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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전쟁론, 전쟁관

공포의 균형

김승국

핵억지는 공포의 균형을 근거로 한다. 눈앞의 압도적인 공포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눈앞의 비참은 근대적인 삶의 결말이며, 이성이 스스로의 죄업(핵무기를 낳은 이성의 죄업)에 전율하므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게 아도르노(Adorno)가 말하는 ‘계몽의 변증법’이며, ‘계몽의 변증법’은 침묵 이상의 근원적인 공포를 안겨준다. ‘계몽의 변증법’의 현장인 아우슈비츠는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관계를 규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 School)는, 근대 계몽주의에 배태(胚胎)된 물상화(fetischism)의 도착을 통하여 나치즘이 등장했음을 강조했다. 나치즘을 딛고 일어선 핵시대의 핵억지는 나치즘에 못지않은 공포의 균형을 안겨주는데, 바로 여기에서 니힐리즘(Nihilism)의 현대적인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공포의 균형은 침묵을 강요한다. 한반도의 경우 비무장지대(DMZ) 주변의 ‘공포의 균형’은, 군사적인 핫라인(hot line)을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침묵을 강요한다. DMZ 주변의 첨예한 군사적 대치가 남북한의 대화를 차단한다. 남북한의 화해를 위한 담론의 생산을 저지하는 이 공포의 균형을 깨야 평화통일의 기운이 높아진다. 공포의 균형 아래에서 남북한 간에 의사소통이 시원치 않은 상태로는 남북한 사회 구성체의 균형(형평)을 유지할 수 없다. 남북한-미국의 군사 당국은 서로 군사적 억지전략에 따라 대화의 창구를 닫는다. 억지전략 때문에 의사소통의 기회가 막힌다. 여기에서 하버마스(Habermas)
의 실천적인 의사소통 이론으로 남북한의 대화-군비협상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북한 간 공포의 균형 아래에서도 판문점의 정전위원회 등이 가동되어 대화의 틈새가 상존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전위원회마저 가동이 정지되어 있어서 공식적인 대화의 틀이 없는 상태에서 공포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물론 남북한 장관급 회담 등의 대화 채널은 있지만 …). 그러므로 남북한 간 대화의 틈새를 점점 크게 벌이는 전술로서 남북한의 군축-평화통일 협상에 임하는 게 현명하다.(2004.12.17)

* 김승국 지음『한반도의 평화 로드맵』(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321~322쪽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