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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종교적인 접근

핵무기와 神 (12) -나가이 다카시의 번제설 (2)

김승국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공포와 전율(Furcht und Zittern)』에서 ‘신앙은 사유가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사유를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역설’이라고 언급한다. 신앙은 역설이므로 불합리해도 믿을 수밖에 없다. 교부 철학자의 말대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이러한 전제 아래, 나가시 다카시(永井隆)의 역설적인 번제설이 드러나는「原子爆彈 死者 合同 弔辭」를 소개하면서 중요부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Ⅰ.「原子爆彈 死者 合同 弔辭」


나가이 다카시가 ‘천주공교(天主公敎) 浦上 신도 대표’로서 1945년 11월 23일에 폐허로 변한 우라카미(浦上) 천주당(성당) 앞에서 낭독한「原子爆彈死者合同弔辭」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0시 30분경 대본영(大本營)에서는 전쟁 최고 지도회의가 열려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결정하기로 되었습니다. 세계에 새로운 평화를 가져 오느냐? 그렇지 않으면 인류를 더 한층 비참한 피의 전란(戰亂) 속으로 몰아넣느냐? 하는 운명의 기로에 세계가 서 있는 시각 즉 오전 11시 2분, 한발(一發)의 원자폭탄이 우리 우라카미(浦上)에 폭발하여 가톨릭 신자 8천의 영혼은 일순간에 천주님 슬하로 불려가고 맹화(猛火)는 몇 시간 동안에 동양의 성지(聖地)를 폐허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천주당(우라카미 성당)에 갑자기 불이 나서 타고 말았습니다. 마침 같은 시각에 대본영에서는 천황 폐하가 종전(終戰)의 성단(聖斷)을 내리셨습니다. 8월 15일 종전의 대조(大詔)가 발포되자 세계는 다 같이 평화의 날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이날은 성모(聖母)님이 승천(昇天)하신 대축일(大祝日)입니다. 우라카미 천주당을 성모님께 받쳤던 것이 새삼스럽게 생각납니다. 이런 일들의 기이한 일치가 단순한 우연일까요? 또는 천주님의 거룩한 뜻이었을까요?
일본의 전력(戰力)을 끝장내려는 최후의 원자폭탄은 본래 다른 모 도시[고쿠라]에 예정하였던 것이 그 도시 상공은 구름이 끼어 직접 조준 폭격을 못하고 갑자기 예정을 변경하여 예비 목표이었던 나가사키에 떨어뜨리게 된 것이고, 또 투하할 때 구름과 바람으로 군수공장을 겨냥한 것이 조금 북방으로 빗 떨어져 천주당 정면에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군 비행사가 우라카미를 겨냥한 것이 아니고 신(神)의 섭리에 의해 폭탄이 이 지점에 오게 된 것이라 해석 못할 바도 아닙니다.
종전과 우라카미 괴멸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죄악에 대한 속죄로서, 일본 유일의 성지(聖地)인 우라카미가 희생의 제단 위에서 도륙(屠戮)되어 불 타 버릴 고결한 어린 양(羊)으로 뽑힌 게 아닐까요?
지혜의 나무 열매를 훔친 아담의 죄[원죄]와 아우를 죽인 카인의 피를 전승받은 인류가 같은 神의 아들이면서 우상을 믿고 사랑을 배반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죽이기를 좋아하는 이렇게 큰 죄악을 종결시키고 평화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후회할 뿐 아니라 적당한 희생을 바쳐 神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여러 번 종전의 기회도 있었고 전멸한 도시도 적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희생으로서 적당치 않으므로 神은 받아 주시기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한데 우라카미가 도륙된 순간 비로소 神이 이를 받아들이시고 인류의 사과를 들고 금세 천황폐하께 천계(天啓)를 내려 종전의 성단(聖斷)을 내리게 한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 없는 일본에서 박해 밑에 4백년 순교의 피를 흘리며 신앙을 지켜오고 전쟁 중에도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올리는 기도를 아침 저녁 끊은 적 없는 우리 우라카미 교회야말로 神의 제단에 바칠만한 유일하고 고결한 어린 양이지 않았나요? 이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금후 다시 전화(戰禍)를 입을 번한 수천만의 사람들이 구원되었습니다.
전란의 어두움은 끝나고 평화의 빛 비치는 8월 9일 이 천주당 앞에서 불 타 버린 영혼들이여! 슬픔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를 아름답다, 깨끗하다, 거룩하다 하며 쳐다보았던 것입니다. 더럽히지 않은 연기(煙氣)로 되어 천국에 올라가신 주임(主任) 사제를 위시하여 8천의 영혼! 누구를 추억하나 좋은 분들.
패전을 모르고 세상을 떠난 복(福) 받은 분들이여!! 결백한 어린 양으로 神의 가슴에 고이 잠든 영혼의 영광이여! 그에 비하여 비참한 우리 살아 있는 무리들. 일본은 졌습니다. 우라카미는 폐허입니다. 눈에 가득차 보이는 잿더미. 기와집은 없어지고, 옷 없고 먹을 것은 없어지고 밭은 황폐해지고 사람도 적습니다. ‘머엉~’하니 서서 하늘만 쳐다보는 두 세 사람.
그날 그때 이 집에서 왜 같이 못 죽었나이까? 왜 우리들만이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죄인(罪人)이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자기들 죄(罪)의 깊이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죄를 씻지 못하여 남아 있습니다.  너무도 죄가 많은 자(者)만이 神의 제단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남긴 것입니다.
일본인이 이제부터 걸어 나갈 패전 국민의 길은 고난과 비참이 가득찬 것이요 포츠담 선언으로 부과된 배상은 매우 크고 무거운 짐입니다. 이 크고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 나갈 고난의 길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죄를 씻는 기회를 주는 희망의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복(福) 받을지어다. 우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 받을 터이니 우리는 이 배상의 길은 정직하게 걸어 나가야하겠습니다. 조소(嘲笑) 받고 욕 먹고 채찍질 받으며 땀 흘리며 피투성이가 되어 목이 타고 배를 주리며 이 길을 걸어 갈 때 카르와리오 언덕에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신 그리스트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주(主)는 주신다. 주(主)는 받으신다. 주(主)의 이름으로 찬송 받으시옵소서. 우라카미가 뽑혀 제단에 오르게 된 것을 감사드리나이다. 이 귀중한 희생으로써 세계에 평화가 다시 오고 일본에 신앙의 자유가 허가된 것을 감사드리나이다.
원(願)컨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천주(天主)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고요히 쉬도록 하여주심을 비나이다. 아멘!!(永井隆『長崎의 鐘』, 129~133) 


Ⅱ. 중요 부분에 대한 설명


위의「原子爆彈死者合同弔辭」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구절이나 단어를 중심으로 비판 어린 설명을 한다.


  1. “한발(一發)의 원자폭탄이 우리 우라카미(浦上)에 폭발하여 가톨릭 신자 8천의 영혼은 일순간에 천주님 슬하로 불려가고...” 는, 피폭자와 하나님의 관계를 설정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피폭자를 선택하여 하나님 나라로 불러들였으니 감사해야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2. “천황 폐하가 종전(終戰)의 성단(聖斷)을 내리셨습니다.”는, 나가이 다키시가 (천황을 존숭하는) 존왕의식을 드러낸 구절이다.


  3. “성모(聖母)님이 승천(昇天)하신 대축일(大祝日)입니다. 우라카미 천주당을 성모님께 받쳤던 것이 새삼스럽게 생각납니다. 이런 일들의 기이한 일치가 단순한 우연일까요? 또는 천주님의 거룩한 뜻이었을까요?” 는, ‘피폭이 우연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이 거룩한 뜻을 펼치기 위해 성모 승천일에 맞춰 핵무기를 떨어뜨리게 했다’고 확대해석할 수 있다.

 
  4. “미군 비행사가 우라카미를 겨냥한 것이 아니고 신(神)의 섭리에 의해 폭탄이 이 지점에 오게 된 것이라 해석 못할 바도 아닙니다.”는, ‘미군 비행사의 의도적인 핵무기 투하에 앞서 신의 섭리에 의해 핵무기가 우라카미 성당 위에 떨어졌다. 미군 비행사가 투하목표를 변경하여 우라카미 성당 위에 핵무기를 투하한 것도 신의 섭리이다’로 풀이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나가사키의 피폭 지옥도(地獄圖)가 신의 섭리에 의해 그려졌고, 핵무기 투하라는 인류 최악의 범죄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는 나가이 다카시의 ‘피폭=섭리’설은 난해하기 짝이 없다. 난해함을 덜기 위해 ‘섭리’에 대하여 문제 제기하는 글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악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가? 하느님이 역사하신다면 왜 이 세상에는 살인과 강도가 자행되며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가? 이러한 악의 실재 앞에서 하느님이 이 세계를 다스린다는 섭리 사상을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은총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K. Barth)의 도움을 통해 섭리론의 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기독교는 하느님의 섭리를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다. ‘섭리’란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우선적 행위’ 곧 ‘절대적 은혜’로서, 하느님께서 자기와 다른 이 명백한 현실을 그의 고유한 의지의 척도에 따라 시간 안에서 보존하고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창 1:1),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창조한 이 세계를 섭리하신다.(요 3:16) 섭리는 창조와 함께 결정된 은총의 계약을 수행하고 유지하는 하느님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 없이 섭리는 일어날 수 없으며, 하느님은 피조물을 위해 그의 섭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바르트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향한 섭리를 세 가지 활동, 즉 보존(conservatio), 동행(concursus), 통치(guberatio)로 설명한다. 보존과 동행과 통치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섭리는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특정한 역사를 형성케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가 피조된 세계에 대한 그의 주권적 지배라고 할 때 인간의 자유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하느님이 세계를 섭리하신다는 신앙을 포기하도록 이끌어온 사상과 세계 현실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수많은 사건들,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아우슈비치의 유대인 집단 학살 사건이나 히로시마의 원자탄 투하 사건 등으로 인한 비참함을 어떻게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건들 앞에서 인류는 역사에서 일어난 현실을 운명 내지 숙명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섭리론의 배제를 의미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악의 사건까지도 섭리론으로 처리하여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피조물의 모든 사건들이 단순히 하느님의 결정으로 쉽게 처리해 버릴 때 적어도 두 가지의 질문이 제기된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가 속박되는 문제를 야기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인간은 태만한 죄를 범하게 되고, 하느님은 문제 해결사로서 ‘기계적인 신(Deus ex machina)’이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 남용이 문제된다. 정말 인간이 스스로 자기 결정과 해석에 의해서 규정된 역사를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권 행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면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운명론과 무엇이 다른가?
바르트는 여기서 정통주의 신학이 제시한 신학의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신학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채 단지 일반적인 신 중심에서 취급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만이 하느님의 주권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느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식하고, 창조자 하느님과 함께 일치된 이해를 가짐으로써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다. 바르트는 하느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참여의 현실을 신앙(Glaube)과 복종(Gehorsam)과 기도(Gebet)에서 다룬다. 첫째, 신앙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한다. 둘째, 복종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한다. 셋째,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한다.”(최종호, 275~282)


  5.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죄악에 대한 속죄로서, 일본 유일의 성지(聖地)인 우라카미가 희생의 제단 위에서 도륙(屠戮)되어 불 타 버릴 고결한 어린 양(羊)으로 뽑힌 게 아닐까요?”라는 나가이 다카시의 물음에 대하여 필자가 다음과 같이 역(逆)질문한다;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은 어느 나라가 유발한 전쟁인가? 바로 일본이 세계대전을 유발한 주동자이다. 따라서 나가이 다카시가 ‘일본이 일으킨 세계대전 때문에 인류의 죄악이 발생하여, 이 죄악에 대한 속죄양으로 우라카미가 선택되었다’고 언급했어야 정확하지 않나? ‘일본이 일으킨 세계대전’이라며 죄악을 일으킨 대상을 지정해야 우라카미가 번제로 뽑힌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이 일으킨 세계대전’이 죄악의 근원이라면, 일본의 전쟁을 최종적으로 지휘한 천황이 죄악의 근원이 아닐까? 그렇다면 천황이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하면서 인류에게 저지른 죄악에 대한 속죄양으로 우라카미가 선택된 것이 아닌가? 천황이 자기 나라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세계대전을 일으켰는데, 이를 나가이 다카시가 번제론으로 은폐ㆍ미화한 것이 아닐까? 신이 우라카미를 번제로 도륙하기 이전에 전쟁주범인 천황ㆍ천황제도를 도륙해야하지 않나?”


위와 같은 질문-역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원죄-속죄-번제(희생양)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 아담의 의도적인 원죄


아담이 [의도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명령을 배반한 것이고 그래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것 때문에 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이 지상에 떨어져 왔으며 거기에서부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는 죄와 함께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인간의 역사는 모두 죄의 역사, 죄에 물들어진 역사이며 거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모두 죄에 뿌리박고 있는 인간인 셈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나면서부터 죄를 짊어지고 있다. 이런 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죄의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아베 마사오, 122)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신의 의지에 배반하도록 의지 결정을 한 것이며, 신에 의한 속죄(贖罪)는 그 같은 인간의 죄까지도 신이 자진해서 용서할 것을 뜻(의지)하는 것이다.(아베 마사오, 139)


    2) 비의도적인 원죄


기독교의 성서적 입장은 전반적인 인간의 특징을 ‘원죄(sin)’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함축들이 있다. 첫째, 원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실패된 관계(failed relationship)’를 의미한다. 히메스(K.R. Himes)는 이러한 과정이 점진적이고 느리게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 둘째, 히메스는 원죄가 바이러스(virus)와 같다고 본다. 셋째, 히메스는 원죄가 인간 상호관련의 측면에서 문화의 맥락에 있다고 본다. 히메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 공동체들과 문화들에서 선에 대한 방해꾼들의 무한한 출현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들을 원죄로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의도적 원죄의 양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원죄인들이 자신들의 죄지음을 인식하는지 아니면 인식하지 못하는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본성상 원죄에서 비롯된 율법의 통제를 피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비의도적 원죄에서 나오는 죄지음의 문제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의도적 원죄와 관련해서 레위기의 5장 2절부터 5절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위기에서 비의도적 원죄에 관한 보기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하길: 어느 누구든지 비의도적으로 하느님의 명령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금지된 것을 범할 때...”(4:2)
“만약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가 비의도적으로 하느님의 명령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금지된 것을 범할 때, 비록 그 공동체가 무의식중에 이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이다.”(4:13)
“한명의 지도자가 비의도적으로 하느님의 명령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금지된 것을 범할 때, 그는 죄를 짓는 것이다.”(4:22)
여기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은 비의도적 원죄의 문제가 철저히 하느님의 명령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비의도적 원죄 또는 죄지음은 이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법에 의해 제공되면서 동시에 구제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또한 하느님의 명령들을 파기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바로 비의도적 죄지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비의도적 죄지음에 대한 경고는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 한명의 지도자, 그리고 그 공동체 구성원의 각 개인으로 향하고 있다. 만약 비의도적 원죄가 발생했다면, 이를 속죄하기 위한 절차가 필요하다. 이는 구약의 시대에서 이른바 ‘희생양(scapegoat)’의 전통이다. 고린지(T. J. Gorringe)는 우리가 원죄를 구제받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들 파괴하기 때문에, 당시 희생양의 메카니즘이 죄지음의 처벌을 면제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희생양이 오로지 자신이 비의도적 죄를 지었다는 자의식과 자기반성을 가졌던 사람에게만 허용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송선영, 328~332)


[이처럼] 비의도적인 죄를 깨닫지 못하면 인간 공동체, 하느님의 왕국을 파괴하는 주요한 원천이 된다. 자기 인식과 반성이 없다면, 비의도적 죄지음에 대한 정당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인식의 경우는 구약성서의 기독교적 삶에서는 희생양을 통해 가능했고, 불교적 삶에서는 비의도적 죄의 업[業; Karma]과 식[識]의 씨앗에 대한 진정한 자아의 선업[善業]을 통해 가능했고, 유교적 삶에서는 도덕적 군자의 실천을 통해 가능했다. 비록 악과 죄지음에 대한 각 종교별 관점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비의도적 죄지음을 자각하게 하기 위한 노력은 이상적 공동체를 확립하기 위한 근본적 방식으로서 공통적으로 강조되었고 제시되었다.(송선영, 343~344)


위의 논지를 나가이 다카시의 번제설과 연결시키면, 속죄양이 된 피폭자들이 비의도적인 죄(원죄)를 저질렀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죄악’에 피폭자의 비의도적인 죄가 포함되는지가 중요하다. 피폭자의 비의도적인 죄가 포함되어야, 그런 죄에 대한 속죄로서 ‘우라카미가 희생양으로 뽑혔다’는 나가이 다가시의 번제설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피폭자의 비의도적인 죄의 업[業; Karma]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제단 위에서 도륙(屠戮)되어 불 타 버릴 고결한 어린 양(羊)으로 ‘우라카미’라는 희생양을 뽑을 수 있다. 우라카미 성당, 우라카미 성당에 다니다가 피폭된 신자들을 제단에 번제(희생양)로 올리는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 그런데 피폭된 신자들은 사망하고 우라카미 성당은 피폭으로 파멸되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 중의 대표인 나가이 다카시가 번제로 올리는 의식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해석해도 무난한지 모르겠다.


위의 원죄-속죄-번제의 3각 관계(원죄를 속죄하기 위해 번제가 필요하다)는, 나가이 다카시 번제설의 핵심이다. 이 핵심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아래에 이어지는 조사(原子爆彈 死者 合同 弔辭)를 독파할 수 있다.


  6. “지혜의 나무 열매를 훔친 아담의 죄[원죄]와 아우를 죽인 카인의 피를 전승받은 인류가...큰 죄악을 종결시키고 평화를 맞이하기 위해...적당한 희생을 바쳐 神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는, 원죄를 속죄하기 위해 번제가 필요함을 다시 강조한다. 피폭자의 비의도적인 원죄를 속죄함으로써, 피폭 이후의 세대들(살아남은 사람들)이 평화를 맞이하기 위해 적당한 희생(번제)을 바쳐 신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되며, 우라카미(우라카미 성당ㆍ우라카미 성당의 신자들)가 번제로 영광스럽게 뽑혔다는 것이다.


  7. “이제까지 여러 번 종전의 기회도 있었고 전멸한 도시도 적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희생으로서 적당치 않으므로 神은 받아 주시기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한데 우라카미가 도륙된 순간 비로소 神이 이를 받아들이시고 인류의 사과를 들고 금세 천황폐하께 천계(天啓)를 내려 종전의 성단(聖斷)을 내리게 한 것입니다.”는, 논란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미국의 공습으로 전멸하다시피한 일본의 다른 도시는 희생으로 적당치 않으므로 신이 받아주지 않았으나, 나가사키(우라카미)만 희생으로 적당하여 신이 받아주었다는 ‘우라카미 번제의 유일성’에 관한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가사키(우라카미)가 희생으로 우수한 점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가이 다카시 자신의 신앙심뿐이어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나가사키가 희생으로 우수한 점을 증명해야 보편성을 지니지 않나?
 

‘우라카미가 도륙된 순간 비로소 神이 이를 받아들이시고...’는, 원자폭탄에 의해 도륙된 순간 우라카미가 신이 받아들일 만큼 영광스러운 번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너무 잔인하고 자학적으로 번제설을 대변하는 문구이다. 


“천황폐하께 천계(天啓)를 내려 종전의 성단(聖斷)을 내리게 한 것입니다.”는, 우라카미라는 번제를 받아들인 신이 천황에게 천계를 내려 종전을 결단하게 했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천황의 의지를 연결시킨 글귀이다. 하나님과 천황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더우기 일본 국가신도의 수장인 천황이 기독교 신앙의 표상인 하나님(God)과 종교적으로 연결될 수 없는데도, 천계를 받았다는 주장이 타당한가?
 

천황의 종전은 정치적인 결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나님의 천계와 연결시킨 것은 천황의 성단을 신비화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하나님의 천계와 천황의 성단을 대비시킴으로써 천황이 하나님 못지않게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부각하고 있는 듯하다.        


  8. “우라카미 교회야말로 神의 제단에 바칠만한 유일하고 고결한 어린 양이지 않았나요? 이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금후 다시 전화(戰禍)를 입을 번한 수천만의 사람들이 구원되었습니다.”는, ‘유일한 번제인 우라카미가 피폭(희생)되었기 때문에 금후 다시 전화(戰禍)를 입을 번한 수천만의 사람들이 구원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핵무기 투하가 미국병사ㆍ일본 시민의 수많은 목숨을 살렸다’는 미국인들 대다수의 생각, 미국 주류 교회의 핵무기 투하 정당론을 옹호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바,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논리이다. 이는, 전 세계의 피폭자ㆍ피폭 2세ㆍ피폭단체ㆍ반핵평화운동 진영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반(反)평화적인 논리이다. ‘분노하는 히로시마’뿐 아니라 ‘기도하는 나가사키’로부터도 비판받을만한 논리이다. 
 

  9. “패전을 모르고 세상을 떠난 복(福) 받은 분들이여!! 결백한 어린 양으로 神의 가슴에 고이 잠든 영혼의 영광이여! 그에 비하여 비참한 우리 살아 있는 무리들...왜 우리들만이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죄인(罪人)이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자기들 죄(罪)의 깊이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죄를 씻지 못하여 남아 있습니다...이 크고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 나갈 고난의 길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죄를 씻는 기회를 주는 희망의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는, ‘번제로 선택된 피폭 사망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므로 복 받은 분들이지만, 죄를 씻지 못한 피폭 생존자들은 비참하다’며 양자를 대비한 문구이다. 번제설의 원죄-속죄-번제의 3각 관계를 극적으로 대비시킨 문구이다. 피폭ㆍ패전 이후의 일본인의 고난이 죄를 씻는 기회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10. “우라카미가 뽑혀 제단에 오르게 된 것을 감사드리나이다. 이 귀중한 희생으로써 세계에 평화가 다시 오고 일본에 신앙의 자유가 허가된 것을 감사드리나이다.”는, 조사(原子爆彈 死者 合同 弔辭)의 결론 부분에서 번제설을 평화와 연결시킨 문구이다.


 ‘우라카미가 희생양이 됨으로써 세계평화가 다시 온다’는, 번제-평화관(희생양을 통한 평화창출)을 드러낸 부분으로 자학적이다. ‘마조히즘(masochism)의 평화관’이다. ‘자학’ 속에도 폭력의 요소가 있으므로, ‘자학적인 폭력의 요소가 역설적으로 내포된 평화관’이다.


이러한 나가이 다카시의 평화관은, ‘분노하는 히로시마’형 반핵평화운동의 평화관과 상반된다. 우라카미ㆍ피폭자를 자학적으로 번제로 삼아야 평화가 도래한다는 ‘마조히즘의 평화관’이,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평화관(하나님 나라의 평화ㆍ예수의 평화)과 어울릴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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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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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永井隆 지음, 이승택 옮김『長崎의 鐘』(서울, 삼일출판사, 1949)
* 아베 마사오「원죄와 카르마(業)」『多寶』11호(1994년 가을)
* 최종호「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섭리사상에 관한 연구」『文化傳統論集』(경성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특별호 1집(2003.12)
* 송선영「종교적 삶에서 비의도적 죄지음의 문제」『佛敎硏究』25 (20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