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
중립 지향적인 군사구조 ➁
앞에서 드러난 ①항과 ②항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하여 ①항과 관련된 문제를 먼저 제기한다.
1. 고종 정부의 군사력이 부족하여 중립화에 실패했나
고종은 1903년 8월 러일 간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듣고 러일 양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유사시 한국을 ‘전시 중립국’으로 간주해줄 것을 요청하는 외교교섭을 추진하였지만 양국은 이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일본은 전시국제법에 있어서 중립국 선언은 스스로 이를 지킬 결심과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이 과연 그러한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빈정거렸다.(정용화 외, 62)
[이에 앞선] 조선 정부의 제1차 영세중립 시도는 조병식(趙秉式) 특사를 통해 1900년 8월 일본 정계의 중진 近衛篤麿(‘고노에 아즈마로’라고 읽기도 하고 ‘고에이 도구마’로 읽기도 함)에게 조선의 영세중립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부터이다. 이에 대해 近衛篤麿는 조선의 중립국 준비 부족을 지적하면서 ‘국방은 일본에 위임하고, 조선은 내치에 전념하라’는 요구와 함께 거절했다.(강종일, 216)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近衛篤麿의 저서『近衛篤麿日記』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을 읽으면, 近衛篤麿가 조선 정부의 중립화 제안을 거부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중립국이라는 것은 적어도 자위의 힘이 없으면 안 되며, 그리고 여러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그 나라의 존폐는 곧바로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에 미치는 바여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나라가 야심을 그 중립국에 두는 것이 실제로 드러나면, 다른 여러 나라는 연합하여 그를 토벌하는 약속을 맺는 것이다. 조선은 이 상태에 적합한 나라인가 하면 그렇지 않으니, 조선에 이해관계를 가진 것은 러시아와 일본뿐이다.…만약 러시아가 야심을 마음대로 하려 해도, 열국은 전쟁이란 도박을 해서까지 러시아와 싸울 리 없다. 그 경우 다만 물러나서 수행할 따름이다. 그때가 되어 전쟁이라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일본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러일 양국의 이해관계로 수렴되므로 다국 간에 보장하는 중립화의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조선정부의 자위력(군사력 포함) 부족, 다국 간의 중립화 보장 체계가 없는 점, 러일 양국만이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 때문에 조선 정부의 중립화 제안을 近衛篤麿가 거부했다는 것이다. 자위력 부족만이 거부의 이유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코스타리카와 같이 자위력이 부족해도 뛰어난 중립외교를 통해 중립국의 지위를 향유할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어쨌든 자위력 부족도 중립화 실패의 원인중의 하나이므로, 고종 정부 당시의 군사력을 소개한 자료를 인용한다.
1) 조선의 군사력
동학농민혁명(1894년) 당시의 조선 중앙군 병력은 3,000명에 불과하였으며, 심지어 동학농민군에 대패하여 청국에 원병을 요청할 정도였던 것이다. 1895년 9월~1900년 10월 사이의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한 총병력수는 20,300명이었다. 그 후 조선조 후기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했다는 1900년 10월~1905년 3월 사이의 총병력수는 25,200명(중앙군 9,900명, 지방군 15,300명)이었다. 이중 유럽식으로 훈련된 군인의 수는 17,000명 정도라 하며 이 시기의 병력 증가는 국방이 아닌 의병 진압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일본의 병력은 60만 명인데 비하여, 조선은 2만 5천명으로 일본의 1/24에 불과한 병력이었다. 일본이 13개 사단으로 확장하고 있을 때, 조선은 1개 여단 조차도 설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00년 당시의 전체 예산액 5,558,972圓 중에서 군부소관비(軍部所管費)는 1,636,704圓으로서 29.4%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29% 정도에 달하는 군사비도 절대적인 재정파탄 상태에서의 군사비 지출이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군사력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군 1개 사단을 주둔시켜 조선의 방비 임무를 가지게 하여 조선 군부의 군령권(軍令權)은 공허화되었고, 1907년 6월에는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고 말았다.
스위스의 경우에, 1647년에 3만 6천명으로 연방군을 결성하여 무장중립의 전통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1907년에는 20만 예비군을 포함한 28만의 군병력을 창설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이 조선조의 군사력은 국가방위보다는 반란진압에 목적이 있었던 관계로, 언제든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을 방지하고 중립을 유지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유명철, 116~117)
위의 글에서 나열된 수치를 단순하게 비교하면, 1905년의 조선 병력은 25,200명(훈련된 병사는 17,000명)인데 비하여, 1907년의 스위스 병력은 28만 명으로 11배 많고, 일본은 60만 명으로 24배가 많다. 달리 평가하면 조선보다 11배 많은 스위스 병력은 영세중립 국가를 유지하는 평화군 역할을 했고, 24배 많은 일본군은 조선을 점령하는 점령군이 되었다. 일본의 점령군보다 스위스의 평화군이 바람직스럽기 때문에 28만 명이 중립국가의 병력 숫자로 적절하다는 하나의 기준이 설정되었다.
그러면 28만 명이라는 기준점을 중심으로 현재의 남북한 병력 179만 명(북한 110만 명, 남한 69만 명; 2009년판 일본 방위백서 35쪽 참조)을 대비하면 6.4배가 된다. 스위스보다 6.4배나 많은 군대를 보유한 남북한이 중립화 통일을 할 테니 국제적인 보장을 해달라고 주변 국가들에 요청할 때 흔쾌하게 동의해줄까? 179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핵무장한(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통일 한국이 등장하는 것을 주변강대국들이 꺼려하여 중립화 통일을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다. 1세기 전에 조선의 군대가 너무 적어서 중립화 보장을 못해주겠다던 일본이 이제는 통일한국의 병력이 자기나라 보다 7.5배가 되므로 보장을 못해준다고 거부할 것이다. 220만 명의 군대를 보유한 중국 역시 중국과 맞먹는 군대를 가진 통일한국의 중립화 통일을 보장해줄리 만무하다.
따라서 중립화 통일의 국제적인 보장을 받기 위해서라도 남북한이 병력을 대폭 감축해야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감축하면 좋을까? 스위스와 같이 20만 명으로 줄일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다른 방법은「고려민주연방제 방안」에 있다.
김일성 주석은 1980년 10월 10일에 발표한「고려민주연방제 방안」에서 “고려민주연방 공화국은 북과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고 민족연합군을 조직하며, 외래침략으로부터 민족을 보위하여야 합니다. 연방국가는 북과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를 끝장내고, 동족상쟁을 영원히 종식시키기 위하여 쌍방의 군대를 각각 10만~15만 명으로 줄여야 합니다.…고려민주연방 공화국은 중립노선을 확고히 견지하고…평화애호적인 대외정책을 실시하여야 합니다. 통일된 조선은 주변 나라들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침략위협으로 되지 않을 것이며, 국제적인 그 어떤 침략행위에도 가담하거나 협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방국가는 우리나라 영토에 다른 나라 군대의 주둔과 다른 나라 군사기지의 설치를 허용하지 말며, 핵무기의 생산과 반입, 그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조선반도를 영원한 평화지대로, 비핵지대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고 역설했다.
위의 내용을 <① 20~30만(남북한이 각각 10~15만 명)의 민족연합군이 ② 중립노선을 견지하는 연방국가의 군대로서 ③ 평화애호적인 대외정책을 실행한다. 평화애호적인 대외정책으로 ① 침략행위에 가담하지 않고 ② 외국군대의 주둔, 외국군대의 기지를 허용하지 않고 ③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비핵지대를 지향한다>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는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지침으로서 손색이 없다.
이렇게 중립노선을 실행할 20~30만의 민족연합군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탄생함으로써, 스위스의 20만 군대와 엇비슷해졌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20~30만 명이 중립화 통일에 대비한 병력수이므로, 현재의 179만 명에서 20~30만 명으로 군비축소하고 이에 걸맞는 안보 패러다임을 새로 정립하는 과제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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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강종일『고종의 대미외교』(서울, 일월서각, 2006)
* 유명철「한국 중립화론 연구」(경북대학교 박사논문, 1989년)
* 정용화 외『동아시아와 지역주의』(양평, 미래인력연구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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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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