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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도시-평화 마을/3세계 숍

[커피 장사 수기 (5)] 짜보때

커피장사 수기 (5)

 

짜보때

 

김승국(커피공방 뜰의 점장)

 

‘라보때’란 말이 있다. ‘라면으로 보통 때우기’의 줄임말이다. 라면을 밥 먹듯 하는 어려운 살림살이를 뜻한다. 알바 학생들, 고시방 입주자들, 돈이 없는 실직자들과 같이 호주머니에서 찬바람이 나는 고달픈 삶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끔 라면을 먹을 때는 맛이 있지만, 매일같이 라면을 먹으면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라면의 일부 재료(스프 등?)가 몸에 그다지 좋지 않다는 설(說)도 있다.

 

라면 먹는 것도 일종의 중독현상이 있어서 계속 먹고 싶어진다. 습관적으로 계속 먹고 싶은 념(念)이 없으면 ‘라보때’의 생활이 불가능하다.

 

나의 경우 라면도 좋지만, 짜장면이 더욱 좋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오랜만에 호의를 베풀어 외식할 때, 언제나 중국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짜장면을 사주었다. 그 당시의 거의 모든 서민들의 단골 외식 메뉴는 짜장면이었다. 기계 짜장면이 아닌 수타 짜장면. 주방장이 손에 침을 바르면서 반죽한 뒤 춤추듯 반죽을 돌려가며 짜장면의 가는 면발을 만드는 장면을 보면 군침이 절로 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당시의 외식 짜장면을 호화롭게 먹던 생각을 하니 다시금 군침이 돈다. 아~ 그 당시의 짜장면을 다시 먹어볼 수 있을까?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짜장면의 입맛이 몸에 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짜장면이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유일한 음식이 짜장면이다. 그래서 짜장면으로 보통 때우는 ‘짜보때’가 가능하다.

 

짜보때의 비용이 적게 들면 더욱 좋다. 다행히 우리 동네는 서민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짜장면 가격도 아주 저렴하여 1,500원이다. 그것도 최근에 1,000원에서 500원 인상되어 1,500원에 판다. 곱빼기는 2,000원.

그런데 취미로 가끔 ‘짜보때’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돈이 여의치 않아 ‘짜보때’하는 것의 차이를 커피장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워낙 짜장면을 좋아하니까 취미로 매일 짜장면을 먹어도 맛이 새삼스러웠는데....커피 장사 하면서 경비절약 차원에서 ‘짜보때’ 생활을 강행하다보니 좀 질린다. 어떨 때는 짜장면이 입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취미가 아닌 강제(강행/ 짜보때 생활의 강행)이기 때문이다. 같은 짜장면인데 심리상태, 생활상태에 따라 이렇게 다른 차이점을 깨달은 것이다. 동일한 존재(동일한 짜장면)인데, 삶의 조건이나 삶의 상황에 따라 맛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짜보때 생활을 강행하는 나는 ‘짜보때하는 커피 자영업자’이다. ‘짜보때’는 나의 존재양식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우리 동네의 저가 짜장면 집에 가면 나와 거의 비슷하게 짜보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 9시 15분경 짜장면집에 첫 번째 손님으로 가서 짜장면을 먹고 있으면, 낯익은 두 번째 사람이 들어와 짜장면을 주문한다. 세 번째 사람도 역시 짜장면...이렇게 거의 매일같이 조찬(아침식사)을 짜장면으로 보통 때우는 ‘짜보때 손님’들이 시간다툼을 하면서 짜장면 집의 아침을 연다.

오늘은 내가 제1착의 손님이 되지만, 내일은 다른 사람이 제1착의 손님이 되면서 짜보때 인생들이 동네 짜장면 집에 모여든다. 짜보때 생활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형성된다. 짜장면을 매개로 이심전심의 인연이 맺어진다. 짜보때 동아리가 이루어진다.

 

나 혼자 이른 아침에 외롭게 앉아서 짜장면을 먹으면 얼마나 처량한가! 쓸쓸하고 처참하고...그런데 나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이 짜보때 동아리를 이룬다면 외롭지 않고 동지감이 생기고 경우에 따라 식구들과 함께 둘러 앉아 밥을 먹는 착각이 생김과 동시에 짜장면의 맛도 더해질 것이 아닌가?(201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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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초고를 마치자마자 짜장면 집으로 달려가 오늘의 짜보때 생활을 시작한다. 나보다 먼저 온 짜보때 손님이 누굴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