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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종교적인 접근

핵무기와 神 (9)-우라카미(浦上) 피폭의 이중구조

김승국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개발한 핵무기가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 신앙 공동체 위에 떨어졌다.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원폭) 세례를 받은 피폭자들 중에서,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 등의 기독교인이 많았다. 원폭투하의 중심지는 松山町인데, 이곳은 기독교 금교령(禁敎令) 시대에 ‘7代 250년’에 걸쳐 신앙을 전해온 잠복 기독교 신자들이 살았던 우라카미(浦上)의 한 가운데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오랫동안의 박해를 견디며 우라카미 지역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를 유지해왔다. 우라카미 신앙 공동체의 핵심인 우라카미 천주당(성당)은 폭심지(핵무기가 떨어진 곳)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핵무기가 투하된 순간 이 성당에서 미사를 보던 수십 명의 신자들이 즉사했고, 우라카미 지역의 가톨릭 신자 12,000명 중 8,500명이 피폭으로 사망했다. 


우라카미의 기독교 신자들이 350년 동안 당한 ‘박해’ 위에 ‘피폭’이 겹치는 이중의 고난을 겪었다. 이러한 ‘고난의 이중구조’를 시간별로 나열하면, 첫 번째 고난이 박해이고 두 번째 고난이 피폭이다. 그러면 첫 번째 고난인 박해부터 설명한다.


Ⅰ.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박해


1549년에 예수회(종교개혁으로 흔들린 로마 교황의 권위 회복을 위해 1534년에 이그나티우스 드 로욜라 등이 창립한 가톨릭의 새로운 수도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드 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52) 신부를 포함한 세 명의 성직자들이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했다. 사비에르는 2년 반 뒤에 중국 선교를 위해 일본을 떠났지만, 이후 가톨릭은 나가사키(長崎)를 중심으로 주로 서(西)일본 지역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1580년에는 신자수 10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17세기 초엽에는 약45만 명에 이르는 큰 신앙집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박규태, 272)


1587년에 규슈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같은 해에 외국인 신부를 국외로 추방할 것을 명하고 다음 해인 1588년에는 나가사키와 모기 등을 직접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는 1597년 신부들을 포함한 외국인 6명, 일본인 크리스트교 신자 20명(총 26명)을 나가사키 니시자카(西坂) 언덕에 매달았다. 이것을 일본 26성인의 순교라고 부른다.(나가사키 평화추진 협회, 4)


당시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규슈 지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가톨릭 신자들을 ‘기리시탄’이라고 불렀다. 기리시탄은 크리스찬의 포르투갈 식 발음이며, 기리시탄을 한자음으로 옮겨 ‘切支丹’이라고 표기했다.


에도 막부의 압박에 의해 불교로 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쿠레(隱れ; 숨은) 크리스천[잠복 크리스천]이라 칭해지는 이들은 에도 막부의 권위 실추를 배경으로 다시금 공공연하게 신앙을 표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공공연한 신앙의 표명은 막부의 탄압을 불러 일으켰다.
에도 후기부터 메이지 초에 걸쳐 나가사키(長崎) 우라카미 지방에 사는 가쿠레((隱れ) 크리스천에 대해 총 4차례의 탄압이 가해졌다. 1차 탄압은 1790년 마을 사람들이 불상을 건립하는데 시주를 거부하여 ‘異宗(이종)’ 신앙자로 피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유야무야 끝났다. 2차 탄압은 1842년 밀고자에 의해 다수가 검거되었으나 나가사키 봉행소(奉行所)(주1)에 근무하는 益田士之助의 배려로 석방됨으로써 1차와 마찬가지로 큰 피해 없이 종료되었다. 제3차 탄압은 1856년 역시 밀고가 계기가 되어 다수의 유력 신도가 투옥되었고 帳方(總頭) 吉藏은 고문 때문에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나가사키 봉행소는 정통 크리스트와 다른 別宗(별종)으로 파악하여 ‘異宗一件’으로 판결(裁決)하였다. 만약 異宗이 아니라 막부가 ‘邪宗(사종)’으로 규정한 크리스천으로 판명되었다면 보다 혹독한 처형이 내려졌을 것이다. 4차 탄압이 이른바 ‘우라카미 요방 구즈레(浦上四番崩れ)’로 에도 막부 말기 1867년에 발발하였다. 신도들은 이전과 달리 더 이상 크리스천임을 숨기지 않았고 공공연히 寺請制(에도 막부의 불교 신자 등록제)를 거부하여 68명이 체포됨으로써 탄압의 막이 올랐다. 이제 막부는 더 이상 異宗이 아닌 邪宗으로 취급하여 신앙탄압에 나섰고 이에 불[프랑스]ㆍ영[영국] 등 외국 공사단이 항의함으로써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박수철, 309)


‘우라카미 요방 구즈레(浦上四番崩れ)’가 발생할 즈음인 1864년 12월 프랑스 사(寺)라 별칭되던 오우라(大浦) 천주당이 건립되었고 이에 대한 소식이 우라카미 크리스천에게 전해졌다.(박수철, 310)


드디어 1865년 3월 우라카미에 사는 기독교 신자 10명이 프랑스의 선교사를 찾아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의 후예로서 신앙을 견지해왔다고 전했다. 이 만남은 나중에 ‘우라카미 요방 구즈레(浦上四番崩れ)’라는 사건으로 발전한다. 개국이냐 양이(攘夷)냐를 놓고 일본 전체가 동요하고 있는 가운데, 이 사건은 막부를 경악시켰다. 그 당시 우라카미 촌(村)의 잠복 기독교 신자 3,400명은 메이지 정부의 손에 의해 서일본(西日本) 각지로 유배되었다. 1873년 기독교 신자의 금제(禁制)에 관한 포고가 철폐되기까지 개종을 강제하기 위한 고문 등에 의해 유배지에서 6백여 명이 사망하고, 9백 명이 개종 당했으며 두고 온 우라카미에는 사람이 없었으며 황무지로 되었다. 그러나 5년 뒤 되돌아온 사람들은 우라카미의 부흥을 위해 우라카미 山里村 庄屋의 자리를 사들여 천주교 교당의 건설에 착수했다. 우라카미 천주당은 20년의 세월을 소비한 뒤 1914년에 완성되었다.(高橋眞司, 2009, 160~161)


Ⅱ. 우라카미 신앙 공동체에 대한 이중적인 차별


우라카미 천주당은 마을의 중앙 언덕에 있고 위치도 좋아 250년간 계속된 신앙의 장소이었다. 1895년에 짓기 시작해 20년간의 근로봉사와 헌금활동에 의해 벽돌을 한 장씩, 한 장씩 쌓아올려 1914년 3월 당시로는 동양에서 가장 크고 6,000명이나 수용이 가능한 적벽돌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높이가 26미터나 되는 쌍탑이 생긴 것은 1925년인데 착공에서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 후, 원폭낙하 중심지에서 북동쪽으로 불과 500미터 지점에 있었던 우라카미 천주당을 원폭은 한순간에 파괴하고, 우라카미 신자 약 12,000명 중 8,500여명의 생명을 빼앗았으며 그 일대를 모조리 타버린 들판으로 변화시켜 버렸다.(나가사키 평화추진 협회, 13)


가톨릭 신자들이 믿었던 하나님의 권능도 핵무기의 위력 앞에서 보잘 것이 없었다. 천주당의 꼭대기에 있던 직경 5.5미터 무게 30톤의 종루(鐘樓) 돔이 핵폭풍에 의해 날아가 35미터 떨어진 흙더미 위에 곤두박였다. 천주당의 붉은 벽돌이 모두 무너졌는데 일부 남은 유벽(遺壁)이 폭심지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다. 천주당 앞뜰의 피폭된 성상(聖像), 원폭 자료관 내부의 피폭 성상(聖像)ㆍ묵주는, 하나님 나라와는 동떨어진 지옥도(地獄圖)를 보여주었다.


한순간에 핵무기 벼락을 맞은 우라카미 천주당은 가톨릭 신자들의 350년의 수난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이 건물이 핵무기에 의해 붕괴되었음은, 핵무기에 의한 두 번째의 수난을 잘 드러낸다. 지옥 같은 기독교 박해 속에서 끈질기게 신앙 공동체를 유지해온 가톨릭 신자들의 대다수가 피폭으로 사망한 것은, ‘박해’라는 고난 위에 ‘피폭’이라는 또 다른 유형의 고난이 이중(二重)으로 겹쳐진 것을 의미한다. 신앙 공동체가 이중적(二重的)으로 붕괴되었다는 말이다. 1867년의 네 번째 기독교 탄압(浦上四番崩れ)으로 우라카미가 황무지로 변한 뒤 78년만인 1945년의 피폭으로 우라카미가 두 번째로<이중적(二重的)으로> 황무지로 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지배층(지배층의 자손이나 친지), 상인<데지마(出島) 부근의 상가에서 살던 사람들>, 나가사키 역ㆍ항구 옆에서 살던 사람들은 피폭을 모면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차별(구별)이 발생했다. 350년 동안 기독교인을 박해했거나 박해에 동조ㆍ묵인했던 사람들은 피폭을 모면하여 살아남았으나, (죽을 고생하며 잠복 신자로 지내다가 겨우 천주당을 세운) 천주교 신자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생(生)-사(死)의 차별’이 생긴 것이다. ‘기리시탄’ 마을로 낙인찍혀 차별받아온 우라카미에 산 자(피폭을 모면한 지배층)와 죽은 자(원폭으로 사망한 신자들)의 차별이 이중적으로 생긴 것이다.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나가사키의 옛 시가지의 사람들과 우라카미의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는, 기독교 전래 이후의 탄압ㆍ박해ㆍ차별의 긴 역사가 있다. 나가이 다카시(永井隆)는 우라카미ㆍ옛 시가지의 구별을 ‘크리스천 나가사키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영혼의 마을’과 ‘항구 나가사키의 이름을 알려진 육체의 마을’의 대비에 의해 드러내면서, ‘마리아의 마을’과 ‘에로스의 거리’라고 불렀다.(高橋眞司, 2001, 196)


‘에로스의 거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마리아의 마을에 살면서 피폭된 기독교 신자들을 향해 ‘당신들이 불교ㆍ신도(神道)를 믿지 않고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천벌을 받았다’며 저주했다. 이러한 에로스 거리의 사람들이 저주하는 ‘천벌’을, 기독교의 섭리(“피폭이라는 천벌을 받았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이다”)로 뒤집어 ‘피폭=번제’설을 주장한 나가이 다카시(永井隆)의 논점을 뒤이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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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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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봉행소(奉行所)는 봉행(奉行)의 집무 장소이다. 사무라이 정권 당시 행정 사무를 담당한 각 부처의 장관을 奉行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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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나가사키 평화추진 협회 엮음『나가사키 평화 가이드 북』(나가사키, 1991)
* 박규태『일본 정신의 풍경』(파주, 한길사, 2009)
* 박수철「明治初 ‘浦上 탄압사건’과 ‘國家神道’」『민주주의와 인권』제7권 제2호(2007)
* 高橋眞司『長崎にあって哲學する』(東京, 北樹出版, 2001)
* 高橋眞司 외 역음『ナガサキから平和學する!』(京都, 法律文化社,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