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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의 당대(當代)의 전쟁에 대한 평가

김승국

1. 1848~1850년의 혁명적 전쟁

마르크스는 이 기간에 ‘新라인 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의 편집장으로서 수많은 예리한 정치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들의 주요한 주장은, 유럽의 혁명적 민주주의에 관한 것과 반동(反動)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주장한 것이었으며, 이 두 가지 사항을 서로 관련된 것으로 다루었다.

1848년과 1849년에 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휩쓸었던 혁명의 물결이 프러시아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군소(群小) 전쟁을 일으켰다. 이 당시 마르크스가 전쟁에 관하여 쓴 글들은 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빨리 다가온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유럽에서 무르익었다고 믿었다. 그는 유럽전쟁 혹은 세계전쟁이 곧 터질 것이며 그것이 유럽의 혁명과정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그는 그 당시 가장 반동적이며 억압적인 권력을 휘두른 차르 러시아에 대항하는 유럽세력의 전쟁을 희망했다.(주1)

마르크스는 {新라인 신문} (1848년 7월 11일號)을 통하여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야말로 혁명적 프러시아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프러시아가 과거의 죄악을 씻어내는 전쟁, 프러시아의 군주주의자(君主主義者)들을 극복하는 전쟁, 외국을 해방시킴으로써 프러시아도 해방시키는 전쟁’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마르크스는 러시아의 반동에 대한 전쟁의 필연적인 전제는 프러시아 반동의 타파 ・프러시아의 내전에 있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혁명 프러시아가 혁명 폴란드와 동맹하여 이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유럽전쟁의 결과로서 사회혁명을 기대했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관점은 원칙적인 평화 지상주의(平和 至上主義)와는 거리가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평화 지상주의의 교리가 아니라 혁명의 교리이다. 이 교리는 ‘해방전쟁의 성질을 갖는 전쟁’을 승인한다. 사회주의자는 무조건적으로 각종의 전쟁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봉건적인 외국인 지배 ・민족적 분열을 제거할 목적을 지닌 ‘정당한’ 민족전쟁에 대하여 동정을 표시한다. 마르크스는 1848년의 정세에 대하여 평화 지상주의자로서 판단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고 그가 슬라브 민족을 증오한 배외주의자(排外主義者)로서 판단한 것도 아니다.(주2)

유럽혁명을 위한 이러한 대(對)러시아 혁명전쟁의 강조는 1848~49년 혁명에 있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혁명전략과 변증법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대내적 혁명과 이것의 완성을 위한 대외적인 혁명전쟁의 수행이라는 기본노선은 분명 그들이 프랑스대혁명과 그로 이어진 혁명전쟁의 상(像)에 영향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1848~49년의 혁명과정을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지의 나약과 비겁함이었다. 즉 당시 독일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고 1793년의 프랑스혁명 모델에 따라 독일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로 수행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1848~49년 혁명의 실패는 {新라인 신문}을 통해 어렴풋이 등장한 ‘영구 혁명론(永久革命論)’을 강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에게 혁명은 ‘계급격차가 기초하는 모든 생산관계, 모든 사회관계를 철폐하는 필연적인 경과 지점으로서 혁명의 영구선언永久宣言(Permanenzerklärung der Revolution),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독재가 필수적이었다.’(MEW 7, p.90.)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쟁취할 때까지 혁명을 영구화(永久化)할 수단과 전술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제2의 {공산당 선언}’이라 할 만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3월 호소문(Ansprache der Zentralbehörde an den Bund der Kommunisten vom März 1850)」은 실로 1848~49년 혁명의 경험이 농축되어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에 있어서 노동자 계급정당의 전략, 전술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승리의 첫 순간부터 노동자들을 배반하기 시작하는 이 당파를 확고하게 위협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무장하고 조직되어야 한다.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총, 기병총, 대포, 탄약으로 즉각 무장하여야 하며 노동자들과 대립되는 낡은 시민자위대의 복구를 반대하여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곳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지휘관과 총참모부를 가진 자립적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대를 창설하여 그것을 국가권력의 지휘하에 두지 말고 대신 노동자들이 창설한 혁명적인 지방자치 평의회의 지휘하에 두도록 해야한다. ‥‥무기와 탄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주어서는 안 된다. 무장
해제 시도가 있을 때에는 무력으로(mit Gewalt) 이를 격퇴해야 한다.”(MEW 7, pp.250~251.)

「3월 호소문」에서 본 것처럼 마르크스의 논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영구혁명론과 밀접히 상관되면서 독자적인 혁명군 사고의 단초라 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자위대 창설론으로까지 전개되고 있다.(주3)

2. 1850~1860년대의 전쟁

1850~1860년대는 투르크(터키) 문제를 에워싼 유럽 대(對) 러시아의 투쟁(1854~1855년의 크림 전쟁)이 격화된 ‘민족전쟁의 시기’임과 동시에, 미국 남북전쟁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이 터진 기간이다. 마르크스는 미국의 「New York Tribune」紙에 기고한 글에서 러시아 차리즘의 정책이나 당시 유럽 나라들의 (겁이 많아 동요하는) 현상유지 정책에 대하여 예리한 정치분석을 한다. 마르크스는 이들 기고문에서도 유럽의 진보세력과 러시아의 반동정치는 양립하기 어려우며 후자의 압력에 의한 전자의 와해 위기를 역설하면서,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1850~1860년대에 걸쳐서 일어난 유럽 및 기타 지역에서의 군사적 충돌에서 마르크스가 의도한 바는, 그 전쟁이나 충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여하히 유리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며 또 작용하도록 혁명운동을 지도할 것인가였다. 특히 1851년 12월 쿠데타로 집권한 프랑스의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반혁명세력과 유럽 반동의 보루인 러시아를 어떻게 견제하며 그것들을 분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시기 마르크스주의 세계혁명 전략의 기축을 이루는 것이었다.(주4)

당시 군사과학에 입문한 엥겔스의 최초의 성과는 1851년 9~10월에 집필된 「반불 신성동맹(反佛 神聖同盟) 전쟁의 가능성과 전제,1852」라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엥겔스는 전쟁수행 및 군대의 발전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와의 상호연관하에서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프랑스에 차기 혁명이 일어날 때 필연적으로 도래할 주변 반동적 국가의 침략으로부터 여하히 프랑스를 방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주5)

엥겔스는 근대전(近代戰)의 수행이 프랑스혁명의 산물이며 바로 나폴레옹이 완전히 구축한 ‘근대적 전쟁체계’의 ‘두 개의 축’으로 ‘공격수단의 대량성大量性’(Massenhaftigkeit)과 이 공격수단의 ‘기동성’을 제시하며 이러한 근대전의 전제가 ‘부르주아지와 소농(小農)의 사회적, 정치적 해방’이며 부르주아지가 화폐를 발명했듯이 소농은 사병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주6)

엥겔스는 “근대전의 수행은 부르주아와 농민의 해방을 전제로 하며 그것은 이러한 해방의 군사적인 표현이다(militärische Ausdruck dieser Emanzipation).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 역시 독자적인 군사적 표현을 가질 것이며 별개의 새로운 전쟁방식을 만들어 낼 것이다.‥‥군사과학(Kriegswissenschaft)에서의 나폴레옹의 위대한 발견이 하나의 기적 따위로 처리될 일이 아니다. 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하여 만들어진 군사과학이 혁명에 의하여 주어진 새로운 관계들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군사과학도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필연적 산물일 수밖에 없다.”(주7)라고 기술한다.

엥겔스는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자위대 ・농촌의 농민 자위대’와 정규군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혁명전쟁의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주8) 내전과 외부의 침략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엥겔스가 그려내고 있는 프랑스의 방어를 위한 가상적 시나리오는 혁명이 전쟁방식을 혁명화한다는 그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다.(주9)

보나파르트의 등장은 곧 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 전략에 있어서 러시아와 함께 붕괴시키지 않으면 아니 될 또 하나의 적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상황전개와 함께 전쟁론과 씨름한 엥겔스의 연구는 계속적으로 진전되어 나갔다. 1852년 5월 7일 그는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가 군사과학에 관하여 말할 때, 일반적으로 기술(Kunst)개념에서 시작하여 그다음 요리기술도 하나의 기술이라는 점을 논증한 다음 기술과 과학의 관계로 확장하고 마지막으로 군사기술(Kriegskunst)의 모든 법칙, 관계, 가능성을 하나의 절대적 정식, 즉 강자는 언제나 약자에게 승리한다는 사실로 상승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여기에 산뜻한 착상과 단순화된 근본법칙으로 사용할 만한 환원이 존재한다.
만일 그것이 사례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것 또한 곤란할 것이다. 나는 아직 실천에 적용할 만큼 도달하지 못했다”(주10)

이처럼 엥겔스는 완성된 형태는 아닐지라도 프러시아의 장군이자 군사이론가인 빌리젠(Willisen)의 저서를 평가하면서 ‘군사과학’의 근본법칙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엥겔스의 군사론 연구가 어느 정도 진전을 보게 되고 따라서 독자적인 군사적 판단을 가지고 당대 유럽전쟁을 판단한 계기가 된 것은 1854년에 발발한 크림전쟁(Krimkrieg)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지적 협력의 탁월한 사례가 될 수 있는 {뉴욕 데일리 타임즈}지의 군사관계 논문에서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의 입장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군사적 판단’을 전개하고 있다. 이 신문에 대한 정기기고로 생계의 상당부분을 메우고 있던 마르크스는 특히 ‘지긋지긋한 동방문제(détestable question orientale)’는 무엇보다 군사적이며 지리적인 것으로 나의 영역이 아니므로 엥겔스에게 일임한다고 알린다. 마르크스는 크림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맨체스터의 전쟁장관(Kriegsministerium zu Manchester)의 즉각적 훈령’에 맡겨 버릴 것이라고 전쟁 전에 말하고 있다.(주11)

  1) 크림 전쟁(1854~1856년)

흔히 ‘승려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크림전쟁은 터키를 둘러싼 소위 열강들의 세력 각축이었다. 크림전쟁은 당시 터키의 영토에 속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에서의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 사이의 성지분쟁을 빌미로 하여 이들 종교세력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던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고 오토만제국 내에 상당한 경제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오토만제국 내에서 러시아의 세력증대를 원하지 않던 영국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발생한 전쟁이었다.(주12)

마르크스는 크림전쟁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반동적 러시아에 반대!’-이 표어는 마르크스에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는 크림전쟁이 혁명운동의 신생(新生)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마르크스는 유럽혁명의 일반적 ・국제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크림전쟁을 관찰했다. 그들은 유럽 민족들의 자유를 위하여 반동적 러시아의 패배를 희망했다.(주13)

여기에서 국제관계 인식의 출발점이자 전략기준인 ‘제6세력(sechste Macht)’ 개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유럽에서는 어느 순간에 소위 5개의 열강의 모두에 대해 자신들의 지배권을 주장하고 그들을 공포에 젖게 할 제6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세력은 혁명이다(Diese Macht ist die Revolution). 그것은 오랫동안의 침잠 끝에 무역위기와 생계수단의 핍박을 통해서 재차 전장(戰場)에 나타날 것이다. ‥‥이 제6의 강력한 유럽세력은 마
치 올림피아 신전에서 날아오르는 미네르바처럼 손에는 칼을 들고 빛나는 투구를 쓰고 등장할 것이다.”(주14)

엥겔스가 원칙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유럽의 혁명운동을 (민족국가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의 場 속에서 분리시켜)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즉 소위 열강인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과 차별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엄격히 계급적 관점에서 당대의 국제관계를 혁명적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해방운동, 그리고 민족해방 운동의 시각에서 조망하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5년에 수립된 유럽의 반동적 국제체제, 즉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를 진보적 역사발전의 장애로 인식하고 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는 개념이다.(주15)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크림전쟁은 혁명적 상황의 유리한 계기를 창출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이것은 러시아와 관련지을 때 명백한 것이다. 반동적 차리즘의 유럽에 대한 위협에 대해서는, ‘단지 하나의 대안이 있을 뿐이다. 슬라브족에 의한 노예화, 아니면 항상 그 공격력의 중심인 러시아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주16)

마르크스는 크림 전쟁을 ‘자유와 전제의 투쟁’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러시아 섬멸전이라는 {新라인 신문} 시기의 전략의 연장으로 대(對)러시아 혁명전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차리즘에 대한 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혁명적 상황을 창출하고 러시아의 유럽에 대한 반동적 영향력으로부터 유럽을 해방시켜 혁명운동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에 부합되는 것이었다.(주17)

  2) 미국 남북전쟁(1861~1865년)

1861년 4월, 15개 노예소유주로 구성된 남부의 선제공격으로 개전된 미국의 내전은 새로운 혁명적 시기의 고양이라는 측면에서 특히 마르크스의 관심을 끈 전쟁이었다. 마르크스가 남북전쟁을 특별히 연구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없으나, 남북전쟁이 유럽의 노동자 계급에 큰 영향을 준다고 판단하여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 남북전쟁의 원인

마르크스는 남북전쟁 발발 7개월 뒤인 1861년 11월 7일 {Die Presse}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현재 남부와 북부 간의 이 전쟁은 두 개의 사회 체제, 즉 노예제 체제와 자유노동 체제 사이의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두 체제가 북미대륙에서 더 이상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투쟁이 발발하였다. 이 싸움은 두체제 중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승리를 거둠으로써만 종결될 수 있을 것이다.”(주18)

이처럼 남북전쟁이 내전의 성격을 갖는다고 규정한 마르크스는 ① 남북전쟁은 불가피했다는 점 ② ‘남북전쟁은 실제로 연방의 해체가 아니라 노예를 소유한 과두정치(寡頭政治)의 통제 아래에서, 노예제의 토대 위에서 재구성한 결과로서 발발한 것이다’(주19)는 점을 전제로 삼는다. 남북전쟁의 원인이 노예제와 자유노동제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제도 사이의 모순에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한 마르크스는, 남북전쟁의 진보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남부 쪽의 공격성을 비판한다.(주20)

      ㉡ 남북전쟁의 계급성

내전의 계급성이라는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당연히 북부를 지원한다. 즉 남부와 북부의 전쟁이 노예제와 자유의 전쟁일 때, 남부의 전쟁은 방어전쟁(Verteidigungskrieg)이 아니라 노예제의 확산과 영구화를 위한 정복전쟁(Eroberungskrieg)이다.(주21) 마르크스는 이러한 ‘정복전쟁’을 일으킨 남부의 노예소유주 과두제가 노예제를 정당화시켜 왔고, 이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 일반을 노예로 만들어 왔음을 강조한다.(주22) 즉 남부에서 노예노동이 존재하는 한 미국 전체에서의 노동운동의 발전은 장애를 받게 될 것인바, 이것은 흑인노동이 노예적인 한 백인노동 또한 해방될 수 없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노동자 계급의 이해는 북부의 노예제 폐지를 위한 진보적 성격의 전쟁에 있게 된다.

마르크스가 1862년 8월 9일자 {Die Presse}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진보적인 북부가 승리하기 위하여 정부로 하여금 혁명전쟁의 수행을 강조하게 하고 성조기에다 노예제 폐지를 전투구호로 써 넣어야 한다.’(주23) 그리고 노예제 폐지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전쟁은 내전의 제1장으로서, 즉 입헌주의적 전쟁수행에 불과하며, 제2장은 혁명전쟁의 수행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주24) 이는 전쟁을 혁명의 유용한 계기로 이용하려는 그의 전략이 재차 확인되는 대목이다.

3. 보불전쟁(普佛戰爭)

1870년 7월 19일 루이 나폴레옹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보(독일)-불(프랑스) 전쟁’은 독일통일의 주적(主敵)이었던 반혁명적 프랑스를 분쇄함으로써 독일이 통일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전쟁이었다.

보불전쟁은 권모술수와 힘의 신봉자인 비스마르크의 지도 아래에서 벌어졌는데, 마르크스는 철저한 국제주의자로서 이 전쟁을 비판했다. 이러한 전쟁 비판에 기초한 제1인터내셔널의 보불전쟁에 관한 제1선언, 제2선언, 제3선언, 엥겔스 ・쿠겔만(Kugelmann) ・비슬리(Beesly)에게 보낸 편지 등에 그의 보불(普佛) 전쟁관이 잘 나타나 있다.(주25)

보불전쟁은, 유럽 최후의 민족전쟁이었다. 이 단계에서 마르크스의 입장은 이전과 달랐다. 당시 자본주의의 입구에 들어선 러시아에서는 국내적 위기가 발생함과 동시에 내부에서 혁명 운동이 시작된다. 이때 유럽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약진이 이루어져 제1인터내셔널이 창립된다. 이제 전쟁의 문제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제기되었다. 이는 ‘민족문제가 유럽정치의 중심’이라고 본 1848~1863년의 전쟁에 대한 입장과 다른 것이다.(주26)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마르크스는 {보불전쟁에 관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의 첫번째 연설(Erste Adresse des Generalrats über den Deutsch-Französischen Krieg)}을 통해 이 전쟁에 대한 혁명적 노동운동의 입장을 천명한다. 마르크스는 ‘이 전쟁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1851년 12월 쿠데타의 개정판에 불과하며 이것은 제2제정의 조종(弔鐘)이 파리에 울려 퍼진 것이며 시작과 동시에 장송곡으로 끝날 전쟁’이라고 선언한다.(주27) 그러므로 ‘이 전쟁은 독일인 쪽에서 보면 방어전쟁, 필요악으로서의 방어전쟁’(주28)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또한 이 전쟁은 (나폴레옹 3세가 쓰러지기 전까지) 독일 쪽에서 보면 부르주아적-진보적인 전쟁이었으며 민주주의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객관적 ・역사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가 러시아 차리즘과 함께 독일의 봉건적 분열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독일의 통일을 방해하고 독일을 억압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에 의한 프랑스 약탈이 자행되었을 때, 즉 독일이 알사스-로렌을 병합했을 때 마르크스는 보불전쟁을 가차 없이 비난한다.(주29)

프러시아는 국내 민중의 저항을 봉쇄하고 독일을 호헨쫄레른 왕조에 합병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전쟁을 시작한 ‘왕조전쟁(王朝戰爭)’을 벌인다(MEW17, p.5). 그러나 보나파르티즘의 독일판에 다름없는 비스마르크 체제와 반혁명적인 프랑스 지배계급이 전쟁을 수행하는 한(限) 반동적 왕조전쟁이지만 전쟁의 진보적 측면 ―독일통일을 완수하고 반혁명적 보나파르티즘을 분쇄하는 ―으로 볼 때, 독일이 방어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불전쟁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용하는 ‘방어’의 개념은 평면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복합적 계기가 내재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주30)

결국 프랑스는 1870년 9월 2일에 패전하고 나폴레옹은 독일의 포로가 되었으며 곧이어 파리에서는 공화국이 선포된다. 이 시점에서 마르크스의 전쟁정책은 대전환을 한다. 즉 방어전쟁 개념에 기초하여 전쟁의 제한적 가치를 승인한 보불전쟁의 제1국면에서와는 달리 프랑스공화국이 수립된 이 시점에서는 평화가 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주31)

전쟁국면의 새로운 전개에 따른 독일 노동자들의 입장을 마르크스는 ‘프랑스를 위한 영광스러운 평화와 프랑스 공화국의 승인’이라는 슬로건 속에 집약시킨다.(주32)

마르크스는 보불전쟁에서 첫째, 제1국면(전쟁발발에서 프랑스의 항복까지)에서는 보불전쟁의 진보적 측면, 즉 프랑스의 해방과 독일통일에 주목하면서 이 전쟁을 ‘독일 측의 방어전쟁’이라는 개념으로 정당화시켰고, 둘째로 자신이 설정한 소기의 전쟁목적이 완료되자 일종의 사회주의적 평화원칙에 따라 이 전쟁을 부정의(不正義)한 전쟁으로 비판하면서 특히 독일의 알사스-로렌합병을 새로운 전쟁의 맹아라고 인식하였다.(주33)

마르크스에 있어서 근본적인 의의를 갖는 것은, 전쟁의 역사적 역할을 에워싼 문제이다. 즉 ‘전쟁은, 생산력 ・국가형태의 발전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힘(力)의 집중을 촉진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저해하는 것일까’에 관한 문제이다. 전쟁에 관한 이러한 유물론적인 평가는 어떠한 형식적 계기보다 가치가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방위적인가 공격적인가 하는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지만 때때로 이러한 형식적 표현은, 다소(多少)나마 근거를 갖고 전쟁의 역사적 평가를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엥겔스가 1870년에 독일이 방위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직접적인 정치적 ・외교적인 사정을 전혀 안중(眼中)에 두지 않았다. 그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실은, 이 전쟁을 통하여 독일이 스스로 민족통일의 권리를 위하여 싸우고 있으며, 민족통일은 독일의 경제발전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결집에 필요조건이라는 점이다.(주34)

4. 파리코뮨

마르크스는 내전 ・계급투쟁을 통한 인민전쟁(Volkskrieg)에서 혁명・대중봉기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여러 가지 양상을 이론화한다.(주35) 이러한 내전 ・계급투쟁 ・인민전쟁 ・혁명 ・대중봉기의 모습을 가장 극적(劇的)으로 보여준 것이 파리코뮨이다.

1870년 9월 2일의 세당에서의 프랑스군의 항복으로 보나파르트 체제는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의 문전을 위협하는 긴급상황에서 파리의 민중은 그 대표들로 하여금 ‘국방정부’를 선포케 하였다. 이 국방정부에 대한 입장을 마르크스는 이미 {보불전쟁에 관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의 두번째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반동세력이 군대와 경찰을 장악하고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의 성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부르주아정부 전복기도는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따라서 프랑스 노동자들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결코 1792년의 추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계급조직을 구성하고 신정부에 의해 주어진 정치적 자유를 수단으로 활용하여야만 하며, 이러한 정치적 자유는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헤라클레스적인 힘을 노동자 계급에게 부여할 것이다.”(주36)

파리의 노동자가 프로이센 군(軍)의 눈앞에서 무장봉기하는 것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처음 얼마 동안 반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도중에 전면적인 지지로 전환한 것은 결코 ‘일이 벌어진 이상 다른 방도가 없다’는 소극적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또한 ‘노동계급의 투쟁이라면 무엇이든 전면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단순한 윤리의식에서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보불전쟁의 성격이 도중에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나 당시 유럽의 정치역학에 대한 일정한 계산 등 복잡한 요인이 개재되어 있다.(주37)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과 부르주아 정부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1870년 10월 31일 메쯔가 함락되고 프랑스의 바젠느 장군의 투항소식을 접한 후 시민들이 시청으로 집결하자 국방정부는 부르주아 지구의 국민위병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파리는 노동자 계급을 무장시키지 않고는, 그들을 쓸모 있는 전력(戰力)으로 전환하여 전투 자체에 의하여 그들의 대열을 단련시키지 않고는 방어될 수 없다. 무장한 파리는 곧 무장한 혁명이었다(Paris in Waffen, das war die Revolution in Waffen). 만약 프로이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파리가 승리하게 된다면, 이는 곧 프랑스의 자본가들과 그들의 국가 기생충(Staatsparasit)에 대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승리가 될 것이다.”(주38)

코뮨은 지배계급의 수중에 있는 맹목적인 무기-상비군을 전 인민의 무장력으로 대체시켰다. 코뮨은 국가로부터 교회의 분리를 선언하고, 종교예산(즉 승려에 대한 국가의 봉급)을 폐지하고, 국민교육에 전적으로 무종교적 성격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법의(法衣)를 걸친 헌병에게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 코뮨은 파괴된 국가기구를 ‘단지’ 보다 완전한 민주주의로 교체한 것, 즉 상비군을 폐지하고 모든 공직자의 완전한 선거제와 해임제를 실시한 데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이 ‘단지’란 것은 한 기구를 원칙적으로 다른 종류의 기구로 바꾸어 놓는 거대한 교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바로 ‘양이 질로 전화’하는 경우의 실례를 볼 수 있다.(주39)

이렇게 양(量)에서 질(質)로 변증법적인 전화(轉化)를 일으킨 파리코뮨을 마르크스는 어떻게 평가했는가? 마르크스에 의하면 “코뮨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횡령자 계급에 대항한 생산자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고,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발견된 정치형태였다.”(주40)  ‘인간이 계급지배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위대한 사회혁명의 아침노을’(주41)인 파리코뮨은 그 ‘직접적 결과가 무엇이건 간에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닌 새로운 출발점이 획득된 것’(주42)으로서, 파리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최고의 의무와 절대적 권리를 자각’(주43)하게 되는 역사적 계기였다고 마르크스는 평가했다. 마르크스는 또한 ‘제정(帝政)에 대한 직접적 대항물은 코뮨이었으며’(주44) ‘코뮨은 사회공화국(社會共和國; die soziale Republik)의 확고한 형태였다’(주45)고 평가했다.

그리고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파리코뮨으로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도 마침내 매장되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코뮨과 보불전쟁을 기점(起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참으로 강력한 비약이 시작된다. 복무 가능한 전 국민이 백만 단위를 헤아리는 군대에 편제되었고 미증유의 효력을 가진 화기・총탄 ・폭약에 의하여 군사 전반이 전면적으로 변혁되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보나파르트식(式)의 전쟁시대는 급속히 종결되고 평화로운 산업발전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전대미문의 잔학함과 예측 불허의 결과를 가져올 세계전쟁(Weltkrieg) 이외에 어떠한 전쟁도 불가
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군사변혁에 의하여 군사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했고 조세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기 때문에 가난한 인민계급을 사회주의의 품속으로 내모는 결과가 되었다.”(주46)

마르크스는 파리코뮨의 본질을 여러 저술에서 밝히는데, 군국주의와 전쟁에 대하여 노동자 계급이 취해야 할 관점을 서술하고 있는 {보불전쟁에 관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의 첫번째 연설}과 {두번째 연설}은, 자국(自國)의 팽창을 위한 전쟁에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가 수행한 비타협적인 투쟁을 잘 보여주고 있다.(주47)

{첫번째 연설}은 자신들의 왕가(王家)의 이기적인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전쟁을 도발했던 프로이센 왕국과 보나파르트주의적인 프랑스의 반동적 음모들을 폭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마르세예즈(Marseillaise)}지(1870년 7월 22일자)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인용한다: “전쟁, 그것은 정당한가?-아니다! 전쟁, 그것은 국가적인 것인가?-아니다! 그것은 단지 왕조의 일일 뿐이다. 정의 ・민주주의 ・프랑스의 진정한 이익의 이름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인터내셔널의 항의를 전적으로 열렬히 지지한다.”(주48)

그는 이어서 “우리는 모든 전쟁, 무엇보다도 왕조 간(王朝 間)의 전쟁의 반대자이다‥‥ 유감스럽고 서글프게도 우리는 필요악으로서의 방어전쟁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생각이 있는 전체 노동자 계급에게, 민중들 자신을 위하여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결정할 권력(Macht)을 요구하고, 그들 자신을 자신의 운명의 주인으로 만듦으로써 그러한 엄청난 사회적 불행의 재발을 방지하도록 호소한다”는 대중집회의 결론을 인용한다.(주49)

{두번째 연설}은 전쟁의 성격이 일정하게 변화를 겪고 난 뒤에 쓰였다. 마르크스는 {두번째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현재의 무시무시한 전쟁은 한층 더 무시무시한 국제적 분쟁의 전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모든 국가에서 칼 ・땅 ・자본의 주인들이 노동자들에 대하여 새로운 승리를 거두도록 해 줄 것이다.”(주50) 그의 이러한 예언은 파리코뮨 이후의 역사 속에서 충분히 검증되었다.

마르크스는 보불전쟁에 관한 탁월한 연설문을 통하여 파리코뮨을 예견한다. 그러므로 파리코뮨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보불전쟁에 관한 마르크스의 연설문들을 미리 고찰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코뮨이 최후를 맞이한 ‘피의 주간’이 끝난 이틀 뒤에 {프랑스에 있어서의 내전(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을 탈고한다. 파리코뮨에 관한 여러 저술들 중에서도 압권인 {프랑스에 있어서의 내전}에서 ‘계급투쟁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모든 혁명 뒤에는, 국가권력의 완전히 억압적인 성격이 더욱 공공연하게 나타난다’(주51)고 지적한 마르크스는 ‘생산대중에 맞서는 지배계급의 끊임없는 십자군(十字軍)이,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행정부에 부단히 증대하는 억압권력(Unterdruckungsmacht)을 부여하도록 강요했다’(주52)고 언급함으로써, 파리코뮨을 무력진압한 국가권력(띠에르 정부)의 폭거를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코뮨이 대체한 자본주의적 국가권력의 성격을 ‘노동자 계급의 억압을 위한 공권력(die öffentliche Gewalt)’이자 ‘계급지배의 기구’로 규정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위협에 부딪친 부르주아지가 국가권력을 ‘노동에 대립한 자본의 국가적 전쟁도구(das nationale Kriegswerkzeug des Kapitals gegen die Arbeit)’로서 무자비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주53) 마르크스에 의하면 ‘의회제(議會制) 공화국의 시기에 국가권력은, 마침내 생산하는 인민대중에 대립하여 횡령자 계급이 지휘하는 노골적인 전쟁도구이다.’(주54)

그러므로 이 국가적 전쟁도구에 맞선 ‘코뮨의 첫 번째 포고는 상비군을 진압하고 이를 무장한 인민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주55) 그리고 코뮨이 주도해야 할 역사의 새 시대를 명백히 알리기 위하여, 한쪽에서는 프로이센 정복자가, 다른 쪽에서는 보나파르트주의자 장군들이 이끄는 보나파르트 군대가 보는 앞에서, 코뮨은 전쟁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대한 상징물인 방돔기둥(Vendôme-Säule)을 허물어 버렸다.(주56) 이러한 코뮨의 ‘노동자 정부는, 노동수단의 독점자(獨占者)들과 자본에 대한 전쟁으로서 선포된 것이다.’(주57)

파리코뮨은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비화(飛火)한 것이므로, 국가나 민족 사이의 전쟁(Nationalkrieg)과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으로서의 내전’과 ‘국가 간(國家 間) 전쟁’의 상관성을 강조한다: “구사회(舊社會)가 아직도 할 수 있는 최상의 영웅적인 비상(飛翔)은 국가 간의 전쟁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다름 아닌 계급투쟁을 지연시키려는 목적을 지닌 정부의 속임수임이 증명되고 있으며,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비화되자마자 국가 간 전쟁은 비산(飛散)한다.”(주58)

<계급투쟁을 지연시키는 전략으로 국가 간 전쟁을 일으키거나 대중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지배계급(주59)은,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번지면 내전을 진압하기 위하여 국가 간 전쟁을 중단한다(주60)>는 마르크스의 통찰은, 계급투쟁-내전-국가 간 전쟁의 삼각(三角) 관계를 확인시켜준다. 이 삼각관계에 ‘Gewalt’가 내재하는데, 이 삼각관계의 전변(轉變)에 따라 전쟁과 평화의 분기점(分岐点)이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기술한 파리코뮨의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파리코뮨을 계기로 근대 국가체계의 일상적 전쟁양식인 민족전쟁은 일단 시효만기된 것으로 간주되고 이를 대체하여 내전이 전쟁개념의 중심에 등장하게 된다. 이 내전이야말로 미래세계의 진보적 기능을 담지하는 전쟁형식이 되는 것이며, 이 내전이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계급전쟁인 한 그것은 당연히 정당한 것, 즉 정의의 전쟁(der gerechte Krieg)으로 이해된다. 둘째, 파리코뮨에 의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억압적 ‘관료적-군사적 기구’를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에 의해 지도되는 민주적 군사조직으로 대체한 것, 즉 상비군을 대체할 프로그램으로서 ‘무장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새로운 군사조직 개념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완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군의 구성을 말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군사적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주61) 셋째, 세계사적(世界史的)인 중요성을 지닌 새로운 출발점으로서의 파리코뮨은,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의무와 권리를 자각한 역사적 계기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뮨을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정치형태로 인식했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Commune’은 ‘Communism’의 기초였다. 그는 파리코뮨에서 다음 시대의 서광을 발견했다. ‘파리코뮨은 제2제정의 국가권력에 대한 단호한 부정, 19세기 사회혁명의 시작이었으며’(주62) 위대한 과거에 사로잡혀 ‘첫 번째는 비극(悲劇)으로 두 번째는 소극(笑劇)으로 끝나는’(주63)
우(愚)를 결코 범(犯)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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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S. F. Kissin {War and the Marxists} (Boulder: Westview Press, 1988), p.3.
(주2) ジノヴィエフ 지음, 佐野 學 옮김 {マルクス・エンゲルスと戰爭問題} (東京: 白揚社, 1927), 19~20쪽.
(주3) 이해영 편 {엥겔스 연구} (서울: 녹두, 1989). 195~197쪽.
(주4) 이해영 편, 위의 책, 198쪽.
(주5) 같은 책, 200~201쪽.
(주6) Engels {Bedingungen und Aussichten eines Krieges der Heiligen Allianz gegen ein revolutionäres Frankreich im Jahre 1852} MEW 7, p.477.
(주7) Ibid., pp.480~481.
(주8) Ibid., p.477.
(주9) 이해영 편, 위의 책, 201쪽.
(주10) Engels {Engels an Marx in London (1852. 5. 7.)}, MEW 28, p.71.
(주11) Marx {Marx an Engels in Manchester(1853. 9. 30.)} MEW 28, p.299.
(주12) 이해영, 위의 책, 203쪽.
(주13) ジノヴィエフ 지음 佐野 學 옮김, 위의 책, 29~30쪽.
(주14) Engels {Der europäische Krieg} MEW 10, p.8.
(주15) 이해영 편, 위의 책, 204쪽.
(주16) Engels {Deutschland und der Panslawismus} MEW 11, p.194.
(주17) 이해영 편, 위의 책, 205쪽.
(주18) Marx {Der Bürgerkrieg in den Vereinigten Staaten} MEW 15, p.346.
(주19) Ibid., p.345.
(주20) 福本保信 「マルクスの南北戰爭論」 {西南學院大學文理論集} 第26卷 第1號(1985年 7月), 2~3쪽.
(주21) Marx {Der Bürgerkrieg in den Vereinigten Staaten} MEW 15, p.340.
(주22) Ibid., p.344.
(주23) Marx {Zur Kritik der Dinge in Amerika} MEW 15, p.525.
(주24) Ibid., p.526.
(주25) 佐野 學, 위의 책, 37~38쪽.
(주26) シュミット 편 高田爾郞 옮김 {エンゲルス}(東京: 現代思潮社, 1977), 14~15쪽.[K. Schmidt {F.Engels}]
(주27) Marx {Erste Adresse des Generalrats über den Deutsch-Französischen Krieg} MEW 17, pp.4~5.
(주28) Ibid., p.6.
(주29) 平野義太郞 지음 {平和の思想} (東京: 白石書店, 1978), 65쪽.
(주30) 이해영 편, 위의 책, 220쪽.
(주31) 같은 책, 222쪽.
(주32) Marx {Zweite Adresse des Generalrats über den Deutsch-Französischen Krieg} MEW 17, p.276.
(주33) 이해영 편, 위의 책, 225쪽.
(주34)トロツキ- 지음, 西島 榮・早川 潤 옮김 {戰爭とインタ-ナショナル}(東京: 拓植書房, 1991), 102~103쪽.[Л. Троцкий 「Война и интернационал」({Война и революция} Т.1, З-е из д. М. 1924. 3-е)]
(주35) W. B. Gallie 지음 {Philosophers of peace and wa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p.80.
(주36) Marx {Zweite Adresse des Generalrats über den Deutsch-Französischen Krieg} MEW 17, pp.277~278.
(주37) 廣松涉・片岡啓治 편, 권명식 옮김 {마르크스 ・엥겔스 혁명론}(서울: 지평,1988), 36쪽.[{マルクス・エンゲルス革命論}(東京: 紀伊國屋書店, 1982)]
(주38)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 MEW 17, p.319.
(주39) 극동문제연구소 편 {原典共産主義大系} (서울: 1984), 244~245쪽.
(주40)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 MEW 17, p.342.
(주41) Marx {Resolutionen der Feier zu Ehren des Jahrestags der Pariser Kommune} MEW 18, p.56.
(주42) Marx {Marx an Ludwig Kugelmann(1871. 4. 17.)} MEW 33, p.209.
(주43)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 MEW 17, p.336.
(주44) Ibid., p.338.
(주45) Ibid.,
(주46) Engels {Einleitung zu Karl Marx’ 「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MEW 7, p.518.
(주47) 마르크스 ・엥겔스 지음, 태백 편집부 옮김 {프랑스 혁명 연구(Ⅲ)}, 4쪽. [Marx ・Engels {On the Paris Commune}(Moscow: Progress Publishers)]
(주48) Marx {Erste Adresse des Generalrats über den Deutsch-Französischen Krieg} MEW 17, p.5.
(주49) Ibid., p.6.
(주50) Marx {Zweite Adresse des Generalrats über den Deutsch-Französischen Krieg} MEW 17, p. 278.
(주51)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 MEW 17, p.336.
(주52) Ibid., p.337.
(주53) Ibid., pp.336~337.
(주54) Marx {Zweiter Entwurf zum 「Bürgerkrieg in Frankreich」} MEW 17, p. 594.
(주55) Ibid., p.338.
(주56) Ibid., pp. 346~347.
(주57) Marx {Erster Entwurf zum 「Bürgerkrieg in Frankreich」} MEW 17, p.558.
(주58) Ibid., p.361.
(주59) 프러시아의 지배계급은, 국내 민중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보불전쟁을 벌였다.
(주60) 1870년에 보불전쟁을 치른 프랑스와 프러시아의 지배계급은 파리코뮨 직전까지 군사적인 갈등관계에 있었으나, 파리코뮨 이후 프랑크푸르트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반(反) 파리코뮨’ 공동전선을 펼친다. 프랑크푸르트 평화협정은 1871년 5월 10일에 체결된 협정으로 알사스와 동(東) 로렌지방을 독일에 양도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파리코뮨 진압을 도와준 비스마르크의 대가(對價)가 이 협정에 보장되어 있었다.
(주61) 이해영 편, 위의 책, 230쪽.
(주62) Marx {Erster Entwurf zum 「Bürgerkrieg in Frankreich」} MEW 17, p.542.
(주63) Marx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 MEW 8,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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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의 제3장 제2절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40호에 실려 있다.
* 김승국『마르크스의「전쟁‧평화」론』(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147~171쪽에도, 위의 글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