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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칼럼-에세이

세계 평화 포럼에 다녀와서 (3)

김승국
    
 
 
일본인의 조용한 ‘반핵운동 수출’

 

지난호에 이어 일본인의 ‘미세하며 조용한 국제연대 운동’에 관하여 언급한다. 거대 담론을 즐기는 한국의 운동가들이 일본인처럼 째째하게 메모하는 습성이 없어서 국제회의의 미세한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미세한 국제연대 운동에 능한 일본인들은 이번 세계 평화 포럼에서도 조용하게 반핵운동의 수출 전사 노릇을 했다. 운동을 수출한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운동의 문화 · 운동 스타일 · 운동 양태는 수출 · 전파 · 보급할만한 것이다. 한국의 3보1배 운동 문화를 홍콩에서 전파했듯이, 일본의 평화 활동가들도 일본 특유의 ‘반핵운동 문화’를 조용하게 수출한다. 한국의 활동가들이 왁짜지껄 운동 문화를 수출하는데 반하여, 일본인들은 발걸음 소리를 죽여가며 ‘히로시마 형 반핵운동’을 수출한다.


세계평화 포럼(WPF)에서 히로시마 형 반핵운동을 수출한 일본인들의 주요 활동을 일자별로 요약한다(WPF에 참가한 일본인들은 반핵운동 이외에 ‘평화헌법 제9조를 지키자’는 캠페인도 열심히 벌였다).


① 2006년 6월 23일


이날 열린 반핵 토론회에 참석한 일본 반핵운동 단체(原水協 등) 회원들은 ‘히로시마에 대한 원자폭탄(이하 ‘원폭’) 투하가 정당했다’는 논의(‘원폭 정당론’)에 대해 반박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원폭 정당론은, 일본 제국주의를 원폭으로 응징하여 제2차 대전을 마감하자는 미국쪽 권부의 발상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벌(罰)을 주고 미국 병사의 사망을 저지하기 위해 원폭을 히로시마 · 나가사키에 투하할 수밖에 없었다’며 원폭 정당론을 펼쳤다.


원폭 정당론은 ‘원폭 원죄론(제아무리 원폭사용의 정당성을 강변해도 원폭투하는 ‘인류를 절멸시키는 원죄’에 해당된다)’의 저항에 직면한다. 특히 원폭 원죄론으로 이념무장한 일본의 평화운동 진영은 미국쪽의 원폭 정당론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반기를 들되 반미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일본 평화운동의 전략이 흥미롭다. 인류 절멸의 핵무기에 ‘반기’를 들 뿐 (원폭 정당론을 제기하는) 미국에 반대하는 ‘반미’를 주창하지 않는다는 전략이다. 역시 모호함을 즐기는 일본인다운 전략이다. 한국의 운동단체 같으면 원폭 정당론을 주장하는 미국이 도마위에 올라갔을터인데, 일본의 상전인 미국을 피한채 핵무기만을 도마위에 올려 놓고 일본 반핵운동의 핵심 구호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를 외치고 있다. 한국의 운동권이라면 ‘No More America! No More (America's) War!'를 외치며 핵무기를 투하한 미국 · 핵전쟁의 주동자인 미국을 겨냥하여 비판의 화살을 날렸을텐데...

 

반미 없는 반기

 

비판의 무기(화살)를 날려보낼 상대방이 없는 비판은 허무하다. 비판력은 나올지 모르지만 운동력은 증강되지 않는다. 원폭 정당론을 비판하는 일본 평화운동의 비판력이 운동력의 증강으로 나아기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이후 61년 동안 줄기차게 ‘반미 없는 반기(원폭 정당론에 대한 반기)’에 주력하는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을 수출하는 일본인들의 끈기는 인정해줘야한다.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의 풍화작용’에 대한 자기반성 없이 61년 동안 쳇바퀴 돌 듯 반복하는 운동에 식상하지 않는 일본 활동가들의 인내력은 존경할만하다.


인내력이 강한 일본의 반핵활동가들이 6월 23일의 토론회에서도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 수출의 걸림돌인 ‘원폭 정당론’을 반박하려 했으나, 비판의 화살을 미국쪽으로 날리지 못하는 반기(반미 없는 반기)에 그쳤다.

 

② 2006년 6월 24일


▲ WPF 참가자 15,000명이 함께한 평화행진 대열에 낀 일본 평화활동가들이 ‘핵무기를 폐기하고 평화헌법 제9조를 지키자’는 내용의 구호를 외쳤다.
▲ 세계 평화시장 회의 개막 총회에서 일본인 피폭자의 증언이 있었다.
▲ WPF의 본무대인 British Columbia 대학 구내에서 원폭 사진전이 열렸다.

 

③ 2006년 6월 26일


▲ 원수협(일본 최대의 반핵운동 단체) 대표단 80여명이 ‘신속한 핵무기 폐기를 위한 거리 서명 운동’을 뱅쿠버 역전에서 전개했다. 서명의 결과물을 WPF 기간 중 열린 ‘Abolition 2000(세계적인 반핵운동 네트워크)’ 연차총회에 내놓은 뒤, 올 가을의 유엔 총회에 제출할 것이다.

 

일본 반핵평화 운동 평가

 

WPF에서 선 보인 일본 반핵운동의 ‘반미 없는 반기’에 대한 필자의 평가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일본인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평화운동론을 에워싼 논쟁을 제안한다;


앞에서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의 풍화작용 · ‘반미 없는 반기’를 지적했는데, 이런 지적보다 중요한 것은 논리의 빈약이다. 원폭 세례를 받은 일본이 수난자라는 피해의식이 강한 반면 일본이 대동아 전쟁의 원흉이었기 때문에 원폭 세례를 받았다는 가해자 의식이 부족한 것이 첫 번째 지적사항이다.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전범 국가 일본의 가해가 원인이 되어 히로시마 피폭이라는 피해를 입게되었다는 원인 · 결과의 순환을 생각하는 평화운동 즉 전범국가 일본의 원죄를 맨먼저 거론하며 사죄(독일처럼)하는 평화운동이 아닌 피폭의 결과만 증언하며 다시는 그런 피폭이 없어야한다는 ‘No More Hiroshima'만 외치는 한계를 지적한다.


모호함을 즐기는(?) 일본인답게 가해-피해 관계를 애매하게 하는 평화운동의 한계는 기본적으로 전쟁관의 불철저함에서 유래한다.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과 관련한 전쟁관은 히로시마의 평화기념 자료관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은 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특히 전쟁과 관련된 역사를 캐묻지 않는다. 역사와 무관한 히로시마의 평화주의를 말할 뿐이다. 전쟁의 기억만 더듬을 뿐이다. 전쟁을 일으킨 인간집단 · 국가의 행동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핵무기라는 물질의 폐기를 바랄 뿐이다.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은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의 폐기만을 요구한다. 핵전쟁이 악이므로 핵전쟁에 반대한다는 구호만 난무할 뿐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성격의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정부를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행위를 막고 전쟁을 가능케하는 핵무기를 없애는데 주력하자고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은 주창한다.


주체가 빠진 반전 · 반핵 · 평화운동은 맹목적이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주체의 대동아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의 원폭 투하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주체와 미국이라는 주체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 놓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누락된채 맹목적적으로 반전 반핵 평화를 외치니 답답하다. 원폭의 원죄만 내세울 뿐 대동아 전쟁의 원죄 · 일본 책임을 거론하지 않는 답답함이다. 이런 답답함을 풀기 위해 일본이 가해자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에 전시해야한다는 제안을 했으나 보기 좋게 묵살되었다. 이게 바로 히로시마 식 반핵의 절대적인 한계이다. 이런 한계점이 있는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을 수출하려는 듯 일본인 활동가 수백명이 WPF 대회장을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니는 그림자를 보고 두려웠다.


필자가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히로시마 식 반핵운동의 모태가 되는 ‘일본 시민운동’의 양식이 한국 시민운동에 유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시민운동의 유입을 우려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화제를 바꿔 WPF를 평가하는 순서로 넘어간다.

 

WPF 평가

 

필자가 WPF의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체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WPF대회 기간 중 느낀 소감을 중심으로 피력할 수밖에 없다. 자칫 주관적인 평가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WPF(세계 평화 포럼)와 WSF(인도의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 사회 포럼)을 비교평가한다.


WPF가 정적(靜的)인 토론형 대회이었다면, WSF는 동적(動的)인 야전(野戰)형 대회이었다. WPF가 신바람 나지 않는 실내 숙고(熟考)형 국제회의이었다면 WSF는 들판에서 난장트는, 길거리에서 승부 내는 운동판이었다. WPF는 생각하고 연구하는 즉 생각한 다음에 길거리에 나서는 일본식 운동을 표방했다면 WSF는 길거리에 나서면서 생각하는, 길거리에 나서서 시민과 함께한 다음에 생각을 정리하는 한국형이었다.


WPF는 일본의 시민운동가 체질에 맞고 WSF는 한국의 민중 운동가 체질에 맞는다. 일본의 시민운동 단체의 이름 중 ‘....을 생각하는 모임’이 상당히 많다. 단체 이름이 말해주듯 모여서 운동에 대하여 생각하고 학습하는 모임이다. 생각에 치중하다보니 운동의 속도가 늦다. 두뇌회전은 빠르지만 행동은 거북이처럼 늦다. ‘...을 생각하는 모임’의 구성원들은 오붓하게 모여 소모임 공동체를 서로 확인하는 재미를 느낀다. 물론 일본인 답게 아무리 작은 동아리이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보스가 있다. 보스의 아름다운 지도력에 따라 일사천리로 움직이는 아기자기한 모임을 일본의 시민운동 단체들이 선호한다.


일본인들은 아기자기한 소모임을 좋아하지 전국적인 운동 본부, 수직적인 전선운동체, 거대한 운동단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작은 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의 사고유형이 운동단체에도 그대로 유입되어 되도록이면 작은 모임을 꾸린다. 그 결과 수많은 분파(Sect)가 양산된다.


최근들어 일본 평화헌법 제9조를 지키는 운동을 전개하자는 ‘第9條の會’가 일본 전역에 수만개 꾸려졌다. 오엔 겐자부로 등의 유명 인사 9명이 만든 ‘第9條の會’를 효시로 이 ‘第9條の會’를 모방하는 소모임 수만개가 일본 전국 방방곡곡에 생긴 것이다. 일본인은 역시 모방의 천재이다. 한국사람들은 ‘第9條の會’ 앞뒤에 무슨 글자를 넣어서라도 똑같은 ‘第9條の會’를 피하려고 몸부림 칠 것이다. 한국은 운동의 사안이 생겨 사회적인 반향이 커질 것같으면 우선 전국조직은 만들 생각을 한다. 전국을 아우르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운동단체를 작명하는데 익숙하다.


전국적인 단일 조직에 익숙한 필자가 일본인 운동가에게 “왜 수만개의 ‘第9條の會’를 하나로 엮어서 전국 단일 조직으로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전국 단일체를 만드는게 불가능하다고 답변하면서 “어쩌면 수만개의 소모임 공동체가 그냥 굴러가는 것이 바람직한데 굳이 전국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며 반문했다. 그는 나의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한 것이다.


일본인의 실내 숙고형 운동방식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 WPF. 한국의 민중운동과 비슷한 WSF. 이 양자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전자가 샌님들의 약간 떠들썩한 공부방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후자는 한국교회의 부흥회하는 분위기이었다. 얌전한 (평화의) 전도사들이 모여 앞으로 (평화를) 전세계로 전도할 방향을 잡는 회의를 연 것이 WPF이었다면, 전세계 민중운동의 부흥회를 연 것이 WSF이었다.


실내 숙고형 운동은 참가자의 쪽수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야전형 대회는 참가자의 쪽수가 중요하다. 그런 탓인지 WPF에는 3천명이 등록한데 반하여 WSP에는 20만명이 등록했다. 실내 숙고형 회의는 운동의 발상을 연습하는 게 중요하지 수십만명이 모여 투쟁력을 과시하는 게 덜 중요하다. 국제대회의 성격상 중요도가 다르다. WPF는 세계평화를 위한 두뇌 훈련장(평화의 발상 연습장)이었지 투쟁가들이 두 손 치켜들고 구호를 마음껏 외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현장의 투쟁성을 중시한 WSF는 민중의 저항 몸짓을 집대성하는데 성공했다.


WPF에서는 평화의 발상은 넘쳐 났지만,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의 몸짓이 여과 없이 드러나지 못했다. 그래서 쑥맥인 대외가 되었다. 차분한 것은 좋을지 모르지만 가라앉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에 비해 WSF에 참가한 인도의 민초들은, 뭄바이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벽촌에서 미어 터지는 완행열차를 잡아타고 며칠 동안 밤을 꼬박 새우며 달려왔다. 쌈짓돈 들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주린 배 움켜쥐고 눈물겨운 대장정(大長征) 끝에 WSF 대회장에 겨우 도착한 인도의 민초들은 이름도 출신계급도 고향도 묻지 않고 만나자마자 부둥켜 안고 뒹굴었다. WSF 대회장이 난장판이 된 것이다.


난장판이 된 WSF 대회장이 구릿빛 민초들의 얼굴색이었다면 WPF는 땡볓에서 지내지 않아 약간 창백한 인텔리겐챠들의 얼굴색이었다. WPF가 서방세계에서 열린 탓인지 백인 중심의 토론형 문화가 돋보였다. 필자가 6월 23일 낮에 열린 WPF의 집행위원회에 잠깐 들렀는데, 집행위원회 참석자들 대부분의 얼굴색이 백색이었다.


혹평을 하자면 WPF가 제1세계의 진보적인 운동가가 주도하는 대회이었다면 WSF는 제3세계 민초들이 주인공인 대회이었다. 그래서 WPF에는 역동성이 부족했고 WSF에는 역동성이 넘쳐 흘렀다. 역동성이 부족한 것은 뱅쿠버 공항에 "WPF 대회 참가자들은 쌍수로 환영한다”는 플랜카드의 물결이 없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WSF가 열린 뭄바이의 국제공항을 내리자마다 덮쳐오는 환영 플랜카드의 물결과 대비되었다. 뭄바이 공항에서 WSF 대회장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좌우가 WSF의 깃발 · 구호 · 플랜카드로 뒤덮힌 것과 너무나 다르게 뱅쿠버 공항에서 WPF 대회장에 이르는 도로에 깃발이 나부끼지 않았다. 뱅쿠버 시내 중심부에 WPF대회의 선전판이 없었던 점이 오히려 이색적이었다. 아마 뱅쿠버 시민조차 WPF가 열리고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뭄바이 시민들은 거의 모두 WSF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열리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렇게 시민과 함께하는 대회가 되었기 때문에 뭄바이 시 전체를 WSF의 도가니로 넣을 수 있었다. WSF 대회기간중 뭄바이는 변혁의 도시로 달구어졌다. 변혁의 열기가 넘쳐 흘렀다. WPF 대회가 열린 뱅쿠버 시의 차가운 공기와 너무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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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42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