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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종교적인 접근

핵무기와 神 (10)-부락(部落)민 피폭의 이중 구조

김승국


Ⅰ. ‘부락(部落)’의 탄생 배경, 부락민(部落民)의 생활


17세기에 시작된 토쿠가와(德川) 막부정권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무사 중심의 신분제도를 확립시켰다. 이 신분제도의 범위 밖에는 에타(穢多), 히닌(非人) 등의 천민이 존재하였는데, 막부는 이들을 일반 백성과 구별하여 근세 봉건사회의 최하위 계급으로 고정시켰다. 이렇게 천민신분의 사람들을 사회에서 격리된 특정 지역에 거주시키고 직업을 제한시키는 과정에서 ‘부락’이 출현하였던 것이다.(이남경, 7)


일본 근세의 천민은, ‘穢多’, ‘非人’ 및 이 양자에 명확히 속할 수 없는 ‘잡종 천민’의 3종류로 크게 구별된다.
① 穢多; 가죽세공ㆍ도살을 직업으로 하는 계통의 천민. 전국(全國) 시대의 말기에 군수품으로서 피혁이 중시됨에 따라서, 성(城)밑 변두리에 모여 특수한 집락(集落)을 만들고 피혁 전매(專賣)의 특권을 받아 제혁(製革)일에 종사하였다. 이 밖에 옥지기ㆍ간수ㆍ죄인 처벌 등의 일에도 종사하였다. 穢多는 태어나면서부터 얻는 신분으로, 결코 평민이 될 수 없었으며 생활에서도 심하게 차별받았다.   
② 非人; 근세의 非人은 거지ㆍ걸인의 무리로 포비인(抱非人)과 야비인(野非人)을 구별하고 있었다. 전자는 非人 인별장(人別帳)에 기재되어 비인두(非人頭)의 지배를 받으며, 후자는 무숙부랑(無宿浮浪)의 者[잠잘데 없는 자]를 말한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非人이 된 자, 범죄로 인하여 非人이 된 者, 빈곤 때문에 거지가 된 평민출신의 者 등 3종류가 있으며, 평민출신인 자는 천민신분을 탈피할 수 있었다.
③ 잡종 천민; 잡다한 예능적(藝能的)인 무리가 이 종류에 속한다. 穢多보다 천시의 정도는 엷었을 것이다.(오민경, 7~8)


에타(穢多)는 ‘심하게 더럽혀 있는 자’, 히닌(非人)은 ‘인간이 아닌 자’이다. 한국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개ㆍ돼지만도 못한 놈’이 非人으로서 조선시대의 백정과 비슷하거나 더 처참한 차별을 받았던 것같다. 조선시대의 백정이나 인도의 수드라 계급이 마을 밖에서 집단거주하며 살았듯이 일본의 穢多ㆍ非人이 집단거주한 곳을 ‘部落’이라고 불렀다. ‘우리 부락’처럼 일반명사로서 쓰이는 ‘부락’이 아니라 穢多ㆍ非人이 사는 특수한 거주지를 ‘部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部落에도 해방의 물결이 일어났다. 1868년 토쿠가와 정부를 붕괴시키고 메이지(明治) 정부가 출현하면서, 신정부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봉건 신분제도를 폐지시켰다. 더욱이 1871년에는 ‘에타, 히닌 등의 칭호를 폐지하고 금후에는 신분도 직업도 평민과 동등해야 한다’는 내용의 ‘해방령(解放令)’을 공포하여 부락민을 법률적으로 해방시키기에 이르렀다.(이남경, 7)


그러나 이 해방령은 서면상(書面上)의 해방에 지나지 않았다. 明治[메이지]정부의 새로운 신분제도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내세웠지만, 천황(天皇)과 황족(皇族), 화족(華族; 舊 公家와 다이묘), 사족(士族; 무사)의 특권신분을 설치함으로써 인간평등을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구(舊) 천민신분이 평민으로 바뀌었음은 그들이 납세, 병역, 의무교육 등 기타의 의무를 평민과 같이 부담하게 되고, 그때까지 신분과 결부되어 누리고 있던 피혁업(皮革業) 등 기타 수공업에 대한 독점권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 생활에서는 직업의 자유와 주거의 자유 없이 여전히 옛날 신분과 연결된 특정한 주거지와 수공업에 얽매어 차별, 천시(賤視) 되었다. 법제상(法制上)으로 봉건적 신분은 없어졌지만, 본질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천황, 황족이라는 초(超)인간적인 신분과 화족(華族)신분이 있는 한 그 반대쪽에는 천민 신분이 사실상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경제적 특권이었던 세습의 직업도 빼앗기고, 아무런 보장도 얻지 못한채 근대사회에 영입되어, 빈곤과 차별의 비참한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직업도 신분차별 때문에 한정되어, 생존을 위해 세인(世人)들이 싫어하는 업종에 종사하였다. 고용주는 이런 점을 악용하여, 부락민(部落民)을 낮은 노동조건으로 고용하였다. 부락 노동자(部落 勞動者)는 위험과 장시간의 싼 임금으로, 게다가 일반 노동자들로부터 멸시당하고 소외당하면서 일하였다.(오민경, 9~10)


제도상으로 봉건적 신분은 사라졌지만, 부락민은 ‘신평민(新平民)’이나 ‘신민(新民)’이라는 새로운 차별용어로 불려졌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오히려 강화되어 갔다. 1872년에 정부는 새로운 호적인 임신호적(壬申戶籍)을 만들었다. 이 호적에는 부락민이 ‘신평민’(해방령으로 새로이 평민이 되었다는 뜻), ‘특수 부락민’(부락민을 특수한 인종으로 보는 의미가 담겨 있음) 등의 천칭(賤稱)으로 기재되어 있어 부락 출신인지의 여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부락민은 그들의 신분을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었다. 이 호적은 결혼, 취직에 있어 악용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당시 부락차별이 생활의 모든 방면에 확산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이남경, 8)


1935년의 부락 인구분포에 관한 표(이남경, 10~11)를 보면, 부락민은 일본 전체 인구의 1.45%로서 1백만 명 정도이었다(부락민 조사에 응한 사람들이 1백만명이고, 조사에 응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며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부락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백만명의 부락민 중 효고(兵庫)에 128,963명이, 오사카(大阪)에 104,375명이, 후쿠오카(福岡)에 71,891명이 살았다. 이들 대도시로 모여든 부락민은 도시 변두리에 새로운 부락을 형성하여 거주하였고, 兵庫ㆍ大阪ㆍ福岡 일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도시부락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당시 부락민의 도시집중 현상에 대한 요인으로, 농촌의 경제사정이 어려운 가운데 대도시에는 광범위한 피혁산업이 존재하였고 노역과 잡업 등에 종사할 수 있는 기회가 농촌보다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이남경, 12~13).


Ⅱ. 켜켜이 고난 받은 나가사키 부락민들


부락민은 태어날 때부터 ‘穢多’ 또는 ‘非人’으로 불리는 ‘원초적인 차별’을 받았다. 1백만명의 부락민 모두가 원초적인 차별을 받은 것이다. 이 원초적인 차별은 인간으로 태어나자마자 맨처음 당하는 고난인데, 부락민의 삶의 조건에 따라 제2차ㆍ제3차의 고난을 수 없이 겪었다. 제아무리 훌륭한 신랑ㆍ신부감도 ‘부락민’이라는 딱지 하나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 제아무리 훌륭한 인재일지라도 ‘부락민’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취직을 하지 못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신랑ㆍ신부감의 인간적인 정체성(identity)을 파악하기 위해 열람한 호적에 ‘신평민’ ‘특수 부락민’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면 혼사(婚事)가 성립되지 않았다. 회사에 취직하기 위하여 제출한 호적초본에 ‘신평민’ ‘특수 부락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취직이 안 되었다.


이렇게 억울한 사정을 ‘제2차 고난’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제2차 고난을 겪고 있던 나가사키 시민들 중에 피폭이라는 고난을 받은 분들은 제3차 고난을 겪은 것이다. 만약 제3차 고난을 겪은 나가사키의 부락민 피폭자들 중에, 신앙 문제 즉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핍박 받다가 피폭 당한 분이 있다면 그분은 제4차의 고난을 겪은 것이다. 이처럼 켜켜이 고난을 받은 현상을 ‘고난의 중층화(重層化)’로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면 고난의 중층화를 겪은 나가사키의 피폭 부락민에 대하여 설명한다.


  1. 나가사키의 피폭 부락민


1935년의 부락 인구분포에 관한 표(이남경, 10~11)를 보면, 당시 나가사키 지역에 거주하던 부락민이 3,189명으로 나가사키 전체 인구의 0.25%를 차지했다.


원폭투하 직전에 나가사키 폭심지에서 1.2㎞ 떨어진 우라카미(浦上)에 1,000여명(약 220세대)의 피차별 부락민이 살고 있었다.(高橋眞司, 153)


이들 우라카미 부락(浦上部落)의 주민들 대부분이 피폭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폭된 부락민의 ‘고난의 중층화’는, 같은 우라카미 마을에서 피폭된 가톨릭 신자들의 ‘고난의 중층화’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비슷하다’는 말은 두가지 뜻을 지닌다; ① ‘고난의 횡적인 연계’를 뜻하며, 고난의 횡적 연계는 ‘삶의 연계’라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삶의 터전ㆍ생존공간의 동일성(같은 우라카미 마을에서 살았다)이 피폭의 동일성을 낳았기 때문이다. ② 가톨릭 신자와 부락민이 이산(離散; diaspora)의 아픔을 유사하게 경험했다. 나가사키(우라카미)의 잠복 기독교 신자 3,400명이 메이지 정부의 명령에 따라 서일본(西日本) 각지로 유배된 diaspora(유배지에서 6백여 명이 사망)와 ‘나가사키 부락민의 세차례의 diaspora(離散) 경험’이 비슷하다. 


폭심지의 지척에 있는 우라카미에서, 차별받는 부락민과 차별받는 가톨릭 신자가 어울려 살았기 때문에 피폭을 함께 당한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과 부락민이 어울려 살았다는 것은, 피차별 부락이 ‘시간적인 공존’을 하면서 탄압ㆍ차별(탄압ㆍ차별의 유형은 다르지만)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가톨릭 신자들와 부락민이 동일하게 에도 막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시대적인 공존’을 했다. ‘공존’이란 애증이 뒤섞이는 공존이다. 가톨릭 신자들과 부락민이 어울려 살았기 때문에 애증이 교차했다. 그러면 ‘애증(愛憎)’의 ‘증(憎; 서로 증오함)’을 먼저 기술한 뒤 ‘애(愛; 애호감정)’를 뒤이어 설명한다.


    1) 憎; 가톨릭 신자와 부락민의 상호 난투(亂鬪)


에도 막부의 지배층은 같은 지역에 사는 가톨릭 신자들과 부락민들을 분할통치(divide and rule)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즉 불교ㆍ신도(神道)에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감시하는 스파이 역할,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는 역할을 부락민에게 맡겼다.
 

1791년 이후 네차례의 기리스탄(가톨릭 신자) 탄압이 있었다. 나가사키 현에 있던 60개의 피차별 부락은 모두 기리스탄 탄압의 앞잡이ㆍ밀정(密偵) 역할로 배치되었다.『浦上切支丹史』라는 책에 ① 가톨릭 신자들의 부락민에 대한 증오 ② 부락민을 증오했던 가톨릭 신자들이 부락민에 복수극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톨릭 신자와 부락민이라는 ‘동일하게 차별받는 피차별 동지들’이 피(血)로써 피(血)을 씻는 상호 혈투(상호 난투)는 지배자들이 가장 원했던 장면이다.(長崎県部落史硏究所, 10~12)


(서로 뭉쳐서 지배계급에 저항하며 차별철폐 운동을 전개해야 할 상황에 있던) 가톨릭 신자와 부락민 사이의 증오심이 양자의 분리ㆍ분할로 이어져, 지배계급이 통치하기에 좋은 상황을 조성했다.


    2) 愛; 기독교 신자가 된 부락민들


나가사키에서 짐승가죽을 벗기거나, 감옥의 보초를 서거나, 사형 당한 사람을 묶어서 끌고 오는 일을 하던 피차별 부락민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 기독교 박해에 저항했다.(高橋眞司, 157)


위의 글은, 나가사키의 부락민이 가톨릭 신자가 되어 기독교 박해에 저항한 사실만 단순하게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 무슨 이유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지역인 神奈県의 八王子의 부락민이 기독교 교인이 된 사례를 다루는 沼謙吉의 논문「部落解放運動の先驅け」『歷史評論』125(1961.1)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明治9년(1876년)에 神奈県 八王子의 부락(현재는 동경시내로 편입된 지역임)에 살고 있던 두명의 청년 山上卓樹와 山口重兵衛가 요코하마의 山手교회에서 Testvuide 신부(프랑스인)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 부락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이 두사람이 가톨릭을 부락에 도입한 이유는, ‘신(神)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톨릭의 철학과 비인(非人)ㆍ천민 취급을 당했던 부락민들의 원망(願望)이 기적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부락민들이 요구했던 평등이 단지 종교적인 단계에 머물렀다면 가톨릭으로의 귀의했다는 사실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山上卓樹ㆍ山口重兵衛이 종교적인 평등관에서 더 나아가 정치적인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자유당(自由黨)에 입당한 뒤 부락민들을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쪽으로 유도했다.


가톨릭의 사해동포(四海同胞)ㆍ인간평등 사상에 심취한 부락민들이 일본의 수도인 동경지역에서 버젓이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은 나가사키 지역에도 해당될 것이다. 나가사키는 가톨릭 신앙의 본거지이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부락민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불교ㆍ신도(神道)를 믿는 경향이 강했던 부락민들 사이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흐름’이 형성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난의 중층화’라는 질곡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톨릭 신앙에서 찾았을지 모른다.


이는 부락민들의 역할(‘불교ㆍ神道에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감시의 대상인 가톨릭 신자들을 사랑하고 기독교를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불교ㆍ神道에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감시하라는 지배자의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 된 부락민들의 결단 속에, 지배층에 대한 저항의 배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부락민과 가톨릭 신자를 분리시켜 통치(분할통치)하려는 지배계급의 전략에 대한 저항이다. 저항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 동일한 ‘고난의 중층화’를 겪고 있던 부락민과 가톨릭 신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지배층의 분할통치 전략에 저항했어야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부락민ㆍ가톨릭 신자들이 증오의 난투극을 벌이며 지배층이 보기에 가장 바람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지배층이 보기에 바람직한 행동’에서 ‘하나님이 보기에 바람직한 행동’으로 이행한 어린양이, 가톨릭 신앙을 선택한 부락민들이다. 이들 부락민 어린양들이 끝내 (우라카미라는 가톨릭 신앙의 메카에서)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피폭 당한 점, 두 유형(가톨릭 신자ㆍ부락민)의 어린양들이 원폭의 희생양이 되는 ‘고난의 중층화’를 공동경험ㆍ공유한 점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Ⅲ. 또 다른 수난자들


 ‘고난의 중층화’ 속에서 핵무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ㆍ부락민에 그치지 않는다. 나가사키에 강제로 끌려와 혹사당했던 조선인ㆍ중국인들이 피폭되어 사망한 비극도 언급해야하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조선인ㆍ중국인와 같은 소수자(少數者; minority)는 민족적 차원의 피폭에 해당되지만, 인도주의 차원의 피폭을 거론할만한 소수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나병(癩病; 한센 병) 환자들이다.         
   

1945년 8월 피폭 당시 일본 전국에 11개 이상의 장소에 ‘나자로 병원’이라는 나병 시설이 있었는데, 이 시설은 기독교가 박해당할 때 선교사ㆍ기독교 신자들이 숨어 사는 집으로 이용되었다.(高橋眞司, 158) 선교사ㆍ기독교 신자들을 추격하던 지배층의 감시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곳이 나병 시설이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지명수배자들의 확실한 은신처가 나병 시설이었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 시설은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있기 때문에 은신처로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쫓기던 선교사ㆍ기독교 신자를 받아들인 나병 환자들이 기독교의 감화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1623년 에도(江戶)에서 기독교 신자 50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모두 나병환자이었다. 나가사키에도 나병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에도에서와 비슷하게 나병환자들이 가톨릭 신자가 된 사례가 있었을 것이다. 나가사키의 경우 불행하게도 피폭을 받은 바, 가톨릭 신자가 된 나병환자들 역시 피폭이라는 고난을 당했을 것이다. 나병이라는 끔찍한 병을 앓는 제1차적 고난 위에 피폭이라는 고난이 겹쳐진 ‘고난의 중층화’를 이들도 겪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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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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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오민경「일본의 부락해방 운동에 관한 연구」(한국외국어 대학원 석사논문, 1995)
* 이남경「1920-1930년대 일본 ‘部落’ 여성의 생활과 의식에 관한 연구」(부산대 석사논문, 2004)
* 沼謙吉「部落解放運動の先驅け」『歷史評論』125(1961.1)
* 高橋眞司 외 엮음『ナガサキから平和學する!』(京都, 法律文化社, 2009)
* 長崎県部落史硏究所 엮음『ふるさとは一瞬に消えた』(大阪, 解放出版社, 1995)
* 黑川みどり 편저『部落史硏究からの發信』第2卷 (大阪, 解放出版社,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