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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평화 만들기의 대안

사회 구성체론과 평화

김승국

Ⅰ. ‘사회 구성체’의 개념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가 펴낸 {철학 대사전}(서울, 동녘, 1989)의 ‘사회 구성체’ 항목을 보면 ‘경제적 사회 구성체’와 같은 개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위의 [철학 대사전] 58쪽에 나오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뜻풀이는 다음과 같다: “특정한 역사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를 말한다. 사회 구성체라고도 한다.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는 개념은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 개념으로서 유물론이 사회와 역사에 적용됨으로써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천적인 사회생활의 과정 속에서 서로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는 물질적 관계와 이데올로기적 관계로 구분될 수 있는데, 유물론의 견해에 따르면 이때 물질적 관계(물질적 생산 및 재생산 과정에서 형성되는 생산관계)가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관계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그때그때의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규정한다. 하나의 사회 구성체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즉 그것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물질적 생산관계의 체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생산관계는 각기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상태에 상응하며, 또 이에 알맞은 정치적, 법적 상부 구조와 그 밖의 다른 관념, 제도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사회 구성체 개념에서 이론적, 방법론적으로 결정적인 핵심은 생산관계, 즉 사회의 경제적 구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적 관계들과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주목하면서도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1. 마르크스의 ‘경제적 사회 구성체’

‘경제적 사회 구성체(ökonomische Gesellschaftsformation)’라는 말은, 마르크스(Marx)가 {경제학 비판}의 1859년 1월의 서문 속에서 처음 사용했다:
“하나의 사회 구성체는 생산력에 있어서 발전의 여지가 없어질 때까지는 결코 몰락하지 않으며 또 새로운 보다 고도의 생산관계는 이 물질적인 존재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모태 내에서 완전히 부화할 때까지는 종래의 것에 의해 결코 대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 좀 더 정밀하게 고찰해 보면 알게 되겠지만 문제 자체는 그 해결의 물질적 조건이 이미 현존하든가 혹은 적어도 만들어지고 있든가 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발생하기 때문이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연속하는 [전진적] 시대로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들 수 있다.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는 개인의 사회적 생활조건으로부터 생기는 최후의 적대적 형태이다. … 그러므로 인간사회의 전사(前史)는 이 사회 구성체와 함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경제적 사회 구성체는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서 확실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의 경제적 구성체의 발전(devéloppment de la formation économique de la société)’라고 하는 것 이외에는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퇴케이, 1987, 187).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는 개념은, 이 시기보다 훨씬 전인 1849년에 펴낸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의 초고 중에서,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으로 유물론적 역사개념을 완성시켰던 서술 속에 나타난다. {독일 이데올로기} 제1부의 상당한 부분을 이미 세계사를 관통하는 급속한 과정에 할당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생산력의 발전정도와 소유관계, 즉 각 시대를 특징짓는 생산양식(Weise der Produktion)에 엄밀하게 기초하여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유물론적 역사개념에서 매우 중요한 생산양식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정확하게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한편으로 생산력(forces productives)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자주 사용되고 있으나 생산관계(rapports de production)라는 개념이 세련되게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자주 ‘교통관계(혹은 교통형태, rapports de commerce / Verkehrsverhältnisse / Verkehrsformen)’라는 개념 혹은 ‘소유형태(formes de propriété / Formen des Eigentums)’라는 개념으로 대용되고 있다(퇴케이, 1987, 183).

{독일 이데올로기}의 ‘교통형태’는 단순히 인간노동의 성과인 생산물의 교환에 머물지 않고 인간활동의 교환, 개인-사회집단-모든 나라들 사이의 물질적 ・정신적 교류, 즉 성(性) ・언어 ・전쟁 ・법률 ・세계시장 ・분업 등을 포함한 ‘생산관계’ 개념으로 발전한다. 전쟁이 교통형태의 한 종류라고 밝힌 {독일 이데올로기}는 폭력 ・약탈 등이 역사의 추진력임을 강조하면서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매개항’으로 폭력(전쟁)을 상정한다. 위의 교통형태를 ‘생산관계’로 대체할 수 있다면 생산력과 생산관계, 즉 생산양식과 폭력(전쟁)이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김승국, 1996, 14-15).

그러므로 생산양식과 폭력(전쟁)이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는 지점에서, 사회 구성체론과 평화 이론(담론)이 만날 수 있다.

2. 사회 구성체에 관한 다양한 견해

  1) 이진경의 견해

사회 구성체로서 한 사회를 인식한다 함은 무한의 구체적 제 현상 속에서 자의적으로 선택된 제 사실에 대한 주관적 이해나 현상나열적인 기계적 종합화와는 구별되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나름대로의’ 어떤 성질을 갖는 것으로 인식된 어떤 사회에 대해 “… 적 사회 구성체”라는, 마르크스가 서명한 딱지를 붙이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이진경, 1987, 38).

사회 구성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가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시사적으로 드러난다.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는 과학적인 개념은 한 사회를 동질적인 여러 현상과 과정들의 기계적 총합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사회적 유기체로 고찰할 수 있게 해주며, 역사적으로 구성된 생산양식의 토대 위에서 사회적인 여러 현상들을 유기적 통일과 상호작용 속에서 볼 수 있도록 해준다.”(김현수, 1985, 63)

사회 구성체로서 한 사회를 인식함은 개개의 특정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그 사회의 제 변화를 합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변화 및 발전 속에서 한 대상의 본질을 구체적 현상과의 통일 속에서 파악하고, 그 위에서 필연화하는 변화의 ‘현실성(Wirklichkeit)’을 포착함으로써, 그러한 ‘현실성의 담지자(Träger)’와 변혁대상의 본질 및 발전경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이진경, 1987, 39).

  2) 정성기의 견해

정성기 교수는, 2002년에 펴낸 {탈분단의 정치경제학과 사회구성}이라는 저서의 부제를 ‘사회 구성체 논쟁의 부활과 전진을 위하여’라고 붙였다. 정성기는 위의 저서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의 부제에 있는 ‘사회 구성체’ 개념과 달리, 제목에서는 ‘사회구성’이란 표현을 한 데 대하여 언급해 둘 중요한 논점이 있다. 맑스의 ‘social formation’ 혹은 ‘economic social formation’을 번역하여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 부르는 이 개념은 앞서 말한 대로 봉건 사회 구성체,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 사회주의 사회 구성체 등 조직적 지배체제를 의미한다. 이런 낡은 사회 구성체, 즉 낡은 ‘지배체제’의 위기 속에서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여러 ‘단위 사회’의 ‘해체’가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다. 서구적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 공동체 사회붕괴와 해체는 오래되었으며, 도시의 유례없는 은행과 대기업 등의 도산과 대량실업도 ‘사회 해체’의 한 양상이다. 이제는 인류사회의 변함없는 기본 단위인 혈연적 가족사회조차도 그 해체가 사상 유례 없이 급격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서구적 개인주의 ・자유주의에 기초한 근대 정당정치와 근대 시장경제의 전개, 발전 그 자체의 현재적 결과임은 명백하다. 이제 기존의 낡은 체제적 ‘social formation’을 뒤집고 다른 체제적 ‘social formation’으로 교체하는 체제 중심적 ‘혁명’이나, 뜯어고치는 ‘개혁’이 아니라,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생존 위기에 처한 개별인간들이 연관을 맺고, 사회 구성하기, 즉 ‘social forming’ 혹은 ‘forming human society’가 누구도, 어느 학문도 피할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새로 시작하는 사회 구성체 논쟁은 낡은 근대적 사회 구성체의 교체가 아니라, 탈근대, 탈자본주의, 탈사회주의, 그리고 아래로부터 ‘사회 만들기’를 전망한다는 점에서 새로움이 깃든 사회 구성체 논쟁이어야 한다.”(정성기, 2002, 11)

정성기는 이어 “본격적으로 사회 구성체 논쟁이 부활하고, 우리 시대의 절박한 [남북한 민중의] 생존위기를 넘어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실질적, 생산적 사회 구성체 논쟁의 부활과 전진 속에서 성실하게 바로잡을 것을 약속하며 소망한다.”라고 피력한다(정성기, 2002, 12).

필자는, 정성기 교수의 사회 구성체 논쟁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이루어지기 바란다. 특히 한반도 평화통일의 구체적인 로드맵과 관련하여 사회 구성체 논쟁이 부활되길 소망한다. 필자가 ‘한반도 평화 로드맵’의 보론으로 작성 중인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의 이행’ 논의가, 사회 구성체 논쟁에 조금만 불씨가 되길 희망한다. 필자는 이런 희망에 따라 사회 구성체 논쟁을 평화의 담론과 연결시키는 모험을 하고자 한다.

Ⅱ. 몇 가지의 모험

1. 하버마스 ・월러스틴 ・아민의 이론

이러한 지적 모험을 하는 데 하버마스(Habermas)의 소통행위 이론과 월러스틴(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에 입각한 사회 구성체론을 접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아민(Samir Amin)의 주변부 사회 구성체론도 조금 낡은 틀이지만 한반도에 적용 가능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의 지적 역량의 부족으로, 하버마스 ・월러스틴 ・아민의 사회 구성체론을, 필자의 관심사인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의 이행’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2. ‘잉여 없는 시장경제’로 평화통일을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 만들기는 ‘참선’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도’를 닦든지 누구나 자본주의를 심층적으로 해부하고, 실패한 혁명의 경험이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주체사상)를 피해 갈 수는 없다. 그 관문을 지나며 마르크스의 자연관, 인간관, 사회관, 혁명관 모두에 대해 점검하여 대안을 찾아야 이 야만적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넘어 진정으로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그런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앞서 논의에 비추어 인간과 사회의 모든 비리, 무리, 부조리를 포함한 불합리, 즉 잉여가 없는 사회이다. 그리고 개별 인간과 전체 사회 간에 어떤 차별적 가치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과 사회가 등가적(等價的)인 ‘각립대동(各立大同)’의 세상이다. ‘세상 만들기’는 … 모든 외적 강
제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기 위한 ‘자치(自治)’를 기본강령으로 삼는다. ‘자치’에 반하여 권력을 추구하며 국민을 지배 대상화하는 중앙 정부의 직업적인 ‘정치’와 ‘통치’는 없애야 한다. … 모든 영역의 잉여를 추구하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잉여 없는 시장경제, 삶을 위한 시장경제를 지향해야 한다. 이런 사회경제적 자치는 어디에서 실현할 것인가? 마르크스주의적 공장 ・노동 중심 현장관과 국가 중심 사고방식을 넘어서 생존기반인 지역적 공간의 삶의 현장 도처에서 ‘지역자치’를 이루어야 한다. 경제적 지역자치는 잉여 없는 공동체적 자치 실현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사업장 자치는 지식집약적 정보통신(IT) 벤처기업에서 흔히 보이는 바와 같이 노동자와 자본가,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이분법적 일터 문화를 넘어서 생산수단 소유자이건 비소유자이건 상이한 직분에 따라 일하는 존재이며,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공동으로 투자한 ‘동업자 사원’으로서 ‘분업적 협업하는 존재’라는 실체 현실에 합당한 객관적 상호 인식의 기반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전국 도처의 지역자치 사회가 연대하여 여러 단위 지역사회에 걸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이것은 자치기반 위에서 특정 지역주민이기도 하고 동시에 국민이기도 한 사회적 존재에 의한 국가 경영, 즉 경국(經國), 혹은 경세(經世)가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숙제로서, 생산수단의 소유문제도 새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해결해야 한다. 그 대강은 생산수단의 무차별적 국유화, 사회화가 아니라, 자연물인 ‘토지’에 대해서는 ‘공개념’을 전면적으로 심화, 확대하여 국민적 공동소유, 개별적 이용으로 하고, 제조업 등 생산수단에 대해서는 당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되 과세를 통하여 부의 세습제를 자연스럽게 폐지하는 등 합리적 정책이 남북통일에 대비해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정성기, 2002, 171-174)

3. 결국 소유의 문제

앞에서 정성기 교수가 언급하듯이 ‘잉여 없는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평화 지향적인 사회 구성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결국 소유 문제가 ‘사회구성체와 평화 담론’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이와 관련한 발상은, 강수돌의 {작은 풍요}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작은 풍요} 273~304쪽에 소개되는 아래의 공동체 소유는, 한반도가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로 이행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 사례 1: 자유로운 생산자 공동체(충북 제천시 백운면 운학2리 거문골 농장)
* 사례 2: 유기 순환적인 양계(경기도 화성군의 산안농장)
* 사례 3: 노동자가 주인 되기(경남 마산의 광동택시)
* 사례 4: 전 사원 주주제 회사(경남 충무시의 신아 조선)
* 사례 5: 노동자가 경영하는 작업장(경기도 고양시의 협성생산 공동체)
* 사례 6: 일용직 노동자들이 만든 자주 기업(1994년 6월에 일용직 26명이 각자 150만 원씩 출자하여 만든 ‘우리 건설’)
* 사례 7: 도농(都農) 공동체(경남 창녕군 남지읍의 ‘공생농 두레’)
* 사례 8: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학교(충남 홍성의 ‘풀무 학교’)
* 사례 9: 경남 산청군의 ‘간디학교’
* 사례 10: 전북 부안군에 있는 윤구병 교수의 실험학교
* 사례 11: 유기농 직거래 모임(전북 전주의 소비자와 변산 지역의 생산자가 손을 맞잡고 운영하는 ‘한울회’)
* 사례 12: 생산과 소비, 교육이 한데 어우러진 공동체 마을(충남 홍성군 홍동)
* 사례 13: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불교 공동체(전북 남원군의 실상사 마을)
* 사례 14: 미국의 애미쉬 공동체
* 사례 15: 지역 통화제(LETS: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
* 사례 16: 노동은행 구상
* 사례 17: 자율 ・자치의 사회 생태공동체
(200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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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강수돌 {작은 풍요}(서울, 이후, 1999).
* 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박사학위 논문, 1996).
* 김현수 편역 {정치경제학 에세이: 발전 도상국과 제국주의}(서울, 아침, 1985).
* 이진경 {사회 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서울, 아침, 1987).
* 정성기 {탈분단의 정치경제학과 사회구성}(서울, 한울, 2002).
* F. 퇴케이 지음, 김민지 옮김 {사회 구성체론}(서울, 이성과 현실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