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사경 (92)-安人•安百姓
김승국
앞에서 동양고전(특히 유학계통의 고전)에서 ‘人’은 지배계급을, ‘民’은 피지배계급을 뜻한다고 설명했는데, ‘人’의 평안 ‘安人’이라는 문구가 『論語』 「憲問」 44에 나온다. 이 문장에 나오는 ‘安百姓’ 역시 ‘安人’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지 현대어의 百姓(people)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安人’역시 지배계급의 평안•평화를 말하는 것이지, 피지배계급의 평안•평화인 ‘安民’과는 무관하다. ‘人’계급은 피지배계급의 평화(安民)에 무관심했다. 군왕을 비롯한 ‘人’계급이 ‘安民’을 언급했다면 정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아랫것들(民)을 끌어안으려는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聖恩은 피지배계급에 베풀겠다는 통치행위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된 자료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출처; 기세춘 『동양고전 바로 읽기』 56~58쪽).
“백성”이란 말은 지배적인 유력자 즉 이른바 ‘有志’들을 지칭한 것이지 人民 전체를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공자는 君子와 小人, 人과 民을 말할 뿐 “百姓”으로 호칭한 경우는 드물었다.
『논어』에서 “百姓”이라는 단어는 단 3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는 孔子의 말이고, 하나는 공자의 제자인 有子의 말이며, 하나는 湯王의 말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모두 “人”과 “民”은 지칭하는 대상이 다르게 사용되었다.
(論語/憲問44):
자로가 君子(官長)에 대해 물었다. 子路問君子 *君子=官長을 지칭함
공자: 자기를 수양하여 공경스럽고, 子曰 修己以敬 *以=猶而也. 至也 及也 爲也
자기를 수양하여 人(人君과 大人)들을 편안하게 한다. 修己以安人 *人=百姓보다 상위계급.
*옛 중국 학자들은 人을 “朋友九族”으로 해석했다.
*百姓(호족)보다 지위가 높은 성인 대인 귀인 등 인계급을 지칭한다.
자로: 그와 같이 하면 다 됩니까? 曰 如斯而已乎
공자: 자기를 수양하여 百姓(호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曰 修己以安百姓*百姓=豪族. 日本에서는 農民.
*여기서 백성은 莊園 또는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이나,
官吏로 공을 세워 王으로부터 姓氏을 하사받아 家門을 이룬 호족 등
세금을 내고 정사에 관여할 수 있는 지배계급을 지칭함.
(論語/顔淵9):
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 哀公問於有若曰
흉년이 들어 양식이 부족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年饑用不足 如之何
유약이 대답했다. 어찌 10분의 1 조세법을 쓰지 않습니까? 有若對曰 盍徹乎.
애공: 나로서는 10분의 2도 부족하거늘 어찌 철법을 쓰겠는가? 曰 二吾猶不足 如之何其徹也
유약이 대답했다. 對曰
百姓이 풍족하면 군주가 어찌 부족할 것이며, 百姓足 君孰與不足
백성이 부족하면 군주가 어찌 풍족하겠습니까? 百姓不足 君孰與足
***百姓=땅을 소유하여 세금을 내는 호족. 땅이 없는 民은 부역을 해야 함.
(論語/堯曰2): *이글은 書經/商書/湯誥를 인용한 것이다.
周나라는 큰 은혜를 받아 훌륭한 인재가 많습니다. 周有大賚 善人是富
비록 주나라의 친족이 있지만 어진 人才만은 못하고, 雖有周親 不如仁人
百姓(百官)에 잘못이 있다면 그 죄는 나 한 사람에 있습니다. 百姓有過 在予一人
도량형을 삼가며, 법도를 살피고 廢官을 수리하니, 勤權量 審法度 修廢官
사방에 정사가 행해졌습니다. 四方之政行焉
망한 나라를 일으키며,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興滅國 繼絶世
貴人이 몰락하여 숨어버린 民을 찾아 등용하니, 擧逸民
천하의 民이 마음을 돌렸습니다. 天下之民歸心焉
위 예문은 『論語』에 나오는 ‘百姓’이란 용례의 전부이다. 여기서 人과 百姓이란 용어의 용례를 살펴보자. 자로가 君子(고위공직자)에 대해 묻자 “군자는 修己하여 공경스러워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자로가 “그것이면 다 됩니까?” 라고 되묻자 “군자는 安人”해야 하며, 더 나아가 “安百姓”하라고 대답했다. 이 때 人과 百姓을 구분하여 말했는데 “人”은 支配階級을 뜻하고 “百姓”은 人 중에서 王으로부터 姓氏를 하사받은 소수의 호족세력을 지칭한 것이다. 이처럼 공자 당시는 人․民․百姓은 각각 지칭하는 대상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百姓”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書經』 <堯典>의 첫머리에서다. 여기서는 “百姓”은 百官을 지칭하고 “庶民”과 대칭시켰다.
(書經/虞書/堯典):
옛 황제이신 요임금을 상고해 보면, 曰若稽考帝堯
큰 덕을 밝히시어 구족을 화목하게 하셨고, 以親九族.
구족이 화목하니 百姓(백관)을 화목하고 밝게 하였으며, 九族旣睦 平章百姓 *平=和也. *百姓=百官族姓.
백관의 차례가 밝아지니 만방이 화목했으며, 百姓昭明 協和萬邦
庶民들도 착하게 교화되어 시절이 태평했다. 黎民於變時雍 *雍(옹)=和也
[中華大字典]에서도 百姓을 百官으로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百姓을 庶民으로 해석하게 된 것은 일본학자들을 베낀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왜곡된 책이 우리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으니 한심할 일이다.
(中華大字典/中華書局刊):
百姓은 百官이다. 百姓百官也*주: *書經/虞書/堯典의 <平章百姓>傳 참조.
경전의 해설을 보면 백성을 백관으로 훈독하였으며, 案經傳 百姓多訓百官
간혹 백성을 “왕의 친속”으로 훈독하기도 한다. 或王之親屬
후세에는 제멋대로 지어내어 “庶民”으로 해석했다. 後世乃專作庶民解
또 日本에서는 농부를 일러 백성이라고 말했다. 又日本謂農夫曰百姓
전국시대 문서인「荀子」에는 “人百姓”이란 말이 나타난다. 이것은 귀족 또는 官僚인 <人>과 장원을 가진 豪族을 합성한 말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市民權을 획득한 자를 통틀어 지칭한 말인 듯하다. 필자의 견해로는 순자가 “人百姓”이라고 굳이 표기한 것은 이때는 이미 전국시대였으므로 人이 아닌 民에게도 姓氏가 주어져 “民百姓”도 존재했으므로 이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荀子/王覇):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아끼지 않을 수 없도록 禮로서 제어한다. 上莫不致愛其下 而制之以禮.
그래서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赤子처럽 보살피는 것이다. 上之於下 如保赤子
정령과 제도는 아랫사람이 人百姓에 부합시키는 수단이다. 政令制度 所以接下之人百姓*接=合也會也
우리는 옛날부터 사람이면 누구나 성씨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나라는 7세기경 신라 왕실과 귀족들이 唐나라에서 姓씨 제도를 수입했고, 10세기경 高麗 태조가 지방호족들에게 姓氏를 하사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까지도 성씨를 가진 사람은 절반도 안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 日帝가 호적을 만들면서 온 국민이 성씨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2500년전 공자 당시의 百姓과 오늘날 우리가 쓰는 百姓은 그 뜻이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논어』』에서 人․民․百姓을 똑 같은 말로 번역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그런데도 우리학자들의 번역은 하나같이 이를 혼동하여 人․民․百姓을 똑 같은 글자로 오해하고 있다. 우리 학자들은 대체로 人과 民을 구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라(國)와 가문(家), 사신(社)과 직신(稷)을 구분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일언이폐지하여 지금 책방에 나와 있는 『논어』 번역서들은 모두 폐기처분되어야 마땅하다
4) 君子儒와 小人儒의 정치투쟁
① 孔子의 소망은 君子가 되는 것
△ 공자의 꿈은 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君子란 大夫이상의 관료를 지칭한다. 그는 계씨 가문의 말단 家臣으로 시작하여 魯나라 公室의 대부로 승진했으므로 군자의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꿈도 꾸지 못했던 영광을 얻었다. 그가 죽은지 500여년이 지나 素王으로 인정되어 聖人으로까지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어록인 『논어』라는 책은 小人을 배척하고 君子가 되기 위한 교과서라 할 수 있다. 『논어』는 맨 앞의 學而편 첫머리를 君子로 시작하여 맨 뒤의 堯曰편 끝머리를 君子로 끝낸다. 이처럼 『논어』는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목표로 하는 君子學이다.
그러므로 군자를 제대로 알아야 孔子와 『論語』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군자를 모르면 공자와 『논어』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과연 君子란 무엇인가? ‘天子’는 하늘의 소명을 받은 자이며, ‘君子’는 군주의 소명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논어』 맨 끝머리에서 이르기를 “天命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天命은 王權神授說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당연히 성왕을 받드는 높은 벼슬아치를 말하는 것이다. 즉 『논어』에서 말한 군자는 ‘安人’ 즉 지배계급을 편안하게 하고, 나아가 ‘安百姓’ 즉 호족들까지도 편안하게 하는 治者를 지칭한다. 다만 당시 관장은 民을 돌보는 ‘安民’의 책임이 없었다. 民은 가문의 대인들과 장원의 호족들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民을 돌보거나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는 대인과 호족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학문에는 자신 있지만 ‘군자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때 공자가 말한 군자는 학자가 아니라 관장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자공은 “군자의 과오는 일식과 월식과 같다”고 말했다. 이것은 고위 공직자인 군자의 행동은 그들을 고용한 귀족들과 그들의 녹봉을 지급할 세금을 내는 장원의 소유주인 호족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당시는 人(귀족)계급이며 호족들인 百姓만이 유권자들이므로 이들 유권자들의 감시와 심판을 기다리라는 뜻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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