God damm’이다. 나와 우리 동네의 친구들이 지나가는 미군차량을 향해 ‘Give me gum !’을 외치곤 했다. 그런데 미군이 껌이나 씨레이션(미군의 식량)을 내던져 주지 않으면, 우리 동네 악동들은 그 자리에서 ‘God damm !’을 외치며 팔뚝으로 대포를 쏘는 흉내를 내며 온몸으로 “너를 저주한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3. 미군과의 상스러운 만남



미군과의 이렇게 상스러운 만남은 분명히 나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Give me gum !’은 미군정의 원조경제에 의지하던 한국 민중의 구걸의식을, ‘God damm !’은 당시 민중들의 미국비판[批美] 의식을 악동들이 구전처럼 외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 들은 어른들의 정치방담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으나 ‘일본놈은 다시 돌아오고, 미국 놈은 믿지 말라 !’고 했다. 당시 민중들의 미국-미군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았으며 그런 여론의 영향력이 아이들에게도 은근히 미쳐, 아이들 역시 미군을 향해 삿대질했으리라…


앞에서 언급한 두 개의 의식, 즉 구걸의식과 미국비판[批美] 의식은 상반된다. 하지만 시대상황도 영어도 전혀 모르는 나에겐 ‘God damm !’이라는 비미(批美) 구호를 외치자마자 미군이 발끈하며 성을 내는 게 여간 재미있지 않아 즐거이 ‘악동들의 비미(批美) 캠페인’에 참여했다.



4. ‘God damm의 비미(批美) 의식’이 잠재화



내가 철이 들어 체계적인 미국 비판의식을 정리한 책을 저술할 때, 어린 나이에 부딪친 미군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며 ‘양키’로 다가오기도 했다. 나는 줄곧 미군-미국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데, 동심에 새겨진 ‘God damm의 비미(批美) 의식’이 조금이라도 잠재화 되어 있을 것이다.


철부지 어린이었던 나 혼자만 유별나게 비미(批美) 의식이 강해서 ‘God damm !’을 외친 게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 ‘미군을 삐딱하게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미군을 ‘양키’ ‘양놈’이라고 욕해도 어른들로부터 제지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미군’ ‘미국인’을 자연스럽게 ‘양키’로 보기 시작했다.


어쨌든 전혀 사회과학 의식이 없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미군을 조롱의 대상으로 여기고 미군 역시 나를 경멸하는 ‘아름답지 못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장항이라는 무역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들의 못된 행태이다.



5. 묘한 배신감 ・증오심



당시 장항이라는 무역항을 통해 들어오는 미국인 등 외국인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와 행패를 부렸으며, 우리 동네의 누나들을 희롱하는 바람에 동네사람들이 질색했다. 동네 처녀들이 외국인들을 피해 골목으로 달아나곤 했다. 나는, 학교 가는 길에 있는 카바레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외국인과 한국 여성이 춤을 추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하였으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외국인들이 같이 춤추던 여성을 억지춘향으로 여관방으로 끌고 가는 장면을 매일 같이 지켜 보았다. 특히 생활고로 허덕이던 우리 옆집의 누나가 집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양공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추운 겨울밤에 들었을 때의 ‘묘한 배신감 ・증오심’이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 당시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미군들이 지나가면 껌을 달라고 하고, 무역선 타고 들어온 외국인들이 떨어뜨리는 콩고물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외국인들 역시 외항선 노동자이어서 그런지 돈은 별로 쓰지 않았으나 유별하게 여자를 좋아했고, 카바레에서 만난 한국 여성들과 하룻밤 자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더욱 얄미워하며 싫어했던 것 같다.


외항선에서 내린 다국적 외국인들이 우리 동네사람들을 오만하게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저항의식이 온 동네에 퍼져 있었으며 나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따라서 우리 동네에서 외국인 ・외세 비판은 생활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일자 무식쟁이가 많은 우리 동네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통해 외세에 대한 비판력을 기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6. 자연 발생적인 비미(批美) ・반외세 의식



군용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미군과 외항선에서 내린 외국인이 우리를 깔보니까 그에 대한 저항심으로 비미(批美) ・반외세 의식이 저절로 생긴 것이다. 이런 자연발생적인 비미(批美) ・반외세 의식은, 나의 어린 시절의 세계관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비미(批美) ・반외세 의식이 알게 모르게 나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형성된 나의 ‘비미(批美) ・반외세의 잠재의식’은, 어른이 되면서 ‘미국 비판적인 평화의식’으로
서서히 승화된다.



7. 영문도 모르고 ‘자주 평화’ 연습 ?



필자가 요즈음 평화운동의 지론으로 내세우는 ‘자주 평화(自主하는 평화)’가 포괄하는 ‘미국 비판 ・반외세’의 심리적인 연습을, 어렸을 때부터 영문도 모르고 했다고나 할까. 동네 분위기가 그러했고 시대 분위기가 그러했으니 나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면 또 하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이야기하련다. 미군 차량에 탑승한 미군들의 완전무장한 모습, 미군 탱크, 각종 미군 무기를 질리도록 지켜본 탓인지 몰라도 우리 동네 아이들은 유별나게 병정놀이를 즐겨했다. 동네 아이들끼리 편싸움을 하다가 지겨우면 이웃동네 아이들과 동네 대항 전쟁놀이를 했다. 장난이 아닌 실전을 방불케 하는 놀이이었다. 전투용(?) 활을 만들어 화살 끝에 탱자를 꽂아 부상을 겨우 모면하게 하는 전쟁놀이를 벌이며 여름밤을 보냈다.



8. 병정놀이로 날을 지새다



우리 어린이들만 군국주의에 찌든 게 아니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어른들은 대포 집에서 술이 취하면 무조건 연령순에 따라 일제 강점기의 군가부터 한국전쟁 때의 군가까지 동네방네 소리쳐 부르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우리 동네의 군사주의 팽배는, 박정희 정권의 쿠데타 이후 상식화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군가를 즐겨 부르며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즐거이 종속되어 갔다.


우리 동네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군사주의 문화가 박정희 군사 파시즘과 어울리면서 나 자신도 군사문화에 대한 특별한 감각이 없이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선생님이 나를 향해 ‘너는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면 딱 좋겠다.’고 격려를 했겠는가?


나의 후배들은 중 ・고등학교 재학시절의 교련시간이 지겨웠다고 한다. 나는 그 이전의 세대이어서 그런지 교련을 받을 적이 없으나,교련보다 더 지겨운 체육시간이 두려웠다. 체육시간은 신체를 단련하는 시간이 아니라, 조금만 실수해도 군대식으로 기합 받고 체육 선생님으로부터 원 없이 구타당하는 시간이었다. 체육시간은 공병대식으로 작업(학교 안팎의 제초작업, 운동장 정비 작업, 돌담 고치는 작업 등)하는 시간이어서 가장 넌덜이가 났다. 그러나 체육시간을 통해 군사문화를 강요당하자 군사문화에 대한 저항감이 서서히 형성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레 익혀 온 군사주의에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고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어렴풋이 들기 시작했다.



9. 군사문화에 대한 저항감



가정 형편상 대학 입학의 꿈도 꾸지 못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갔다. 나는 몇 년간의 은행원 생활을 청산하고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늙은 대학생을 심리적으로 괴롭힌 것은 교련시간이었다. 대학이 굉장히 낭만적인 곳으로 생각하고 직장생활도 그만두고 대학생이 되었는데… 어렸을 적 병정놀이를 대학에서도 또다시 하니 갑갑한 노릇이었다. 그나마 총에 실탄도 장전하지 않고 나무로 만든 총으로 찔러 총 연습을, 학점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다니… 이 보다 더 웃기는 활극이 없었다. 대학생들이 엉성한 교련복을 입고 북녘 동포를 향해 ‘찔러 총 !’ 연습을 하는 웃지 못 할 코미디는, 박정희 군사독재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어렸을 적의 병정놀이에 비해 전혀 재미가 없는데도, 군사독재의 억압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교련 연습을 통해 ‘전쟁의 그늘’이 대학교에 스며든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분단체제에서
비롯됨을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 나보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교련반대 ・박정희 군사독재 반대운동에 열중했으나, 나는 늦깎이 대학생이 된지라 사회의식도 그만큼 늦게 터득했다.



10. 막사 안에서 싹튼 ‘평화 동경심’



이어 대학 재학 중 군에 입대했다. 나는 전방에서 공병으로 지내며 박정희 군사 파시즘의 현장을 체험했다. 늙은 대학생이 뒤늦게 입대한지라 나는 병사들 중에서 최고령이었다. 그래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내가 도저히 군대체질이 아닌 것 같아서 차라리 ‘고문관’으로 지내기로 작정했다. ‘고문관’ 생활을 하다 보니 오히려 군사문화의 모순이 잘 인지되었다. 그래서 제대할 무렵에는 ‘군대생활의 지겨움을 벗어나려는 해방감에서 비롯된 평화 동경심’이 생기기 시작하여 나의 의식에 최초로 ‘평화’라는 단어가 자리하게 되었다.


나는 제대 직후 대학에 복학한 다음에 박정희 군사 파시즘 반대, 민주화 운동에 관하여 후배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민주화 운동 단체에 가입한 다음부터 더욱 열심히 운동에 참가했으며, 운동 전반에 눈을 뜨게 되면서 ‘통일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이 땅의 분단을 조장한 세력이 미국-미군이라는 인식’이 운동권에 널리 퍼졌는데, 나도 그런 인식에 동의하면서 ‘주한미군을 통한 미국의 군사 지배’와 분단체제의 관련성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1. 반핵평화 국제대회에서 ‘평화의 영감’을 받다



그러나 1989년 소련의 붕괴 이후 이념의 방황기에 ‘나를 지도했던 운동꾼(?)’들이 서서히 짐 보따리를 챙기고 있었다. 바로 이때, 일본의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열리는 반핵평화 국제대회의 초청장이 나에게 날아왔다. 나는 그 반핵평화 대회에 참석한 다음부터 핵무기 반대운동의 영감을 받아 반핵운동에 진력하기로 결심했다. 그 뒤 반핵평화 운동 단체의 간부로 지내며 핵무기 반대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냈다.


한편 대학원에서 철학공부를 하던 나는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그 동안의 인식을 총정리 하면서 ‘정치 경제학적인 인식’ 아래에서 평화이론과 평화 운동의 접점을 찾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 뒤 나는 박사학위 논문에 나타난 인식을 더욱 깊이 하기 위해, 199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평화와 관련된 저서들을 섭렵했다. 1999년에 귀국한 뒤 본격적으로 평화 운동에 종사하기로 결의하고, 오늘날까지 평화의 이론과 실천을 종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2. ‘제국주의적인 군사문화’의 해독을 위한 ‘자주 평화’ 운동에 매진할 생각



그러나 이런 노력은, 어렸을 적부터 군대 생활할 때까지 내 몸에 지닌 군사문화를 해독(解毒)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제 어느 정도 해독되었으니 아직도 군사문화에 찌든 사람들의 의식을 해독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특히 부시 정권이 ‘막가파 군국주의’를 앞세워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 이어 북한을 군사적으로 무너뜨리려는 ‘제국주의적인 군사문화’의 해독을 위한 ‘자주 평화’ 운동에 매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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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27호(200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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