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화연구(이론)-평화학/평화 만들기의 대안

'잘사는 평화'의 지평

김승국

플라톤(Platon)의 저서 크리톤 의 대화 중에 소크라테스가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어 “ ‘잘’이란 ‘아름답게’라든가 ‘올바르게’라든가와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잘 산다’의 ‘잘’을 ‘아름답게’ ‘올바르게’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잘’이란 결국 ‘올바르게’요 ‘잘 산다’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에서 ‘잘 산다’는 것은 돈이나 신체나 세상의 평판이나 지위에 머리를 쓰지 않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기의 영혼, 즉 정신을 가장 좋은 것, 가장 훌륭한 것이 되게 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최명관, 1971, 40․43)

소크라테스(Socrates)가 말하듯이 ‘잘 사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 즉 정의롭게 사는 것(義로운 삶)이요, 자신의 영혼(이성)을 가장 훌륭한 것이 되도록 정화하는 일이다. 정의롭게 살면서 이성을 정화하는 일은 평화로운 삶을 예약한다. ‘잘사는 평화’를 예약한다. 개인만 ‘잘사는 평화’를 누리지 않고 사회 공동체와 더불어 ‘잘사는 것’이 될 때 사회의 평화가 이룩될 것이다.

‘사회 공동체와 더불어 잘사는 평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하게 요청되어 왔다. 그럼 먼저 동양의 ‘잘사는 평화’를 살펴본 다음에 서양의 ‘잘사는 평화’에 접근해 본다.

Ⅰ. 동양의 ‘잘사는 평화’

동양에서 ‘잘사는 평화’의 핵심은 천(天)-지(地)-인(人)의 조화에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동양 고대의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군사 지향적인 사회, 군사 지향적인 사회 구성체(군사 구성체)이어서 ‘잘사는 평화’를 전혀 보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군사 구성체를 ‘평화 구성체’로 전환하는 일이 춘추전국 시대의 가장 큰 ‘평화의 과제’이었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하여 중국 고대의 성현들<공자(孔子)․맹자(孟子)․노자(老子)․장자(莊子)․묵자(墨子) 등>이 ‘평화 지향적인 사회 구성체(평화 구성체)의 대안’을 내놓음으로써 ‘잘사는 평화’의 상(像)을 제시했다.

  1. 공자 ․ 묵자 ․ 노자의 ‘잘사는 평화’

춘추전국 시대 5백 년간은 제후들이 군웅할거하며 쟁패하는 전쟁의 시대였다.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 지배계급의 착취, 민중의 굶주림으로 점철된 말세이었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난세에 민중들은 전쟁과 착취로 유랑민이 되어, 도둑이 되지 않으면 자식과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비참한 처지였다.

민중이 소망하는 태평성세란 ‘전쟁의 주동자인’ 임금이 누구인지 모르고 아무 간섭 없이 농사짓고 우물 파서 등 따습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풍년이 들면 태평성세를 기뻐하며 격양가(擊壤歌)를 부른다. ‘격양가’는 요임금 시절의 태평성세에 민중이 부른 노래로 인류의 오랜 소망인 무치(無治)의 사회, 즉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열망한 것이다. 전쟁이 지긋지긋하여 ‘격양가’를 부르며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던 민중들. 이들의 희망을 담아 ‘평화의 담론’을 제시한 성현들의 말씀을 중심으로, 춘추전국 시대 당시의 ‘잘사는 평화 구성체’론에 접근한다.

    1) 유가의 의전론(義戰論)

공자는 전쟁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제후들 간의 겸병전쟁이나 제후국 내의 소자치국(附庸)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병합하는 전쟁을 반대하는 ‘의로운 전쟁(義戰)’론을 펼쳤다. 그는 제후들이 천자를 무시하고 주례를 범하는 무례를 한탄했을 뿐, 영일 없는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전쟁터에서 죽어 가고 있으며, 전쟁비용 때문에 굶어 죽고 얼어 죽는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맹자도 공자의 ‘반(反)패도주의로서의 의전론’을 계승하면서 제후들의 겸병전쟁을 반대한다.

    2) 묵자의 ‘겸애(兼愛)-비공(非攻)’

묵자(墨子)의 평화 지향적인 가치관으로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들 수 있다. ‘겸애․교리’는 천하의 해(害)를 물리치고 이(利)를 일으키기 위한 최대 강령이었다. 그것만이 인류 모두가 서로의 이익을 옹호해 줌으로써 복지 증진을 기대할 길이라고 묵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비공’은 침략전쟁이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특히 민중의 이익과 상치되는 침략전쟁은 불의(不義)이다.

    3) 노자의 무위(無爲)정치 ․ 소국과민(小國寡民)

노자는 ‘부쟁(不爭)’을 자기 삶의 방식으로 결정하였다. 노자가 제시한 ‘부쟁’의 전술에 따르면, ‘불감위주 이위객(不敢爲主, 而爲客)’해야 한다. 이 말을 의역하면 ‘주동의 위치에 절대로 서지 말고 수동의 자세를 취하라. 먼저 도발해서는 안 되며 침공에 대한 방어만이 할 일이다.’는 뜻이다. 전쟁은 인간 최대의 작위(作爲)이다. 노자는 처음부터 전쟁을 부정한다. ‘무위(無爲)’라야만 능히 ‘무불치(無不治)’할 수 있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은 노자가 그리던 이상적 정치 형태이다. 옛날(夏․殷)에는 나라 수가 3천을 넘었던 것이 춘추(春秋) 시대에 들어와 백 수십국으로 줄고 다시 전국(戰國) 시기는 7대(七大) 강국으로 병합되었는데 모두 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같은 전쟁을 통한 약소국 병합, 즉 겸병(兼倂)전쟁을, 노자는 철저하게 반대했다.

  2. 대동사회(大同社會)-소강사회(小康社會)

중국 성현들의 평화의 담론이 비록 ‘의전론(공자․맹자)’ ‘非戰論(묵자)’ ‘반전론(노자․장자)’으로 갈리지만, 모두 전쟁이 없는 태평성세를 꿈꾼다. ‘태평성세’의 어원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최초로 보이는 이상사회로서의 ‘대동(大同)’이다. 이때의 ‘동(同)’은 ‘평(平)’과 ‘화(和)’의 뜻이며 대동사회는 평등․평화사회를 의미한다.

    1) 묵자의 대동(大同)-안생생(安生生) 사회

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는 인민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난세였다. 그의 이상사회는 전쟁이 없고 생명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천하에 남이 없는(天下無人)’ 안생생 대동사회(安生生 大同社會)이었다. ‘천하무인의 안생생 대동사회’는 묵자의 ‘잘사는 평화 구성체’이었다.

    2) 유가의 소강사회(小康社會)

예기(禮記)를 편찬한 유향(劉向)은 요순(堯舜) 시대를 대동(大同)으로, 우(禹), 탕(蕩), 문(文)․무(武)․주공(周公)의 삼대(三代)를 ‘예치(禮治)의 소강사회’로 규정한다. 요순의 대동 시대에는 대도(大道)가 이루어졌으나, 삼대에 이르러 대도가 이미 쇠미해졌다. 유향은 요순의 평화 공동체가 존재했던 시기를 대동 시대로, 삼왕(三王)의 신분차별이 요구되는 예치사회가 존재했던 시기를 소강 시대로 구분했다.

이처럼 유향 등의 유가들은 예기 의 역사 발전 단계를 ‘대동사회→소강사회의 이행’으로 본다. 유가의 이상사회는 천하를 일가(一家)처럼 생각하는 소강사회이며, 이 소강사회는 효제(孝悌)를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삼는 사회이며, 그리고 효를 인간 일반과 국가에까지 확장한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천자의 전쟁은 인정했다. ‘소강사회를 저해하는 패도주의’를 정벌하는 전쟁, 이러한 정벌전쟁을 일으키는 천자의 부국강병을 인정하였다. 맹자 역시 폭군방벌(暴君放伐)을 주창했다. 천자가 제후를 징계하는 정치행위로서의 전쟁이 정의의 전쟁(義戰)이며, 이러한 의전이 ‘소강사회에서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평화의 길’이라고 강조
했다.

    3) 노자 ․ 장자의 ‘잘사는 평화 구성체’

노자는 전국통일(戰國統一)을 지향하는 ‘유가․법가의 부국강병에 의한 대국주의(大國主義)’에 반대하면서 ‘소국과민’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소국과민’은 “隣國相望鷄犬之聲相聞, 甘其食, 美其服, 安其俗, 樂其居(이웃 나라의 닭과 개의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는 지경이다. 王은 백성들에게 그 고을의 음식을 달게 여기게 하고, 자기 고을의 복장을 아름답게 여기게 하며, 그 풍속을 편안하게 하고, 그들의 주거지를 즐기도록 해 준다.)”에 함축되어 있다. ‘隣國相望鷄犬之聲相聞, 甘其食, 美其服, 安其俗, 樂其居’의 ‘잘사는 평화 구성체’는 현대인에게도 공명(共鳴)이 있다.

Ⅱ. 서양의 ‘잘사는 평화’

  1. 기독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 11:6∼8)는, ‘잘사는 평화’의 목가적인 표현이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주고 오 리를 가려거든 십 리까지 가주라.”(마태복음 5:38∼42)는 예수님의 비폭력주의에서 ‘잘사는 평화’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2. 마르크스(Karl Marx)

    1) ‘자유인의 연합’에 의한 Assoziation(association)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인(自由人)들의 연합’,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結社), 즉 ‘Assoziation’은 평화의 담지자이다. 마르크스의 저작 곳곳에 산재해 있는 ‘Assoziation’은, 그 문맥에 따라 ‘협동하는 일, 협동조합, 협동생활, 협동단체, 협동관계, 공동조합, 공동적 결합, 공동사회, 결합, 결합사회, 결합체, 집단 결합, 연합, 연합사회, 연합체, 결사, 협회, 조합, 연대, 단체’를 뜻한다. ‘Assoziation’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평화로운 사회 상태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Assoziation’은 마르크스의 ‘평화’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며, 마르크스의 ‘평화’를 이끄는 담지자이다.

    2) 노동과 평화

마르크스에 따르면 “아무도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자신을 도야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냥꾼, 어부, 목동 혹은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곧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
을 할 수 있게 된다.” ( 독일 이데올로기 ) 이것이 목가적(牧歌的) 사회분업에 입각한 마르크스 평화론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마르크스는 “각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각 사람에게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라고 쓸 수 있다.”( 고타 강령 비판 )고 밝히면서, 공산주의에 의한 지고(至高)의 평화 상태를 예견한다. 협동적(協同的)인 부(富)가 샘처럼 분출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분업노동(특정한 직업)이라는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데, 그러한 노동이 아닌 필요에 따라 소비물자를 분배받는 사회가 가장 평화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이때의 ‘노동’은, 고한노동(苦汗勞動: 장시간 노동․저임금 노동 등 좋지 않은 조건 밑에서 자본가의 착취에 그대로 복종하며 반노예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성격을 불식할 수 없는 ‘labour’로부터, 제작․창작․창조활동 내지 유희의 뉘앙스를 포함한 ‘Work’로 탈바꿈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영구전쟁 상태에 있는(in ewigem Kriegszustand) 인류의 전사(前史)가 막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고한노동(labour)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구평화 상태에 있는(in ewigem Friedenszustand) 인류의 본사(本史: 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의 지양(Aufhebung der Arbeit)을 통하지 않고는 평화를 누릴 수 없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의 폐지’가 아닌 ‘소외된 노동의 지양(해방)’을 통하여 평화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게 마르크스의 ‘잘사는 평화’의 본령이다.

  3. 요한 갈퉁(Johan Galtung)

갈퉁의 ‘구조적 폭력’이란, 한 사회의 구조나 체제가 갖는 폭력성을 말하는데, 가령 한 노동자가 저임금의 구조 때문에 착취를 당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다면, 그는 이 사회로부터 구조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억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여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것은 구조적인 폭력에 의한 것이며, 실제로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땅이나 집이 없어서 굶주려 죽고, 영양실조로 죽게 되는 수천만의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폭력을 지양하는 게 갈퉁의 ‘잘사는 평화’의 핵심이다.

  4. 이반 일리치(Ivan Illich)

이반 일리치는 ‘citoyen(의식 있는 시민)’을 평화의 주체로 내세운다. ‘citoyen’은 사적 소유에 매달리는 일반적인 시민(citizen)과 달리 평화의 감수성이 높은 ‘의식 있는 시민’이다. 이반 일리치는 ‘citoyen 중심의 잘사는 평화 공동체’를 희망했으나, 현실은 이와 달리 ‘지구촌의 중심부는 평화롭게 보이나 주변부에 비평화(peacelessness)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일리치는 중심부의 평화와 주변부의 평화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Pax Economica(근대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평화)’와 ‘민중의 평화’를 대비하면서 ‘팍스 에코노미카’를 비판한다. 근대 자본주의적 ‘팍스 에코노미카’에 의한 ‘발전’ 개념과 평화의 개념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전’은, 필연적으로 민중의 평화를 희생시키는 가운데 ‘팍스 에코노미카’를 강요한다. ‘팍스 에코노미카’는 민중의 평화를 근원적으로 위협한다.

그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과 ‘고유한(vernacular) 노동’을 대비하는 가운데, 그림자 노동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갈망한다. 그는 주부의 가사노동으로 대표되는 ‘그림자 노동’을 예시한다. ‘그림자 노동’이란 비생산적․비상품적이라는 이유로 생산노동에 가려진,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는 만인이 ‘고유한(vernacular) 노동’을 즐기는 공생(conviviality)사회를 ‘잘사는 평화 구성체’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Ⅲ. 마무리하며

  1. 자립(Subsistence)의 ‘잘사는 평화’를 향하여

‘Subsistence’는, ‘자연 생태계의 속에서 인간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해가는 틀, 개인과 집단의 본래성을 발현시켜 유(類)로서 영속시키는 조건의 총체’이다.

전 세계의 대안경제․대안화폐․공동체 경제․지역자립경제 모델에서 Subsistence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간디․마르크스․아담 스미스․이반 일리치․폴라니(Polanyi)의 세계관에서 Subsistence의 이론적인 측면을 탐구할 수 있다. Subsistence 지향의 정치 경제학, 순환 경제학, 지역자립 경제학, 지속가능한 경제학에로의 ‘인식 틀(paradigm) 전환’을 통한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중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평화(지향의) 경제학’을 통하여 공생(共生)사회, 지역자립의 사회체제를 조성해야 한다. ‘Subsistence에 의한 평화의 틀(paradigm)’을 새로이 형성해야 한다.

  2. 아랫것들(Subaltern)이 없는 ‘잘사는 평화’를 바라며

사회 양극화의 하층에 속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실업자․도시빈민․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의 희생양인 농민이 ‘아랫것들(Subaltern)’에 해당된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Subaltern의 고난․구조적 폭력이 지양된 평등사회’를 요망한다. 양극화의 해소, 즉 Subaltern을 줄이는 것이 ‘잘사는 평화’의 경제적 덕목이다.

[참고 자료]
* 최명관 「‘잘 산다’는 것의 의미」, 숭전 대학교 논문집 제3집, 1971.
----------
*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286호에 실린 필자의 글「잘사는 평화 (1) (2007.7.22)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