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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평화공동체(도시, 마을)

풀뿌리 평화 공동체

김승국

평화의 주체를 국가로 상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가 평화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 집단이므로, 원론적으로 평화를 보장하기 어렵다. 오히려 시민사회의 평화 공동체를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시민 스스로 아래로부터 풀뿌리 평화 공동체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국가에 맡기면, 국가라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이 강권(强權, Gewalt)을 행사하며 전쟁 지향적․비(非)평화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렇게 국가의 강권이 폭력․전쟁 지향성을 띠는 것을 제어하려면, 지역의 풀뿌리 민중들이 평화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국가 중심으로 짜여 있는 평화의 공간을 지역으로 재편하는 주인공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담지자인 풀뿌리 민중들이다. 이들의 생활터전인 지역을 중심으로 생태․생명․평화 공동체를 이룰 때 비로소 국가의 폭력․전쟁 지향성을 억제할 수 있다. 풀뿌리 차원에서 마을의 평화가 이룩되어야 국가의 평화도 보장된다. 마을이 평화롭지 않은데 국가가 평화로울 리 없다.

마을이 평화의 기본 단위라는 관점에서 간디의 스와라지(Swaraj) 운동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역의 생태․생명 공동체를 역설하는 김지하 선생・김종철 교수・나카무라 히사시(中村尙司) 교수의 글을 숙독할 필요가 있다. 이 밖에 많은 학자․논객들의 글을 종합하면서 풀뿌리 평화 공동체의 논리적 근거를 발견하고자 한다.

Ⅰ. 풀뿌리 평화 공동체의 논리적 근거

  1. 김종철 교수: 민중의 자치와 평화({녹색평론} 2003년 9-10월호)

평화의 문제를 생각하는 자리에서, 좀 더 근원적으로 이 문제를 들여다 보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오늘날 평화, 무엇보다도 민중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특히 민중의 평화를 운위하는 것은 평화의 문제를 논의하는 데 결코 빠트려서는 안 될 차원을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풀뿌리 민중의 일상생활 자체가 전쟁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기본적 사실이다. 그리고 민중의 평화라는 개념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지금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군사적 충돌이나, 침략이 본질적으로는 지배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지 결코 민중과 민중 사이의 대결일 수는 없다는 가장 근본적이되 흔히 간과되고 있는 사실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의 관심이 늘 ‘평화유지’에 있어 왔다면, 풀뿌리 민중은 언제나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염원하면서 살아왔다는 점을 (이반 일리치는) 강조한 바 있다. 민중이 이해하는 평화와 지배층이 생각하는 평화는 그 내포가 전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땅에 뿌리박고 사는 풀뿌리 민중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의 생존이며, 가족과 이웃들과 어울려 삶의 기쁨을 향유하면서,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준비하여 가는 생활이다. 민중생활이 근본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생존의 순환적인 지속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 집단적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땅의 보존과 오랫동안 땅을 돌보아 온 공동체의 지혜, 이웃들과의 협동적 관계와 상부상조, 보살핌과 환대, 고통을 견디는 기술, 그리고 자립적 생존을 위한 토대 중의 토대인 이러한 여러 공동자산(commons)이 훼손 없이 보존되는 것이다. 민중에게는 땅이 보존되고, 이웃들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한, 자급, 자치의 근본적으로 평화로운 삶이 가능했고, 국가와 교회의 존재는 그들의 삶에서 부차적, 외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민중의 자급, 자치, 자율적인 생존의 지속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노골적인 군사적 공격 못지않게 혹은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더욱 위협적인 것은 이른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생존의 토대의 파괴일 것이다.(6∼9쪽)

  2. 김지하 선생: 풀뿌리 민주주의와 생명 공동체({김지하 전집 2})

우리의 민주화 운동은 생명의 원리에 알맞은, 사람의 생태적 삶의 역사와 조건에 알맞은 정치적 생명공동체 건설, 즉 지방자치제의 보다 높은, 보다 창조적인 단계의 실천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저는 정치적인 생명공동체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경제적인 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농민들의 협업적인 유기농 공동체, 지역 농산물 유통 공동체, 지역 농산물 가공 공동체 운동이 계속 확대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입니다.(86∼87쪽)

이것들이 모두가 생명의 개별성과 전체성이라는 기본 원리,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화엄사상의 원리와도 통하며 수운 선생이 이야기하는 ‘밝고 밝은 운수를 각각 자기 나름대로 밝혀 실현한다(明明其運 各各明)’ 또는 ‘한 세상 사람이 옮길 수 없음을 각각 안다(一世之人 各知不移)’로서의 동귀일체(同歸一體)의 기본 정신과 일치하는 생명사상이라고 생각됩니다.(88쪽)

이러한 생명공동체의 건설에 있어서 우리가 바탕을 두어야 할 기본 사상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입니다. 타인에게도 무궁한 한울님, 우주생명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상호 공경하는 정신 위에서 생활 공동체, 생명공동체 운동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문화운동은 바로 이 정신에 따라 생명공동체 건설운동으로 나아가는 정신적 내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90쪽)

생명운동으로서의 민주개혁운동은 국민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인격실현, 소공동체적 평등과 친교의 성취, 지역자치와 지방정부의 자유로운 복합그물 보따리로서의 주민자치 공동체 연합, 곧 풀뿌리 민주주의 개혁에 의해 새로운 지역적 사회생활 양식을 창조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다. 모든 중간경향이 국민국가․국민의회의 집중과 수렴의 틀 안에서 집권을 기도하는 한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매우 위태롭다. 결국 생명가치 실현을 목표로 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개혁 방향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젠 시민 자신이 개혁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171∼173쪽)

풀뿌리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가치의 질의 변화와 평등한 분배, 빈부 차이, 노사 갈등, 경영과 생산의 차별을 원천적으로 해소시킴으로써 현존하는 국민경제적 시장질서에서의 평등 실현에 강력한 촉매와 저울과 모델을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계약이나 결합이 아니라 공동의 원리, 공생의 원리, 나아가 상호 공경의 원리를 바탕으로 우애에 가득 찬 협의체계를 지향해야 한다. 자주관리 소(小)공동체와 공동체 그물로서의 주민운동은 철저히 생산과 생활 전면에서 중층적․복수적 공동체들의 살아 생동하는 영성적이고 생태적인 공생 네트워크여야 할 것이다.(174쪽)

19세기 말 우리의 동학은 개인 내면의 무궁하고 신령한 우주적 생명의 공경과 개성적 자기실현, 곧 시천주(侍天主)로부터 출발해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있어서의 무궁하고 신령한 우주생명의 자각적인 실현운동이며 영적인 생명가치 존중과 그 실현운동이었다. 동학의 제1의 모토인 지상신선(地上神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지상신선이라는 사회적 생명운동과 당시 국가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그 관계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제2의 모토 안에 함축되어 있다. 보(輔)는 보(保)가 아니다. 국가를 ‘지킴’이 아니라 국가를 ‘도움’이다. 근왕(勤王)과는 전혀 다르다. 지상신선(地上神仙)은 신령한 생명의 개인 및 사회적 실현이지 국가가 아니며 용화세계나 천년왕국과 같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지상신선과 포덕천하(布德天下), 보국안민의 민중적 도덕정치운동의 산 양식, 신령한 생명가치 실현의 대중적․지역적 사회운동 양식이 동학의 어디에 있을까? 바로 포접제(包接制)이다.(175∼178쪽)

    1) 포접(包接)

동학의 포접은 최치원의 옛 풍류도에 관한 글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포함삼교 접화군생(包含三敎 接化群生)’이다. 삼교는 유(儒)의 강기(綱紀), 불(佛)의 견성(見性), 선(仙)의 연생(練生)의 세 가르침이다. 동학은 이 셋을 기독교의 섬기는 사랑과 함께 쌓은 도덕의 보따리다. 견성이 자기발견의 우주적 영성이라면 연생은 생명의 보전과 향상이요, 강기가 사회윤리라면 섬기는 사랑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의 상호 공경일 것이다. 동학의 포(包)는 다종교적 도덕의 공존을 개인 내면과 생명, 공동체, 사회 자연의 관계에서 가능하게 한다.(181쪽)

동학의 포덕(布德)의 역사에서 포(包)는 접(接)이 한 마을 등의 가족, 친척, 친지, 계, 두레 등의 생산․생활․혈연적 바탕을 가진 개방 확산적 영적인 공생 공동체였는 데 비해 숱한 이질적인 다양한 특성을 가진 接들을 겹쳐 싸는 산 그물 보따리로서 당시의 마을 주민과 주민 사이의 생동하는 삶의 접촉관계인 상권(商圈), 즉 통혼권(通婚圈)을 따라 싸가면서 퍼져 나갔다. 그래서 包를 ‘처남․매부 포덕’의 보따리라고 부른다. 요즘 말로 하면 지역과 지역 사이의 지장적(地場的)인 산 연관을 이미 함축한 자치 단위이다. 包는 接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주체성․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개방적 주체성이었고 도소(都所)의 경통(敬通)이나 다른 包나 接의 ‘사발통문’, 즉 가르침이나 깨우침, 영적 정보라는 질(質) 또는 신령한 메시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영성을 통해서지만 언제나 개방되어 있고 순명(順命)하는 영적인 소통그물이다. 즉, 분산․수평적․개성
적인 정보․교양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그러면 接은 무엇인가? 최치원은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 했다. 군생(群生)은 인간과 동식물․무기물 전체를 가리키는 중생(衆生)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갖가지 생산활동과 소비․문화․영적 생활 등 뭇 삶의 양태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생명 과정의 삶에 동학의 영적 생명사상, 생명가치를 가르쳐 나름 나름으로 제 삶의 근원생명을 회복하며 서로 공경하고 친교하며 공생․공산하는 생산적 삶의 열린 관계망이다. 接은 개방적인 소공동체이다. 정신문화적 친교와 생산의 나눔과 평등한 경제관계, 인격적 관계 등이 모두 공경으로 보장되는 예컨대 우리의 ‘자주관리 생산 공동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주민자립 경제나 자치, 주민 생명문화운동의 소공동체를 ‘接’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와 포, 접과 접, 포와 접들 사이, 그리고 계속 움직이고 있는 도소(都所)와의 확산하는 그물 같은 소통망이 ‘사발통문’인데 이것은 구심보다 원심력 중심의 질적인 무궁확산 진화와 여러 쌍의 상호 통신의 그 이중성의 무한 복잡화, 그리고 끝없이 확산하는 중층적 차원 변화의 탁월한 네트워크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어 현대 정보소통망의 새로운 틀로서 매우 빼어나다.(182∼185쪽)

  3. 中村尙司 교수

    1) 생명 경제학

김지하 선생은 中村尙司(나카무라 히사시) 교수의 논문 「地域自治と生命經濟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김지하, 2000, 220-233)

나카무라 히사시는 농업의 부활에 토대를 두고 경제가치로부터 생명가치에로의 가치 중심의 이동에 따라 지역경제를 국민경제로부터 일단 분리시키며, 국민주권에서 주민주권으로의 권력 이동을 역설한다. 나카무라의 ‘생명 경제학’은 세 가지 생명계의 기본 질서와 법칙에 입각해서 전개된다. 그 하나는 정상개방계(定常開放系)로서의 무기물, 물과 같은 것은 순환한
다는 점이다. 두 번째, 동식물은 종 증식-자기 종을 번식시키고 그것을 증대시키는 세대교체의 특성과 종 다양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다양성이라고 표시된다. 세 번째로는 인간 공동체 사이의 사회적 관계성-이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상호 개성화와 언어관계를 통한 상호소통 및 상호 존립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순환성, 다양성, 관계성으로 정리된다. 순환성, 다양성, 관계성은 앞으로 건설되어야 할 지역경제에 있어서의 기본 개념이다. 생명의 순환성, 관계성, 다양성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가? 국민경제와 국민경제학에 입각해서 형성되는 시장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과의 관계는 지역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관계, 즉 토지, 사회적 신용, 노동력 이것을 상품화함으로써 국민경제적 시장이 형성되었다. 근대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토지의 상품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신용관계의 상품화,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는 노동력의 상품화이다.

지역자치를 가능하게 하려면 지역경제의 자립이 확보되어야 되는데 그 자립의 기초를 만들려면 제1차적으로 회사조직, 기업조직 안에 전부 흡수되어 있는, 또는 중앙 국가공권력에 의해 강제당하고 있는 토지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신용관계, 그리고 노동력을 우선 부분적으로나마 탈상품화해서 지역으로 되돌려 통합해 놓아야 한다.

지역경제가 농업을 중심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나카무라는 열 가지 항목을 제시한다. 농업을 중심으로 한 지역산업을 재건하려 할 때, 지역산업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그 원리로서 열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지역자원의 탈상품화 ② 다양한 토지 이용을 통한 영농의 다각화 ③ 다양한 협업조직을 통한 집단영농의 고도화 ④ 과수, 농업 일반, 축산, 수산, 임업, 양조 등을 포함한 지역 복합농업 형성 ⑤ 유기농업을 중심에 두고 바이오 가스나 소규모의 정화시설, 즉 환경생산 ⑥ 상품화되지 않는 노동력, 상품화될 수 없는 노동력의 자주관리를 통한 경영참가 ⑦ 농업 관련 산업을 모체로 한 농촌공업 진흥 ⑧ 잉여생산물의 판매와 소비재 구입 ⑨ 경제활동에 필요한 자금의 지역 내 순환 ⑩ 타 지역과의 인격적․기술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하는 문제.

    2) 지역자립의 경제학

생명의 특질은 ① 순환성 ② 다양성 ③ 관계성이다. 이 세 개의 특질 중 어느 것이 없어도 생명계는 위기에 빠진다. 이 삼중(三重) 구조를 구비하지 않은 생명활동을 예시하고, 그것과 대비하며 본래의 생명 이해를 깊이 하고자 한다. 이하의 예시는 반생명(半生命), 비생명(非生命) 또는 불완전한 생명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① (순환성)만의 생명은, 생명계의 기초에 있는 지구의 물 사이클이다. 순환성의 의의를 가르쳐 주는 생명활동이다. ② (다양성)만의 생명은 알코올 발효 중의 효모이다. 일정한 농도가 되면 엔트로피를 버리는 방법이 없는 평형에 이르러 생명활동이 멎어버린다. ③ (관계성)만의 생명은, 마르크스 사상이나 간디의 사상이다. 신체조직을 가진 마르크스나 간디는 이미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낳은 관계성이, 우리들의 삶․사고방식을 규정하는 한도 안에서 마르크스도 간디도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을지언정 삼중 구조를 갖지 않아서 변화하는 일이 없는 생명이다. ①+②(순환성+다양성)만의 생명은, 바다 속의 생태계나 인적(人跡)미답의 무인도의 동식물이다. 인간이 없기 때문에 자기인식의 방법을 갖지 않는 생명활동이다. ①+③(순환성+관계성)만의 생명은, 천국이나 지옥처럼 사후(死後)의 세계로서 상상되는 데 그치므로 삼중 구조의 생명과는 접
점을 갖지 못한다. ②+③(다양성+관계성)만의 생명은,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다. 외부의 지령에 의존하여 에너지를 보급받고 엔트로피를 폐기하는 시스템이다. 정상계방계(定常開放系)가 아니다. 따라서 지구를 우주선 지구호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에너지의 보급과 엔트로피의 폐기가 불가능해지면 이 생명은 활동 정지에 빠져버린다.

사회과학에서 본 현실의 생명활동은, 이러한 삼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회과학의 연구는, 삼중 구조를 지닌 특이한 생명활동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특권적인 위치를 확인하는 바탕위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명을 삼중 구조로 생각함으로써 전체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길이 열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자연과 사회과학으로 분단된 학문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지역자립의 경제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생명계의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한다. 생활의 본거(本據)로서의 지역을 파악할 때 희소성․교환가치에서 출발할 이유는 없다. 생명계의 유지․재생산에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생명계의 고찰에서 획득할 수 있는 세 가지 특질인 순환성․다양성․관계성은 추상적이지만 더욱 넓은 의미의 ‘지역성’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개념이다. 효율성․착취율보다 더욱 기초적인 범주이다. 경제 과정으로부터의 자립을 지향할 때, 지역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것이 어떠한 순환성․다양성․관계성인지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역의 의미도 명확해진다. 자립을 지향하는 지역의 범위는, 생활 과정의 순환성․다양성․관계성의 폭에 따라 결정된다. 이때 단일한 지역성을 상정할 수 없다. 지역 역시 생명계와 같이 다중(多重)의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또 다중 구조를 가짐으로써 자립을 보장할 수도 있다. 생명계와
연관된 경제 과정을 안정적으로 존속시키는 것이 지역자립의 과제이다. 지역의 구체적인 특수성에 따라 ① 순환이 정체되지 않을까 ② 다양한 활동이 해체되지 않을까 ③ 사회관계가 일면적(一面的)으로 되지 않을까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中村尙司, 1993, 25-28)

  4. 간디

    1) {힌두 스와라지}

간디는 ‘스와라지’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Home-Rule’과 ‘Self-Rule’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Home-Rule이 자기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다스리는 정치적 자치를 말한다면, Self-Rule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는 개인적 각성과 행동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모두 자치(自治)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는데, 간디는 정치적, 민족적 자치를 이루기 위해서
는 먼저 개인적 자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힌두 스와라지(Hindu Swaraj) 에서 강조하고 있다.(간디, 2002, 20-21)

간디의 힌두 스와라지 (1909)는 그가 아직 남아프리카에서 활동 중이던 때에 쓴 소책자이지만, 이 책은 생애 마지막까지 간디가 견지하였던 문명관과 사회경제사상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기념할 만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간디는 1945년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인도가 그리고 세계가,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려면, 조만간 우리들이 마을, 궁전이 아니라 오두막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우리들은 마을생활의 단순 소박성에서만 진리와 비폭력의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요지는 각자가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종철, 2003, 15-16)

간디에게 ‘자유 인도’의 핵심은 자기들의 삶의 운영 방식을 결정할 힘을 갖고 있는 마을자치(스와라지)였다. 힌두 스와라지 를 통하여 간디가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농촌마을 중심의 자치, 자급, 자립적 민주주의야말로 인도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생활 방식으로서 영구적으로 지속가능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김종철, 2003, 16)

2) {Village Swaraj}

위와 같은 간디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저서가 {Village Swaraj}이다. 우리말로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번역된 이 책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간디, 2006)

* 마하트마 간디는 마을 판차야트(선출된 몇 명으로 구성되어 마을 일을 돌보는 마을회의) 조직을 통한 경제와 정치권력의 분산을 강하게 호소했다. 그는 인도의 판차야트 체계가 과학적으로 작용하면 시골의 사회적, 경제적 힘을 구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침입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인도의 시골에서 열의와 활기를 가지고 시작된 ‘판챠야트 라지’의 실험은 간디가 제시한 마을 스와라지의 목표를 향한 옳은 발걸음이다.(4∼5쪽)

* 간디는 마을 스와라지를 국가 없는 민주주의라는 그의 이상에 접근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간디는 국가 없는 민주주의라는 이상의 실제적 유용성을 깨달았고 ‘국가가 시들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분산시키는’ 마을 스와라지를 제시하였다.(13쪽)

* 진정한 민주주의, 즉 스와라지는 진정한 정치 시스템의 궁극적인 원동력인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성장을 위해 일한다.(14쪽)

* 마을 스와라지는 많은 정치적 병폐들에 대해 강력한 치유책을 제공하는 진정하고 힘찬 민주주의이다. 간디는 판차야트라지, 즉 완전한 정치권력을 가진 비폭력적이고 자족적인 경제 단위인 마을 스와라지의 모습과 프로그램을 구상하였다. 모든 마을은 하나의 공화국 혹은 전권을 가진 판차야트가 될 것이다. 당연히 모든 마을은 자립적이고 전 세계를 상대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일들을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단위이다. 마을 스와라지에서 궁극적인 권력은 개인에게 있을 것이다.(14∼16쪽)

* 비폭력적인 경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간디는 산업주의, 중앙집중화된 산업체들 그리고 불필요한 기계들을 배제하였다. 그는 도시를 마을 착취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는 미래세계의 희망은, 아무런 강제와 무력이 없고 모든 활동은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고 말했다. 마을 스와라지에서는 전체가 사랑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19∼20쪽)

* 스와라지를 진실과 아힘사(비폭력)만을 통해 얻고 구축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게 되어야만 실현될 것이다. (31쪽)

* 마을 스와라지의 기본 원칙들: ① 사람 우위-완전 고용 ② 생계를 위한 노동 ③ 평등 ④ 신탁(trusteeship) ⑤ 탈중심화 ⑥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⑦ 자급자족 ⑧ 협동 ⑨ 불복종 ⑩ 종교의 평등 ⑪ 판차야트 라지 ⑫ 나이탈림(수공업 일을 통한 국민교육)(64∼75쪽)

    3) 마을 스와라지를 지키는 평화여단

간디는 마을 스와라지를 공화국으로 간주한다. 간디가 생각하는 스와라지는 단순한 마을이 아니다. 공화국의 역할도 겸하는 정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스와라지라는 공화국을 지킬 장치가 필요하다. 스와라지의 보호장치로서 우선 군대를 떠올릴 수 있으나, 간디는 군대를 거부한다. 정규군이 아니면서도 경찰․군대를 대신하는 비폭력 평화여단이 마을 스와라지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기를 소유하지 않은 평화여단이 스와라지의 평화 지킴이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마을의 평화를 지키는) 평화여단에 관한 간디의 구상이 실린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의 제26장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간디, 2006, 270-276)
* 얼마 전에 나는 평화여단 구성을 제안했다. 폭동, 특히 종교적 대립으로 인한 폭동을 목숨을 걸고 막기 위한 것이다. 내 생각은 이 여단이 경찰이나 군대까지도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완성된 평화여단의 구성원은 어떤 자격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① 그는(평화여단의 구성원은) 비폭력에 대한 살아 있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② 이 평화의 사자(使者)는 지구상의 모든 주요 종교에 대해서 같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③ 이 평화를 위한 일은 그 지역 사람이 그 지역에서만 할 수 있다. ④ 이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무리를 이루어서도 할 수 있다. ⑤ 이 평화의 사자는 직접적인 봉사를 통해 그 지역이나 선택된 집단 안에서 사람들과 접촉을 갖고 있을 것이므로…이방인이 폭동을 진압하러 온 것과는 다를 것이다. ⑥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은 흠잡을 데 없는 성품을 갖고 있어야 하고, 엄격하게 공정한 인물로 알려져 있어야 한다. ⑦ 다가오는 폭풍에 대한 전조를 감지하면 평화여단은 일이 터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려고 하는 일을 조정하려 노력할 것이다. ⑧ 이 운동이 확산되면 늘 이 일을 하는 일꾼들이 있는 것이 좋을 테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⑨ 이 여단의 구성원들이 입는 특색 있는 복장이 있어서 시간이 가면 그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비폭력적인 국가에서도 경찰력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경찰은, 현재의 경찰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일 것이다. 그 구성원들은 비폭력을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경찰은 어떤 종류의 무기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일은 아주 드물 것이다. 비폭력 부대가 효율적이 되려면 규모가 작아야 한다. 비폭력 부대의 구성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다. 신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평화여단은 무기력할 것이다.

그러면 평화여단의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 자원자는 어떤 무기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② 부대 구성원은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③ 자원자는 누구나 붕대, 가위, 바늘, 실, 외과용 칼 등의 응급처치 도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④ 그는 다친 사람을 운반할 줄 알아야 한다. ⑤ 그는 불을 끄는 법, 화재지역에 안전하게 들어가는 법, 조난구조를 위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는 법, 또 짐을 지고서나 혼자서나 안전하게 내려오는 법을 알아야 한다. ⑥ 그는 자기 지역의 모든 주민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자체가 봉사이다. ⑦ 그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라마나마’를 암송해야 하며, 믿음을 갖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간디는 위와 같이 ‘스와라지’라는 풀뿌리 평화 공동체의 자치․자위를 위하여 평화여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힘사(비폭력)의 힘으로 무장한 평화여단이 스와라지의 평화를 보장하지, 국가권력의 힘이 반영되는 군대나 경찰이 스와라지의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간디의 생각은, 종교분쟁이 심각한 인도와 같은 나라의 풀뿌리 평화 공동체를 이룩하는 사상적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현대 국가에서 간디의 이와 같은 발상이 통용될지 의문이며, 통용되기 어려운 만큼 풀뿌리 평화 공동체를 만들기 어렵다.

Ⅱ. 작은 매듭

지금까지 풀뿌리 평화 공동체의 논리적 근거를 밝히기 위해 김종철 교수․김지하 선생․나카무라 히사시 교수․간디의 저작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이들의 저작을 통해, 지역의 생태․생명․평화 공동체에 관한 발상을 얻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저작을 통하지 않고도 우리들의 생활현장에서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들의 생활세계가 ‘시장-자본-국가의 3각 파도’에 휩쓸리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공동체의 유산, 즉 향약․두레․품앗이․계(契)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이제 향약․두레․품앗이․계를 통해 마을의 평화 공동체를 이룩한 선조들의 지혜를 되살리며, 21세기의 반(反)평화적인 ‘시장-자본-국가 공동체’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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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14호에 실린 필자의 글「잘사는 평화 (11)」(2008.3.13)을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