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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화 통일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4) --- 사회적인 조건 ① 김승국 1.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 어느 나라이든지 대외적으로 중립외교를 펼치려면, 국내사회가 평화로워야한다. ‘사회적 평화’가 중립외교의 필요조건이다. 국내에서 사회적 평화가 유지되어야 위정자들이 대외정책으로서 중립외교를 전개할 수 있다. ‘사회적 평화’가 좀 낮선 용어이므로, ‘평화 지향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평화의 상태’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다. 더욱이 중립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내의 사회적 평화가 필수적이며, 중립국가가 된 다음에 사회적 평화가 강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코스타리카,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의 국가들은, 중립국가가 되기 이전에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중립국가가 된 이후에 사회적 평화가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대내적으로 사회적 ..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3) --- 역사적인 조건 ⑪ 김승국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수립된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아, 노론-친일파가 온존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상당수는 친미파로 ‘전향’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노론의 모화(慕華)가 친일파의 모일(慕日), 친미파의 모미(慕美)로 바뀌며 숭배(慕)의 대상이 중국(華)~일본(日)~미국(美)으로 바뀌었을 뿐, 외세(종주국)에 사대하는 몸짓은 그대로이다. 그런 몸짓을 하는 몸체의 원조가,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이다. 서인 중에서도 최명길의 주화론을 꺾은 척화파가 원조중의 원조이다. 다시 말하면 ‘서인 척화파’의 斥和~노론의 慕華~친일파의 慕日~친미파의 慕美로 이어지는 사대주의가 자주ㆍ중립 외교(자주 노선 없이 중립화를 이룰 수 없고, 자주 외교.. 더보기
코스타리카의 비무장 영세중립---남북통일에 주는 함의ㆍ시사점 김승국 코스타리카의 정식명칭은 Republica de Costa Rica이고 통칭은 Costa Rica이다. Costa Rica는「풍부한(Rica) 해안(Costa)」이라는 뜻이며,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이 땅에 상륙했을 때 조우한 先住民(인디헤나; Indígena)이 금세공(金細工)의 장식품을 몸이 지니고 있었던 데에서 이 이름이 붙었다. 공식적인 영어표기는 Republic of Costa Rica이고 통칭은 Costa Rica이다. 우리말로 ‘코스타리카 공화국’이라고 표기하면 정확하며 이 글에서는 ‘코스타리카’라는 국명을 사용한다. 중앙 아메리카 남부에 위치하는 이 나라는, 북쪽의 니카라과, 남동쪽의 파나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남쪽은 태평양을 북쪽은 카리브해를 향하고 ..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2) ---역사적인 조건 ⑩ 김승국 1. ‘중립외교의 이정표’를 가로막는 차단막 최명길은 호란(정묘호란ㆍ병자호란)의 위기 극복 대안으로 변통(變通)의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이으려 했다. 변통이란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에 맞추어 때로는 명분을 굽혀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명나라의 적인 후금과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앞날을 대비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이 추구한 실리외교를 조금 절충하여 ‘친명(親明)’의 관계는 유지하고 ‘和金[후금과의 和親]’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이화, 318) 이렇게 광해군 중립외교를 변용한 최명길의 ‘변통’은 고집불통의 척화파에 의해 단절되었다. 최명길은 청의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섰다...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1) ---역사적인 조건 ⑨ 김승국 앞의 글에서 주화ㆍ척화의 논쟁을 해석학적으로 이해하면서 중립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최명길ㆍ김상헌의 和-戰-守 논쟁은 오히려 변증법적이다. 和와 戰은 안티테제(Anti These)인데 어떻게 ‘守(백성의 목숨ㆍ민족의 생명ㆍ임금의 목숨ㆍ사직을 지킴)’라는 Synthese로 수렴할 것인가의 논쟁이어서 변증법적이다. 기본적으로 和를 These로 삼는 최명길과 戰을 These로 삼는 김상헌의 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두 사람 사이의 이해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하기 힘들다. ‘和(청나라와의 강화)=降(항복)’이라는 김상헌은 ‘戰해야 和의 길이 열린다’는 모순 속에서 守를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최명길은 ‘和=降’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고 和를 통해..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0) ---역사적인 조건 ⑧ 김승국 남한산성 논쟁의 텍스트(Text)를 해석학적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주화파ㆍ척화파의 ‘화(和)’에서 중립의 가치를 찾는 숙제가 남아 있다. 이해는 어린아이의 옹알거림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햄릿’이나 ‘이성 비판’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른다. 거석들, 대리석, 음악적으로 채색된 음색, 몸짓, 단어, 문자, 행위들, 경제 규정이나 헌법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정신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해석을 필요로 한다.(빌헬름 딜타이, 36) 남한산성 논쟁의 주역인 최명길과 김상헌의 몸짓, 말투, 음색, 일거수 일투족, 옹알거림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해석을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의 격렬한 논쟁 속에 스며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의 차이, 세계관ㆍ이념의 차이, 논쟁을 위해 사용하는 한자 단어, 논쟁이 기록..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8) ---역사적인 조건 ⑥ 김승국 1. 광해군의 국제감각을 이어받은 최명길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지 5년 후인 1627년에 후금의 군사가 물밀듯 밀려와 한양을 함락시키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임금인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끝내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인조 정부는 맹약을 어기고 계속 명(명나라)을 지원하면서 후금을 배반했다. 이에 후금은 사신을 보내 강경하게 조선을 힐책하자 후금의 사신을 죽여 우리의 뜻을 보이자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환을 없앤다는 정책에 따라 1636년 조선을 점령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두 전란 때 광해군은 강화도와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이런 현실을 지켜보았다. 이때 광해군의 심정은 어떠했을..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6) ---역사적인 조건 ④ 김승국 1. 중립외교의 핵심인 기미ㆍ자강 정책 광해군이 후금에 취했던 대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기미책(羈縻策)으로 유연한 관계를 유지하되,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나아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군사적 자강책(自强策)을 마련하는 것이다.(한명기, 2002, 72) 『광해군 일기』권 147 (광해군 11년 12월 신미)에 따르면, 광해군이 후금에 대한 대응책을 신하들에게 지시한다; “第惟我國人心兵力無可爲之勢 奈何 奈何...大槪一邊羈縻一邊自强 誠是長算 固不可廢一 皆無着實擧行之事 予切痛焉.”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인심이나 병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대개 한편으로는 기미책을 쓰고 한편으로는 자강책(自强策)을 쓰는 것은 진실로 장구한 계산으로 한 가지도 ..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9) --- 평화 유지군 김승국 1. 주한미군, ‘한반도형 언병’ 만들기의 걸림돌? 묵자는 전수방위를 위해 방어전쟁에 필요한 군사기술과 함께 무기들을 개발했다. 묵자의 제자들인 묵가 집단은 공성전(攻城戰)에 대항하는 방성전(防城戰)을 체계적으로 익히고 훈련하여 그 분야의 대가들이 되었다. 예를 들면, 묵자의 사상이 담긴『묵자』에는 성문을 지키는 방법(備城), 높은 곳의 적을 대비하는 방법(備高臨), 사다리 공격을 대비하는 방법(備梯), 수공(水攻)에 대비하는 방법(備水) 등 방어 전쟁에 필요한 대책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전 연구회, 2006, 305~306) 묵자의 전수방어 방법은 분쟁의 중립지대에서 이루어지므로 중립주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묵자가 무기를 사용했으므로 비무장 중립주의가 아닌 ‘유(有)무장 중립주의’이.. 더보기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의 머리말 김승국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한반도는 스위스⋅오스트리아와 같은 지정학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오스트리아처럼 중립국가가 되는 가운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모색하자는 논의가 거의 없다. 스위스와 같이 모범적인 연방제 아래에서 영세중립을 통해 통일을 이룬 ‘중립화 통일’의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중립화 통일이라는 평화통일의 지름길이 있는데도 기존의 국가연합⋅연방제 논의에 매몰된 통일론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2. 이 글의 구도 1) 새로운 통일방안을 제시함 지금까지 남북한에서 제기된 통일방안은 국가연합과 연방제에 중점이 있었다. 남한은 주로 국가연합에 의한 통일을, 북한은 연방제 통일을 주창했다. 6⋅15 선언의 제2항은 국..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