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화 운동/칼럼-에세이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주체와 양태 (2)


김승국

 

4. 개인

 

지난번에 이어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주체인 ‘개인’과 (개인 중심의) 운동양태를 설명한다. 한국의 일인(一人)시위와 비슷한 ‘나 홀로 시위’(<표1>의 4-1)가, 오키나와에 오래전부터 있어왔다.<표1; 생략>

한국의 일인시위는, 집단시위가 번거롭고 집회 관련 법률의 까다로운 점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유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인시위는 ‘운동의 개인화’라는 함정을 지니고 있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집단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게 좋다는 선입관념 때문인지 몰라도, 필자는 일인시위에 대하여 큰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일인시위에 인색한 필자가 일본의 나 홀로 시위를 보고 오히려 동정심마저 들었다. 일본의 나 홀로 시위는 한국의 일인시위보다 훨씬 쓸쓸하게 전개된다. 조직의 결정에 따라 나 홀로 시위를 하는 게 아니라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시민 개인이 나 홀로 시위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 홀로 시위는, 조직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을 꺼리거나 조직에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즐기는 활동이다. 나 혼자라도 사회의 지킴이가 되어야겠다는 결단에 따라 나 홀로 시위를 하는 것이지, 조직의 결정에 따른 타의적인 나 홀로 시위가 아니다. 자의적인 나 홀로 시위이므로, 명예욕 · 과시욕 · ‘언론 발’ 받으려는 욕구가 전혀 없다. 완전히 익명성에 입각한 순수한 나 홀로 시위라는 점에서, ‘사진 발’ · 언론 발 받기 좋아하는 한국의 일인시위와 다르다.

일본의 경우 자발성이 강한 나 홀로 시위인지라 매우 진지하다. 필자가 지난 2월 3일 헤노코  투쟁본부를 찾았을 때 나 홀로 시위를 즐기는(?) 두 사람을 만났다.

오키나와의 우루마 시에 사는 50대 후반의 여성인 스나가와 야에(砂川弥惠) 씨는 거의 매일 아침 슈와브 기지의 정문 앞에서 나 홀로 시위를 하면서 “헤노코 기지 신설 반대!”를 주창한다. 누가 알아주던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슈와브 기지 앞에 도착하여 자기가 시위하고 싶은 시간만큼만 하고 귀가한다. 오키나와의 오지에 있는 슈와브 기지 정문 앞을 지나칠 사람이 전혀 없고 더구나 그 곳까지 기자들이 찾아와 취재할리 없지만, 자기가 좋아서 오키나와의 평화를 염원하는 개인의 열망에 따라 나 홀로 시위를 한다고...

또 한사람은 62세의 노인 이나후꾸 마사기찌(稻福政吉) 씨이다. 오키나와의 우루마 시에서 살고 있는 그는, 매일같이 선전용 봉고차를 끌고 헤노코 해변(기지신설 예정지)에 와서 모래 위에 ‘The Futenma Base Move on U.S.A.(후덴마 기지는, 대체기지를 헤노코에서 찾지 말고 미국으로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하루 종일 쓴다. 지팡이 같은 작대기로 모래 위에 구호를 쓴다. 하염없이... 모래사장 위의 구호가 밀물에 씻겨 내려가면 잠시 기다렸다가 썰물 때가 되면 다시 ‘오키나와 미군기지 나가라! 헤노코 신설 기지 반대!’를 모래 위에 새기며 혼자서 반전 · 반기지 운동을 펼친다. 구호만 쓰는 게 아니다. 봉고차의 스피커를 통해 반전 · 반기지 음악이 흘러나오게 한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헤노코 해변의 한 가운데에 설치된 철조망(철조망 건너편이 미군기지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모래 위에 설치한 철조망) 바로 옆의 나 홀로 시위와 어울리는 반전 음악은 한편의 멋진 ‘평화 예술’이다.

그런데 이런 감상에 젖을 시간 여유가 없다. 그가 나 홀로 시위를 끝내자마자 미군이 밀어닥쳐 모래 위의 구호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미군기지 소유의 모래사장 위에 쓰여진 미군 반대 구호를 용납할 수 없다는 미군 쪽의 강경대응이다. ‘(미군의 유령이 허허벌판 같은 모래사장에 나타나) 미군철수 구호를 지우는 꼴불견’과 싸우는 오키나와 영감(이나후꾸 마사기찌)님의 필승을 기원한다.

슈와브 기지 정문 앞의 50대 후반의 아줌마 투사. 헤노코 해변의 모래사장 위에 하루 종일 ‘미군 나가라!’는 구호를 작대기로 그리는 할아버지. 이들의 나 홀로 시위가 끝내 강물이 되어 헤노코 반대 투쟁의 대하(大河)를 이루고 있다. 양심적인 시민들이 하나의 점을 이루어 나 홀로 시위를 하면서 이심전심으로 인간 띠를 이루기 시작하면 하나의 자그마한 선(線)이 되고 이 선들이 모여 투쟁의 공간을 만들어 나아가는 '다중(多衆; multitude) 운동'(<표1>의 4-2)이 헤노코에서 성공하고 있다. 중앙집권적인 운동 방식에 익숙한 한국의 운동단체 · 활동가들에게 낯선 다중운동이 헤노코에서 성공리에 펼쳐지고 있다.

오키나와의 헤노코와 한국의 평택은 동병상련의 지역이다. 두 지역 모두 미군재편(GPR)의 몸살을 앓고 있다. 동일한 사안인 미군재편을 에워싼 투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투쟁 양식은 다르다. 평택의 경우 전국 단위의 조직인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범국민 대책위원회’라는 중앙집권적 · 수직적(?)인 운동 틀을 처음부터 만든 반면, 헤노코에는 전국 차원의 대책위원회가 아닌 (개인적으로 헤노코 기지 신설에 반대하는) 자유인-다중의 수평적인 연합 형태를 띤다. 물론 헤노코 주민들의 조직도 있고 오키나와의 운동권도 가세하지만 기본적으로 헤노코 기지 신설에 반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입출입이 자유로운’ 다중의 운동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 운동 틀은 개개의 뜻이 모인 집합체에 불과하므로, 이 운동틀을 원격조종하는 세력은 없다. 소수점 이하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씨줄 · 날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가운데, 온 라인 ·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헤노코 투쟁 본부(중앙집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운동을 수렴하는 ‘텐트 속의 본부’]를 떠받치는 ‘비폭력 실력 투쟁’의 위력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런 위력이, 미 · 일 동맹의 헤노코 해상기지 건설 야욕을 무너뜨리고 있다.

한국의 운동권을 끌어 모았는데도 승리의 고갯마루에 올라서지 못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범국민 대책위원회’의 운동력을 능가하는 헤노코 운동 본부. 이 본부를 에워싼 다중의 힘 속에 승리의 비결이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할 것이다. 

 

5. 진보정당

 

한국과 달리 진보(혁신)정당-운동권의 결합력이 강한 일본, 진보정당의 노조 · 운동권에 대한 구속력이 강한 일본에서 진보정당의 존재는 중요하다. 오키나와의 경우 진보정당(사회당 · 공산당 · 사회대중당)이 노조 · 운동권과 연대하는 가운데 조직적인 반전 · 반기지 운동을 주도해왔다.

한국의 민주노동당도 운동권과 연대하지만 그 결합의 강도 · 결합 방식이 일본과 다르다. 민주노동당은 운동의 지도부도 운동전선의 객(客)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사안별로 결합하지만, 일본의 경우 ‘정(진보정당)+노(노조)+운(운동권)’ 사이의 복잡하면서도 정밀한 공동투쟁 구도(<표1>의 5-1)에 의해 운동판을 짠다. 그러므로 개인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달리 ‘위로부터의 조직적 · 목적의식적 · 이념적인 운동’의 경향을 띤다. 골리앗(오키나와의 기지 공화국을 원격조종하는 미 · 일 동맹)에 ‘나 홀로 대항하는 다윗들’이 다중을 이루어 헤노코 해상 기지 건설계획을 물리치는데 공헌했지만, ‘정+노+운’의 지원 없이 불가능했다. ‘정+노+운’의 공동투쟁 틀이 ‘나 홀로 다윗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투쟁을 전개한 힘이 승리의 원천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정+노+운’의 공동투쟁 틀이 정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당 쪽이 운동의 주도력에 집착하지 않으면) 초당파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오키나와의 일본복귀 운동을 주도한 ‘복귀협(復歸協)’의 중심체인 진보정당이, 피해자(미군기지 피해자) 단체 · 오키나와 전쟁 유가족 단체 · 직능단체(의사회 등) · 경제단체 · 종교단체 · 지자체를 끌어들여 초당파적인 운동체를 꾸림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군기지-미군의 지배체제-미 · 일 동맹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은 기본적으로 정치투쟁이므로, 진보정당의 몫이 크다. 진보정당이 결합된 운동을 통해 중앙권력 · 지배계급에 대하여 더욱 큰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처럼 진보정당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몇 차례의 ‘島ぐるみ 투쟁(오키나와 섬사람 전체가 달라붙어 미군 지배체제-미 · 일 동맹에 저항한 투쟁)’에 성공한다. 오키나와 현민을 동원하는 대규모 현민 대회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진보정당이 참여하여 島ぐるみ 투쟁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키나와의 민중운동사에서 진보정당은 운동의 견인차 노릇만 한 것이 아니다. 일본 진보진영의 특징 중의 하나인 분열 · 파벌 투쟁의 원인을 정당 쪽에서 제공한 적이 많다. 노조 · 운동권이 제각기 진보정당(사회당 · 공산당 등)과 선을 대면서 인맥관계를 형성하므로, 노선 · 조직관의 차이가 운동관의 차이로 비화되고 끝내 인맥간의 불화 · 대립 · 적대 · 상호멸시 · 이지메(왕따)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각종 선거에서 정당 · 노조 · 운동권이 단일후보를 내지 못한 결과 여당(자민당)에 참패한 사례가 많다. 단일후보를 내지 못하여 자민당 후보가 어부지리 함으로써 운동의 성과를 지배계급에게 ‘상납’함은 물론 운동의 분열을 가속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6. 지자체

 

진보정당이 득세하는 혁신 자치체는 운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 혁신 자치체의 꽃은 혁신 지사 · 혁신 시장이다. 혁신적인 인물이 현의 지사 · 시장이 당선되도록 노력하는 것 자체가 운동이다. 오키나와 역시 유명한 혁신 지사(屋良朝苗 · 大田昌秀 지사 등) · 혁신 시장(伊波洋一 시장 등)을 배출했으며(<표1>의 6-1), 이들이 운동권과의 ‘훌륭한 가버넌스(good governance)'(<표1>의 6-3)를 이룩하면서 반전 · 반기지 행정(<표1>의 6-2)을 펼쳐왔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는 오타(大田) 지사 등의 혁신 지자체장이 ‘미군용지의 강제수용을 위한 대리서명‘을 거부한 것이다. 미 · 일 정부의 집요한 개입 · 심리적 위협을 물리치고 대리서명을 거부하는 행위는 정치생명을 건 행위일 수 있으므로 혁신 자치단체장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

큰 기대를 모으고 당선된 오타 지사는 한 때 일본정부 쪽으로 기우는 인상을 주었으나, 반전지주를 비롯한 오키나와인의 평화염원을 져버리지 않았다. 그는 재임기간 중 평화의 주춧돌(平和の礎) · 오키나와 현립 평화기원 자료관을 세우는 등의 평화행정을 훌륭하게 전개했다.

오키나와의 혁신 지자체장 중 한사람은 이하 요이치(伊波洋一) 씨이다. 그는 후덴마 기지가  있는 기노완(宣野灣) 시의 시장이다. 그는 시장에 당선되기 전에 반전 · 반기지 운동의 기수이었다. 필자가 지난 2월 3일, 이하 요이치 시장을 예방하기 위해 기노완 시청에 가서 깜짝 놀랐다. 우선 조그만 시청 안에 거대한 기지대책부를 두고 12명의 직원을 배치했다. 기지대책부는 후덴마 기지 감시용 카메라를 운용하고, 감시 화면을 시청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다. 세계 어디에서도 후덴마 기지를 컴퓨터로 감시할 수 있다. 이러한 ‘온라인 모니터의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하 요이치 시장에게 경탄의 박수를 보낸다.

또 하나 놀란 것은, 기노완 시청 옥상의 시멘트 바닥에 “US helos(helicopters) out now! don't fly over our city"라는 슬로건이 큼지막한 흰색 페인트로 그려져 있는 점이다. 이 슬로건은 시장의 지시에 의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시청 직원이 자발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후덴마 기지에 착륙하기 위해 시청 옥상 위를 날아야 하는 미군 헬기 조종자의 가슴이 뜨끔할 만한 슬로건. 이런 슬로건을 내걸고  ‘평화 행정’을 펼치는 이하 요이치 같은 인물이 왜 한국에는 없는지 답답하다. 한국에는 어느 세월에 이하 요이치와 같은 혁신 단체장이 나올지...        

 

맺음말; 헤노코의 운동

 

현재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핵심은 헤노코의 반기지 투쟁이다. 1995년의 소녀 강간사건을 계기로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격랑이 일어나자, 미 일 동맹은 SACO(오키나와의 시설 · 구역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오키나와의 기지축소에 관한 대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SACO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대안은 후덴마 기지의 기능을 축소하는 대신  헤노코의 해상에 헬리포트(heliport)를 새로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헤노코 해상의 헬리포트 건설계획이 알려지자, 헤노코 지역주민들은 보수 · 진보의 구분을 넘어 모두 기지신설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 이윽고 1997년 1월 최초의 주민운동 단체인 ‘헬리포트 건설저지 협의회(생명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운동경험이 전무한 주민(민초)들의 집합이었다. 이 모임의 결성 초기에 나고 시장이 기지신설 반대를 분명히 했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나고 시장이 갑자기 ‘기지신설을 위한 사전조사의 수용의지’를 표명하자 지역의 여론이 양분되어 운동이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럼에도 반대운동측은 ‘사전조사’ 반대의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지역주민의 80% 이상이 보수파인 헤노코에서 서명운동을 성공리에 마침으로써 운동에 자신감이 생겼다.

이어 [헬리포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구민회]등의 풀뿌리 운동조직이 출범했다. 이러한 풀뿌리 주민단체를 비롯한 시민단체 · 노동단체 · 정당 등이 연대하여 1997년 10월 17일 ‘헬리콥터 기지반대 협의회’를 결성했다. 이 협의회는 (헤노코 해상기지 건설의 찬반을 묻는) 시민투표(1997년 12월 21일 실시)를 위한 건곤일척의 투쟁(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단배포 · 가두선전 · 결의대회 · 주민 간담회 · 서명운동 등)을 전개한 끝에 승리함으로써 해상기지 건설계획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다.

운동의 ‘운’자도 모르던 헤노코 촌놈들이 결성한 ‘헬리포트 건설저지 협의회(생명을 지키는 모임)’가, (일본 정부의 집요한 개입을 물리치고) 주민투표에서 승리한 감동어린 이야기가 널리 퍼져나감으로써 일본 전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제 헤노코 투쟁은 일본 뿐 아니라 (헤노코 신설기지를 중심으로 미 · 일동맹을 재편하려는) 미국 정부에게도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서고 있다. 무지렁이 같은 촌로들이 앞장선 헤노코 투쟁이 미 · 일동맹의 헤노코 해상기지 신설계획을 무산시키는 제1차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비록 제1차적인 승리를 얻었지만 절반의 승리에 불과하다. 미 · 일 동맹이 헤노코의 연안에 새로운 기지를 세우려는 계획(헤노코 연안계획)을 다시 추진하며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각종 유혹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노코 연안계획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헤노코 투쟁세력은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제2의 승리를 향해 맹진하고 있다.

또 하나 헤노코 투쟁의 타산지석은 ‘쥬공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헤노코 신설기지를 반대하는 생명 · 평화운동의 지혜’이다. 쥬공은 헤노코 해상의 산호초에 사는 천연 기념물의 해상 포유류인데, 생태환경의 악화에 너무 민감하여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헤노코 해상기지 건설에 착수하기만 해도 쥬공의 집단서식이 불가능해지는 중대한 생태문제가 발생하므로, 이 문제를 제기하며 생명 · 생태 운동과 반전 · 반기지 운동을 연결시키는 슬기를 발휘하여 대중적인 호응을 크게 얻었다. 쥬공의 생명을 살리는 게 헤노코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는 ‘생명 평화 운동’의 새로운 발상을 헤노코에서 찾아볼 수 있다.
---------
*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28호에「오키나와에 평화를 (11)」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