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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칼럼-에세이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주체와 양태 (1)


김승국

 

운동론을 정립할 때 운동의 주체와 (그 주체가 운동을 전개한) 양태를 파악하면 쉽게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다. 오키나와의 경우도 누가 · 어느 집단이 운동의 주체로 나서서 어떠한 양태의 운동을 벌였느냐를 분석하면, 민중운동의 역사를 수월하게 조망할 수 있다.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주체와 양태를 한눈에 보기 위해 작성한 <표1; 생략>에 나타난 ‘주체-운동양태의 번호순’에 따라 운동론을 서술한다. 먼저 <표1>을 보자.
일본 사람들은 프라이버시(privacy)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생활 · 개인만이 즐기는 시간 · 개인만이 향유하는 공간을 차지하려고 한다. 서구 시민사회의 자아 발견의식과 좀 다르지만 어쨌든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려는 욕구가 크다. 한국인이 ‘우리’를 중심에 놓고 행동하는 것과 다르다.

일반 시민의 생활에서 ‘나’ 중심이냐 ‘우리’ 중심이냐의 변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운동에서는 사뭇 다르다. 내가 운동의 주체가 되는 개인 중심의 운동과 우리가 주체가 되는 집단적 운동은 운동 양태가 서로 다르고 운동력도 다르다. 전자가 일본형 운동양태라면 후자는 한국형 운동양태이다(아무래도 집단형의 운동이 운동력이 강하므로 한국이 일본보다 운동이 왕성하다고 볼 수 있다). 오키나와의 민중운동 역시 '개인적인 자유인의 연합(association)'에 입각한 공동투쟁이 주류임을 상기시킨다. <표1>의 6가지 주체가 복잡한 짝짓기를 하면서 제아무리 현란한 운동의 방정식을 구사해도 기본은 개인에서 출발한다. 개인에서 운동이 출발하므로, 일본 전국의 단일조직 건설은커녕 분파(sect)가 속출하고 분파투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곤 한다. 각설하고 첫 번째 운동주체인 반전지주와 (반전지주가 벌인 운동의) 양태를 설명한다.

 

1. 반전지주

 

반전지주 사이의 공동투쟁과 반전지주-한 평 반전지주의 공동투쟁이 빈번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전지주 개인의 결단에서 운동이 시작되었다. 점령자인 미군이 ‘총검과 불도저’로 오키나와 민중의 땅을 미군용지로 강탈(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이후에는 일본 정부가 토지강탈을 대행함)하는 임대차 계약을 강요했을 때, 이를 거부(‘반전지주 말살’ 정책을 거부)한 반전지주들의 개인적인 ‘결단’이 반전지주 운동(<표1>의 1-1)의 물결을 이루었다. 특히 반전지주를 성원하기 위해 노력한 ‘한 평(一坪) 반전지주’들은 전적으로 개인참여 형태의 ‘한 평 반전지주 운동’(<표1>의 1-2)을 벌였다.

복귀 직전인 1971년 12월에 3천명이었던 반전지주에 대한 말살정책으로 말미암아, 반전지주의 숫자가 대폭 감소하자(5년 뒤에 5백 명, 10년 뒤에 2백 명으로 대폭 줄고 2000년에 100명만 남음), 반전지주의 미군기지에 편입된 땅 한 평을 오키나와 안팎에 거주하는 사람들(일본 본토 거주자 포함)이 1인 1만원을 내고 구입하여 공유 · 등기하는 ‘한 평 반전지주 운동’을 펼쳤다. 많은 한 평 반전지주들이 오키나와의 반전지주들을 에워싸며 반기지 운동의 진용을 짜는 대중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한 평 반전지주 운동이 시작되자 예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 주민들을 학살한) 일본군의 장교이었던 대학교수, 오키나와 전쟁을 취재했던 오키나와 타임스 사장 등이 오키나와 전쟁의 체험을 반추하며 참여했다. 국회의원, 오키나와 지자체 단체장과 의원들, 대학교수, 신문기자, 자영업자 등 3천여 명이 참여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들 반전지주 · 한 평 반전지주들의 ‘손에 손을 이은’ 기지반대 공동투쟁이 ‘島ぐるみ 토지 투쟁(오키나와 섬사람 전체가 달라붙어 미군의 토지강탈에 저항한 투쟁)’을 이루어내는 등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근간이 된다. 한 평 반전지주들을 향해 ‘방석 지주’ ‘손수건 지주’라고 야유한 일본 우익들의 공세를 뚫고 민중운동의 말뚝을 박았다. 수천 명의 반전지주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오키나와 지사들이 일본정부의 끈질긴 ‘대리서명(반전지주의 땅을 강제수용하는 조치에 오키나와 지사가 대리 서명함)’ 강요를 물리쳤다. 1995년 3명의 미군에 의한 강간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민중운동을 불 지른 사람들이 반전지주들이다.

 

2. 운동권(NGO)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유력한 주체인 운동권(NGO)은, 다른 모든 주체들(<표1>의 1, 3, 4, 5, 6)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반전 · 반기지 운동을 펼친 ‘운동의 발신지이자 운동의 수렴지점’이다.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의 운동권은, (진보)정당 · 노조와 손잡고 운동을 전개해왔다. 일본의 전통적인 야당인 사회당이 노조(총평) · 운동권(NGO)과 연대하면서 지배계급에 저항했으며, 일본 공산당도 마찬가지 방식의 국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자체의 단체장 · 의원 역시 정당출신이므로 진보적인 지자체 단체장 · 의원을 중심으로 지자체가 ‘사회당-노조-운동권'의 연대틀에 합류한다.

오키나와의 경우 운동권이 진보정당(사회당 등) · 노조(‘全軍勞’라는 미군기지 노동자들의 노조/ 교사노조/ 지자체 공무원 노조)와 3각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지자체를 끌어들이며 공동투쟁(<표1>의 2-1)을 전개해왔다.

오키나와의 운동권은 법률 투쟁의 일환으로 미군기지 관련 소송운동(<표1>의 2-2)을 자주 펼친다. 일본의 운동권이 한국의 운동권에 비하여 소송투쟁에 주력하는 이유는, 일본 정부가 법적으로 진 다음에야 움직이기 때문이다. 운동과 권력의 역학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일본 정부는 거만한 자세를 취하며 운동권의 압력을 배제한다. 한국 정부가 운동권의 목소리를 경청하거나 경우에 따라 눈치 보는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 일본에서 나타난다. 일본의 매스컴도 마찬가지이다. 수만 명이 집회를 해도 진보적인 매체(아사히 신문)에 보도되지 않거나 기껏 한줄 기사로 나오는 상황에서, 운동권이 국민(시민)과 더불어 투쟁하는 방법은 법적인 투쟁밖에 없다. 법적인 투쟁에서 승리하여 법률적인 의무감을 정부에 내리 먹여야 행정기관이 움직이는 일본 사회의 현실에서, 돈과 품이 많이 드는 소송투쟁을 울며 겨자 먹기로 한다. 

오키나와의 경우, 미군기지 소음을 방지하기 위해 피해 주민들이 나서도록 운동권이 유도하는 소송투쟁이 많다. 세계에서 가장 느린 판결을 내리는 일본 법원을 상대로 소송투쟁을 벌이는 인내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가데나 미군기지 爆音방지 주민 공동투쟁 위원회’ 등의 검질긴 소송기록 자료집을 읽어보면, 일본인의 ‘一生懸命(목숨을 걸고 일하는 정신)’을 감지할 수 있다. 오키나와의 운동권 인사들이 ‘목숨을 걸고 검질기게 권력을 상대로 장기간 소송투쟁하는’ 감투정신을 공감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서 10년 이상 판결을 기다려야하는 소송투쟁을 하지 못한다.

소송투쟁 이외에 (미군기지를 포위하는) 인간 띠 잇기 운동(<표1>의 2-3)이 주목을 끈다. 가데나 기지와 같은 광활한 미군기지를 인간 띠로 에워싸려면 운동권의 동원력으로 부족하다. 이 때 한 평 반전 지주회와 같이 개인이 참가하는 시민 · 주민운동 조직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공동투쟁 중심의 운동권과 개인 중심의 시민 · 주민운동이 상호보완적인 형태의 대중운동으로서 인간 띠 잇기 투쟁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인간 띠 잇기는 1987년 6월 21일 2만 5천명이 가데나 기지의 주변 17.5 킬로미터를 완전히 에워싼 쾌거에서 출발한다. 1984년부터 운동권 활동가들(노조 간부 등)의 인간 띠 잇기 제안을 오키나와 현 노조협의회가 받아들여 실행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실행위원회의 대표는 나하 시장을 비롯한 혁신 지자체단체장 · 노조 대표 · 반전지주회 · 한 평 반전지주회 · 인권협회 등의 반전 · 평화 · 민주단체의 대표 · 개인이었다.  

이 밖에 운동권의 일상활동으로 기지 감시(<표1>의 2-4)를 들 수 있다. 한국의 운동권이 제아무리 힘이 세다고 하지만 미군기지에 밀착하여 감시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유약하게 보이는 일본의 운동권은 전국의 미군기지 · 자위대 기지를 지척에서 감시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특히 미군기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니터하여 홈페이지(
http://www.rimpeace.or.jp
/ 등의 싸이트)에 게재하며 감시하는 치밀함은 존경할만하다. 홈페이지로 감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미군기지의 내부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언덕 · 건물 옥상 등을 확보한 뒤 주기적으로 취재 · 촬영한 정보를 일본 전국에 유포하며 공유하는 기지 감시망을 갖추고 있다.

반기지 운동의 첨병인 오키나와는 더욱 치밀하게 관 · 민이 나서서 기지감시 활동을 한다. 오키나와에서는 민간 운동진영만 기지 감시활동을 하는 게 아니다. 후덴마 기지가 있는 기노완(宣野灣) 시의 미군기지 관련 부서는, 후덴마 기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기지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채 감시정보를 (시청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다. 
http://city-ginowan-okinawa.miemasu.net/ViewerFrame?Mode=Motion&Language
=1을 접속하면 누구나 후덴마 기지의 동향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후덴마 기지에서 미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족집게 같이 알 수 있다. 행정 관청이 앞장서서 미군기지를 감시하는 곳은 오키나와 밖에 없을 것이다.

오키나와 운동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기지 노동자들이 강력한 미군기지 반대운동(<표1>의 2-5)을 전개한 점이다. 미군기지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1961년에 ‘全軍勞(全沖繩軍勞働組合連合會)’를 만들어 고용주인 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한국의 미군기지 노동자들이 미군에 눌려 지내는 가운데 낮은 단계의 경제투쟁(임금인상 요구)에 머무른 것과 대조적이다. 1961년이면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시점인데, 그 당시 한국의 미군기지 노동자들이 오키나와의 全軍勞처럼 미군과 정치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꿈속에서도 불가능했다.  

 

3. 주민운동

 

일본은 지자체 제도가 일찍이 발전한 나라이므로 주민운동이 오래전부터 활성화되었다. 주민들의 생활상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이 꽃을 피웠다. 오키나와의 경우 주민들의 생활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가 미군기지이므로, 주민운동 차원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시민권을 얻었다. 

오키나와의 주민운동은 기존의 운동형태 즉 ‘운동권(復歸協)+진보정당+노조의 3자연대 틀’에 대한 저항감에서 출발한다. 이 주민운동은 ‘金武灣을 지키는 모임’(<표1>의 3-1)에서 비롯된다. 1973년 金武灣 주변 바다를 매립하여 CTS(석유비축기지)를 건설하여 자연을 파괴하려고 하자 지역주민들이 ‘金武灣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한다. 이 모임은 조직원리 · 운동의 방향성의 측면에서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으로 주목을 받았다. 강대한 권력에 대항해온 종래의 운동체는 복귀협(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운동을 전개한 운동권 단체), 진보정당(사회당 · 공산당 등), 노동조합에 의해 구성된 피라미드식 ‘큰 단체의 연합’으로서 ‘島ぐるみ 토지 투쟁’을 성공시키는데 유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큰 그물로 작은 물고기를 잡을 수 없듯이 그물코가 큰 ‘운동권+진보정당+노조의 연대 틀’로는 미세한 주민들의 생활상의 권익을 옹호하는데 한계가 뒤따랐다.

이러한 한계에서 출발한 ‘金武灣을 지키는 모임’은 아기자기한 주민운동 답게 단 두사람의 지도자를 앞세웠지만 기본적으로 주민 개개인에 직접 의존하는 운동체이었다. 운동가가 아닌 주민이 운동의 주역이 된 것이다. 이 주민들은 자연과의 공생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CTS 저지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생활 자체의 변화를 통한 오키나와 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가치관의 전환 속에서 새로운 오키나와 사회상을 추구하려는 주민운동이었다.

이러한 주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반전지주 운동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반전지주 운동은 주민 개개인의 결의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주민 자신이 갖고 있는 땅이 미군에 제공되어 미군기지가 건설되면, 그 미군기지가 전쟁 · 분쟁 개입용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전쟁반대(전쟁예방) · 기지반대운동으로서의 반전지주운동에 합류하되 주민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것이다(반전지주 대부분이 농민이므로 농민운동의 일환으로 반기지 운동을 전개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주민운동의 폭발력은 미군기지 관련 현민투표(<표1>의 3-2) · 주민(시민)투표(<표1>의 3-3)에서 발휘되었다.


1996년 9월 8일, 일본의 현 중에서 최초의 현민(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1995년의 ‘미군에 의한 소녀강간 사건’을 규탄한 운동의 여파가 강하게 남은 탓인지, 주일미군의 지위협정(SOFA) 개정 · 미군기지의 정리/축소 등의 4가지 요구사항을 걸고 현민투표에 돌입했다. 그 결과 투표율 59.53%, 찬성율 89.09%로 유권자의 과반수인 53.04%가 미군기지 반대의 의지를 드러냈다. 현민투표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지자체 · 노조 · 시민간의 연계가 이루어졌다. 과반수를 약간 웃도는 좀 낮은 찬성율이었지만, 오키나와인 전체가 기지문제를 에워싸고 강한 관심과 기지반대의 의지를 안팎에 표명한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현민투표를 놓고 대학생 · 고등학생 등의 젊은층이 활발한 논의를 한 교육 · 자치의식 배양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주민투표의 결정판은 1997년 12월 21일의 나고(名護) 주민(시민)투표이다. 나고 시는 (후덴마 기지의 대체기지를 세우려는) 헤노코(辺野古)가 소재한 시(市)이다. 나고 시의 시장은 본래 헤노코 신설 기지건설에 반대했으나, 조금씩 찬성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를 알아차린 시민들이 분연히 들고 일어나 (헤노코 지역주민 중심의) ‘생명을 지키는 모임’등의 21개 단체가 시민투표 추진협의회를 결성하여 주민투표 운동에 들어갔다. 이에 맞선 헤노코 기지 건설 세력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내걸고 ‘나고 시 활성화 촉진 시민 모임’을 만들어 기지 찬성 서명운동을 개시했다. 기지 건설 찬성파가 가가호호 방문하며 ‘지역경제 활성화와 기지신설을 맞바꾸자’는 유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고 시민들은 기지 반대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주민투표 결과 총 유권자 38,176명 중 16,254명이 헤노코 기지 신설에 반대함으로써 주민투표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주민투표는 헤노코 기지신설 반대 투쟁에 결정적인 힘을 불어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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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26호에「오키나와에 평화를 (10)」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