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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전쟁론, 전쟁관

전쟁과 숭고 미학(崇高美學)

김승국

1. 칸트의 ‘숭고미(崇高美)’

칸트(Kant)는 ‘숭고(Erhabenen)’에 대해 고찰한다. 칸트에 의하면 숭고의 판단은 미적 판단에 관한 경우에 준하며, 취미판단(Geschmacksurteil, 미적 판단의 의미)의 네 가지 계기에 대해서 거의 같은 고찰을 가할 수 있지만, 양자가 서로 다른 점도 있다. 즉 “미(美)의 감정은 직접적으로 생(生)의 촉진 감정을 동반하고, 따라서 감성적 자극 및 유희적 상상력과 결합할 수 있지만, 숭고의 감정은 단지 간접적으로만 생기는 쾌감이다. 이 쾌감은 생명력의 일시적인 저지와, 그 직후에 일어나는 한층 더 강렬한 생명력의 유출 감정이며, 따라서 상상력의 활동에 따른 유희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엄숙한 감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극적인 쾌감(negative Lust)이라고 해야한다.”(칸트 {판단력 비판} § 23)

다른 말로 하면, “미(美)에 대한 취미는 휴지적(休止的)인 정관(靜觀, Kontemplation)의 감정을 전제로 하고, 또한 이것을 지속하지만, 숭고의 감정은 대상의 판단에 결부된 감정의 운동(Bewegung)을 그 특색으로 한다.”(칸트 {판단력 비판} § 24)

그리고 미(美)는 정관적(靜觀的)인 점에서 우리들의 오성적(감성적) 판단으로 유추되나, 숭고는 동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의지나 행동, 더 나아가서는 이성(道義心)과도 관련해서 고찰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숭고를 다음의 2종류로 나눈다.
숭고(Erhabenen): ① 수학적 숭고(Mathematisch-Erhabenen) ② 역학적 숭고(Dynamish-Erhabenen).

여기에서 수학적 숭고라는 것은 ‘그냥 단지 큰 것’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이다. 예를 들면, 높은 산이나 큰 바다나 피라미드나 聖피에트로 성당의 내부공간에 대해서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상대적인 크기는 아니고, 경외스러운 생각에 결부된 크기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러한 크기에 대하여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고, 동시에 그것을 통괄하려고 하는 자기감정의 고조에 의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다음으로 역학적 숭고는 ‘미적 판단에 있어서 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힘(Macht)으로서의 ‘자연’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험한 절벽이나 천둥이나 활화산이나 성난 파도나 혹은 용감한 전사의 태도를 대할 때에 느끼는 감정이다. 이것들은 문화가 낮은 민족에게는 단지 단순한 공포의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서는 굴복과 비하가 있을 뿐이지만, 문명인은 여기에서 오히려 자연에 대항하는 일종의 자기 우월성을 느낀다. 즉 “자연이 우리들의 미적 판단에 숭고라고 평가되는 것은 그것이 공포심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우리들의 힘을 마음속에 환기시키고 … 우리들이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힘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자연을 이와 같이 숭고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그것이 우리들의 상상력에 따른 심정이 자기의 사명을 자연보다 더 탁월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을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상상력을 고조시키기 때문이다.”(칸트 {판단력
비판} § 28) 따라서 숭고의 주요 원인은 자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심정의 내부에 있다고 한다.<井上充夫 지음, 임영배 ・신태양 옮김 {建築美論} (서울, 국제, 1994).120~121쪽)>

2. 전쟁과 숭고미

칸트가 말하듯이 용감한 전사의 태도를 대할 때 숭고미를 느낀다. 이때 미학적인 쾌감을 느낀다.

전쟁은, 미학적인 쾌(快) ・불쾌(不快)의 대상이다. 정치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의 매력과 전쟁 그 자체의 매력을 구별해야 한다. 후자의 매력 대상으로서의 전쟁을 ‘미학적 대상으로서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전쟁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친근한 것이다. 전쟁영화, 전쟁을 소재로 한 예술, 수많은 TV게임, 기업전쟁, 대학입시 전쟁, ‘전쟁의 유추(analogy)’에 의한 의식앙양 등에 나타나는 전쟁경험의 현실감이 이에 해당된다. 전쟁의 미학적 특징은 일상적인 질서를
침범하고 파괴하는 강대한 힘의 발현, 타자(他者)와 적대하는 자신의 잠재력의 극한에 이르는 긴장이다. 이런 특징을 갖는 미학적 범주를 ‘숭고’라 부른다. 숭고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숭고는 위화감에서 드러나는 미적인 감정이다. 암벽이나 거대한 바다, 핵무기의 폐허를 앞에 둔 나의 능력을 넘어선 강대함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공포의 감정과 더불어 내가 해방되는 미적 경험이다. 전쟁의 포연(砲煙) 뒤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핵무기의 숭고한 광경 뒤에 그런 지평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市田良彦 {戰爭} (東京, 新曜社, 1989).154쪽>

3. 타자(他者)의 창출과 말소

타자의 존재가 전쟁의 전제이다. 전쟁의 매력은 타자를 없애는 일에 매달리는 매력이다. ‘타자’라는 장해와 항쟁하면서 타자를 자기에 동화(同化)하는, 즉 적에 승리하여 지배하거나 속령화(屬領化)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없앤다. 정치 목적에서는, 살해하기보다 동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이 수행된다.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기대 즉 ① 타자와의 항쟁에서 생기는 숭고의 경험이 나에게 주는 ‘타자성(他者性)을 조우하고자 하는 기대감’ ② 적(敵)-타자와의 전투라는 공포(불쾌)를 거친 고차원의 쾌(快)에 대한 기대가 전쟁의 매력을 불러일으키며 전쟁의 유혹을 환기시킨다. 국가를 (국가의 구성단위인) 개인들에 매개시켜 주는 것은 전쟁이 가져다주는 숭고한 쾌(快), 거기에 수반하는 열광이다. 전쟁에 투자되는 사회적 자원의 규모가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숭고한 열광과 더불어 병사들의 행군, 군악대의 리듬, 전투기의 폭음 및 이런 것들의 거대한 공진(共振) 속에서 ‘적(敵)들’과 ‘우리들’ 공동체의 ‘모호하지만 강인한 공통감각’이 편제된다.<市田良彦 {戰爭} (東京, 新曜社, 1989).157쪽>

4. 숭고와 기술

전쟁의 매력이 대중적인 규모로 편제된 것은 총력적(total war)이 출현한 제1차 대전 이후이다. 이러한 미적 기능을, 그 시대의 기술(technology)이 매개한다. 근대 기술의 규모는 너른 바다, 거대한 바위산의 눈에 익은 광경 이상의 숭고감(崇高感)을 주며, 그러한 최신 기술의 사용권은 국가에 있다. 국가가 소유한 핵무기용 전자 기술 속에서 ‘숭고(sublime)’가 ‘승화(sublimation)’된다. 전쟁의 숭고한 광경은 무엇보다도 전쟁터에서의 전투광경으로 표현된다. 전쟁의 공포도, 적(타자)의 말소를 위해 동원된 최신 기술의 최대 속도 ・파괴력을 가능케 하는 전투광경에서 환기(喚起)된다. 무기의 속도가 너무 빨라 육체의 조작범위를 넘어섰다. 오늘날의 숭고한 전투 무대에 내 몸뚱이가 등장할 여지가 없다. 첨단무기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숭고성은, 전쟁의 이미지 속에서만 나타난다. 핵과 전자(電子), 전쟁 상황에서 ‘전쟁에 의한 국가의 자기확증’이 핵전쟁의 강대함 속에서 승화된다. 절대전쟁의 절대적 공포 앞에서, 국가는 핵무기의 전자기술이라는 ‘탈육체화(脫肉體化)한 억지전략’을 향해 매진한다. 자기와 타자(적)의 차이가, 컴퓨터 화면상의 데이터 ・TV게임으로 나타난다.<市田良彦 {戰爭} (東京, 新曜社, 1989).159쪽>

5. 전쟁과 타자: 숭고의 승화 속에서

파시즘은 ‘기술에 의한 전쟁의 숭고미 고양(techno sublime)’을 매개로 신(神)이 없는 시대의 공통감각을 조작했다. 한국의 군사 파시즘이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전쟁의 숭고함을 조작하고, 반공전쟁의 숭고함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작을 통해 한반도의 전쟁구도를 굳혔다. 이러한 허위의식의 공통성이, ‘전쟁기계의 강대한 잠재력이 가져다주는 숭고감정’ 속에서 실체화한다. 전자기술을 통한 숭고함의 경험에 불가결한 타자성(他者性)은, 전자 기술에 의해 모의 실험되고(simulate), ‘Techno Sublime’은 ‘Cyber Sublime(전자 기술에 의한 전쟁의 숭고미 고양)’으로 미분화된다. 전자정보에 의한 현대전쟁의 양식, 한반도에서 예상되는 첨단무기에 의한 전쟁양식 속에 ‘Cyber Sublime’이 내재해 있다.

현대예술에 전쟁과 숭고의 양상 및 언설(言說)이 편재(遍在)한다. 현대의 문화에 불가결한 통과의례인 듯한 ‘전쟁과 숭고의 언설군(言說群).’ 전위(前衛)의 죽음을 말하는 시대에 숭고와 관련된 언설이 부상하고 있다. 한반도의 전쟁구도를 굳히거나 부추기는 언론의 행각을 보면 이를 직감할 수 있다. 조선일보 등 전쟁을 방조하는 언설군(언론과 전쟁구도에 관한 담론)을 분석해 보라. 사회체제 내에 숭고의 효과를 승화시키는 정보자본주의 시대의 전쟁욕구가 조선일보의 홈페이지 안에 ‘Cyber Sublime’의 형태로 묻어난다. 조선일보의 홈페이지는, 전쟁욕망을 일상화하는 ‘전쟁 지향적인 자본’의 끊임없는
‘적(타자: 북한이라는 가상적) 창출’을 만들어내는 소굴이다.

조선일보가 말하는 ‘북한과의 숭고한 전쟁’이라는 이미지가 ‘북한과의 전쟁을 숭고화(崇高化)’한다. 전자 미디어가 현실을 편제(編制)하는 오늘날, 전자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숭고한 영상의 발호는, 전쟁과 숭고의 연접(連接)이 단지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전자 미디어의 현장 속에서 확증한다.

방송매체가 전쟁의 숭고함을 선전하곤 한다. 방송매체가 1998년 10월 13일 부산 앞바다의 해군함정 퍼레이드를 보도한 사례, 각종 무기 전시장을 신바람 나게 보여주는 방송태도, ‘에어 쇼(air show)’를 통해 군사문화의 오락화 ・흥행화를 부추기는 TV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걸프전 당시 CNN이 전쟁의 숭고미를 영상미(映像美)로 승화시키고 이슬람 문명권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의 승리감을 고취시킨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전쟁을 숭고하게 보는 호전적인(전쟁의 숭고미를 찬양하는)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분단의 결과물이다. 전쟁의 숭고미를 찬양하는 분단 정신병 ・분단의 피해망상증 ・정신 도착증(倒錯症)에 대한 분석이 긴요하다. 최첨단 무기를 통한 전쟁의 숭고미를 북한과의 전쟁에서 맛보겠다는 정신 도착증은, 북한 정권을 7일 만에 붕괴시키려는 5027-98 작전계획 안에 깃들어 있다. 한국군이 가담하는 5027-98 작전계획에 의한 ‘Cyber Sublime’은 타자(동족인 북한 사람들)를 말살시키려는 것이다. 동족인 북한사람들을 말살시켜도 좋다는, 북한의 모든 생물을 멸종시켜도 좋다는 ‘민족 말살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의 발상’이, 5027-98 작전계획의 ‘Cyber Sublime’ 안에 있다. (200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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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국 지음『한반도의 평화 로드맵』(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323~329쪽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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