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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도시-평화 마을/3세계 숍

[커피 장사 수기 (10)] 아랫것들의 낡은 신발

커피장사 수기 (10)

 

아랫것들의 낡은 신발

 

김승국(커피공방 뜰의 점장)

 

지난번에「구멍 난 양말 속의 환부(患部) ‘발꿈치’」라는 글을 쓰면서 아래와 같은 사진을 실었다.

 

<사진 설명; 동그랗게 구멍 난 양말과 뒤꿈치>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구멍 난 양말을 신은 구두를 촬영한 사진(아래의 사진)은 선보이지 않고 아껴두었다.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다니는 ‘아랫것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낡은 신발, 즉 ‘아랫것들의 낡은 신발’에 관한 글을 쓸 때 사용하려고 아껴 두었다.

 

<사진 설명;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다니던 나의 낡은 신발>

 

위의 사진은 아랫것들에 속하는 나(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커피 자영업자인 나)의 낡은 신발(닳고 닳아 동그랗게 구멍 난 양말을 신은 구두)을 촬영한 것이고, 아래의 사진은 아랫것들의 낡은 구두를 많이 그린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De la Faille's no. 255)이다.(책에 수록된 그림을 휴대전화의 사진기능을 통하여 엉성하게 촬영한 것이어서 더욱 남루하게 보인다)

 

<사진 설명; 고흐가 그린 네덜란드 아랫것들의 낡은 구두>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아랫것의 낡은 구두와 고흐가 그린 1880년대 네덜란드의 아랫것의 낡은 구두가 비슷하게 보인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닮은꼴이다. 삶의 유형이 닮았기 때문에 닮은 신발의 형상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아랫것들의 고단한 삶을 지탱해준 낡은 신발은 21세기의 한국, 19세기의 네덜란드에서만 형상화되는 게 아니다. 춘추전국 시대의 중국에서도 아랫것들의 낡은 신발이 무수하게 존재했지만 유감스럽게 사진으로 형상화할 수 없다. 춘추전국 시대의 아랫것들이 신었던 신발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이 글의 주제로 삼을 만하다.

 

이와 같이 춘추전국 시대의 아랫것들-19세기 네덜란드의 아랫것들-21세기 한국의 아랫것(필자)이 신었던 낡은 신발을 오브제(objet)로 삼아 이 글을 써내려간다.

 

Ⅰ. ‘아랫것들’은 누굴 지칭하는가?

 

‘아랫것’에서 ‘아래’는 ‘하층’을 뜻한다. ‘하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하층민’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지만 좀 싱겁다. ‘민(民)’의 포괄성 때문이다. 국민, 시민, 민중 등 ‘민’의 포괄적인 다양성을 담기에는 너무 무겁다. 그래서 늘 낮은 곳을 향하는 하층민을 지칭하려고  ‘것’을 갖다 붙였다.

 

‘것’은 물건에 대하여서만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을 짐짝 취급한다”는, 사람을 물건(것)처럼 다룬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를 푸대접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것들 봐라!”며 기분 나쁜 심정으로 말할 때의 ‘것’은 ‘사람’이다. 반대로 기분 좋은 심정으로 어떤 인물을 칭찬할 때 “그 사람 걸물(傑物)이다”며 사람(人)과 物(것)의 거리감을 좁힌다. 사람(人)과 物(것)의 거리감이 좁혀진 ‘인물상(人物相)을 드러낼 때 ‘것’을 사용한다. 인(人)이라는 것(物)의 꼴(相)을 드러내고자 할 때 ‘것’을 애용해도 무방하다.

 

이와 반대로 사람(人)과 物(것)의 거리감을 넓히려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사람(人)과 物(것)은 격(格)이 다르다. 사람(人)과 物(것)의 격(格)이 얼마나 다른지를 놓고 논쟁하는 게 인물성동이론의 주요한 흐름이다. 사람(人)과 物(동물; 것)의 차이점이 얼마나 큰가를 따지는 게 주안점이다. 사람은 物(동물; 것)과 달라서 ‘것’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취지이다.

 

이렇게 사람의 위상을 높이려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거론되었던 조선시대의 봉건적 사고방식은, 역설적으로 사람을 지나치게 짐짝(것) 취급했다. 조선시대에 동물(것)보다 못한 처지에 있던 아랫것들은 인물성동이론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봉건시대 양반집의 머슴(하인)이 바로 아랫것들인데, 이들은 동물보다 못한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봉건시대를 타파한 민주주의 시대에 동물보다 못한 머슴 같은 ‘것’이 사라졌을까? 부잣집 마나님이 끌고 다니는 애완견의 영양식보다 보잘 것 없는 식사를 하는 ‘아랫것들’이 지금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허울 좋은 민주주의마저 좀먹는 신자유주의가 횡행할수록 개밥보다 못한 밥을 먹는 ‘아랫것’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신자유주의의 아랫것들인 머슴이 증가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발호하는 세상은 몬도가네(개 같은 세상)이다. 아니 개만도 못한 중음신(中陰身)들이 득실대는 <개만도 못한 ‘몬도가네 이하의 세상’>이다.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의 머슴을 대표하는 중음신이 바로 자영업자라고 말할 수 있다. 나와 같은 커피 자영업자 역시 신자유주의의 아랫것으로서의 머슴이다.          

 

이처럼 ‘아랫것들’은 사회-경제-역사적 하층민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시대에 따라 아랫것들을 표현하는 용어가 다르고 아랫것들의 고단한 삶을 지탱해주는 신발에 관한 표현이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하다.

 

춘추전국 시대에 아랫것들의 신발을 표현한 ‘귀천용귀(屨賤踊貴)’, 19세기의 고흐가 그린 아랫것들의 낡은 구두, 21세기 신자유주의의 머슴인 필자의 낡은 구두를 지칭하는 단어만 다를 뿐 아랫것들의 신발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본질은 동일하다. 춘추전국 시대의 삼환(三患; 세 가지 환난)인 굶주린 자(飢者)가 먹을 수 없고, 헐벗은 자(寒者)가 입을 수 없고, 고달픈 자(勞者)가 쉴 수 없는 현상이 19세기-21세기에도 재현되기 때문이다. 삼환(三患)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동일하다. 시대에 따라 현상만 달리 나타날 뿐이다.

 

이와 같이 달리 나타나는 세 가지 현상을 ‘귀천용귀’ ‘고흐의 낡은 구두’ ‘나의 낡은 구두’로 나누어 설명한다.       

 

Ⅱ. 귀천용귀(屨賤踊貴)

 

춘추전국시대에 전쟁-착취 뿐 아니라 형벌이 너무 가혹했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당시의 형별은 얼굴에 먹물을 뜨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불알을 거세하는 궁형(宮刑). 발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목숨을 끊는 사형(殺刑) 등 오형(五刑)이 있었고, 오형의 죄목이 각각 500가지로 2,500가지의 죄목이 있었다.

 

예를 들어 월형(刖刑)을 당한 아랫것들은 뒤축이 없는 신발을 신어야한다. 그런데 뒤축이 없는 낡은 신발을 구하기 어려워 값이 올라가는 반면에 뒤축이 있는 정상적인 신발의 가격은 저렴한 희한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게 바로 귀천용귀(屨賤踊貴)의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을 목격한 안자(晏子; 공자의 제자)는 “國之諸市 屨賤踊貴”라고 언급했다(『左傳』昭公 3년). 온 나라의 시장에서 정상인의 온전한 신발은 값이 싸고, 죄를 지어 발꿈치를 잘린 병신들이 신는 뒤축 없는 낡은 신발이 비싸다는 뜻이다.   

 

Ⅲ. 고흐의 낡은 구두

 

고흐(1853~ 1890년)는 27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37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10년 동안 9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 구두 그림은 모두 아홉 점이다. 아홉 점의 구두 그림 중에서 하이데거(Heidegger;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가, 위의 사진 속의 작품 ‘De la Faille's no. 255’에 주목했다.

 

하이데거는『오솔길(Holzwege)』이라는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De la Faille's no. 255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구두의 닳아빠진 내부의 어둡게 열려 있는 데서 노동자의 힘든 발걸음이 전면을 응시하고 있다. 구두의 빳빳하게 주름진 무거움 속에는 거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밭의 균일하게 넓게 펼쳐진 이랑 사이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을 그녀의 축적된 소작기간이 있다. 가죽위에는 흙의 습기와 풍요가 놓여 있다. 구두바닥 아래에는 석양이 질 때의 발길의 고독이 살짝 들어있다. 구두 속에는 대지의 침묵의 부름이, 곡식이 익는 그것의 고요한 선물과 황량한 들판의 휴한지의 쓸쓸함 속에 설명할 길 없는 자기부정이 진동하고 있다. 이 도구에는 빵의 확실성에 관한 불평하지 않는 걱정이 스며들어가 있으며, 다시 한 번 욕구에 저항하였다는 말없는 기쁨이, 임박한 분만 앞에서의 전율과 죽음의 위협에 대한 떨림이 스며들어가 있다. 이 도구는 대지에 속하며, 시골 아낙네의 세계 가운데 보존되어 있다. 이 보존된 귀속으로부터 도구 자체의 자기인식이 생겨난다.”

 

하이데거가 언급했듯이 고흐의 낡은 구두는 늙은 노동자의 얼굴처럼 깊은 주름이 잡혀 있는, 목이 긴 가죽 구두로, 끈은 풀어져 내려와 있고, 왼쪽 신발은 목이 접혀 있다. 이 신발은 피곤한 세월을 지나오며 그러나 친숙한 삶의 굴곡이 각인된, 늙어서 주름진 살갗처럼, 그대로 고흐의 얼굴이다. 세련된 사회의 생활양식과는 상이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사진 설명; 고흐의 또 다른 구두 그림>

 

Ⅳ. 나의 낡은 구두

 

<사진 설명; 나의 낡은 (왼쪽) 구두>

 

신발은 착용자의 존재를 표상하는 초상화이다. 신발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이 잇다. 그만큼 신발은 존재의 거울이다. 나의 낡은 구두(위의 사진)는 커피장사하고 있는 나의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이다. 나의 낡은 구두는, 늙은 노동자(자영업 노동자)의 얼굴처럼 깊은 주름이 잡혀 있는 낡고 찌그러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머슴인 커피 자영업자의 시름 깊은 얼굴이 구두에 투영되어 있다. 흙이 약간 묻어 있는 나의 낡은 구두는, 흙냄새 나는 지상에서의 삶의 고달픔을 반영한다. 적자를 모면하기 위해 커피 한잔이라도 더 팔기 위해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신세타령하는 나의 삶이 배어 있는 신발이다. 나의 초상화이자 신세타령의 상징물이다.

 

Ⅴ. 맺음말

 

앞에서 묘사한 세 개의 낡은 신발(춘추전국 시대의 신발-19세기 고흐의 낡은 구두-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의 나의 낡은 구두)의 물질구조는 각각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풀어헤쳐진 신발 끈이 삶의 늘어짐을 드러낸다. 축쳐진 삶을 형상화한다.

 

둘째, 인생의 올가미인 구두끈을 잠시 풀어 놓은 듯한 긴장의 이완이 보인다. 그러나 구두끈을 조였을 경우, ‘신발 끈을 조여매고 생산성을 높이자’는 공장 입구의 구호 간판을 연상케 한다.

 

셋째, 세상을 헤매는 중음신(中陰身)의 삶이 배어 있다. 춘추전국 시대에 2,500가지의 형벌을 벗어나려고 헤매었던 민중들의 뒤꿈치 없는 신발을 상상해본다. 땅 위에 굳건히 발을 딛지 못하고 조금 떠 있는 듯 그려져 있는 고흐의 그림에서도 춘추전국 시대의 귀천용귀(屨賤踊貴) 현상을 감지할 수 있다. 나의 구두 역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안온한 은퇴생활을 즐기지 못하고 살짝 떠있는 중음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흐 자신이 파리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닐 때 신었던 자신의 구두를 그렸듯이, 내 구두 역시 커피 숍 부근의 뒷골목을 헤매며 다니던 신발이다. 자영업자 김승국의 헤매는 삶의 그림자가 내 신발 속에 깃들어 있다.

 

넷째, 신발은 육신의 껍데기이다. 더욱이 낡은 신발은 낡은 육신의 껍데기이다. 춘추전국 시대-19세기-21세기에 남루한 인생살이를 지낸 낡은 육신을 지탱해준 낡은 신발을 마음속으로 다시 그려본다.

 

다섯째, 낡은 신발은 삶의 구속을 반영한다. 고흐의 그림 ‘De la Faille's no. 255’을 보면 오른쪽 구두의 풀어진 끈이 아래로 흘러내려 오른쪽 하단 구석에 동그란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고리는 착용자의 인생을 향해 열려진 수갑, 삶을 구속하는 올가미이다. 나의 구두끈이 동그란 고리를 형성하고 있지 않지만, 구두끈은 나의 삶을 옥죄는 올가미이다. 내 인생의 덫이자 함정이다.

 

여섯째, 낡은 신발은 허무한 인생을 반영한다. 고흐의 구두와 내 구두 속의 텅 빈 공간은 비어 있음(空), 무(無)를 표상한다. 허무(虛無)한 인생을 대변한다. 본래 무(無)인 인생살이인데,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 삶의 공허함을 말해준다. 특히 내 구두의 텅 비어 있음은, 죽기 기를 쓰고 일해도 적자를 모면하기 어려운 한국 자영업자들의 무상(無常)한 인생을 표징한다. 고달픈 자영업자의 신체의 일부(발)가 구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허공을 채움으로써 생산-영업(나의 경우 커피장사)이 시작된다. 신발 속에 有(생산성-영업실적-매상고-돈벌이)를 채우려고 발버둥치지만 끝내 無(텅 빈 공간; 빈손)로 남는 자영업자의 그림자가 구두 속의 공간을 어른거린다. 내 생활의 음울한 암호가 낡은 신발 속의 공(空)에 머물러 있다.(201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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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기세춘「공자-묵자와 평화」(3) <평화 만들기(http://www.peacemaking.kr) 118호(2004.2.23)>
* 이성훈「반 고흐는 누구의 구두를 그린 것인가?」『大同哲學』제45집(2008.12)
* 박정자『빈센트의 구두』(서울, 기파랑, 2005) 107~149쪽.
* 박정자「철학의 구두끈」『현대비평과 이론』통권 29호(2008년 봄?여름호)
* 클리프 에드워즈 지음, 최문희 옮김『하느님의 구두』(서울, 솔 출판사, 2007) 63~71쪽.
* 이명옥『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파주, 21세기 북스, 2009) 85~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