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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평화공동체(도시, 마을)

공동체의 평화

김승국

Ⅰ. 공동체의 지평

일반적인 의미의 공동체(community, Gemeinde, communauté)는 인간의 공동생활이 이루어지는 일정한 지역, 특히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지역사회를 지칭한다. 긴밀한 인간적인 결합을 갖되 영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상호 연대하는 기초적인 집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혈연․지연․우정․박애 중심의 지역성․공동체 감정이 중요한 가치로 통용된다.

그런데 경제적인 의미의 공동체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사회의 봉건성이 강한 지역단체를 가리킨다. 사적 소유권이 확립된 근대 사회 이전에, ‘토지의 사적 소유와 공동체에 의한 소유가 병존하는 상태’ 아래의 토지의 공동소유단체가 공동체이다. 생산력의 발전이 낮은 곳에서 개인이 독립하기 어려웠던 전근대 사회의 중요한 생산 단위로서 각각의 인간들의 필요 충족․생활 유지라는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보증한 공동조직이 공동체이다. 사적 소유와 공동소유의 관계 또는 양자의 비중은 여러 조건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마르크스가 지적한 아시아적 형태․고전 고대적(古典 古代的) 형태․게르만적 형태 등 몇 가지 형태로 구별된다.

이와 같은 공동체가 존립하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의 생존을 평등하게 보증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상호간의 연대성․평등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호 원조 의무를 진 공동체의 구성원은 엄중한 규제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동체의 존립조건은 생산력 발전․생산활동의 공동영위라는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다. 공동체의 방위를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억제․희생될 수도 있다. 이때 ‘개인이 우선인가 공동체가 우선인가?’고 물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제기했는데, 이 명제는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각 개인이 독립하여 자족적이지 못할 때 폴리스(Polis)가 상위이므로, 폴리스라는 공동체가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차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개인이 폴리스의 전제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개인이 우선이라는 차원을 생각할 수 있다. 폴리스의 시
민인 개인의 정체성(Identity)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의식이 만개한 근대에 들어와서 개인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근대는 개인의 자기의식이 극한까지 발달한 시대이다. 개인의 자유를 주창한 홉스(Hobbes)의 사회계약설을 원점으로 삼아 (평등에 역점을 둔) 루소(Rousseau)의 사회계약설이 태어났고, 이에 대치되는 것으로 헤겔(Hegel)의 국가 유기체(有機體)설이 다른 쪽의 극점(極點)을 만들어 냈다. 통치(Government)의 정당성을 근거로 한 권위(Authority)의 원리와 공리(Utility)의 원리를 내세운 아담 스미스(Smith)는 중용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개인’과 ‘공동체’의 여러 조합이 각각의 근대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세계는 (세계의 세포를 이루는) 개인을 최소 단위로
다양한 조직 내지 공동체―가족․집단․결사․조합 또는 회사․교회․자치체․국가․국가연합 등―를 이루고, 그 신경 계통 또는 순환기 계통으로서의 ‘시장’이 위의 공동체들을 상호 연결시켜 준다. 다양한 특성을 갖는 조직으로 famiglia․ groupe․ union․ chièsa․ coalition․ combination․ commune․ Gemeinde․ company․ société․ Staat 등을 나열할 수 있으며, 이것들은 다양한 ‘공동체(communauté)’와 ‘협동체(association)’를 이룬다. 이에 대응하여 개인 역시 다양한 존재(homme․ man․ citoyen․ padróne․ wife․ enfant․ servant․ associé․ Mitglieder 등)로 있으며, 시장도 한결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다.(西村豁通, 1996, 1-2)

이와 같이 다양한 공동체 속의 다양한 개인이 다양한 시장 구조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생활세계가 평화를 창출(Peacemaking)할 수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중요하다. 개인-시장-공동체의 3자 관계를 어떻게 엮어 내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평화가 결정된다. 개인과 공동체의 중간에 있는 시장이 평화를 보장하면 개인도 공동체도 평화 지향적이 될 수 있다. 제아무리 개인이 평화를 지향해도, (개인을 에워싼) 공동체와 (공동체와 대면해 있는) 시장이 갈등관계에 있으면 개인적인 평온에 그친다. 공동체의 평화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평화에 앞서, 시장과 공동체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검증하는 게 선결 과제이다.

Ⅱ. 시장과 공동체

시장이 옛 공동체를 파괴하고 나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공동체이다. 시장 자체가 공동체이지만, 가설(假設) 공동체일 뿐이다.(西村豁通, 1996, 46) ‘가족을 존속시키며 시장의 저변․주변에 사회복지․노동조합․공제(共濟)활동이 평화롭게 배치될 것’이라는 가설(假說) 아래 가설(假設)된 공동체가 시장이다. 그런데 시장의 폭력성 때문에 평화로운 배치가 불가능해져, 위와 같은 가설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미완의 공동체’로 전락했다. 그래서 미완의 공동체인 시장을 ‘완결성(평화의 완결성)을 갖는 공동체’로 바꾸기 위한 개혁․진보․혁명적인 대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회주의 공동체론․협동조합론․협동체(Association)론 등이 대표적인 대안이다.

그런데 이들 대안은 ‘시장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끝에 공동체가 약화되는 모순’을 완전히 해소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특히 시장의 자유를 만끽하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낳은 10 對 90의 사회에서, 90에 해당되는 개인의 자유가 매우 협소해졌다. 이에 따라 10의 상층(上層)과 90의 하층(下層)이 어울려 공동체를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중심인 ‘시장’과 (시장의) 변두리로 밀려난 ‘공동체’의 2항 대립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과 공동체의 2항 대립’ 속에서 공동체의 평화를 보장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를, 공동체론으로 극복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1. 시장과 공동체의 2항 대립

사람들은 시장에서 개별적인 거래를 할 때만 관계를 맺으며, 이를 벗어나면 서로 무관계(無關係)․몰관계(沒關係)의 개체로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공동체는 거래관계에서 외재적(外在的)이 되어 마땅히 무시당하는 존재로 밀려난다. 그 반면에 상업세계도 공동체에 대하여 외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시장과 공동체를 2항 대립의 관계로 생각하는 전통이 생겨났으며, 근대 경제학은 이러한 전통과 밀착되어 있다. 근대 경제학이 이론의 전제로 삼는 경제인(經濟人) 모델은,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질을 모두 하나의 개체 차원으로 분할하여 개체의 특질 속에 해소시킨다. 시장의 차원, 구매하고 구매되고 팔고 팔리는 차원에서만, 사람들이 사회적인 인연을 맺게 되므로 공동체의 원만한 형성이 불가능하다.(西村豁通, 1996, 47)

이와 같은 ‘시장과 공동체의 2항 대립’이라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타자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공동체’가 요청된다.

Ⅲ. 타자(他者)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공동체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명제를 분석적으로 고찰해 보자. 사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복수의 타자(他者)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회생활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이 단순히 무리지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자는 그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의 타자와 직․간접적으로 서로 교제하고 교류한다. 그러나 어떠한 교제인가, 원활한 교제인가, 아니면 장애물이 있는가.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으며, 타인과의 교제가 원활하게 진전된다고 예상할 수도 없다. 사회성이라고 하는 원사실(原事實)을 원리적으로 철저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이 집단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원사실은 결코 평화적이 아니다. 그것은 원초적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어
떤 개인이 (실제로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원리상 배제하며, 또한 타자가 (실제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폭력적으로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이와 같은 원초적 폭력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현존재는 (타자)의 현존재를 배제한다. 사회생활의 근원에는 복수의 인간적 현존재가 원초적 폭력에 의해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보인다. 질서나 제도는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폭력에 직면하여 그 원초적 폭력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생겨 나온 것이다. 복수의 인간이 생존하고 있는 상태란 상호 적대 상태이다. 17세기 서구 사상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전쟁 상태’이다. 이것은 이미 질서를 갖는 집단 사이의 전쟁 상태가 아니라, 질서 이전의 개인들 사이의 전쟁 상태이다. 그러나 상호 적대상태가 영속적일 수는 없다. 적대 상태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하나는 공멸로 끝나는 경우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적대 상태를 만들고 있는 폭력의 압력, 배제의 힘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해 공멸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사실상 이 길이 선택되고 있다. 인간은 상호 배제의 폭력을 임의의 타인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던 폭력을 회피한다. 임의의 누군가에게 집단적 폭력이 집중될 때, 질서 형성을 위한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차별화라고 하는 질서체계는 임의의 타자(‘우리’와는 다른 제3항)에 대한 배제적 폭력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제3항 배제가 사회관계의 문법(질서의 규칙) 형성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가리킨다. 배제되는 제3항은 말할 것도 없이 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회관계의 질서를 만들고 중심을 지닌 ‘시민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은 희생자 만들기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비록 교묘한 형태이긴 하지만, 배제된 제3항으로서의 희생자가 다른 사람들과 무관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관하기는커녕 역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민적 관계’를 형성하는 요인이 된다. 사람들은 희생자와의 관계를 매개로 해서 ‘배제되지 않은 운 좋은 사람’으로서 서로 승인하는 것이다. 사회 또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 자기확인을 하기 위해서는 희생자 만들기에 공동 참가한 표시를 필요로 한다.(今村仁司, 1999, 193-198)

Ⅳ. 화 폐

앞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 자기확인을 하기 위해 제3항으로서의 희생자 만들기에 공동 참가하는 표시를 필요로 한다.’고 기술했는데, 제3항으로서의 희생자 만들기에 공동 참가하는 표시가 바로 화폐이다. 이 표시가 화폐의 단위(1만 원, 5천 원, 1천 원 등)로 각인된다. 이 각인을 지닌 것이 화폐이다. 1만 원․5천 원․1천 원이라고 표시된 각인은 시민사회의 제3항을 배제하는 각인이며, 자본주의의 합리성에 의해 조절(regulation)된다. 개인-시장-공동체의 3자 관계(개인은 공동체와 길항관계에 있고 공동체는 시장과 길항관계에 있는 3자 관계)의 엇물림을 조절하는 수단이 화폐이기 때문이다.

아글리에타(Michel Aglietta)의 화폐이론에 의하면, 화폐는 시스템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교환관계를 조직한다. 화폐는 숫자에 법(法)의 힘을 부여한다. 화폐는 단일성․통일성을 나타내는 형태이다. 화폐는 교환자들의 관계 속으로 뛰어들어 ‘경쟁에 의한 적대관계’를 조정하는 제3항이다.(주1) 조절․조정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합리성으로 각인의 남발을 막고 최대한
지연시킨다.(주2)

자본주의의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전개되는 전쟁 상태에서 만인(萬人)은 언제나 제3항화(第3項化)의 운명에 사로잡힌다. 언뜻 보기에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시민적 관계에도 근원적으로 제3항 배제라는 사회 형성 폭력의 각인이 찍혀 있다. 이 각인을 한 몸에 지닌 것이 화폐이다. 결국 화폐는 자본제 생산양식(구조)의 주요한 담당자인 자본으로 변환(Metamorphose)된다. 이 자본은 경제적인 희생양(bouc émissaire, scapegoat)을 먹고 자란 것이며, 사회 전반에 걸친(전반적인) 제3항 배제운동에 의해 축적된 것이다.(주3)

화폐 형식이라는 제3항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아버지인 라이오스(희생자)에 해당된다.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에게 폭력을 행사했듯이 자본주의 사회(근대 시민사회)에서 화폐 형태-화폐(자본)이라는 제3항이 폭력을 행사한다.(주4) 이렇게 근대화폐는 폭력을 끌고 다닌다. 이 폭력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제3항 배제효과로서의 폭력이다.

제3항의 폭력관계가 내재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되면 시민사회의 평화 공동체가 성립되기 어렵다. 이 폭력 때문에 자본주의 시민사회에서 공동체의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시민사회 전반에 걸쳐 임의의 타자(‘우리’와는 다른 제3항)에 대한 배제적 폭력이 일어나면 공동체의 평화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제3항으로 배제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자본주의 시민사회에서 공동체는 그림의 떡이다. 시민이 서로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경제적 이윤을 꾀하려는 상호적 폭력의 사회에서, 타자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평화 공동체는 한갓 유토피아이다. 따라서 우리와는 다른 임의의 타인(제3항)이 오이디푸스처럼 희생양이 되지 않는 공동체 사회가 절실하게 요망되며, 이 요망에 따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이론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Ⅴ.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이론

  1. 사회주의 계열의 이론

‘개인-시장-공동체의 3자 관계를 화폐가 (제3항의 희생 위에서) 조절하면서 자본을 축적하는 체제’를 지양하는 이론이,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이론으로 바람직하다. 위의 요구사항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이론체계는 드물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학자들이 고안한 공동체론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푸리에․ 오엔․ 푸르동․ 크로포트킨․ 페비안 사회주의자)이 다양한 공동체 유토피아론을 제기했다. 이어 마르크스․엥겔스는 코뮌(Commune), 협동체(Assoziation), ‘유적존재(類的存在, Gattungswesen)’를 통해 공동체의 평화를 창출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르크스의 주안점인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의 재건’에 의해 평화 공동체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에 공동체론의 요소가 비교적 강하지만, 마르크스․엥겔스의 이론에는 공동체론의 요소가 상대적으로 약하므로, 사회주의 이론 전반에서 공동체론을 추출해 내기 어렵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사회주의 이론에 내재된 공동체론적인 요소를 설명하면서 평화 공동체의 가능성을 아래와 같이 타진한다.

    1) Assoziation

마르크스의 저작 곳곳에 산재해 있는 ‘Assoziation’이라는 말은 그 문맥에 따라 협동하는 일, 협동조합, 협동생활, 협동단체, 협동관계, 공동조합, 공동적 결합, 공동사회, 결합, 결합사회, 결합체, 집단결합, 연합, 연합사회, 연합체, 결사, 협회, 조합, 연대, 단체를 뜻한다.(김승국, 1996. 147)

위의 20개의 뜻은 거의 모두 공동체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므로 ‘Assoziation’론에서 공동체의 평화를 내올 수 있겠다.

마르크스의 Assoziation은 자유인(自由人)들의 연합(Verein freier Menschen; Marx Das Kapital MEW 23, p.92), 자본주의의 노동 방식인 통합노동(combined labour)이 아닌 연대노동(결합노동; associated labour)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die freie Assoziierung der Arbeiter)’를 지칭한다.(김승국, 1996, 147)

Assoziation에서 자유롭게 결사하는 노동자의 ‘노동’은 ‘labour’가 아닌 ‘Work’이다. 장시간 노동․저임금 노동 등 좋지 않은 조건 밑에서 자본가의 착취에 그대로 복종하며 반노예적 상태로 하는 노동이 ‘labour’인 데 반하여, 제작․창작․창조활동 내지 유희의 뉘앙스를 포함한 노동이 ‘Work’이다. 따라서 ‘labour’에서 ‘Work’로 탈바꿈하는 사회변혁이 없으면 (노동자가 대다수인) 공동체의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사회주의적 공동체의 평화를 보장하려면, 필요노동(필요노동 시간)의 극소화와 자유 시간의 극대화, 즉 labour의 극소화와 Work의 극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강조한다.

    2)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의 재건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의 폭력에 의하여 개인적 소유를 수탈당한 독립생산자는 끝내 노동력밖에 갖고 있지 않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고 빈곤의 축적을 가져온다. 그러나 폭력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에게 빈곤의 축적을 강요한 자본가 계급의 생산방식은 스스로 질곡에 빠짐과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반항을 불러일으켜 전쟁(혁명)의 계기를 유발한다. 전쟁의 계기를 유발한 자본가 계급의 자본축적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계기를 가져온다. 이제 수탈당할 자(者)는, 독립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 즉 임노동자의 두목이다. 자본주의적 소유의 최후의 종(鐘)이 울린다. 본원적 축적에 의하여 개인적 소유를 부정(否定) 당하는 제1차의 부정이 끝나고 ‘수탈자(자본가)를 수탈’하는 제2차의 부정(부정의 부정)이 시작된다. 이 부정의 부정은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획득물, 즉 협업 및 토지를 포함한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입각한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다.(김승국, 1996, 88-89)

이처럼 부정의 부정 단계를 거쳐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입각한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면 공동체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2. Subsistence

橫山 正樹는 {平和學のアジェンダ} 46쪽에서 ‘Subsistence’를 아래와 같이 풀이한다;
Subsistence는 원래 식량을 비롯한 생활용 기본 물자를 가리키는 일반 용어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등의 경제학에서 ‘생활자료’로 번역되었다. 또 기층 노동자가 받는 ‘겨우 생존할 만큼의 임금수준’을 말하기도 한다. 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시장경제에 편입되지 않은 원주민족의 한계적인 자급경제 또는 그 생업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빈곤한 생활의 이미지를 띤 이 용어를 수정하여 심화한 사람은 폴라니(Karl Polanyi)라는 경제인류학자이다. 그가 1944년에 펴낸 대전환 에서 ‘원래 상품으로 산출되지 않은 자연환경․인간․인간의 사회제도가 각기 토지․노동․화폐로 상품화되어 있는 근대 사회의 특유한 허구[擬制]를 지적했다. 이것들이 상품으로서 시장 메커니즘에 종속됨으로써 자연이 오염․파괴되어 악덕․범죄 등의 혼란이 일어난다. 이러한 혼란 때문에 인간사회의 멸망을 걱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장경제를 인간사회의 통제 아래에 두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폴라니는 역설한다. 또 中村尙司는 {地域自立の經濟學}(1993년)에서 토지․노동력․신용을 상품화하는 무리(無理)를 지적하며 탈상품화(脫商品化)를 제창한다. 이러한 주장의 전제가 되는 자연-인간의 관계(자연환경) 및 인간 상호의 사회관계야말로 Subsistence의 기본 요소에 다름 아니다.

폴라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리치(Ivan Illich)는 {Shadow Work}(1981년)에서, 시장경제에 의존하지 않고 토지에 뿌리를 둔 ‘인간생활의 자립․자존’이 Subsistence라며, Subsistence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발전=개발(development)을, ‘Subsistence에 싸움을 거는 전쟁’이라며 비판한다.

일리치와 대화를 거듭하며 그의 비판자가 된 베르호프(Claudia von Werlhof), 톰젠(Veronika Bennholdt-Thomsen), 미즈(Maria Mies) 등의 독일인 페미니스트(Feminist)들도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자본 축적론}(1913년) 등에서 배운 ‘여성노동(가사)으로서의 Subsistence 생산노동’에 눈을 돌린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인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세계화
경제의 대안으로 ‘Subsistence Perspective’를 내걸었다.

폭력의 극복을 겨냥하는 평화학의 관점에서도 Subsistence는 중요한 개념이다. 橫山 正樹는 생명의 존속․재생산을 지탱하는 생명 유지계통(시스템)으로서의 Subsistence를 ‘개인과 집단이 그 본래성(잠재적 실현 가능성)을 다하고, 더 나아가 인류로서 영속하기 위한 조건 전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라 인간-자연 생태계의 관계 및 사회관계 전반으로부터 폭력을 없애 가는 ‘Subsistence 지향’을 {環境を平和學する!}(2002년)에서 제창했다.

이와 같이 개발주의・근대세계 시스템에 대하여 반문(反問)하는 페미니즘(Feminism) ・생태(ecology)운동・평화학과 연관을 맺고 있는 Subsistence는, 지구환경의 지속가능성 파괴․세계화에 대한 대항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Subsistence의 가치를 지향하는 가운데 생태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3. 주종환 교수의 ‘공동체의 경제학’

‘공동체의 경제학’을 주창하는 주종환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 내지 공동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본질을 갖고 있다. 고립된 개인이란 실제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고전학파 이론에서는 사유재산제도가 절대적이고 개인이 마치 독자적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같이 가정하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의 경제학 체계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전 사회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 완전경쟁을 전제로 한 시장가격 형성의 원리를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신고전학파와 맞닿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는 가족 공동체, 계급 공동체, 지역 공동체, 민족 공동체 등 각종 공동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을 무시할 경우에는 공동체에 의한 제재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 경제의 현실이다.(주종환 ①, 2006, 382)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학설이나 한계효용 학설이나 모두 지극히 추상적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학설은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화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이론이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사회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한다.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농민과 자영업자가 있는가 하면, 예속된 상태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도 있으며, 독점자본가와 중소기업자가 혼재해 있다. 한편 한계효용 학설에 있어서도 모든 소비자가 자기의 물질적 욕망의 극대화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경제인’을 가정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지극히 비현실적 인간 유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효용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가 아니다. 이웃을 돌보기 위해서 자기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인간도 수없이 많다. 더욱이 이 두 개의 이론에 공통된 점은, 인간이 모두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고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독자적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개인은 결코 독립적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민족 공동체 또는 지역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그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주종환 ①, 2006, 380)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계급관계는 ‘노동자 공동체’와 ‘자본가 공동체’의 대립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계급사회에서의 계급대립도 보다 상위의 보다 큰 ‘민족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같은 민족 공동체 안에서의 공동체 상호간의 대립이므로 그것은 결코 절대적, 비타협적으로 굳어진 관계라고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상이한 민족 공동체 상호간의 대립이 첨예화할 경우에는, 민족 공동체를 구성하는 하위의 계급 공동체 상호간에 일종의 융합과 협력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가족 공동체 안에서도 개인의 상대적 독립성과 독자성이 강화되고 있지만, 각 개인은 여전히 가족 공동체의 제약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 계급 공동체, 기업 공동체, 촌락 공동체, 지역 공동체, 민족 공동체, 인류 공동체 등 순서에 따라 상위로 올라간다. 각급 공동체 내부에서는 공동체 상호간에 상극과 대립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상위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는 이익 공동체 내지 운명 공동체로서의 동족의식과 ‘공감(sympathy)’ 내지 사랑의 원리가 지배한다. 그 밑바닥에는 ‘증여’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증여’를 주고 받는 한, 공동체 상호간에는 평화와 사랑에 입각하는 공동체 원리가 지배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은, 상품의 교환관계가 ‘증여’의 발전된 형태이며 공동체 상호간에 평화와 사랑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요체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공동체적 교환(communal exchange)’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평화와 상호 증여의 원리가 결정적으로 훼손받았을 때에는 상극과 대립이 발생하고, 심할 경우 사생결단의 싸움으로 번진다.(주종환 ②, 2006, 284-285)

공동체의 경제학은 이제까지의 경제학의 이론적 유산을 소중히 계승하면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과 그것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문제들, 특히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과 그 공공성에 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인간 중심의 경제학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인간 중심의 경제학 체계’는 시장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역할을 그런대로 인정하면서, 시장이 어떠한 조건 아래서 공동체적 정의를 확립할 수 있고, 전체 공동체와 각 가족 공동체 안에서 시장이 인간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조건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론체계여야만 한다.(주종환 ①, 2006, 383)

‘공동체의 경제학’은 남북으로 갈라져 반세기 동안이나 대립과 상극의 비극적인 나날을 보내 온 우리 겨레를 하나로 묶어세울 수 있는 경제학 체계라는 성격을 아울러 가질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전체는 개인을 위해, 개인은 전체를 위해’라는 공동체 원리가 문자 그대로 실현되는 복된 사회, 그것을 앞당기기 위한 경제학 체계로서 ‘공동체의 경제학’을 제안하는 것이다.(주종환 ①, 2006,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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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 (박사학위논문, 1996)
* 주종환 ①, 「공동체의 경제학(Ⅰ)」 {사회경제 평론} 제26호(2006. 4.)
* 주종환 ②, 「공동체의 경제학(Ⅱ)」 {사회경제 평론} 제27호(2006. 10.)
* 今村仁司 지음, 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서울, 민음사, 1999)
* 岡本三夫 외 엮음 {平和學のアジェンダ} (京都, 法律文化社, 2005)
* 西村豁通 외 엮음 {個人と共同體の社會科學} (京都, ミネルヴァ書房,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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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07호에 실린 필자의 글「잘사는 평화 (8)」(2008.1.27)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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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화폐는 경쟁에 의한 적대관계를 조정하는 제3항이다. 교환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승인욕망’으로부터 배제되기 때문에 화폐가 제3항이 된다. 화폐로 평가된 가치체계를 통하여 숫자가 보편적으로 개재(介在)되고, 이 개재에 의하여 모방의 적대관계는 소유욕망으로 된다. 여기에서 사적 소유가 발생한다. 사적 소유란, 타인의 활동의 성과를 숫자의 형식으로 전유하려는 욕망이다. 각각의 사람들은 타자가 보유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포기한다. 즉 싸게 구입하여 비싸게 팔아넘김으로써 취득적 폭력이 일상화 된다. 화폐의 발생과정은, 취득적 폭력을 사적 소유의 완전히 다른 현실로 이끈다. 화폐는 物의 취득욕구를 가치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지만, 화폐 자체는 가치가 아니다. 화폐는, 사회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상품과 동일한 자격으로 판매되거나 구입되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정통성은, 만장일치의 취득
적 폭력이 가져온 과실이다.(김승국, 1996, 60-61)

(주2)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物象化)된 합리성은, 폭력의 물상화와 폭력의 제도적 내재화(內在化)에 기인한다. 배제효과에 의하여 생성된 근대 화폐․자본은, 제3항 배제의 각인을 최후까지 지연시킨다. 즉 제3항으로서의 화폐․자본은, 질서의 형성자임과 동시에 이 질서가 근원에 있어서 반복하는 제3항 배제의 담당자이기도 하다.(김승국, 1996, 63)

(주3) 근대의 자본은 화폐에 결정(結晶)된 제3항 배제를 전반화(全般化)한다. 바꿔 말하자면 자본이란 전반화한 경제적 희생양(bouc émissaire, scapegoat)이며, 전반화한 제3항 배제운동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역사적 특이성은, 제3항 배제효과를 시공간적으로 특정화․국소화(局所化)하지 않고 오히려 전반화하여 인간 전체․자연 전체를 제3항 배제효과의 권내(圈內)에 포섭하는 데 있다. 근대 시민사회가 제3항화 폭력(물리적인지 아닌지를 물을 것 없이)을 사회관계의 그물코의 구석구석까지 삼투시키므로, ‘전반화’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앞에서 자본이 경제적인 ‘bouc émissaire’라고 언급했는데, ‘émissaire’라는 단어 속에 이미 ‘배제’의 뜻이 깃들어 있으므로 ‘제3항 배제의 운동체’로서의 자본이 다시금 상정된다. 그러므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轉化)’를 제3항 배제의 논리에 따라 표현하면, 이는 ‘배제된 제3항으로서의 화폐’에서 ‘전반화한 제3항으로서의 자본’으로의 전화이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하고 자본이 제3항 배제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자립할 때, 자본의 논리를 통하여 제3항 배제의 논리가 사회 전체에 관철된다. 화폐가 자본으로 변환됨에 따라 ‘화폐의 폭력’도 ‘자본의 폭력’으로 전환(Verwandlung)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만큼 제3항 배제의 폭력을 구석구석까지 전파하는 사회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이다.(김승국, 1996, 64-65)

(주4) 화폐 형식이라는 제3항(un troisième terme)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희생자)에 해당된다.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에게 폭력을 행사했듯이(이러한 부자간의 싸움은 시민사회의 경쟁․투쟁과 원리상 동일하다), 자본주의 사회(근대 시민사회)에서 화폐 형태-화폐(자본)라는 제3항이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희생물을 살해하려는 위기의 절정에서 폭력이 모든 욕망의 수단이자 동시에 주체이며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 희생물이 없다면 그리고 위기 후에 이 폭력이 문화질서로 변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회질서는 불가능해진다. 희생양은 상호적 폭력에서 공동체적 평화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그 이행을 확실하게 하고 이행 그것 자체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이제 평화의 초석이 된 것이다. 속죄양은 공동체를 화해시킨다. 오이디푸스 왕을 계속 예로 들자면, 오이디푸스는 페스트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래서 그를 추방했더니 페스트가 사라진다. 희생자의 악(惡)한 면은 그가 죽은 뒤에, 혹은 추방된 뒤에 생겨난 선(善)한 면을 더욱 강화시킨다.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악하나(maléfique) 다음에는 선하다(bénéfique). 희생양은 혼란에서 질서로 이행하는 것의 상징이 아니라, 이행 그 자체이다. 상호적 폭력에서 일인(一人)에 대한 만인(萬人)의 폭력으로의 이행이 바로 모든 문화의 기원이다. 그것은 희생적 위기에 일어난다.(김승국, 1996, 4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