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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군사주의, 군국주의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조짐

김승국

이 글은,『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의 [평화 누리 TV]에 실려 있는 동영상(제목;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조짐)과 관련이 있다. 이 글의 순서에 맞춰 [평화 누리 TV]에 동영상이 실려 있다. 따라서 이 글의 사진번호(‘사진 1’ 등으로 표기함)와 [평화누리 TV]의 동영상에 표기된 번호가 일치한다. 독자들이 양쪽의 번호를 대조하면서 이 글을 읽으면 필자의 논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필자 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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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기정사실화하는 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글을 쓰는 취지에 동의하지만, 군국주의 부활의 기정사실화에 토를 달기 위해 ‘조짐’이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아직 군국주의가 실체로서 부활하지 않았으므로. ‘조짐’이란 표현을 썼다. 군국주의가 부활할 징후가 엿보인다는 뜻이다.

<사진>
* 사진 1; 전선으로 떠나는 장병의 무운(武運)을 비는 문구가 적혀 있는 일장기
* 사진 2; “무운 장구(武運 長久) 하여라!”
 
필자는 현재의 일본 군사대국화 경향이 강화되어 군국주의 경향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이와 같은 ‘군사대국화~군국주의 이행’을 생각한다면, 이미 일본에 군국주의가 부활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에 대한 교정이 필요하므로 군사대국화와 군국주의를 애써 구분한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용법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이 군사대국화 경향을 강화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군국주의 단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군사대국화와 군국주의 사이에 문턱을 둔 것이다. 군비를 증강하며 군사대국화 경향을 띠는 모든 나라가 군국주의 국가는 아니라는 점을 망각하고 ‘군국주의’를 남발하면 곤란하므로 문턱을 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사대국화와 구별되는 군국주의의 개념․범주를 밝히며 이 글을 써야 마땅하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데 유용한 자료로서 손기웅의「군국주의론: 분석의 Typology」『한국정치학회보』제28집 1호(1994)를 추천한다. 이 논문의 군국주의론을 통해, 일본이 현재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검증하면 될 것이다. 손기웅 박사는 이 논문에서 자유주의적 시각의 군국주의, 맑스주의적 시각의 군국주의를 대별하면서 군국주의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면 제약상 생략한다.

손기웅 박사의 논문에서 기술하는 자유주의적인 시각으로 보아도 맑스주의적인 시각으로 보아도 현재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고 있지 않다(군․산 복합체론에 따라 일본에 군․산 복합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진단이 나오면 일본의 군국주의론이 의미를 지니지만, 일본에 군․산 복합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서, 이 논의도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일본이 현재 군사대국화의 경향을 강화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부활할 경우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를 예상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평화구축 가능성을 예견하는데 필수적이다. 과거의 메이지 유신이후 1945년 패망 이전까지의 군국주의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군국주의를 창출 할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어떤 군국주의를 초래할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군국주의 부활의 징후는, 현재의 군사대국화 경향을 통해서도 읽어낼 수 있다. 

여기에서 군사대국화에서 군국주의로 나아갈 조짐을 읽는 징후 읽기가 중요하다. 현재 엿보이는 군국주의 부활의 조짐 중에서 상당 부분은 ‘과거의 군국주의(메이지 유신~1945년의 패망 사이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징후이다. 따라서 이 글은 맨 처음에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을 다룬 뒤, 군사대국화 경향 속에서 군국주의 부활의 징후를 읽는 순서를 취한다.

Ⅰ.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

  1. 안보와 자위대에 부과되었던 ‘제약’의 파기

1950년대에 자위대를 발족시키고 방위력을 증강시키는 가운데서도, 일본의 방위정책에는 나름대로의 제약이 가해져 있었다. 일본 정부는 헌법 9조와의 ‘정합성’을 확보할 필요성과 야당과 진보세력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전수(專守) 방위’를 비롯한 방위정책상의 여러 제약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① 전수방위 ② 비(非) 군사 대국화(大國化) ③ 해외파병의 금지 ④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금지 ⑤ 비핵(非核) 3원칙 ⑥ 무기수출 금지 3원칙 ⑦ 군사비의 GNP 1% 미만 원칙 등이 그러한 제약들이었다. 그러나 1978년의 미-일 방위협력 가이드라인[guideline; 지침]에 이은 1997년의 ‘신(新) 가이드라인’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원칙이 깨지기 시작했다.

‘신 가이드라인’의 요점은 ‘주변 사태시의 미․일 군사협력’에 있다. ‘주변 사태’란 아시아 태평양 전역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일본은 이 지역에서 미군이 전개하는 군사행동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군사체제를 구축하였다. 미․일 동맹의 틀을 통해 일본 자체의 군사행동 범위가 일본 영토의 ‘전수 방위’가 아닌 아시아 태평양 전 지역에로 확대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신 가이드라인’에서의 미․일 협력은 자위대의 협력만이 아니라 일본의 국가행정 기구와 지방 자치제 등 국가와 국민의 총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이 “헌법 9조 2항의 ‘전력 불보지(戰力 不保持)’를 위반한 단계를 넘어, 9조 1항이 금하고 있는 ‘무력행사’를 수행하는 나라에로의 전환을 시작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같은 ‘신 가이드라인’ 체제의 법적 정비를 완결한 것이 1999년 5월에 성립된 ‘주변 사태 관련 3법안’이었다. 그중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것이 주변사태(북한의 유사시 등)에 있어서 미군의 군사행동에 일본이 전면적으로 협력할 것을 규정한 ‘주변사태 조치법’이다.

‘주변 사태법’이 통과된 이후 일본의 군사 대국화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주변 사태법’이 통과된 직후 ‘국기․국가법’이 제정되는 등 ‘네오-내셔널리즘(Neo-Nationalism)’의 동향이 강화되고, 특히 국회에 ‘헌법 조사회’가 설치되어 본격적인 헌법개정 문제가 구체적인 일정과 더불어 정치과제로 등장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각 정당과 자민당의 각 정파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각종 개헌안을 제출해 놓고 있다. 다양한 개정안들은 모두 9조와 전문(前文)의 개정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어 자위를 위한 선제(先制) 공격 가능성을 내포한 ‘유사(有事) 관련 3법안’이 2003년 6월에 통과됨으로써 ‘평화헌법의 틀을 넘어선 군비확장’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1) 군비확장
 
      ① 일본의 방위비(2008년도); 4조 7,800억 엔(국내 총생산의 0.907%).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71.7조원(1백 엔=1,500원으로 계산함)

<표1; 주요 국가의 국방지출(회계 연도; 생략)

      ② 일본의 방위산업 규모(2004년도)
* 방위생산액(억 엔)
선박; 2,037/ 항공기 5,429/ 차량 286/ 무기탄약 3,397/ 電氣通信機 3,136/ 석유제품 804
* 방위산업이 공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율(%)
선박; 8.34/ 항공기; 60.12/ 차량; 0.06/ 무기탄약; 87.22/ 전기통신기; 0.63/ 석유제품; 0.79
 
Ⅱ.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국가의 성격을 변환
  
  1.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개헌론의 대두

냉전체제 붕괴 후 소련의 위협이 크게 감소되자, 미․일 안보조약 및 자위대의 존재에 대한 재검토론이 대두되었고, 보수 지배층은 대응논리 마련에 고심하였다. 마침 걸프전쟁은 그들에게 돌파구를 제공했으며, 걸프전쟁을 계기로 군비증강이나 자위대 해외 파병의 논리에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즉, 소련 위협론을 대신하여, ‘아랍의 석유는 일본경제의 생명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적 국제공헌이 필요하다’는 노골적인 권익 옹호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국제공헌은 곧바로 평화헌법에 대한 개정논의로 연결된다.

일본정부는 국제공헌을 앞세워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고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가능하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사진>
* 사진 3; 육상 자위대원
* 사진 4; 아파치 롱보우 대전차 헬기
* 사진 5; 자위대의 전투기
* 사진 6; 해상 자위대 함정
* 사진 7; XASM3 초음속 대함 유도탄을 장착한 항공 자위대 F-2A 지원 전투기

  2. 평화헌법 제9조의 개악 움직임

일본국 헌법 제9조는 일본헌법의 3대 원칙 중 하나인 평화주의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조항이며, ‘전쟁 포기’ ‘전력 무보유(戰力 無保有)’ ‘교전권의 부정’ 등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일본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헌법 9조의 내용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윽고 일본 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헌법 개정의 움직임은 일본이 미국의 뜻에 따라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꾸려는 데 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의 용인,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무력행사 등 헌법의 중요한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또한 비핵 3원칙이나 무기수출 금지 등의 중요한 정책도 무효화하려고 한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헌법을 무시해왔고 자위대라는 ‘군대’를 세계 각지에 파병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평화헌법 개악의 움직임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아, 헌법 9조를 지키려는 ‘9조회(9條の會)’ 7,500개가 헌법개악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9조의 회 운동에 힘입은 듯, 헌법 개악을 반대하는 여론이 찬성하는 여론을 넘어서고 있다.

  3. 방위청이 방위성으로 승격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 실시 이후 방위분야를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2007년 1월 9일에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시켰다.

  4. 자위대를 자위군으로 변환하기 위한 노력

일본 집권 자민당 신헌법기초위원회는 2005년 8월 1일 '자위군 보유'와 '해외 무력행사'를 용인하는 헌법개정초안 1차안을 발표했다. 일본 정당이 개헌안을 조문 형태로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개헌초안은 ‘전력보유 금지’를 정한 헌법 제9조를 전면 개정하고 자위군 보유를 명기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초안은 우선 헌법 2장의 명칭인 ‘전쟁포기’를 ‘안전보장’으로 바꾸고 조문에서도 “전쟁과 그 외의 무력행사 또는 무력행사에 의한 위협을 영구히 포기한다”라는 표현을 “영구히 행하지 않는다”로 개정, ‘포기’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이번에 가장 많이 손을 본 헌법 제9조 2항은 원래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일본의 ‘평화주의 원칙’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개헌초안에서는 ‘전력보유 금지’와 ‘교전권 부인’에 대한 내용이 완전히 삭제되고 “국가의 평화와 독립,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위군을 보유한다”며 ‘자위군 보유’를 명기했다.
자위군의 임무도 일본 방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평화 및 안전 확보”로 규정, 자위대의 해외 무력행사를 사실상 용인했다.

<참고 자료>
    ① 자위대의 戰力(2007년도)
* 육상 자위대; 병력 148,631명/ 전차 848대/ 장갑차 967대/ 주요 火砲; 620문/ 작전용 항공기; 418機/ 地對空誘導彈(改良 Hawk, 新 中距離 對空 미사일); 8個群
* 해상 자위대; 병력 44,495명/ 함정; 146척(호위함 50척, 잠수함 16척, 기타 80척)/ 작전용 항공기; 165機
* 항공 자위대; 병력 45,733명/ 작전용 항공기 372機(전투기 282, 정찰기 15, 수송기 55, 공중 급유․수송기 4, 早期 警戒機 16)/ 地對空誘導彈 6群

Ⅲ. 군사 대국화 경향 속의 군국주의 부활 조짐
  
  1. 일본인의 국방의식 변화

평화헌법 개악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국제공헌론의 논리가 일본 국민들에게 쉽게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0~80년대의 경제성장과 함께 나타난 평화의식의 변질, 즉 일본인의 평화의식의 허약성에서 찾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고도 경제성장 이후 현상긍정의 보수적 성향이 증대하던 일반 국민의 의식은  냉전 붕괴 이후 이에 더하여 대국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는 점과, 일본 일반국민의 반전․평화의식은 가해자 性이 결여된 채 전쟁의 피해자 性에 주로 근거하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안보관은 전후 오랜 기간 가상적국(假想敵國)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국 평화주의(一國 平和主義)’였다. 그러나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일․북 정상회담을 고비로 북한이라는 ‘위험’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동시다발 테러로 미국인들의 안보관이 크게 바뀐 것처럼, 일본은 (북한의) 납치라는 국가테러가 밝혀진 9․17이 전환점이 됐다. 그리고 이에 앞선 1998년에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일본 쪽으로 발사한 사건, 1999년 동해의 노도(能登)반도 부근에서 북한 공작선을 해상자위대가 추적한 사건, 2001년 동중국해에서 북한 공작선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의 교전 등 9.11 동시다발 테러를 전후해 북한과 군사면에서 접촉이 늘었다. 

이와 같이 북한과의 군사적인 마찰이 증가하는 가운데 터진 일본인 ‘납치’ 사건은 일본 국민들의 북한 혐오감을 더욱 부추겼다. 한편 북한 혐오감을 정치군사적으로 악용한 일본 지배세력의 세뇌공작에 힘입어 북한 위협론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이는 미일 동맹의 북한공략(붕괴) 전략의 이데올로기로 승화되었다.    

일본인의 국방의식․안보관의 변화가 북한 위협론으로 응집되면서 미․일 동맹의 북한공략 전략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천황제

북한 위협론 중심의 안보관 변화가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을 강화시키면서 군국주의로 나아갈 조짐이 보인다. 현재는 군사대국화에서 군국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군국주의 부활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기 현상이 ‘자위대의 자위군에로의 변화’와 맞물려 진행된다면 일본 군대의 성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청된다. 자위군이라는 일본 군대의 장래에 대한 예측이 요청된다. 즉 자위군이라는 일본 군대가 천황의 군대(皇軍)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새로운 군국주의 군대로 변모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본 군대의 장래를 점치기 어렵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천황제이다. 지금은 상징적인 의미의 천황제이지만, 주변 사태로 인한 일본 유사시(미․일 동맹의 대북 전쟁/ 북한의 정변 등) 자위군이 천황제와 결합되어 천황의 군대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사진>
* 사진 8; 분재를 둘러보고 있는 천황 부부
* 사진 9; 천황부부

이처럼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조짐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천황제는 필수적인 연구대상이다. 다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자위대~자위군~천황의 군대에로의 이행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皇軍이 다시 살아나는) 천황제의 군사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사회의 근간에 가로놓여 있는 천황제가 태평양 전쟁의 기억 속에 어떠한 형태로 남아 있는지, 천황제의 이데올로기가 일본인의 사회의식 속에 어떠한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연구하면 천황제의 군사화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가늠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일본 문화의 핵심 중의 하나인 천황제가 군국주의 문화와 연결되는 고리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사진>
* 사진 10; 가미가제 공격장면
* 사진 11; 가미가제 병사
* 사진 12; 가미가제 조종사
* 사진 13; 미주리호 함상에 곤두박질하고 가미가제 전투기

위와 관련하여 천황군대(皇軍)에 대한 일본인의 의식, 가미가제(神風; 자살 특공대) 의식의 사회화, 사무라이의 할복자살과 군국주의 의식의 관련성, 일본 군국주의의 기원<정토(淨土) 불교․호국불교, 선(禪; Zen)과 武의 관련성, 武의 문화, 사무라이와 벚꽃(櫻)의 관련성, 日本刀 숭앙>, 천황제와 관련이 깊은 히노마루(日の丸; 일장기)게양․기미가요(君が代) 강요의 배경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사진>
* 사진 14; 일장기
 
  3. 야스쿠니 신사 참배

현재 군국주의 부활의 조짐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이다. 한국․중국의 국가․국민의 저항을 물리치고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일본 지배계급의 행태에서  군국주의 부활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사진>
* 사진 15; 입구 기둥 뒤편에 보이는 야스쿠니 신사
* 사진 16; 야스쿠니 신사의 전경
* 사진 17;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장면
 
야스쿠니 신사는 민초들의 신도(神道)를 국가종교화한 것이며, 전쟁신(戰爭神)을 미화하는 군국주의이데올로기 장치이다. 그러므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는 군국주의 부활의 의지를 내보이는 정치적인 행위이다.

여기에서 신사(神社)의 국가종교화-군국주의화의 동시진행이 과거(명치유신 이후 皇軍에 의한 조선 점령․태평양 전쟁)와 같이 이루어질지의 여부도 관심거리이다.

<사진>
* 사진 18; 일반 신사의 모습 1
* 사진 19; 일반 신사의 모습 2
* 사진 20; 일반 신사의 모습 3
* 사진 21; 신사의 3대 요소(거울, 새끼 동아 줄, 흰 종이 장식) 중 하나인 거울
* 사진 22; 흰 종이 장식
* 사진 23; 새끼 동아줄, 국화 문양, 흰 종이 장식이 어울려 있다
* 사진 24; 신사 입구의 기둥 문을 통해 들어온 참배객들이 첫 번째 의식으로 밧줄에 매달린 종을 울려 神을 불러들인다.
* 사진 25; 밧줄이 아닌 천에 매달린 종을 울리기도 한다.

유슈칸(遊就館; 천황을 위해 죽은 전사들을 전쟁신으로 받들어 모신 ‘야스쿠니 신사의 군사박물관’)에서 ‘천황에 의한 전쟁’을 미화하는 바탕에 군국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큐칸 사진>
* 사진 26; 유슈칸 전경
* 사진 27; 전쟁신의 영정 코너
* 사진 28; 전쟁신들의 사진

<탁경현 사진>
* 사진 29; 전투복장을 입은 탁경현의 모습
* 사진 30; 탁경현이 몰았던 군용 비행기 

4. 우익(右翼)

<사진>
* 사진 31; 야스쿠니 신사 앞에 집결한 우익들
* 사진 32;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시위중인 우익들

‘황군(皇軍)의 군국주의 향수를 달랠 길이 없어서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옛 일본군 복장을 입고 망동을 부리는’ 일본 우익의 정체성(identity)․사고체계․행동양태․조직계통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익들의 맹동이 일본의 보수우익 정치를 통하여 자위군의 황군화(皇軍化)로 연결되는 경로를 예측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사진>
* 사진 33; 우익들의 선전차
* 사진 34; 우익들의 가두 선전차량
* 사진 35; 우익의 선전차량
* 사진 36; “일본도 핵무장 하자”는 선전문구가 보인다

위와 같은 군국주의 부활의 징후를 더욱 구체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① 일본인의 전쟁관 ② 일본인의 사생관(死生觀)-순국관(殉國觀) ③ 일본인의 집단의식 ④ 일본인의 인간관계-나까마(仲間) 관계 ⑤ 일본의 사회 구성에 관한 논란(縱의 사회? 橫의 사회?) ⑥ 일본인의 정신분석-의존성(甘え) 등에 관한 설명이 필수적이지만, 지면 제약상 생략한다.

<사진>
* 사진 37;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뒤에 조총련 건물 앞에서 시위중인 우익들

Ⅳ. 맺는말

앞에서 기술한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조짐은, 皇軍의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을 회상케 한다. 황군(皇軍)이 주도한 조선점령~대동아 전쟁의 망령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으로 고난을 받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민들은 일본 군국주의가 부활하는 조짐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이 아직은 미국의 견제를 받으며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군국주의로 나아가는데 제약이 크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경제 위기를 동반한 제국 미국의 추락’이라는 세기적인 변환기를 틈탄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부활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굴레에서 벗어난 일본 지배계급의 군국주의 부활이 이루어진다면,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의 화마(火魔)에 휩싸일 것이다. 군국주의 부활의 신호탄인 군사대국화 자체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군국주의 부활 조짐이 뚜렷해질수록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강도가 높아져갈 것이므로, 이를 저지하는 평화운동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 군국주의 부활 조짐을 차단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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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43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