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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전쟁론, 전쟁관

전쟁구조 고찰

김승국 정리

* 이 글은, 市田良彦의 {戰爭}(東京, 新曜社, 1989)을 참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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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전쟁 일반

  1. 군신(軍神)의 유령이 배회하는 한반도

사람들은 전쟁을 미화하곤 한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전쟁기념관은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영웅을 찬양하며 상무(尙武)정신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상무정신을 반공정신으로 연결시킨다. 상무정신을 북한 반대로 연결시킨다. “무찌르자 오랑캐(북한 괴뢰?)”를 은근히 선동한다. 동족인 북한을 오랑캐로 본다.

이처럼 군신(軍神)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 군신의 유령이 배회하는 한반도. 전쟁의 마귀에 홀린 한반도 민중들. 군신이 활개 치는 한반도에서 어떻게, 어떤 사회 구성체를 만들어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야 하는가?

평화통일을 위한 사회 구성체를 내오기 위해 한국 사회의 전쟁 양식(樣式)을 분석해야 하지만, 그에 앞서 군신의 칼춤이 벌어지는 현장을 소개한다:
1998년 10월 중순경 부산 앞바다의 해군 퍼레이드에 참여한 대중들은 열광했다. 대통령도 이 행사에 참석했다. 매스컴들이 첨단 해군장비를 자랑하듯 찬양했다. 그러나 이들 장비가 최첨단 살인무기임을 언론매체는 망각했다. 특히 이 행사에 참여한 함정 가운데 핵 잠수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감각하게 첨단무기의 위력을 찬양했다. 이날 살인무기들의 퍼레이드가 하나의 쇼, 하나의 흥행, 잔치, 축제로 자리매김되었다. 최첨단 살인무기들을 보면서 축제를 벌이다니 ….

2. 의례(儀禮) 전쟁

“전사(戰士)는 본질적으로 축제를 즐긴다. 이 축제는, 전쟁의 폭력성과 죽음을 억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양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의 의례(儀禮, 퍼레이드)이다. 이러한 의례전쟁이야말로 전사들이 싸우는 양식이며, 목적 없는 탕진, 무상(無償)의 낭비이다. 때문에 의례전쟁은 현실의 전쟁에 대한 공포로부터 만들어진 보잘것없는(초라한) 회피(回避) 양식이 아니라, 전사가 임하는 전쟁터의 본질적인 양식 그 자체이다.”(市田良彦 [戰爭] 16쪽: 이하의 인용자료에서는 쪽
수만 표기함)

걸프전 이후 전쟁게임에 바탕을 둔 전쟁관이 지배적이다. 이런 전쟁관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달되면서 전쟁을 즐기는 대중심리를 확산시켜, 전쟁반대-평화옹호의 대중성 확보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심리적으로 전쟁이 상존하는 구조가 정당화되고 있다. 이런 전쟁관으로 무장한 한-미 군사동맹의 전략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북한의 유격대 전략과 한-미 동맹의 전쟁게임 전략의 대결양상이 한반도 전쟁양식의 기본적인 틀이다.

3. 전쟁을 통해 자원을 탕진함

“북아메리카 서북부에 사는 인디언은 특이한 증여(贈與)양식을 지니고 있다. 두 패로 나뉜 자들이 서로 증여하는 의식(儀式)을 거행한다. 이들은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앞에서 자신의 재산 중 가능한 한 귀중한 것을 파괴해 보이는 형식으로 의식을 진행한다. 그리고 더욱 귀중한 것을 더욱 무상(無償)으로 파괴하여 소진(消盡)한 자가 승리하게 된다. 의식의 열기가 점점 고조되면 자신의 집, 토지, 노예 등 전 재산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른다. 무상(無償)의 탕진을 계속한다.”(14쪽)

위는 남북한의 무모한 군비경쟁을 연상케 한다. 남북한의 광적인 군비경쟁으로 민족공동의 부(富)를 탕진하는 바보짓을 생각하게 한다.

바따이유(Goorges Bataille)는 전쟁의 본질을 ‘탕진’이라고 결론 내린다. 전쟁은 공동체의 안정을 교란하고, 공동체를 뒷받침하는 노동 ・축적을 폭파 ・탕진하기 위하여 실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은 탕진의 축제이다. 전쟁은 무엇인가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무상(無償)으로 탕진하기 위한 행위-반(反)공동체적인 행위이다. 여기에서 근대전쟁과는 다른 ‘야생(野生)전쟁’이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국가(공동체)에 있어서 전쟁의 성질이 나타난다. 국가가 실행하는 전쟁은 미개사회의 전쟁과 전혀 성질을 달리하는 전쟁 즉 국가재산의 방위, 영토의 확대, 노동력-노예의 확보, 자원의 확보축적 등을 목적으로 한 ‘인색한 은행가의 재(財)테크’이다. 공동체의 확대를 목적으로 한 기업이다. 공동체를 방위하고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거는 전쟁이 역설적으로 매우 폭력적인 것으로 된다. 전쟁에 의해 다른 공동체가 소멸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절대(絶對)전쟁이 요청된다(20~27쪽).

4. ‘전사(戰士)’와 ‘병사’의 구분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공동체의 집합화 즉 국가의 형성 속에서 전쟁의 의미가 변질하여 전사들의 위치가 변질되기 시작한다. 전쟁은 무상(無償)의 축제임을 그만두고 목적을 지닌 ‘약탈-방어전’이 되어, 전사들은 공동체를 지키거나 다른 공동체를 무력에 의해 제압하고 지배하는 ‘군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전사들의 축제는 끝나고 적(敵)의 공포로부터 오는 전멸전 또는 지배전(支配戰)이 시작된다. 자신의 공포를 타자(他者)의 살육에 의해 회피해 가는 병사의 시대가 시작되어 전사와 공동체 사이에 전개되었던 축적과 탕진이라는 대립관계는 사라지고, 전사는 공동체의 탐욕의 도구로 전
락한다.”(18쪽)

5. 전쟁의 인간학

인간의 공격성의 신화를 언급한다. 프랑스 혁명 때 국민이 혁명전쟁에 동원되어 계급을 초월한 ‘국민’이 등장했다. 전쟁터는 도야의 장소였다. 주권의 원천은 왕의 신체가 아니라 시민의 신체였다. 혁명방위의 전쟁과정에서 근대의 인간이 태어났다(39쪽).

6. 원죄와 ‘전쟁이라는 노동’

성서의 ‘실락원’은 원죄,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불모의 땅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숙명을 말해 준다. 불모와의 투쟁, 불모의 제패, 풍요로운 낙원을 되찾는 것이 인류에게 부과된 고역(苦役)이며 사명이다. 그러나 묵시의 그날까지 인류는 원죄의 죗값 치르기를 계속하고 그 노역(勞役) 또는 헤겔(Hegel)이 말하는 ‘전쟁이라는 노동’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초의 인류는 기아 ・불모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에 내던져졌는데, 이는 ‘인류의 비극성과 원죄’를 에워싼 서구적인 고정관념이며 이데올로기의 뿌리를 이룬다. 전쟁을 에워싼 이념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중심으로 나온 것이다(41쪽).

인류는 불모 ・전쟁과 싸우는 가운데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고 삶을 쟁취하는 의지와 실천으로써 문명을 형성하여 역사를 이룩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전형으로 홉스(Hobbes)의 정치사상이 나타났다. 자연상태에서는 언제나 식량이 희소하므로 식량을 에워싼 전쟁상태가 항상적이며, 여기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가 생긴다. 이러한 전쟁상태와 식량의 희소성을 관리하기 위한 강권(强權)을 가진 ‘국가’가 요청된다. 전쟁상태는 거대한 ‘전쟁기계(war machine; Leviathan)’인 국가의 공포 아래에서 휴전상태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국가에 의한 평화가 유지된다(42쪽).

7. 전쟁-평화와 국가

들뢰즈 가따리(Deleuze Gattari)가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에서 제출한 ‘전쟁기계’(주1) 개념은 그 다원적인 내포(內包) 때문에 많은 오해를 낳았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전쟁기계’는 일종의 투쟁상태로서 자신의 운동성과 스피노자의 conatus 즉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에까지 자신을 존속시키려는 생명의지, 존재의지의 운동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타자(他者)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신의 존립과 운동의 가능한 한의 자유와 전개에로의 의지, 자신에 대한 자신의 착란된 그러나 강렬한 긍정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억압, 통합, 노예에 대한 본능적인 투쟁의지의 운동이 된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적 통합에로의 투쟁의지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대한(macro) 국가장치 쪽으로 수탈될 때 국가를 보지(保持)하는 전쟁장치로 기능해버리기도 한다. 개개의 개체가 국가라는 ‘거대하며 동일한 상태의 생명체’ 쪽으로 수탈될 때 전쟁기계는 개별(個)에 대한, 타자에 대한 억압장치로 기능해 버린다. 기계는 모든 지배와 억압을 분해하는 의지이며 거대한(macro) 분산과 국가적인 거대한(macro) 폭력과의 사이를 계속 파동 치게 될 것이다. 즉 전쟁기계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문제를 유발하는 파동적(波動的)인 개념이며 우리들은 그 파동 속에서 즉 ‘미세함(micro)과 거대함(macro)의 파동’ 속에서 물음을 연발하는 ‘투쟁기계’임을 받아들여 거기에서 전쟁기계의 경사를 측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43~44쪽).

헤겔(Hegel)에게 있어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 전쟁상태를 상기(想起)시키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의무로 요청된다. 여기에서 국가 자체가 전쟁체제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국가는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민(民)에게 죽음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현재 죽음과 빈곤과 병(病)이라는 공포의 이미지가 관리적(管理的) 복지국가를 이상화시켜 핵전쟁의 현혹이 공포라는 전체성 속에 우리들의 사고를 가두어 놓는다(47쪽).

8. ‘영구(永久) 억지론’ 비판

루소(Rousseau)는 홉스의 테제와는 대조적으로 ‘전쟁상태는 사회상태에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홉스나 그로티우스(Grotius)가 구상하는 ‘전쟁에 대항하는 국가’는 스스로 ‘전쟁상태’를 반복한다. 홉스식의 국가에 ‘저항하는 사회’를 지향한 루소의 사회계약도 이 ‘전쟁상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서 ‘전쟁’을 피하려는 행동은 ‘전쟁’을 불러들인다.

‘전쟁상태’는 적대성(敵對性), 항쟁의 부분적이며 비전면적(非全面的)인 계속이다. 그것은 전쟁의 일상화, 잠재화(潛在化)이며 정말로 ‘평화란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계속’이 된다. 전쟁이 이렇게 영속화하는 것을 ‘순수(純粹) 전쟁’이라 부른다.

칸트(Kant)도 ‘평화 시에 내재하는 전쟁상태’의 위기에 눈을 돌린다. 칸트는 이미 {영구평화(永久平和)를 위하여}의 제1조항에서 장래의 전쟁의 요인을 숨겨둔 평화조약은 결코 평화조약으로 볼 수 없다고 기술한다. 적대행위의 연기(延期)는 결코 ‘평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구평화’의 프로젝트란 무엇일까?

‘전쟁상태’의 회피를 겨냥하는 수단으로서 이 계획은 국가 간의 ‘연합’을 제시한다. 평화 내지 휴전상태에 있는 국가와 국가는 그 관계의 외부에 ‘연합’을 제3자로서 설정함으로써 위기를 저지한다. 갈등(Conflict)의 강도를 조작하고 최대공약수로 가장 폭넓게 이해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구평화론은 영구억지론이다. 억지론을 법제화하는 자연법론이 여기에서 거론된다.

힘의 억제는 보편적이거나 근절적(根絶的)인 폭력을 나누어 갖는 위험을 잉태하고 있다. 전쟁을 피하는 싸움도 재액(災厄)을 초래한다. 지배에 저항하는 평화 자체가 무장한 평화에서 확립된다. 보편적인 선(善)이 아니라 일반적인 악(惡)의 이념, ‘惡의 惡’이 보지(保持)된다.

‘억지’는 18세기에도 일종의 연옥이었다. 칸트도 연합국가의 기구와 식물 ・유기체의 유사점을 말한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 제65절의 주에서 미국의 건국을 예로 들면서 정치연합과 유기체의 비슷한 점을 시사한다(57~62쪽).

9. 절멸(絶滅)주의

전쟁이 ‘적(敵)’의 절대적 소멸, 종적(種的)인 절멸 즉 대량학살(Holocaust)을 이념으로 한 것은 최근의 일로서 민족의 생산장치 전체를 파괴한다. 클라우제비츠(Klausewitz)의 ‘절대전쟁’에서도 적의 전투능력의 완전한 파괴는 있으나 적의 종적인 절멸은 없다. 클라우제비츠의 절대전쟁은 일거에 적대국가 타도전(打倒戰)에서 비전투원을 포함한 민족생산 장치의 파괴 즉 종적인 섬멸을 요청하는 대량파괴(Holocaust)로 확대되어 간다(65쪽).
(2004.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