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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종교적인 접근

핵무기와 神 (13) -나가이 다카시의 번제설 (3)

김승국


1. 키에르케고르와 나가이 다카시


나가이 다카시(永井隆)의 ‘번제설(피폭=번제)’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번제론을 소개한다.


필자가 보기에 나가이 다카시는, 키에르케고르의『이거냐 저거냐(Entweder-Oder)』에 나오는 ‘A형 인간’에 가까운 것 같다. 키에르케고르는『이거냐 저거냐』에서 A형 인간과 B형 인간을 대비시키면서 이거냐(A형 인간 선택하느냐) 저거냐(B형 인간을 선택하느냐)를 놓고 고민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A형은 직관적ㆍ감성적ㆍ미적인 감성을 갖고 사색하는 인간이고 B형은 이론적인 사람이다.


필자가 앞에서 A형 인간에 ‘가까운 것 같다’고 언급한 이유는, 나가이 다카시에게도 B형 인간의 요소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A형 인간의 요소가 강한 것 같다는 뜻일 뿐, 이분법적으로 나가이 다카시에게는 B형 인간의 요소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렇게 나가이 다카시를 A형 인간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면, A형 인간을 선호하는 키에르케고르의 풍모ㆍ신앙관을 나가이 다카시가 지니고 있다고 말하면 무난할 것 같다. 나가이 다카시의 신앙관과 키에르케고르의 신앙관이 비슷하다면, 키에르케고르 번제론을 통해 나가이 다카시의 번제설을 이해할 수 있겠다.


Ⅱ. 키에르케고르의 번제론


  1. 창세기 22장 


키에르케고르의 저서『공포와 전율(Furcht und Zittern)』에 번제론(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올리려고 한 실존적인 결단에 관한 논의)이 나온다.『공포와 전율』은 창세기 22장의 ‘이삭 번제’를 주제로 삼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창세기』22장 1~13절)


도대체 왜 아브라함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윤리적 목적도 없이,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인륜적으로 정해진 세계를 체념하고 그런 끔찍한 짓을 하려고 했을까? 구약성서의 대답은 그것이 ‘시험’, ‘유혹’이라고 하고 있어 더욱 알 수가 없다. 아브라함이 시험 또는 유혹받고 있는 것은 윤리적인 것의 보편 타당성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 유혹을 물리치고 윤리적인 것의 무한한 체념을 통해 더 높은 목적 곧 신앙을 실현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은 하나의 새로운 범주, 곧 신앙을 필요로 한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신앙이란 개별자가 보편적인 곳보다 높다고 하는 것...개별자가 개별자로서 절대적인 것에 절대적인 관계에 서 있다고 하는 역설이기 때문이다.(표재명, 98)


아브라함의 행위는 윤리적으로 표현하면 이삭을 죽이려고 한 일이고, 종교적인 표현을 빌리면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치려고 한 일이다. 이것은 무서운 모순이다. 이 모순 속에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는 불안이 있다. 그런데 이 불안이 없으면 아브라함의 존재는 의의를 잃는다. 이 모순은 무서운 변증법적인 투쟁이고 이 불안을 극복하는 거인적인 열정이 ‘믿음’이고, 이 ‘믿음’이야말로 자식을 죽이려고 하는 무시무시한 행위까지도 신성한 행위로 바꾸어 놓는다. 이것이 ‘믿음의 변증법’이다.(키에르케고르, 임춘갑 옮김『공포와 전율/ 반복』, 406~407)


  2. 신 앞에 선 단독자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에 가서 그(이삭)를 하나님께 번제(燔祭)로 드리려 했을 때, 이삭은 공포에 떨면서 외쳤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이 세상에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러한 즉 당신께서 내 아버지가 되어 주소서!” 그 때 아브라함은 아들의 외침을 듣고 “하늘에 계신 주여! 나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이삭이 당신에 대한 신앙을 잃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삭이 나를 못된 인간이라고 믿는 쪽이 낫습니다”고 중얼거렸다. 등을 돌리고 칼을 빼드는 아브라함의 왼손 주먹이 절망에 못 이겨 불끈 쥐어지고,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이삭은 보았던 것이다.
『공포와 전율』의 아브라함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우리는 신 앞에 선 단독자를 보게 된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고 싶은 신, 즉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 관계이다.(키에르케고르 지음, 손재준 옮김『공포와 전율』479)


  3. 불안과 원죄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삶의 근원적 현상 가운데 하나인 죄를 인간의 실존적 상황인 ‘불안’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또 해석한다. 실존철학에서 불안은 인간 실존의 근본 계기 가운데 하나이다. 불안은 인간을 실존으로 이끄는 중요한 단초이기도 하다. 불안은 특히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는 인간의 죄스러움을 그 기원에서 설명하면 ‘원죄의 전제’요, 동시에 ‘원죄의 결과’ 혹은 ‘원죄의 현존’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죄 그 자체는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학문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죄가 실제로 인간의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간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실존적 자각이다. 죄에 대한 인식은 특별히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인간 실존 이해를 위한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이다. 소위 그리스도교의 죄의 개념이 인간이 단독자로서 절대적 존재 앞에 서게 되는, 즉 종교적 실존으로서의 실존론적 신앙을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로서의 불안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난해한 저서로 꼽히는『불안의 개념』(Der Begriff Angst, 1844)에서 밝히고 있다.(박병준, 161)


  4. 인신 제사


[이삭과 같은 사람의 몸을 희생양으로 제단에 올리는] 인신제사(人身祭祀)는 일찍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주변나라들과 구별 없이 행해졌다고 본다. 이런 불법적인 이방제의가 야웨종교로 유입되었다.(겔 23:37 이하/ 시 106:37 이하 등)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 안에서 자녀를 죽여 우상에게 드렸다. 장자 제물은 신명기 종교개혁 때까지 야웨종교의 합법적인 구성요소였다. 신명기적 역사가가 말하는 인신제사 특히, 왕들이 자기 아들을 번제하는 제의 행동이 아하스 왕에게서 있었다.(왕하 16:3) 므낫세 왕도 자기 아들을 인신제사의 제물로 드린 일이 있었다.(왕하 21:6)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신제사는 개인보다는 대표성을 띤 지도자 즉, 왕들이 자기 아들을 바쳐 ‘국가적 목적’을 성취하려 하거나, 아니면 ‘왕권 강화’를 위해서 아들을 제물로 드렸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아브라함은 히브리 공동체의 지도자요, 대표자로서 블레셋인과 대결해야 하는 마당에서 일찍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려 적에게 격노함이 임하게 하여 그들을 무력하게 하려고 했던 의지도 품을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오히려 비상시에 국가나 부족 단체 지도자가 위기 극복을 위해 최후로 쓸 수 있던 마지막 카드로서 인신제사 수행이 아니었나 싶다. 개인적-가정적 차원에서 부자간(父子間)의 개인 신앙문제가 아니라 고대 종교사회에서 집단 신앙의 책임적-희생적 행위로서 당위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방석종, 10~11)


전쟁에서 패배를 승리로 역전시키기 위해, 매우 긴박한 상황과 적의 위협 아래에서 인신 제사가 이루어졌다. 아브라함 당시 주변 나라들은 이런 인신 제사법을 당연시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실시했다. 바로 이런 주변 상황에서 섞여 살던 아브라함은 이런 인신 제사법과 짐승 제물 제사의 과도기적인 상황에 있었고, 이삭이 짐승제물 제사를 건의한 인물로 드러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왕이나 집단의 대표자는 진리를 내포한 당위법 종교관습을 그의 백성이나 회원들 앞에서 집례하였다. 그런 법은 신적(神的)인 것이요, 신의 명령으로서 관습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규범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신이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런 규범으로서 종교 관습법을 따라야 했다.(방석종,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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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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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키에르케고르 지음, 손재준 옮김『공포와 전율』(서울, 삼성 출판사, 1977)
* 표재명『키에르케고어의 단독자 개념』(서울, 서광사, 1992)
* 키에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공포와 전율/ 반복』(서울, 다산글방, 2007)
* 방석종「이삭제물 연구」『신학과 세계』(감리교 신학대) 제44호(2002년 봄)
* 박병준「키르케고르의 ‘죄(성)’의 개념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철학』제93집(2007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