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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비핵화-비핵지대화

김일성 주석의 비핵평화지대 제안과 핵개발

김승국

김일성 주석은 ‘한반도・동북아의 비핵평화 지대를 만들자’는 제안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유훈통치를 한다는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비핵지대화 열망을 외면한 채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핵문제에 관한 한(限) 유훈통치를 어긴 핵무기보유 선언(2․10 선언)의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북한 쪽 ‘비핵평화 지대’ 주장의 약사(略史)(주1)를 소개하고 짤막한 질의・논평을 곁들인다.

1. 김일성 주석 “비핵평화 지대 창설”

  (1) 1981년 3월 14일

1981년 3월 14일 일본 사회당 대표단과 북한 노동당 대표단이 평양에서 개최한 회담에서, 양측은 ‘동북아시아 지역 비핵평화 지대 창설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북한은 이 회담을 효시로 비핵평화 지대・비핵지대화 창설에 큰 관심을 보인다.

위의 공동선언에서 양측은, 아시아・세계의 강고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동북아시아에 비핵평화 지대를 창설하는 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위해 아래의 4가지 사항에 합의한다:
    ① 동북아시아 지역에 전개되어 있는 모든 핵무기를 철거하여 파기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지역의 핵무기와 생화학무기의 개발・실험・생산・소유・운반・저장・반입 및 사용을 일체 금지해야 한다.
    ② 동북아시아 인민의 의사에 반(反)하여 불법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외국군기지・외국군대를 철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③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침략을 목적으로 형성된 군사 블록을 해체하여 새로운 군사동맹을 결성하려고 하는 시도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④ 동북아시아의 비핵평화 지대의 범위는, 북한・일본 및 그 주변 해역으로 한다.(주2)

  (2) 1981년 3월 16일

일본 사회당 대표단이 1981년 3월 16일에 주최한 연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한다: “동북아시아 지역 비핵평화 지대 창설에 관한 공동선언은 아시아・세계 평화를 겨냥한 양당의 공동투쟁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 선언이 한반도・아시아에서 긴장 격화・일본의 우익화를 방지하고 조선의 평화통일・일본의 비무장 중립화를 실현하기 위한 양국 인민의 투쟁을 촉진하며, 평화롭고 자유로운 새로운 아시아, 새로운 세계를 굳건히 세우기 위한 공동위업의 수행에서 커다란 생명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세계의 인민은 제국주의자의 어떠한 침략・전쟁 행위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대륙・모든 지역・모든 나라에 비핵평화 지대를 창설하여 세계의 강고한 평화・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1982년 11월 5일

김일성 주석은 유고슬라비아의 탄유그 통신사의 질문에 대한 서면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동맹 국가들과 세계의 평화애호 인민은 세계의 각 지역에 비핵평화 지대를 설치하기 위해 힘 있게 투쟁해야 한다. 조선 인민은 한반도를 비핵평화 지대로 만들기 위해 싸울 뿐 아니라 아시아・중동・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유럽에 비핵평화 지대를 설치하기 위한 세계 평화애호 인민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세계의 도처에 비핵평화 지대를 설치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확대하여 지구상에서 핵무기의 시험・제조・저장・사용을 금지하고 핵무기를 최종적으로 폐기할 때 인류는 핵전쟁의 위험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다.”(주3)

  (4) 1982년 12월 3일

김일성 주석은 朝日新聞 편집국장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회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시아의 각 지역에 전개되어 있는 제국주의자의 침략적 군사기지를 철폐하여 침략군을 철퇴시키고 비핵평화 지대를 설치하는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해야 한다.”(주4)

  (5) 1983년 이후

김일성 주석은 1983년 11월 16일 루마니아 공산당 기관지 대표단의 질문에 대한 회답, 1984년 6월 1일 동독 방문을 환영하는 베를린 시민대회에서의 연설, 1984년 6월 16일 불가리아 방문을 환영하는 소피아 시민대회에서의 연설, 1984년 9월 19일 일본사회당 대표단과의 담화, 1985년 1월 7일 포르투갈 공산당 대표단을 환영하는 연회에서의 연설, 1985년 3월 15일 루마니아 공산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제1서기의 질문에 대한 회답, 1985년 6월 1일 불가리아 당・국가대표단을 환영하는 평양시민대회에서의 연설, 1985년 6월 9일 世界 편집장의 질문에 대한 회답 등을 통하여 비핵평화 지대의 창설을 적극적으로 주창했다.

2. 한반도 비핵화・비핵지대화 주장

북한은 1956년 최고 인민회의 제1기 제12차 회의에서 반핵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뒤 계속 비핵화를 주장하였다. 그 뒤 북한 당국이 줄기차게 비핵화・비핵지대화에 관한 주장・제안을 했으나 지면 제약상 생략하고 중요한 제안만을 기술한다.(주5)

  (1) 비동맹 회담에서 제안

북한은 1976년 8월의 5차 비동맹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에서의 비핵지대화를 제기한 이래 1991년까지 주기적으로 주장하였으며, 1991년 10월 23일 평양에서 열린 제4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의 연형묵 총리는 9개 조항으로 구성된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에 관한 선언(초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북한 측이 주장한 비핵화 제의 중 가장 포괄적인 제안이었다.(주6)

  (2) 노동신문의 논평

북한의 노동신문 (1986. 6. 24.)은 “남조선에 핵무기가 제거되어야 조선반도에서 핵전쟁의 화근이 없어지고 조선 인민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나라 인민들이 핵위협을 모르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논평했다.

위의 논평처럼 ‘조선 인민・주변 나라 인민들이 핵위협을 모르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 위해’ 북조선의 핵무기를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신문 (1986. 6. 24.)의 논평을 역행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북한은 무슨 말로 변명을 할지 궁금하다. 미국으로부터 핵위협을 당한 북한이, 예상되는 북・미전쟁의 막바지에 ‘무고한 남한 민중을 향해 핵위협을 할지 모르는 구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미국의 핵위협→북한 핵무기 보유→남한 민중(의 평화적 생존권)에 대한 핵위협으로 이어지는 ‘핵위협의 악순환’에 대하여 북한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2005.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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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이 약사를 쓰기 위해 金日成 非核平和地帶の創設について(東京, チュチェ思想國際硏究所, 1985)를 참조했다. 이 책을 보면 김일성 주석이 비핵평화 지대의 창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았는지를 알 수 있다.

(주2) 필자의 질문;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유훈통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일성 주석의 유훈 중 ‘비핵평화 지대 창설’은 예외인가? 비핵평화 지대는커녕 핵무기보유 선언을 한 것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저버린 게 아닌가?

(주3) 필자의 질문; 핵무기를 최종적으로 폐기하자는 김일성 주석의 어록을 역행하는 북한 핵무기보유 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

(주4) 필자의 질문; 김일성 주석은 비핵평화 지대를 위한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현 북한 지도부는 핵무기 보유를 위한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주5) 북한의 비핵지대화 제안에 관하여, 김승국 지음 {한국에서의 핵문제・핵인식론} (서울, 일빛, 1991) 312∼313쪽을 참고할 것.

(주6) 북한 측의 비핵화 제의가 기만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새로운 동력자원을 개발 이용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일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핵평화주의를 거론하는데, 이는 舊소련이나 중국의 경우처럼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포장이었다. 이 시기에 김정일은 영변 원자력 연구소 등 기존의 핵시설을 대폭 확장하고, 1985년부터는 영변에 50MW 원자로와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재처리 공장 건설을 시작하고, 영변 5MW
원자로의 조기 완공을 독려하여 1987년부터 가동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최재혁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개발에 관한 연구」(국방대학원 석사논문, 2003) 103∼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