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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무기(核, 북한 핵, MD)

핵무기에 대한 인식 Ⅱ: 핵무기 보유의 정당성 문제

김승국

1. 탈냉전・탈근대 시대에 웬 핵무기?

핵으로 안보를 강구하려는 발상이 구태의연함을 잘 알고 있을 북한이 고육지계로 핵무기를 만든 안보 딜레마가 오히려 안쓰러워 보인다. 한물간 고물인 핵무기를 두들겨 큰 소리를 내게 하여 미국의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심리전은 이해할 수 있지만, ‘도대체 탈냉전・탈근대 시대에 웬 핵무기를 만들어 야단법석을 떠는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요즘은 전자(IT)산업의 발달에 힘입은 첨단 정밀타격 무기의 효능이 핵무기 못지않고 이들 무기들의 억지력 역시 핵무기에 버금가므로, 핵전쟁의 위험을 각오하며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북한은 이런 경향을 역류하고 있다.

핵무기를 새로 만드는 일은 고전적인 군비확장에 해당된다. 정보전쟁이 유행인 21세기의 탈냉전・탈근대(postmodernism) 시대에 각광받는 무기는, 핵무기의 위험을 회피한 정밀유도・자동 지휘통제・실시간 정찰 무기이다(이 무기들도 핵무기의 살인 능력에는 뒤지지만 엄청난 대량 살상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제거의 대상이다).

이렇게 21세기에 ‘한물간 핵무기’를 만드는 행위는, 20세기의 지긋지긋한 핵군비 경쟁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냉전적 발상의 소산이다. 갈퉁(Johan Galtung)은 냉전을 ‘핵지상주의(核至上主義)+스탈린주의’로 표현했다. 이를 한반도에 적용하면 ‘북・미 핵공방에서 묻어나오는 핵지상주의(찬핵 민족주의 포함)+부시주의(Bushism)’라는 새로운 한반도 냉전도식을 내올 수 있다.

‘냉전-핵시대-근대주의(modernism: 핵무기는 근대주의의 군사기술이 적용된 전형적인 무기이다)’에 대비되는 ‘탈냉전-후기(post) 핵시대’(주1)의 시대상과 걸맞지 않는 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다. 핵무기는, 완전히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지만 퇴물임이 분명하다.

핵무기가 퇴물임을 확인하는 세계의 조류, 즉 전 세계 무기 체계의 post modernism 경향에 엇박자 넣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북한 무기 체계의 modernism 경향을 중심으로 북한 핵무기보유 선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북한 측 핵무기 개발 체계의 modernism 경향이, post modernism 무기 체계를 지닌 미국에 엇박자를 넣는 바람에 당황하고 있는 미국의 모습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엇박자의 춤사위 속에서 핵무기의 그늘, 핵무기에 의한 민족 상호 학살의 그늘이 짙어지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탈(post)핵무기 시대'에 들어섰지만 한반도를 비롯한 제3세계 지역에서 핵시대의 유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제3세계 국가들이 ‘빈자(貧者)의 핵무기’를 통해 강대국의 횡포에 저항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값싼 핵무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는 ‘부자(미국)의 핵무기’와 ‘빈자(북한)의 핵무기’의 대결장이 되어가고 있다. 부자의 핵무기에 짓눌려 전쟁 위협에 시달리던 빈자가 드디어 핵무기라는 칼을 부자에 들이대고 ‘이젠 더 이상 나를 위협하지 말라’며 생사를 건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이 생사를 건 싸움에서 중요한 점은 칼을 쥔 게 정당한가의 여부, 즉 핵무기 보유의 정당성이다. 여기에서 ‘부자의 핵무기’와 ‘빈자의 핵무기’ 모두 정당한가? 부당한가? ‘부자의 핵무기’는 부당한 반면 ‘빈자의 핵무기’는 정당한가? ‘부자의 핵무기’는 정당한 반면 ‘빈자의 핵무기’는 부당한가의 정당성 싸움이 중요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이 논쟁을 활성화하기 위
한 몇 가지 이론을 아래에 제시한다.

2. 핵무기 보유의 정당성을 검증

  (1) 정의의 전쟁론에 입각하여

전쟁에 관한 도덕적 판단을 정지하는 ‘현실주의’ ・‘절대 평화주의(pacificism)’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정의에 들어맞는 전쟁의 조건・규준(rule)을 규정하려는 ‘정의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로부터 비롯되어 중세의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정교한 이론틀로 발전한다. 이어 17세기의 그로티우스(Grotius)가 근대의 국제법에 정의의 전쟁론을 도입한다. 그 뒤 근대 국민국가의 영토분쟁・식민지 쟁탈전을 배경으로 ‘국가 상호간의 전쟁에는 정의도 부정의도 없다는 관념’이 반영된 무차별 전쟁론(전쟁에 즈음해서 당사국의 어느 쪽이 정당하고 다른 쪽은 부당하다고 판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 횡행하면서 정의의 전쟁론은 시들해진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몰(沒)윤리적인 전쟁관이 수정되어, 정의의 전쟁론이 다시 살아난다. ‘현실주의’에 항거하면서 전쟁참가자의 증언을 실마리로 삼아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 평화의 단서이다’고 설명한 왈쩌(Michael Walzer)의 Just and Unjust Wars 는, 정의의 전쟁론을 새로운 시각에서 평가한 작품이다.

이와 같은 이론적인 축적을 통해 ‘전쟁에 대한 법’으로 6가지 조건, 즉 ① 권한을 갖는 당국이 전쟁 개시 결정 ② 정당한 이유 ③ 올바른 의도 ④ 평화적인 해결책을 사용한 끝에 취하는 최후의 수단 ⑤ 발생하는 손해와 달성되어야 하는 가치의 균형 ⑥ 승리할 가망이 갖춰져야 한다.

또 ‘전쟁에 있어서의 법’에 관하여 옛날의 두 항목, 즉 ① 전투원/비전투원의 식별 ② 균형의 원칙(전쟁목적에 걸맞은 공격수단을 선택해야 한다)에 다섯 가지 항목(포로의 살해・학대 금지 등)이 부가되었다.

‘전쟁에 대한 법’의 ⑤항과 ‘전쟁에 있어서의 법’의 ②항은, 핵무기 사용의 조화・비례(발생하는 손해와 달성되어야 하는 가치의 비례를 따져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에 관한 ‘비례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있어서의 법’에 나오는 ①항(전투원/비전투원의 식별)은 ‘구별성’에 관한 것이다.

왈쩌는 Just and Unjust Wars (2nd. ed. 1992) 269쪽에서 ‘인류가 멸망할 위험성을 내포한 핵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정의라고 인정하기 곤란하다. 특히 비전투원을 무차별 대량 살상하는 핵전쟁은, 종래의 정의의 전쟁론을 답습하더라도, 전쟁수단의 비례성(proportionality) ・구별성의 기준을 위반하므로 정의의 전쟁으로 인정하기 곤란하다’고 강조한다.

정의의 전쟁론은 핵무기의 출현으로 정당성을 잃고 있다. 핵무기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 전쟁 체계는 전쟁수단의 비약적인 파괴력・잔혹함으로 말미암아 수단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한 결과 정의의 전쟁론이 설 땅이 사라졌다.(주2) 이러한 현상을 파악한 왈쩌는 ‘핵무기가 정의의 전쟁론을 공중분해시킨다(Nuclear weapons explode the theory of just war)’고 주장했다. 그런데 왈쩌는 ‘혁명・인민전쟁 차원의 정의의 전쟁론’에 입각한 핵무기 보유의 정당성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혁명・인민전쟁에 관하여 말할 때 북한을 빼놓을 수 없다. 북한은 현재 미국 제국주의와의 반제혁명전쟁・인민전쟁을 벌이고 있다. 북한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했다면, 반제・민족해방의 의미에서 혁명전쟁을 수행 중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혁명전쟁이 북한 인민의 대동단결 속에서 진행 중이라면 인민전쟁
이라고 볼 수 있다. 왈쩌와 같은 서방의 학자들은 혁명전쟁・인민전쟁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지만, 사회주의권의 학자들에게 혁명전쟁・인민전쟁은 ‘정의의 전쟁’에 해당된다.

전쟁유형과 관련해서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출발점은 “인민전쟁”이다. 엥겔스는 근대의 전쟁은 “부르주아지와 농민의 해방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이 해방의 군사적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다수 인민의 이해에서 분리된 당대의 지배계급간의 국지전이나 정부간의 전쟁은 반동적이거나 반혁명적인 것이다. 전쟁은 원칙적으로 비판된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억압자에 대항하는 피억압자의 전쟁”은 “역사상 유일한 정당한 전쟁”이며, 낡은 국가기구를 분쇄할 계급전쟁, 곧 “노동과 자본간의 전쟁”은 본질적으로 “정전(正戰: 정의의 전쟁)”이다. 클라우제비츠와 달리 엥겔스와 마르크스에게 그러므로 내전(Bürgekrieg), ‘방어전쟁’, 반식민주의적 민족해방전쟁, 이들의 게릴라전쟁 등은 ‘정당한’ 전쟁이다.

레닌은 ‘억압자에 대항하는 피억압자의 전쟁’이 정당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사회가 諸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러한 착취를 근절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배적이며 억압하는 착취계급들 자신이 항상 그리고 도처에서 시작하는 전쟁을 피할 수가 없다. 전쟁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왕조의 이익과 약탈도당의 식욕 및 자본주의적 이윤을 점유하는 주인공들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모험의 전쟁이 있다. 인민의 억압자와 정복자들을 반대하는 전쟁―이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유일하게 정당한 전쟁이다―도 있다.…프롤레타리아는 러시아에서 위대한 해방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는 그 자신의 혁명군 부대들을 조직하며, 우리에게 넘어 온 병사 및 해병부대를 공고히 하며, 농민을 끌어들이며, 국내전쟁의 불길 속에서 형성되고 단련되는 새로운 러시아 공민들을 전체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투사의 영웅주의와 열정으로 충만시키면서 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 「혁명군과 혁명정부」 1905>

마르크스주의자는 전쟁을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으로 나눈다. 억압자에 대한 피억압계급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다. 예컨대 고대 로마의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처럼 노예주에 대한 노예의 전쟁, 프가초프가 지도한 러시아의 농민전쟁처럼 지주에 대한 농노적인 농민전쟁, 외국의 정복자,제국주의적 식민주의자에 대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인민의 전쟁과 같은 민족해방전쟁은 이에 속한다. 또한 제국주의 여러 나라의 무력간섭에 대한 소련국가의 전쟁, 또는 미 제국주의 앞잡이의 침입에 대한 쿠바 인민의 전쟁처럼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해 수행하는 전쟁도 마찬가지로 정의의 전쟁이다.< 브레즈네프 편집 소련공산당 小史(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1970) 86∼87쪽>

옛날 사람들은 ‘춘추(春秋)시대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오늘 제국주의에게는 더구나 의로운 전쟁이 없고, 오직 피압박민족과 피압박계급에게만 의로운 전쟁이 있다. 전 세계에서 인민이 궐기하여 압박자를 반대하는 일체 전쟁은 모두 의로운 전쟁이다. 러시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은 의로운 전쟁이다. 제1차세계대전 후의 구라파 제 국가 인민의 혁명은 의로운 전쟁이다. 중국의 반아편(反阿片)전쟁(1840∼42), 태평천국(太平天國)전쟁(1851∼64), 의화단(義和團)전쟁(1900), 신해(辛亥)혁명전쟁(1911), 1926년부터 1927년까지의 북벌(北伐)전쟁 그리고 1927년부터 현재까지의 토지혁명전쟁, 오늘의 항일 및 매국역적 토벌전쟁은 모두 의로운 전쟁이다… 무릇 의로운 전쟁은 서로 원조하여야 하며 의롭지 못
한 전쟁은 그것을 의로운 전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이것이 바로 레닌주의적 노선이다.<모택동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에 대하여」 모택동 선집 제1권(北京, 外文出版社, 1968) 216쪽>

전쟁에는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이 있고, 침략전쟁과 해방전쟁이있습니다. 나쁜 것은 부정의의 전쟁이며 침략전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르조아 평화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민족해방 전쟁과 자기 계급을 해방하기 위한 민족해방 전쟁과 자기 계급을 해방하기 위한 혁명전쟁 같은 정의의 전쟁을 지지합니다.<김일성 우리의 혁명과 인민군대의 과업에 대하여 139∼140쪽>

이렇게 혁명전쟁・민족해방 전쟁을 부르짖던 사회주의자들・사회주의 국가들은, 그들이 비판하던 제국주의와 동일한 핵무기를 개발했다. 이로써 그들이 보호해야 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목숨을 위협하게 되어,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고 외친 마르크스의 호소를 무색케했다. 그뿐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 사회주의 동지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핵무기를 배치하는 사태로 발전함으로써, 동일한 사회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상대국 인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다.

핵무기라는 괴물이 사회주의 혁명전쟁의 정당성(혁명전쟁=정의의 전쟁)을 결정적으로 훼손한 데 그치지 않고 사회주의 사상의 담지자인 인민의 생명까지 위협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주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자본주의 사상의 신봉자로서 제국주의 전쟁을 지도하는 지배계급도 핵무기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핵무기는, 핵무기 보유 국가・민족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제국주의 전쟁이든 혁명전쟁관이든 관계없이 정의의 전쟁관을 형해화했다. 이런 설명은 북한・미국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북한의 혁명전쟁・미국의 제국주의 반혁명전쟁(북한의 혁명전쟁을 부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 모두 ‘정의의 전쟁’임을 강조하면서, (정의의 전쟁론을 퇴색시킨)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혁명전쟁이든 반혁명전쟁이든 그것이 핵전쟁으로 연결되어 인류・민족공동체의 생명을 절멸시킬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정의의 전쟁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한편 핵무기가 아닌 통상무기에 의한 혁명전쟁・민족해방전쟁, 즉 핵무기가 없던 시절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한 해방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인정하곤 했다. 식민지 지배, 외세의 억압 아래의 인민들이 나서는 ‘민족해방 전쟁’은 제3세계 민중이 전개하는 정의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북한이 사회주의 고전의 ‘정의의 전쟁’론의 연장선상에서 ‘부정의한 미국 제국주의와 대결하기 위해 정의의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북한식 정의의 전쟁론’을 감성적으로는 수용할 수 있으나, 왈쩌가 말하는 비례성・구별성의 요청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유감스럽게도 북한의 핵무기 역시 무차별적인 대량 살상을 원초적으로 배제할 수 없으므로 비례성・구별성을 만족시킬 수 없다.

실정(實定)의 전시법상(戰時法上) 개별적인 핵무기는 분명 비전투원의 보호와 비례의 원칙을 충족시키면서, 즉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핵(核)의 문턱이 무너지는 순간부터는 핵전쟁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도박에 불과한 것이다.<민경길 「국제법상 핵무기의 지위에 관한 연구」(명지대 박사학위 논문, 1989>

앞에서 정의의 전쟁론이 핵시대에 적용될 수 없음을 밝혔는데, 북한식 정의의 전쟁론도 핵시대에 적용되기 어려우므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정당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왈쩌의 어법을 빌리면, “북한의 핵무기가 ‘북한식 정의의 전쟁론’을 공중분해시켰다!”

전통적인 정당 전쟁론(정의의 전쟁론)에 기초를 두고 본다고 하더라도 이 대량학살무기(핵무기)의 사용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핵무기의 위협은 전쟁을 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핵전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또 이 핵무기들은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어느 일방이 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위협하에서 평화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
다. 그리고 핵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기술사회에서는 어느 편에도 승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국제간의 갈등해결의 유효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핵무기의 발견으로 인해서 더 이상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따라서 평화만이 삶의 계명이다.<손규태 「북한의 핵무장과 그리스도 교회」 기독교 사상 (1994년 1월호) 24쪽>

2. 핵확산 이론에 입각하여

핵확산 이론은 핵무장 원인을 특정국가가 지닌 기술수단의 총량으로 설명하는 학파와 이와는 달리 특정국가의 핵개발 동기를 핵확산 원인으로 설명하는 학파 등 2개의 학파가 주류를 이루어왔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스테판 메이어(Stephen M. Meyer)는 전자를 기술이론으로, 후자를 동기이론의 범주로 분류하였다. 한편 이와는 달리 대부분의 제3세계 학자들은
기존의 기술이론과 동기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두 이론은 기득권을 가진 핵강대국의 자기 합리화 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평적 핵확산은 핵강대국과 비핵국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특히 수평적 핵확산은 핵강대국의 수직적 핵확산과 연계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주장을 연계이론이라 한다.<최재혁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개발에 관한 연구」(국방대학원 석사논문,2003) 13쪽>

연계이론의 장점은 기술이론 및 동기이론에 비해 보다 거시적인 분석틀을 제공함으로써 핵확산 원인을 세계적 차원의 범위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특정국가의 핵확산 원인을 특정국가나 특정지역에 국한시키지 않고 범세계적 영역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연계이론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연계이론이 주장하는 핵강대국의 수직적 확산이 수평적 핵확산을 야기한다는 주장도 결국 동기이론에서 설명하는 안보유인의 범주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연계이론이 주장하는 핵강대국의 비핵 약소국에 대한 핵위협은 범세계적 차원의 핵국가 對 비핵국가에 대한 위협이라기보
다 특정 핵국가와 특정 비핵국가간의 쌍무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연계이론은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적 학파와 제3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반)제국주의적 학파로 구분된다.<김태우 「핵확산 이론과 한국 핵무장의 이론적 당위성」 국방논집 제11호(1990. 가을호) 156쪽>

미국의 연계이론가들은 NPT 체제의 차별성과 이중 기준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현 국제 핵정치구조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핵국의 불평을 무마하고 효과적으로 핵확산을 억지하기 위해서는 핵강대국들이 비핵국가에 대해 핵불사용 선언과 비핵지대에 대한 지위 존중, 핵감축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간 핵프로그램에 관한 협력을 포함한 핵국의 비핵국에 대한 NPT상의 의무를 수행할 것을 제시한다.<유성옥 「북한의 핵정책 동학에 관한 이론적 고찰」(고려대 박사논문, 1996) 47쪽>

반면 제3세계 학자들 중심의 (반)제국주의적 연계학파는 국제안보 체제의 본질을 제국주의적인 핵강대국과 비핵 약소국들로 이루어진 착취적이며 불평등한 실체로 파악한다. 따라서 착취와 지배의 구조를 수평적 핵확산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하면서 비핵 약소국들은 핵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북한 외무성의 2005
년 2월 10일의 핵무기보유 선언(2 ・10 선언)/남한 쪽 찬핵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 더불어 수평적 핵확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국제 핵정치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에 있다고 본다. 아울러 자유주의적 연계이론가들이 제시하는 핵강대국의 비핵 약소국에 대한 핵불사용 보장 등 일련의 조치들은 핵제국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단순한 상징적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핵강대국들이 핵무기를 힘의 통용수단으로 사용하는 한 비핵국가들도 똑같은 목적을 위해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유성옥 「북한의 핵정책 동학에 관한 이론적 고찰」(고려대 박사논문, 1996) 48쪽>

2 ・10 선언의 ‘핵무기 보유’ 부분이 이런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2 ・10 선언의 뒷부분인 ‘비핵화 희망’ 부분과 배치된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지키고 싶은 희망마저 깨버리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게 이 선언의 요지이다. 궁여지책으로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핵무기 선택의 주체인 북한 쪽 국가권력의 핵무기 보유 욕구를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의 국가권력은 ‘핵무기라는 폭력장치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궁극적인 무기임’을 믿는 가운데 2 ・10 선언을 한 듯하다. 2 ・10 선언은 ‘핵이라는 폭력을 선호하는 국가권력 일반의 문제점(반제・민족해방 전쟁용으로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측면에서 평가할 점이 있지만)’을 드러낸다.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의 총체적 압력 앞에서 국가권력의 보위를 위한 비상한 결의로
핵무기라는 폭력을 선택했다는 변명이 호소력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북한 국가권력이 핵무기를 선호한 결과 한반도 민중의 목숨・평화적인 생명권이 유린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변명은 묘지명(墓誌銘)에 새길 문구에 불과하다.

이처럼 연계이론에 따라 핵무기 보유를 변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선택・선호하는 국가권력의 폭력(핵무기 사용)에 의한 온 생명의 절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온 생명의 절멸 가능성’은 제3세계 민중(한반도 민중)의 생존(subsistence) ・생존의 지속성(sustainability)이 근원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한계를 지칭한다. 이런 한계의 분유(分有)를 강요받는 한반도 민중은, 핵무기를 선택・선호하는 국가권력에 자신의 생명을 맡겨야 할지 아닌지를 결단해야 한다. 이 실존적인 결단을 위하여, 생명평화의 입장에서 북한 핵보유선언에 대하여 냉철한 관점을 정립해야 한다.(200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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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핵무기 못지않은 효력을 나타내는 최첨단 무기가 등장하여 반드시 핵무기에 의존하지 않아도 안보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후기(post) 핵시대가 되었다. 탈근대주의(post modernism)를 반영하는 전자(IT)산업의 발달로 인한 무기의 최첨단화는, 통상 폭탄의 명중률 향상, 파괴력의 강화 등을 통해 핵무기의 군사적 역할을 점점 저하시키는 효용을 갖게 되었다. 예전에 핵무기를 중시했던 폴 닛츠(전 미국 대통령 고문)도 “미국이 군사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통상 전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 핵무기는 필요없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후기 핵시대를 예고하는 것이 미사일 방어망(MD)이다. 한마디로 핵이 아닌 물질에 의한 ‘탈냉전의 무장시대’가 후기(post) 핵시대이며, 후기 핵시대는 탈근대주의(post modernism)의 무기 체계와 짝짓기를 하고 있다.

(주2) 정의의 전쟁론의 원조인 기독교계 역시 핵무기에 의한 전쟁이 정의의 전쟁관에서 벗어난다고 밝혔다.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1945년 핵무기의 투하와 함께 여러 측면에서 변화를 겪게 된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총회에서 ‘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선언함으로써, 교회는 이제까지의 애매하고 분열된 입장들에서 분명한 입장을 천명했다. 이것은, 전쟁은 타락한 세계에서는 불가피하다는 종래의 패배주의적 입장을 뒤집은 것일 뿐 아니라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암스텔담의 선언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전면전을 하게 되었다. 이제 남녀 모두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 부가해서 엄청난 공중 폭격과 핵무기와 새로운 무기들의 발견이 뒤따랐다. 이 모든 것은 현대전에서 이전의 전쟁들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규모의 무차별적 파괴들을 낳게 된다.” 핵과 같은 현대적인 무기의 발견 이후에는 전쟁에 대한 과거의 관념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의로운 대의를 위한 정당한 전쟁(정의의 전쟁)을 정당한 무기들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전통적인 ‘정당 전쟁론(정의의 전쟁론)’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하여도 대량학살 무기에 의한 위협이나 사용 등을 교회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서 냉전 체제하에서 교회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도 핵무기 사용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손규태 「북한의 핵무장과 그리스도 교회」 기독교 사상 (1994년 1월호)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