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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교육/평화교육 교안

평화-역사 수업 교안

평화-역사 수업 교안

 

김승국(평화 활동가)

아래는 ‘평화의 시각으로 조명한 역사 수업’에 대비하여 정리한 교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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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스타리카 관련 DVD; 8분간 시청

1) 코스타리카; 영세중립 국가

2. 영세중립 국가


1) 스위스

스위스는 1515년 마리그나노 전투에서 참패한 뒤 국제분쟁에서 어느 한
쪽 편을 드는 것이 큰 위험부담을 준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전투를 계
기로 스위스는 향후 외교에서 중립노선을 선호하게 된다. 1815년 영세중립 선언.

3. 한반도의 중립

스위스가 영세중립 국가로 공인된 1815년 11월 20일에 조선 땅에
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815년 전체의 항목을 보아도 심각한 대외관계에 관한 기록은 없고 통상적인 대응만 나타나 있다. 대외적으로 전쟁의 위협이 없는 시대, 즉 청나라ㆍ일본이 조선 땅을 전혀 넘보지 않는 평온한 시대이었으므로 나라 안의 동향이 많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1815년에 조선 땅이 평온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의 임금이 대외정책을
잘 펼쳐서 평온했던 것이 아니라, 종주국인 청나라의 대(對)조선정책이 유
화적이었고 일본은 조선 문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조선을 유화적으로 다룬 까닭을 알려면 병자호란14)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점령한 후금(나중에 청나
라가 됨)이 조선의 인조 정권을 접수한 뒤 조선 땅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으나, 더 높은 차원의 전략에 따라 인조 정권을 살려 주었다.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후금
이 인조 이하 지도부를 몽땅 다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칭
기즈칸의 군대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로 문제는 그것
이다. 그렇게 다 죽여 버리면,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다는 것-그것은
칭기즈칸의 손자가 세운 원나라 정권에서 잘 볼 수 있다. 후금은 그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기본적으로 무능했다. 전
략도 전술도 없었다. 그저 ‘명나라=은인=아버지 나라’라는 의식으
로 살았다. 물론 그 점에서는 유치(幼稚)하지만, 반면 ‘명나라=서인
정권의 이익’으로 삼은 점에서는 더없이 노회한 정치꾼들이었다. 정
치적 어린애이면서 노회한 정치꾼들-그렇기에 후금에 너무 쉽게 졌
다. 바로 그 점이 후금의 마음에 든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강고하게
정권을 잡는 노회한 인간들인데, 외부적으로는 더없이 무능하다는
것. 따라서 그들[후금]은 인조 정권, 쿠데타 정권, 서인 정권을 다시
그대로 온존시키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들을 없애고, 조선을 식민지
로 직할 통치하면 비용이 막대하게 든다. 후금은 낙후한 조선에 별다
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뜯어먹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보태 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그들은 조선을 포기했다(손영식, 2005, 74).


무능한 인조 정권을 살려 두는 게 식민지를 관리하는 비용이 덜 든다
는 고도의 전략에 따라, 평온한 상태에서 권력을 유지하게 된 인조 이후
의 임금들. 이 임금들은 (청나라가 전략적으로 부여한) 평온함에 취한 나
머지 평화지향적인 대외정책에 너무 소홀했다. 이들이 광해군처럼 정신
을 차려 중립지향적인 대외정책을 이끌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북벌정책
(효종의 대외정책)을 구사하면서 종주국인 청나라를 쓸데없이 자극했다.


3) 영리한 정권이었다면……


영리한 정권이었다면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하여 조선-청나라-
일본의 평화로운 3각 관계를 정립했을 텐데……. 군사적인 방식의 북
벌정책은 역행해도 분수를 넘은 것이다. 전쟁을 생각게 하는 북벌정
책이 아닌 조선-청나라-일본의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한반도
중립지대화를 청나라ㆍ일본에 제안하여 승인을 받았더라면, 19세기
말의 망국의 수난~20세기 초의 일제지배~20세기 후반의 분단체제
(중립화 통일이 불가능한 체제)로 이어지는 역사의 악순환이 일어나
지 않았을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늘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한-중-일 관계를
전쟁이 아닌 평화의 방식으로 이끌어야 중립화 통일이 가능한데, 이
에 역행하듯 ‘군사적으로 무능한 정권’이 북벌정책(효종)을 펼치거나,
청나라가 허용한 평온한 분위기에 빠져들어 평화체제(조선의 중립지
대화)를 구상할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중립지대화는커녕 ‘중립지대가 없는 붕당싸움’에 열중하여 국력을
소진시킨 끝에 망국의 길을 향하여 줄기차게 걸었다. 국내에서 붕당
싸움을 할 기력이 있었으면, 청나라ㆍ일본을 찾아가 조선의 중립지대
화를 설득했어야 한다. 허용된 평온함을 넘어 청나라ㆍ일본이 다시는
병자호란ㆍ임진왜란을 일으킬 수 없는 한반도 중립지대화-동북아
시아 평화체제를 구축했어야 한다. 스위스의 정치가들처럼.
스위스는 1515년 마리그나노 전투에서 참패한 뒤 국제분쟁에서 어느 한
쪽 편을 드는 것이 큰 위험부담을 준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전투를 계
기로 스위스는 향후 외교에서 중립노선을 선호하게 된다(박후건, 2007, 41).
스위스는 한반도와 똑같이 전쟁을 겪었으나 전쟁으로부터 벗어나
기 위해 몸부림친 끝에 영세중립을 성취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의 조
선의 임금ㆍ조정은 영세중립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국내의 당파싸움
에만 매달렸다. 참으로 바보 같은 정권이 인조 이후 지속된 끝에, ‘영
세중립을 거론조차 할 수 없는 현재의 분단체제’를 조성하는 원인(遠
因)을 제공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폐기한 인조반정 이후 서
인-노론 세력이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따른 사대주의 외교를 펼
친 화근(禍根)이 분단체제의 근원(根源)을 이룬 게 아닐까?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의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 이후의 임금들은 붕당
정치의 허수아비가 되었거나 세도 정치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한
반도ㆍ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없었다.


1) 1815년 이전의 역사


영세중립 원년(1815년)의 앞뒤로 나누어 한반도 중립화의 조건을 탐
색하려는 필자의 방침에 따라, 1815년 이전의 조선의 역사를 서술한
다. 1815년 이전의 역사가 너무 방대하므로, 임진왜란(조일전쟁)~1815
년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⑴임진왜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는 일
본 전국을 통일한 뒤 명(明)나라와 조선을 정벌하여 이름을 만세에 남
기려는 허황된 꿈을 꾸었다.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주
들에게 포상으로 약속한 토지가 부족하자 그들에게 나누어 줄 땅을
확보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백여 년간 계속된 내전으로 전쟁
이 일상화된 무사들의 넘치는 전쟁 욕구를 해소해 주는 대안으로 명
과 조선을 접수하고자 그 길목인 조선부터 침공한 것이다(백지원, 29).
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양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
였으나 중반에 이르면서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
선 지원, 조선 수군의 대활약상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늘 그러했듯이, 임금을 비롯한 지
배자는 도망치고 민초들만 남아서 맨손으로 침략군에 저항했다. 의주
까지 도망친 선조는 화급하게 명나라의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의 지
원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일본군에 맞설 군대를 파병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서인(西人)을 비롯한 조선의 지배
층은,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은혜, 즉 ‘재조지은(再造之
恩)’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사림파 사대
주의자들(송시열이 대표적인 인물)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하면서,
명나라만을 숭배하고 후금(청나라)은 오랑캐로 멸시했다.


⑵병자호란의 원인을 제공한 숭명배청(崇明排淸) 외교


이른바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따른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외교
가 후금을 자극하여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명나라는 지는 해이
고 후금(청나라)은 떠오르는 해임을 직감하지 못한 조선의 지배계급
이 숭명배청의 외교를 펼친 것은 후금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
다. 이렇게 병자호란의 원인이 된 ‘숭명(재조지은의 명나라를 숭배하
는 사대주의)’은 시대착오의 소산이다.


명군[명나라 군대]이 명목상으로는 ‘조선을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
지만 실제로는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에 들어왔
다(한명기, 1999, 16). 명의 참전은 조선을 구원한다는 목적보다는 조선
이 일본에 넘어갈 경우를 우려하여 요동을 방어하고, 궁극에는 중국의
심장부인 북경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한명기, 1999, 31).


이러한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지는 해인 명나라에 나라의 운명을
맡긴 어리석은 대외정책이 병자호란으로 이어진다. 지는 해(명나라)
와 떠오르는 해(후금)가 뒤바뀌는 명청(明淸) 교체기에 양쪽의 중간에
서 줄다리기하면서 국익을 챙기는 중립적인 외교가 시급했다. 적어도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펼치며 국익을 챙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광
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집단이 명나라만 일방적으
로 짝사랑하여 병자호란의 화근을 만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상 명나라는 조선에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 생각이 없이 요동
을 보호하는 국익을 위해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했는데, 명나라 군
대를 받아들인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 나라로 섬기는 ‘재조지은’의
사대주의 이데올로기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으니 한심한 일이다.


⑶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 속에서 중립외교 펼쳤어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의 국제정세는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만큼 엄혹했다.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위협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와중에 누르하
치[후금]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한명기, 2009, 242) 속에서 ‘중립외교’가 나라를 살려 내는 은혜
로운 생각(再造之恩)이며, 지는 해인 명나라에만 바보같이 충성을 바
치는 것이 재조지은이 아니다.


샌드위치처럼 북로남왜(北虜南倭)의 한가운데에 끼어 있는 조선의
대안은 균형외교ㆍ중립외교이었다. 한반도를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완충지대로 상정하는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일본(임진왜란의 주역)과
후금(청나라 병자호란의 주역)에 호소하고 명나라의 동의를 얻어 냈
어야 한다. 한반도 주변의 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주변국가들(명
나라ㆍ청나라ㆍ일본)을 합종연횡 하여 한반도 중립화를 도모하기는
커녕 주변 국가들을 이이제이(以夷制夷) 하는 능력도 조선의 지배계급
은 갖추고 있지 못했다. 오로지 골수에 사무친 사대주의 이데올로기
인 ‘재조지은’을 국내 정치용으로 악용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
으로 활용했고, 이러한 수단을 잘 사용한 서인 집단이 인조반정 이후
의 조선 권력을 내리 장악하게 되어 망국에 이르게 된다.


2) 임진왜란과 명나라 그리고 사대주의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 준 전쟁이다. 과연 그러한가?
임진왜란은 실질적으로 동인(東人)들이 치렀다. 유성룡, 이순신 그
리고 곽재우, 정인홍 등 영남 의병 등이 그들이다. 반면 서인(西人) 가
운데 공을 세운 사람은 별로 없다. 임진왜란의 뒤에 그 공로로 동인
이 집권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서인은 ‘명나라=임진왜란 승리자=이 나라 구원자’로 규정했다.
송시열이 말한 바, 재조(再造)의 은혜를 준 나라였다. ‘다시 이 나라를
세우게 해 준 은혜’-그것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해 주었다
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참전해서 이 나라를 구원해 준 전쟁
이었다. 이에 반하여 동인이 보기에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수군과 곽
재우 등의 의병이 싸워서 이긴 전쟁이다.


서인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물론 쿠데타[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
서였을 것이다. 일단 동인이 세웠던 공을 부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친명(親明) 이데올로기, 그것은 인조 쿠데타에 이용되었으며, 병자
호란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병자호란 때 처절한 패배 뒤
에 이제 친명 이데올로기는 소중화론(小中華論)으로 나가면서 집념이
자, 강박 관념이 된다. 정권 장악을 위해서 만든 친명 이데올로기가
서인의 질곡이 된 것이다.


명나라를 빌미로 집권한 송시열이나 서인-노론에게 명나라는 이
제 ‘서인 노론 정권’그 자체가 된다. ‘서인-노론 정권의 이익=명나
라-소중화(小中華)-재조지은(再造之恩)’이 된다. 쿠데타[인조반정]의
명분으로 시작하여 상대 당파를 제압하고 자기 당파의 이익을 위해
서 그런 이론을 선택한 서인들-그들은 병자호란이라는 잘못된 선택
뒤에 명나라[지는 해]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명나라에 대한 병적인 집착, 그것은 사대주의로 나간다. 정신적 사
대주의-소중화(小中華)라는 것, 대의명분-강상(綱常)윤리에 폭 빠진
것. 그리고 자신감과 자주성의 상실. 서인의 역사에는 이것이 면면이
드러난다(손영식, 69~70)


이렇게 자주성을 상실한 서인-노론의 역사가 줄곧 이어져 내려와
망국의 원인을 제공하며 일제의 침략을 허용한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사대주의에 심취한 서인-노론이 자주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주적인
중립외교를 전개하면서 한반도 중립화를 이룰 수 없었다. 서인-노론의
자주성을 잃은 사대주의가 지나치게 외세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외세의
한반도 진입을 너무나 쉽게 허용하고, 외세의 난립 속에서 득세한 일본
이 끝내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린다.


여기에서 사대주의와 ‘중립’의 간극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립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은 아니지만, 극도의 사대주의가 망국을
초래한 것보다는 낫다. 이러한 점에서, 중립외교를 시도했다가 물러
난 광해군의 미완성 중립화가 아쉽다.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
고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이어져 영조ㆍ정조 시대에까지 대물림되었
다면, 조선 땅도 스위스처럼 영세중립지대가 되었을지 모른다.
결국 극도의 사대주의가 한반도 중립화를 가로막은 흉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망국의 근원이 되었다.


4. 광해임금의 중립외교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지정학적 특성을 지닌 한반도에서
역대 왕조들은 양국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부심해야 했다.
한반도의 정권들은 대외정책을 펼쳐 나갈 때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변수를 동시에 고려해야만 했다. 서북방에서 중국이나 다른 북방민족
과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동남방에서 일본과의 관계까
지 악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양쪽에서
긴장을 초래하고 중국과 일본을 모두 ‘적’으로 만들 경우, 정권은 물론
국가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쪽에서 동시에
적을 만들 경우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의
상황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명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란 이후 서북방에서
누르하치의 위협이 커지면서 곤경은 재현되었다(한명기, 241).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위협이 여전한데 후금(청나라)의 위협이 가
중되고 있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 앞에서 임금은 어떠한 대외정
책을 펼쳐야 했을까?


이러한 역사적 도전에 제대로 응전한 임금이 광해군인 것 같다. 광
해군은 임진왜란의 당사자인 선조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았다. 선조는
명나라를 지성으로 섬기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
은 적이 없는 철저한 사대주의자이었다. 이 때문에 북로남왜(北虜南
倭)의 국제정세를 평화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임진왜란을 자초
했다. 그런데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은 아버지와 달랐다. 광해군은 임
진왜란이 한창일 때 왕세자로 정해져, 선조를 도와가며 임진왜란 중
의 국사를 담당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의 참화가 나라와 민중에게 어떠
한 고통을 강요하는가를 절실하게 체험한 위정자였다. 명이 조선을
도왔다고는 하나 명이 자신의 국익을 위해 보였던 독선적인 행위들
과 횡포를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 또한 광해군이었다. 그가 중화사
상의 한계를 직접 체험하고 국제관계를 중화주의적 명분이나 이념
못지않게 전쟁과 평화의 관점에서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시야를 획득한 측면이 분명이 있었을 것이다(이삼성, 537~538).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의 참화가 심각한 것을 절감한 광해군이
평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아버지(선조)의 대명
사대(명나라에만 사대하는) 외교를 탈피한 점이 중요하다.


대명사대를 국가정책의 하나의 근본으로 천명한 조선에서 모든 외
교의 시작과 끝은 명나라와의 관계에 있었다. 특히 명나라를 하나의
대국이 아닌 유일한 상국(천자국)으로 보고, 더 나아가 부모라는 개념
까지 도입해 ‘군부(君父)’의 나라로 섬겼던 조선사회에서, 대명사대 원
칙에 약간이라도 저해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국제관계라면 그것은 단
순한 외교 문제를 떠나 국가의 정체성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계승범, 207).


[국가의 정체성을 평화 지향적으로 정립하려는] 광해군은 조선이
명의 ‘이이제이’책 때문에 후금과의 대결구도 속으로 휘말리는 것을
회피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시도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
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왕조 개창 이후 200년
이상 이어져온 ‘조공ㆍ책봉 관계’ 속에서 명은 이미 조선의 ‘부모지
국(父母之國)’으로 인식된 데다 참전을 통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
풀었다’는 명분까지 더해지면서 임진왜란 이후의 명은 ‘부모지국’ 이
상의 ‘버거운 존재’가 되었다. 더욱이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 선전포
고하고 무순(撫順)을 점령한 이후 명과 후금의 대결이 날로 격화되면
서 조선의 입장은 한층 난감해졌다. 조선을 끌어들여 활용하려는 명
의 책동은 더욱 집요해졌고, 그와 맞물려 조선 내부의 화이론자(華夷
論者)들 또한 ‘부모지국을 지원하라’고 채근했다(한명기, 18).


2) 파병을 에워싼 논란


‘부모지국인 명나라를 지원하라’고 채근한 화이론자(華夷論者)들은
광해군의 신하들이었다.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립외교
를 펼치려는 광해군 앞에서, 신하들은 명나라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임금을 윽박질렀다. 이렇게 임금과 신하 사이에 외교노선을 놓고 극
한적인 대립을 보인 결정적인 계기는 명(명나라)의 파병요청이었다.
당시 후금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명은 공식ㆍ비공식적으로 모두
서너 차례에 걸쳐 조선에 병력을 요청했는데, 비변사를 필두로 거의
모든 신료들이 찬성론을 펴고 광해군이 외롭게 반대하는 형세로 논
쟁이 전개되었다. 광해군은 명 황제의 파병요청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를 서슴지 않은데 반하여, 신하들은 그런 광해군의 왕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수시로 파업을 일삼았다.


파병 찬성론의 근거는 군부의 나라인 명에 대해 ‘재조지은’을 갚아
야 한다는 것과 200년 사대 전통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반대론의 근거는 명의 군사작전은 실패할 것이라는 현실적 정세 판
단이었다(계승범, 47~48).


명나라만 파병을 조선에 요청한 것이 아니라 후금도 도와달라고
광해군에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어느 쪽만 일방적으로 지원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명과 후금은 각기 조선의 지지가 필요했다. 조선을 사이에 놓고 두
나라의 외교전은 첨예하게 맞붙었다. 명은 조선에 지속적으로 군대를
요청했고, 후금은 조선에게 우호조약의 체결을 재촉하면서 명을 돕지
말도록 압력을 가했다(계승범, 149).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라도 명이나 후금 가
운데 어느 한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의 파
병 요청과 후금의 압력 사이에서 조선 조정이 고심했던 문제의 본질
은 중립의 문제라기보다 양자택일의 문제에 더 가까웠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떤 노선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조정 논의는 1618년 초여
름에 명이 후금 정벌 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것을 계
기로 본격화되었다. 이 파병 여부 논쟁을 시작으로 광해군이 계해정
변(인조반정, 1623)으로 인해 강제폐위 당할 때까지 약 5년간 조선 조
정은 외교노선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논쟁의 소용
돌이에 휩싸였으며, 이 논쟁을 통해 광해군과 양반신료들의 대외인식
과 정세인식 수준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또한 이 논쟁이 왕
의 강제 폐위라는 극단적인 사건[인조반정]을 통해 마무리 된 사실은
당시 조선사회를 움직인 권위[서인의 권위]의 실체와 관련해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계승범, 149~150).


대명사대(對明事大)를 하나의 상대적인 외교노선으로 보지 않고 절
대적 가치로 보는 한, 조선이 명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에서 중립적
외교를 추진하는 것은 우선 이론적으로 불가능했다. 교린이니 기미
(羈靡)니 하는 정책이 결코 진정한 의미의 중립정책이 될 수 없는 이
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계승범, 208).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중립적 외교를 실행하려고 노력한 광해군의
훌륭함이 돋보인다. 후금과 명나라 사이의 양다리를 걸치는 중립 외
교를 전개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중립외교를 실행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광해군의 대외정책이 더
욱 빛난다. 인조반정 이후의 임금들이 소중화주의에 따른 사대주의
외교를 펼친 것과 비교하면 할수록 빛난다.


후금과 명나라의 사이에 낀 엄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이 나아
갈 길은, 두 나라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한반도를 중립지대
로 만드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중립외교를 펼쳤어야 했는
데, 중립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축출하는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이 일
어났다.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친 것을 죄악으로
규정한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서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집단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인조
반정 이후 서인 정권의 반청친명(反淸親明) 정책이 병자호란을 초래하
지 않았나? 인조로 하여금 삼전도에 나아가 오랑캐의 왕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수모를 겪게 한 주범이 당신들 아닌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항복을 불러온 당신들이말로 반역자
가 아닌가?


1) 광해군의 군사적인 중립 정책


⑴강홍립에 내린 밀지 ‘觀形向背’


여진의 후금이 만주에서 일으키는 새로운 정세에 면밀하게 대처한
광해군은, 현명한 외교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피하였다. 인조정권과 달리 광해군의 외교노선이 후금의 경계심
을 풀고 조선을 비교적 중립적 세력으로 인식하게 했다는 점은 일정
한 근거가 있다. 1619년 살이호 전투에 원군을 파견할 때 도원수 강
홍립(姜弘立)에게 밀지를 내려 “상황을 보면서 처신할 것이지 적에게
이동하는 것을 보여 주어 먼저 공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
다(이삼성, 536).


광해군은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와 출병에 동조하는 조정 대신들의
압력에 못 이겨 끝내 명나라에 대한 파병을 결정한다. 사면초가에 몰
린 끝에 1만 3,000여 명의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강홍립(姜弘立)
을 도원수로 임명하였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은밀하게 불러 “정세를
잘 살펴보고 행동을 결정하라(觀形向背).”는 밀지를 내렸다. 또 광해군
은 강홍립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
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전으로 군사를 죽이지 않
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행동지침을 보냈다(이이화, 203).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내린 밀지 ‘觀形向背’는 군사적인 중립정책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제아무리 중립외교를 잘해도 군사적으로 뒷받
침되지 않으면 실패한다. 군사적인 중립정책이 중립외교의 후방기지
역할을 해야 중립화에 성공한다. 기미책과 자강책을 절묘하게 배합한
광해군의 외교 전략은, ‘觀形向背’의 군사적 중립정책에 힘입어 문무를
겸비(文 중립외교/武 군사적 중립정책)하는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
다. ‘기미+ゥ자강+�觀形向背’의 3박자를 갖춘 광해군의 외교안보 전략은
17세기뿐만 아니라 21세기의 한반도 중립화를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


1) 광해군의 국제 감각을 이어받은 최명길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지 5년 후인 1627년에 후금의 군사
가 물밀듯 밀려와 한양을 함락시키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임금인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끝내 형
제의 맹약을 맺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인조 정부는 맹약을 어기고 계속 명(명나라)을
지원하면서 후금을 배반했다. 이에 후금은 사신을 보내 강경하게 조
선을 힐책하자 후금의 사신을 죽여 우리의 뜻을 보이자는 강경책으
로 맞섰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환을 없앤다는 정책에
따라 1636년 조선을 점령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두 전란 때 광해군은 강화도와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이
런 현실을 지켜보았다. 이때 광해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만약 자신이
왕위에 있었더라면 이 전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성호 이익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낸 것은 명나라의 방
어를 위해서였으므로 지나친 은혜의식[再造之恩]을 가질 필요가 없다
고 말했다. 이것은 바로 사대모화주의자(事大慕華主義者)들에 대한 경
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그들은 아무런 힘도 기르지 않고 있
음은 물론 후금의 정세도 파악하지 못하고 늙은 명나라만 붙들고 있
다가 끝내 오랑캐라고 깔보고 내려다보던 후금을 임금의 나라로 받
들어야 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대모화주의자들에 의해 임금 자리를 빼앗긴
광해군은 이 땅의 임금 중에서도 자주와 자립을 추구한 드물게 보이
는 군주였다. 그의 이런 정책 때문에 사대모화주의자들에게 쫓겨나
외로운 섬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광해군의 국제질서에 대한 감각은 최명길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최명길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개인의 노력으로 세밀히 파악하여 주화
파(主和派)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강화를 성립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백성의 희생을 줄이고 나라를 유지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이이화, 257).


2) 주화파와 척화파


일반적으로 최명길(崔鳴吉, 1586~1647년)을 주화파라고 부르고 이
에 맞선 세력을 척화파(斥和派)라고 부른다. 정묘호란ㆍ병자호란 당시
의 척화파 거두는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이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이던 인조 앞에서 최명길의 주화론과 김상헌의
척화론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주화파와 척화파는 패전에 따른 강화(講和)를 논의할 때 등장하기
마련이다. 패색이 짙은 아군의 내부에서 ‘적군과의 강화교섭을 시작
할 것인가 적군과 끝까지 싸워 장렬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의 양자
택일을 놓고 격론을 벌인다. 전자가 주화파라면 후자는 척화파이다.
전자가 비교적 온건한 데 비하여 후자는 강경하다.


3)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으며 전쟁을 유발한 척화론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관련하여 보면, 주화파와 척화파는 단순한
온건ㆍ강경 논쟁에 머무르지 않는다. 광해군 집권 당시부터 부각된
사대모화주의자들의 척화론이 인조반정의 논리로 연결되면서 광해
군 중립외교의 맥이 끊기기 때문이다.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반정이 전쟁(정묘호란ㆍ병자호란)을 유발한 원인을 제공한 점에
서, 인조반정 주도세력인 서인의 역사적 책임이 크다.


광해군은 심원한 계책과 명민한 판단력을 가지고 명과 후금에 대
한 외교관계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대등하게 유지하는 데
힘썼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비변사 신하들은 명을 추종하고 의존하
려는 사대사상에 젖어 있었고 후금을 오랑캐로 깔보는 척화(斥和)로
일관함으로써 대(對)후금관계를 악화시켜 마침내 화를 자초했다. 그
러다가 조선에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
의 신정부는 서인 일파에 의하여 독점되었으며 반정의 명분으로서
전왕[광해군]의 명에 대한 배은망덕과 노이(奴夷 후금)와의 통호를
들었다. 이때부터 숭명사대(崇明事大)와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어 호
란을 일으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맥을 끊으며 호란을 일으킨 요인을 제공한 척
화론의 배후에, ‘재조지은’을 주창하는 숭명사대의 모화사상이 있다.
숭명사대의 모화사상이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단절시킨 근원인 셈이
다. 이 숭명사대의 모화사상을 지론으로 삼은 서인-노론 세력과 이
세력의 거두인 송시열이,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후대로 전승되는 역사
의 맥락을 단절시킨 것이다. 중립외교의 역사를 차단한 척화파의 거
두 김상헌, 서인-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4) 그들만의 전쟁(손영식, 72~73)


김상헌ㆍ송시열 등은 후금에 대해서 강경파ㆍ주전파였다. 죽을 때
까지 싸우자는 파였는데, 정작 그들 스스로는 무기를 잡고 싸우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을 때 국가는 파탄이
난다. 청나라에 이길 자신이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도발하지 말아야
한다.


[재조지은의 모화사상이 유발한] 병자호란은 ‘그들만의 전쟁’이었
다. 조선의 서인 정권이 먼저 선전포고하는 형식으로 시작되어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이 패망하는 것으로 끝나 버린 허망한 전쟁이었다.
도대체 저항다운 저항도, 전쟁다운 전쟁도 없이 망했다.


왜 그렇게 저항이 약했던가. 관군도 싸움다운 싸움을 하지 못했고,
[임진왜란 때와 같은] 의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① 짧은 전쟁
기간-이 또한 준비 없이 전쟁판을 벌인 [인조] 서인 정권의 책임이
다. ② ‘너희들의 정권’이라는 의식. 인조 정권은 쿠데타로 탈취한 정
권이었다. 동인-북인의 입장에서 서인들이 일으킨 전쟁에 마음이 내
킬 리가 없었다. 의병은 주로 삼남에서 일어났다. 영남은 동인의 아성
이다. 물론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가 전쟁터여서 의병이 고향 지키기
차원에서 일어났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터였던 경기도 지역에서 의
병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인조 정권이 쿠데타 정권이었기 때
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인의 핵심 축을 이루는 충청도 서인들은 왜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그들은 정치꾼이기에 막대한 이익이 따
르는 쿠데타에는 가담하나, 대가 없는 희생인 의병에 마음이 내킬 리
가 없었을 것이다. ③ 지도부의 비겁함과 무능함-김상헌 등의 주전
파들, 말은 많으나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병자호란 뒤에 서인
정권은 마땅히 물러났어야 하나 다시 집권했다.


[병자호란 때] 모두가 완전히 심리적으로 얼어붙어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왜 그러했던가? 유일 강
국 명나라 군대를 완파한 청나라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 때문에 전
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상헌 등 주전파는 목청을 높여
서 싸워 죽자고 했다. 실제로 싸워야 하는 군인들은 내켜 하지 않은
전쟁, 그러나 전투를 하지 않는 문신들은 싸워 죽자고 하던 상황-희
극적이지 않은가?


5) 무능한 서인 정권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차단한 서인 정권이 병
자호란 때만 무능했던 것은 아니다. 정묘호란 당시에 보인 서인 정권
의 무능함을 지적하기에도 부끄럽다.


전쟁[정묘호란]에 대비한 태세가 전연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취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후금과 강화를 하
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왕과 대신들이 강화를 위한 회의를 거듭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도 난국을 타개할 식견을 가진 자가 없었고 오직 기울어져 가
는 명나라의 눈치를 살피고 거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었
다. ‘명나라와는 사대하며 후금과는 교린한다는 원칙’을 정했으나, 후
금이 이 원칙을 수용할 리 만무했다. 후금의 요구사항인 ‘척절남조(尺
絶南朝 명과의 관계를 끊어라!)’를 에워싸고 의견이 백출했다. ‘영절
천조(永絶天朝 명과의 관계단절)’등에 관해 설왕설래했다. 이때 전선
의 상황은 한강과 임진강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이 떨어져 10일이
지나면 궤멸될 상태였고 오직 고군분투하는 정충신의 군사에게 공급
할 식량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대
신들은 강상(綱常)과 사대의 명분론에만 급급하여 앞을 내다보지 못
했다(김종원ㆍ이양자, 54ㆍ555ㆍ60).


2) 송시열의 등장


김상헌 등의 척화론자에 송시열이 포함된다. 김상헌ㆍ송시열 등의
서인이 병자호란 이후 줄곧 조선정치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것이 결정적이다. 병자호란을 유발하고도 책임
을 지지 않은 서인 집단이 주도한 인조반정은, 중립외교의 전승을 막
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서 완벽한 참패를 한 정권, 국가를 멸
망의 위기에 몰아넣은 정권, 그러나 후금의 명나라 정복전략 때문에,
후금에 의해서 일부러 다시 심어진 정권-이것이 바로 서인 정권이
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런 정권은 물러났어야 했다. 전쟁의 참패 때문
이라도 혹은 후금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국가의 기
강과 민족자존을 위해서라도 그 정권은 물러났어야 하며, 나아가 처
벌을 받았어야 했다.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을 때, 집안이면
집안, 나라면 나라, 꼭 망하게 되어 있다.


바로 이 상황에서 송시열이 등장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송시열이 젊어서 효종의 스승이었고, 그 우연한 인연 때
문에 그렇게 큰 정치가가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우연은 우연
에 불과하다. 송시열이 뛰어난 점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보
고, 그것에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뒤 인조와 서인 정권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했던 것-정
권의 정당성, 명분이었다. 국가를 멸망에 몰아넣은 자들, 전쟁에 완벽
하게 패배한 자들-그들이 다시 집권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패배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면서 왜 다시 집권해야 하는가?
그러나 후금은 참패한 서인 정권의 인사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고스란히 그대로 정권을 잡게 해 줬다. [서인 정권이] 무능하기 때문
에, 다시는 후금에 대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정권을 넘겨준 것이다-
이것은 치욕에 해당된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보고, 전율할 위기의식을 느낀 사
람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물러나
야 할 세력, 심판받아야 할 세력인 서인이 집권한다는 것, 그것의 정
당성 부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권
을 잡아야 하는가?


송시열은 그것을 소중화(小中華) 이론으로 제시한다. 효종은 북벌
이론으로 제시한다. 이 두 이론은 손바닥과 손등에 해당된다. 패배했
기 때문에 설욕해야 한다-이 북벌론은 단순하다. 게다가 전쟁 참패
의 책임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설욕은 꼭 진 자가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한 번 진 것으로, 실력이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난 자들이 다
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


소중화론-이것은 좀 고차원적이다. 조선을 문명국가로 규정하고,
문명 수호 작업을 말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십자군 전쟁, 종교 전쟁의
분위기가 될 것이다(손영식, 75~76).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파탄 낸 인조반정을 통해 집권한 서인이 전
쟁을 일으키고도 재집권함으로써 중립외교 추진 세력이 역사의 무대
에서 퇴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조반정은 중립외교 세력
대(對) 사대주의 세력의 대결에서 후자, 즉 서인 집단이 승리한 정치
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불행이 광해군에 그치지 않
고 소현세자에게도 적용되면서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1636년 12월의 병자호란으로 인질이 되어 심양에 연행된 지 8년 만
에 귀국한 소현세자(1612~45)는 현명하고 국제정세에 밝아서 광해군
의 중립외교의 맥을 이어 갈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조와 서인 정권은 소현세자를 질시하고 있었다. 청의 구
왕(九王)과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되어 돌아온 소현세자가 다음 왕위 계
승자가 되어서는 자기네 서인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
국 소현세자는 앞서 서인들에게 밀려난 15대 광해군과 같이 당쟁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거세되고 만다. 이와 같이 명청(明淸) 교체기에 친
명파와 친청파가 국론을 크게 두 편으로 갈아놓고 나라의 운명을 좌
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친청: 광해군-主和--소현세자----실학---개항
친명: 인조--斥和-봉림대군(효종)--위정척사--의병


다시 말해서 17, 18세기의 조선왕조가 갈 길은 친청이냐 친명이냐의
두 길밖에 없었는데 조선은 친청의 길을 택하지 않고 친명의 길을 택했
던 것이다. 실리를 버리고 의리를 택한 것이다. 이(利)보다 의(義)가 더
중요하다는 의리론에 입각한 대외정책이었다(박성수, 377~378).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인 명에 대한 의(義)를 중시하는 대외정
책이 서인 정권에 의해 지속되었고,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광
해군 축출ㆍ소현세자의 정치적 살해가 일어나면서 중립외교 추진세
력-주화파가 거세된다. 거세된 자리 위에서 실학파(북학파)가 사대
모화주의를 비판했으나 대명사대(對明事大)의 대외정책을 폐기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채 조선 말기의 개항이라는 정치적 시도가 실패
로 돌아간 끝에 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또한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
한 일제 지배의 유산이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이, 오
늘날 영세중립 정책을 구사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분단 시대의 우리들이, 청나라와 타협하여 실리를 얻으려
던 광해군을 버리고 죽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청과 대립하는
인조의 정책을 따르고 있는지 모른다. 또 최명길을 버리고 김상헌을
따르고 있는지 모른다(박성수, 378).


2. 역사적인 조건 ⑽


1) ‘ 중립외교의 이정표’를 가로막는 차단막

최명길은 호란(정묘호란ㆍ병자호란)의 위기 극복 대안으로 변통(變
通)의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이으려 했다.
변통이란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에 맞추어 때로는 명분을 굽혀서라
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명나라의 적인 후금
과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앞날을 대비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
이 추구한 실리외교를 조금 절충하여 ‘친명(親明)’의 관계는 유지하고
‘和金[후금과의 和親]’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이화, 318).


이렇게 광해군 중립외교를 변용한 최명길의 ‘변통’은 고집불통의
척화파에 의해 단절되었다.


최명길은 청의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섰다. 그는 죽음을 무릅
쓰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난국을 화의(和議)로 건지려 했다. 그러나 척
화파는 심지어 칼을 꼬나들고 면전에서 그를 죽이려 했다. 임금은 척
화파를 누르고 주화파인 최명길ㆍ장유 등을 감쌌다. 이런 분란 속에서
최명길은 눈물을 흘리면서 항복문서를 손수 써야 했다. 이때 김상헌이
들어와서 항복문서를 빼앗아 북북 찢어 버렸다. 존명(尊明) 의리를 밥
처럼 먹고 사는 자들[척화파]과 존명 의리를 잠시 접고 살길을 찾아보
자는 자들[주화파], 어느 쪽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방책이겠는가? 끝까
지 목숨을 걸고라도 본질을 굽히지 않는 것이 ‘대의명분’이라면, 본질
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방법을 바꾸어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권도
(權道)’이다. 최명길의 타협적 노선도 권도였다(이이화, 320).


최명길의 저작인 󰡔지천집(遲川集)󰡕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청음(淸陰, 김상헌)의 척화는 수경(守經) 한 가지였으나 나의 주화는
지경(知經)하여 달권(達權)한 것이다. 나의 마음은 고리같이 둥글어서
돌아갈 줄을 안다.”

‘수경’은 근본을 지킨다는 뜻이지만 ‘지경’과 ‘달권’은 근본을 알지
만 적절하게 방편을 쓴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신의 행동에 신념을 가
졌다는 말인가?(이이화, 322)


고리같이 둥글어서 돌아갈 줄 아는 마음으로 적절하게 방편을 쓰
는 최명길의 중립외교는, 󰡔주역(周易)󰡕의 ‘중(中)-시중(時中)’을 연상
케 한다. 모나지 않은 원만한 세상 속의 중립지대를 상징하는 ‘중(中)’
은 중립화의 상징적인 단어이다. 주역의 시중정신(時中精神)에 따라
中(중립)의 시(時)ㆍ위(位, 공간)를 찾아 중립화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통해 이 길을 걸었으며, 최명길도 변통하면서
이 길을 걸으려 했다. 그런데 이 길의 길목에서 중립의 길을 걷지 못
하게 한 세력이 있었다. 바로 척화파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서인
척화파이다. 서인 중에는 최명길과 같은 주화파도 있었으므로, ‘서인
척화파’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서인 척화파’가 광해군~최명길로 이
어지는 중립외교의 맥을 끊어 놓은 것이다. 중립외교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자리에 ‘척화-척사(斥邪)’의 팻말을 박은 것이다. 이 팻말은,
인조반정~김상헌의 척화(斥和)~효종의 북벌정책~위정척사로 이어
지는 ‘사대모화주의의 이정표’이다. 이 이정표는 광해군의 중립외
교~최명길의 주화(主和)~소현세자~실학~개항으로 이어지는 ‘중립
외교의 이정표’를 가로막는 차단막이 되었다.


중립(중립외교ㆍ중립화ㆍ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관점에서 광해
군 이후의 역사를 평가하면, ‘중립외교의 이정표’와 ‘사대모화주의의
이정표’가 대립한 결과 후자가 전자의 기를 꺾어 득세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의 ‘중립(중립외교)’의 기운을 제압한 세력은 서인 척화파
이고 그 중심인물은 김상헌ㆍ송시열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김상
헌~송시열로 내려온 사대모화주의가 19세기 말의 국제정세에 조응
하지 못한 결과 망국(조선왕조의 멸망)의 이정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2) 영세중립 원년 이후


1815년의 영세중립 원년 이전에 광해군의 중립외교~최명길의 주
화(主和)~소현세자~실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역사의 주류가 되었
다면, 조선 땅도 일찍이 스위스처럼 영세중립 국가가 되었을지 모른
다. 그런데 통탄스럽게도 영세중립 원년 이전의 인조반정~김상헌의
척화(斥和)~효종의 북벌정책이 역사의 주류가 되는 바람에,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가는커녕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통한의 역사를 잘 정리한 이덕일 박사의 글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이덕일, 2009, 317~341 요약).


정묘ㆍ병자호란은 사실상 인조반정 체제가 자초한 전화(戰禍)로서
반정체제의 시대착오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란
이후에도 반정체제는 붕괴하기는커녕, 변화와 개방에 대한 모든 요구
를 억압하면서 더욱 보수ㆍ반동적인 성격으로 나아갔다. 반정체제는
성리학 사상의 조선적 변형인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지배이념으로 삼
아 다른 모든 사상을 억압했고 이는 인질생활 도중 개방적 현실주의
자로 변모한 소현세자를 독살할 정도로, 독존적 행태로 나타났다. 소
현세자의 죽음은 현실주의자의 죽음이자 개방주의자의 죽음이었고,
이로써 조선은 개방과 현실의 기회를 잃고 더욱 폐쇄적인 사회로 나
아갔다.


인조반정 체제는 노론 일당 독재체제로 전환되었다. 이어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이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이제 조선은
노론 일당 독재에서 노론의 한 일가(一家) 독재로 더욱 전제화된 것이
었다.


세도정치 아래 국왕은 명목뿐인 존재에 불과했고, 더 이상 기댈 곳
이 없어진 민중들은 민란으로 노론 일당체제 및 세도정치에 저항했
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정책들을 단행했으나
왕권 강화라는 수구적 지향점을 지님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대원군의 실각은 고종의 친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고종은 서세
동점의 한가운데 놓인 조선을 이끌어 나갈 만한 비전과 역량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지배계급의 개혁 실패로 동학으로 대표되는 민중들이
직접 개혁의 장에 나섰으나 지배계급은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여 이
를 진압했다. 동학농민 혁명의 실패는 조선의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마지막 기운이 무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잇달아 승리함
으로써 조선 점령을 확정 지었다.


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은 인조반정 이후 약 300여
년간을 집권해 온 노론이 국망(國亡)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일
제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는 데 있다. 노론 인사 어느
누구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층 중에서는 그나마 야당이었
던 소론[주화파의 후예]과 재야 남인들 중 일부만이 독립운동에 나섰
다(이덕일, 2005, 16~20).


일제는 조선 점령 직후인 1910년 10월, 76명에 달하는 한인들에게
이른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했다. 대부분 이씨, 민씨 등 왕족
들과 집권 노론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합방공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
도 귀족의 지위를 누렸다.


일본이 비록 영토를 점령했어도 이들 매국 사대부들의 도움이 없
었다면 그리 순조롭게 대한제국을 병탄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노론이 대다수인 ‘한일합방 공로작 수여자 명단’은 대한제국이 멸망
할 수밖에 없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앞에서 살펴보
았듯이 노론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잠시 동안 정권을 내준 것을 제외하고 조선 멸망 때까지 집권했다.
300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집권한 정당의 당인들이 나라 팔아먹는
데 앞장선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이런
노론 당파의 일부 후예들이 조선사 편수회에 들어가 식민사관을 형
성하면서 역사권력을 독점한다. 이렇게 된 근본원인은 해방 후 수립
된 정부 성격이 민족정체성 수립과 거리가 있었던 데 있다. 역사를
퇴행으로 몰아갔던 노론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이 현재까지 한국사의
주류행세를 하는 잘못된 현실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2. 역사적인 조건 ⑾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수립된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아, 노론-친일파가 온존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상당수는 친미파로 ‘전향’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노
론의 모화(慕華)가 친일파의 모일(慕日), 친미파의 모미(慕美)로 바뀌며
숭배(慕)의 대상이 중국(華)~일본(日)~미국(美)으로 바뀌었을 뿐, 외세
(종주국)에 사대하는 몸짓은 그대로이다. 그런 몸짓을 하는 몸체의 원
조가,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이
다. 서인 중에서도 최명길의 주화론을 꺾은 척화파가 원조 중의 원조
이다. 다시 말하면 ‘서인 척화파’의 斥和~노론의 慕華~친일파의 慕
日~친미파의 慕美로 이어지는 사대주의가 자주ㆍ중립 외교(자주 노
선 없이 중립화를 이룰 수 없고, 자주 외교 없이 중립 외교 없다)를
차단하는 역사가 흘러왔고, 분단 시대인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다.
이러한 몇백 년의 ‘반(反)자주ㆍ중립의 역사’를 어떻게 청산하면서 중
립화 통일을 이룰 것인가?


1) 영세중립 원년 이후의 역사적인 조건 탐색


위와 같은 문제제기를 하면서 영세중립 원년(1815년) 이후의 역사
적인 조건을 탐색한다. 이 탐색의 대상은 慕華~慕日~慕美의 뿌리인
모화사상이고, 모화사상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상헌ㆍ송시열이다.


⑴모화사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하여 조선유학자들 사이에 모화사
상이 크게 일어났다. 명나라를 존숭하는 것은 춘추시대에 모든 제후
국이 주나라를 존숭하는 것과 동일한 의리이다. 명나라를 옹호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것은 ‘임금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尊王擁
夷].’는 것을 대의로 여기고 사생결단하여, 이를 다투며 도덕적 절의
에 기초하여 이것을 주장하였다(현상윤, 260).


그리하여 이 사상과 주장은 널리 국민에게 침투하여 도덕이 되고
의리가 되며 여론이 되어 수백 년 동안을 시종일관하였다. 삼학사의
죽음,17) 만동묘(萬東廟)의 제향(祭享),18) 숭정(崇禎) 및 영역(永曆) 기원의 사용19) 등을 보면 저간의 소식을 짐작할 수 있다.


17) 홍익한(洪翼韓)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의 죽음을 말한다.

18) 만동묘(萬東廟)의 제향(祭享)이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만동묘를 세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그리고 남쪽으로 쫓겨 간 의종(毅宗)을 제향(祭享)하기 위한 것이다.

19) 숭정(崇禎)과 영역(永曆)은 명나라 말기 의종(毅宗; 1628~1644)과 영명왕(永明王; 1647~1662)의 연호이다.


⑵김상헌


모화사상 고취에 있어서 김상헌은 실로 대표자이고 영수이다. 김
상헌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여전히 존명론(尊明論)을 주장하고 ‘복수설
치(復讐雪恥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어 내림)’의 의견을 고조하였다.
이제 그 언론을 들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명나라 신종 황제의 재
조(再造)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계곡에서 방황하고 피눈물이
흘러 눈물이 메말라 버리고 주야로 마음을 맹세하는 것은 다만 하나
의 검으로 머리를 베고 신하의 심장을 갈라 보이고자 할 뿐이다.”
그리하다가 마침내 그는 청나라의 요구에 의하여 ‘척화(斥和)’의 죄
명으로 심양에 압송되었다. 그러나 김상헌은 의연하게 배명사상(拜明
思想)을 선전하고 고취하였다(현상윤, 261~263).


⑶송시열


모화사상, 사대주의의 특색은 화(華)라는 중국 민족에 대해서는 무
조건 숭배하는 대신에 華 이외의 딴 민족에 대해서는 오랑캐와 야만
인이라고 멸시하는 것이요, 큰 자(者), 강한 者에게는 무조건 굴복하면
서 작은 者, 약한 者는 천시하고 멸시하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 자체가 중국인들이 멸시하고 천시하는 이족(夷族)이건만
또 중국인에게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았건만 제 생각은 하지 못하고
딴 민족에 대해서는 夷族이라고 멸시하고 만족(蠻族)이라고 천시하였
던 것이었다.


이것이 소위 모화사상, 사대주의의 가장 가소로운 점이었다.


우암(尤菴) 송시열을 영수로 한 우리나라 선유(先儒)들의 모화사상, 사
대주의는 이상에 말한 그 가소로운 특색을 가장 잘 구현시킨 것이었다.
철저한 모화사상, 사대주의로만 일체를 꾸려 놓고 이것을 국시(國
是)로까지 定하게 한 송시열과 그의 추종자들은 3백여 년 명나라가
아니면 날이 새지 않을 정도이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은 찾아볼 생
각도 하여 본 적이 없다.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못난 짓이었더냐?
생각만 하여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권오돈, 69~71).


송시열이 활동할 무렵 주자학은 조선에서 이미 그 순기능을 다한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절대적 위치에서 상대적 위치로 내려와야 했
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
자학을 강화하는 역사의 반동으로 나아갔다.


송시열은 “다행히 주자 뒤에 나서 학문이 어긋남이 없다.”고까지
말했지만 그 주자학이 정치에 적용될 때 어긋남이 너무 컸던 것이 송
시열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주희의 의리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것, 즉 소중화(小中
華) 사상을 주자학의 조선화(朝鮮化)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소중화란 명분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맞게 학문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유학의 진정한 조선화는 소중화가 아니라 양반 사대부 중심의 중세
유학을 농민을 포함하는 일반 양인 중심의 근세 유학으로 바꾸는 것
이어야 했다. 그런 사고 속에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해야 했다. 사대부
와 일반 백성이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송시열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이었고,
서인ㆍ노론이라는 당(黨)의 이익이었다.


그는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黨益)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
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이덕일 395~398).


[중립외교의 선구자인] 광해군은 도덕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현
실적으로 청나라와 타협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광해군]는 도덕과 현
실, 윤리와 힘을 일원화시킨다. 아니 현실과 힘의 편에 선다. 현실주
의이고, 책임 있는 태도이다.


반면 서인과 송시열은 도덕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청나라와 강
경하게 대결하는 길을 걸었다. 대결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과 현실, 윤리와 힘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2원화시
킨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를 선택한 반면 현실과 힘을 완전히 포기한
다. 현실적 힘이 받쳐 주지 않는 도덕과 명분 주장-그거야 삼척동자
도 알 수 있듯이 완전히 깨지는 길이었다. 병자호란의 패배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후 충청도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은 소중화론, 북벌론을 주
장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대결을 이끈다. 청나라에 대한 증오심이 서
인 정권의 집권 명분이 된다. 송시열의 소중화론은 일종의 정신 승리
법이다(노신, 󰡔아큐 정전󰡕을 보면, 아큐는 ‘정신 승리법’으로 강한 자
를 이긴다. 정신적으로만 승리하는 것이다)(손영식, 206).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병자호란 때 조선을 점령한 후금은, 서인
정권이 무능하기 때문에 온존시킨다. 김상헌ㆍ송시열이 이끄는 서인
정권의 무능이 생존 전략이 되었다. 서인 집단이 무능함을 생존 전략
으로 삼을 정도라면, 조선의 퇴락과 낙후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는 새로운 국가가 등장했
어야 한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았다. 실학이 등장하기는 해도 현실적
으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새로운 국가를 세울 새로운 사상은
없었다. 그렇다고 지주-지식인-사대부 계급을 대체할 강력한 계급
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작인층은 여전히 약한 계층이었다. 그래서 조
선은 낡고 반동적인 세력[서인-노론 세력]이 여전히 집권했고, 서서
히 쇠잔해져 가서 백색 왜성이 되어 간다(손영식, 173).


조선이 백색 왜성이 되어 간 원인이,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서인-노론 집단의 모화사상에 있음을 강조하며 이 글을 마친다.


5. 한반도 분단의 遠因


1) 나라가 썩어 문드러졌다


필자는 광해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를 조명하면서, 광해군 중립
외교를 단절시킨 서인에 이은 노론ㆍ세도정치 집단의 3백 년 지배가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광해군 이전의 조
선 전기(前期)부터 ‘민생고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배계급의 무능함으로
인한 망국의 징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징조를 독파한 이율
곡의 저서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소개한다(기세춘, 241~245).


“민생은 생선처럼 썩어 문드러지고
흙처럼 무너질 것이다.
오늘날 민력(民力)을 살펴보면
죽어가는 사람처럼 숨소리가 잦아들어
평시에도 지탱하기 힘들 지경이니
만일 외환(外患)이 남북에서 일어나면
장차 질풍에 낙엽이 쓸리듯 할 것이다.”


위와 같이 임진왜란을 경고하는 발언에 이어 ‘백성이 굶주리면 나
라가 아니다’는 통렬한 비판이 계속된다.


“읍과 동리는 적막하고 쓸쓸하여
사람의 연기가 멀리 끊어져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만약 이러한 폐단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근본이 무너질 것이며
국가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궁궐은 환락에 취한 반면에 민(民)은 굶어 죽었다.


“궁궐 안에서는
환락에 취해 밥 먹을 겨를도 없으나
궐문 밖에서는
임금의 은택이 흐르지 않아
슬픈 우리 창생은 무슨 죄, 무슨 허물뿐
기름기는 가렴주구로 말라가고……
기근이 겹쳐
마을마다 길쌈하는 노래가 끊어지고
골짜기마다 가뭄과 홍수로 탄식한다.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고
구제의 손길이 끊긴 버려진 백성이 슬프다.”


이렇게 백성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민은 결국 도적이 되거나 민란
을 일으킨다.


“백성이 항구적인 산업이 없으면
그 본연의 착한 마음을 잃게 되고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절하면
염치를 돌아볼 수 없게 되어
일어나 도적이 되니
어찌 본마음이겠는가?”


⑴ 20대(對) 80의 사회에서 전쟁의 피해가 가중됨


당시 조선은 20 대(對) 80의 사회이었다. 20%의 양반이 모든 권력
을 쥐고 있지만, 80%의 상놈들은 인권이 없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더
구나 임진왜란, (광해군 중립외교를 단절시킨 서인 주도의 인조정권
이 유발한)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참담한 병화(兵禍)를 겪고 난
이후에 민생은 그야말로 도탄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나라를 보위
하기 위해 우선 군사를 정비하고 민생을 돌보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농토의 소유자가 병사를 내는 농병일치의 제도하에서 20%의 양반이
농토를 겸병(兼倂)하면서도 병역을 면제받았으니, 80%의 상민(常民)이
가진 농토만으로는 군사를 정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즉 민생이 피
폐하여 군사를 정비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1만 명의 군
사만 쳐들어와도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20 대 80의 사회에 전쟁의 화마까지 덮쳐 민생고가 가중
되었다. 모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들의 고난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양란(兩亂)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광풍이 조선을 휩
쓸고 갔을 때,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겠지만 가장 큰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힘없는 아녀자들이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장수들은 전쟁을 치르는 동한 성욕을 해결하고자 조선 현지에서 조
선인 아녀자를 현지처로 삼고 조선 여인들에게 일종의 화대로 부지
미(扶持米)를 주었다.


전쟁 기간 중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인들이 일본군에게 겁탈을
당하거나 그런 사태를 피하고자 자살하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임진왜란에 이어 조선을 휩쓴 병자호란 때도 조선의 여인들은 크
나큰 고초를 겪었다. 청군[청나라 군인]에게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간
수많은 여인들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이리저
리 돌림을 당하다 매를 맞거나 병들어 죽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와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
들이 돌아온 여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음란한 여인을 가리키는 ‘화냥녀’또는 ‘화냥년’이라는 말
은 병자호란 때 청[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인이라는 말인 ‘환향녀(還鄕
女)’에서 유래했다(도현신, 258~265 요약).


2) 망국 100년, 분단 63년


조선왕국의 말년에, 조선의 민중들은 대부분 땅을 갈아먹고 사는
경작농민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농업생산성이 낮았던 관계로 사람들
이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가족들이 먹고 남는 경제적 여유가 별
로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농사를 짓지도 않고 먹고사는 왕실 양반
관료들의 수가 늘어나고 또 그들의 가렴주구가 하도 극심하였기 때
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도처에서 들고 일어나서 ‘민란’을 일으켰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는 ‘민란’이 전국 도처에서 일상화되었고,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
봉기는 조선왕국 왕실 관료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왕실의 민씨 정권은 드디어 청국 군대를 불러들이게
되었고, 일본은 청군의 출병과 일본 공관 경비를 이유로 조선에 일본
군을 출병하게 되었으니, 결국 조선왕국 지배층 내부에서 친청파와
친일파가 갈리어 권력다툼을 하면서, 각기 외세의 무력으로 조선 각
지의 민란과 동학군을 진압하려 했었기 때문에 외국군대가 조선 땅
에 들어온 것이다. 이 땅에서는 친청파가 불러들인 청군[청나라 군대]
과 친일파가 불러들인 일군[일본 군대]이 싸우는 청일전쟁의 결과로
결국 청군이 패하여 일본이 조선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태로 진전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왕국의 국권을 찬탈한 배경에는 1902년의
‘5영일동맹조약’과 1905년의 ‘미ㆍ일 태프트-카츠라 밀약’이 있었다
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할 일이다. 약소국가가 과연 어느 강대외세를
믿으면 될까?


그러나 조선왕국의 망국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
은 당시 조선왕국의 왕실 관료들이 자국 내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일으킨 민란과 갑오 농민봉기를 청국이든, 일본군이든, 외세의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하려고 했고, 자기 문제를 자기 힘으로 스스로 해결하려
는 자주적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일본군은 조
선왕국의 관군과 더불어 무력으로 동학군을 말살했고, 드디어는 일본
군이 조선왕국의 독립권까지를 집어삼키는 사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왕조 말년에 왕실관료들과 민중 사이의 민족 내부 갈등을 스
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망국의 비극을 맞았던 우리 민족은 8ㆍ15 후의
정국에서 다시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 독립국가를 만들겠다고 남과
북이 각기 미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을 불러들여 동족상잔의 전쟁을 했
다. 조선왕국의 망국과 6ㆍ25 전쟁의 비극 속에는 ‘외세 의존’이라는
사대주의의 공통성이 있었다. ‘외세의 힘’을 빌려, 민족 문제를 해결
하려고 한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성찰
이 없었던 것이 우리 민족에게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던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김낙중, 2005).


3)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악순환이 분단체제로 연결됨


민중봉기를 제어할 능력이 없던 노론-세도정치 세력이 외세의 힘
을 빌려 봉기를 진압하면서 민족모순이 강화되었다. 계급모순의 발로
인 민중봉기를 외세가 진압함으로써 민족모순이 강화되는 악순환이
조선왕조의 멸망을 가져왔다. 19세기 말부터 일어난 계급모순-민족
모순의 악순환은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고, 드디어 일
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부터 폭발하여 1950년 한국전쟁의 내재적 원
인을 제공했다. 분단체제의 서막이 된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 사이에
평화통일을 위한 중립지대가 사라짐으로써,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하
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광해군 축출(광해군 중립외교의 단절)~인조반정~서인ㆍ
노론 집권~세도정치~조선왕조 멸망~분단의 과정 속에서, 중립외교ㆍ
중립화ㆍ중립화 통일ㆍ영세중립과는 거리가 먼 사대주의(慕華ㆍ慕日ㆍ
慕美사상)가 득세한 끝에 분단체제를 강화하게 되었다.


한반도 분단은 (국제)정치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ㆍ경제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민생고(民生苦)로 말미암은 19세기의 민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의 학정, 지배계급의 가렴주구ㆍ토지수탈로 밥상 공동체를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민(民)의 저항이 민란으로 폭발하고 이 민란이 이어져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터지면서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개입했으며, 그 결과 한반도는 국제 대리전의 전쟁터로 전락한다. 19세기의 민란⟶신미양요→갑오농민전쟁⟶청일전쟁⟶
명성황후시해⟶아관파천→러일전쟁⟶을사보호조약⟶의병전쟁→한일합병조약⟶일제(日帝)지배⟶일제의 패망과 민족해방⟶미 군정⟶한국전쟁⟶정전⟶분단체제로 이어져 오는 가운데, 민초들의 평화로운 삶은 아예 불가능했다. 民이 잘사는 길을 모색할 겨를이 없었다. 평화의 밥을 먹을 수 없는 民의 유랑ㆍ삶의 분단, 생활세계의 분단이 밥상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져 사회ㆍ경제적 분단이 가중되었다. 19세기 이후의 사회ㆍ경제적 분단이 1945년 이후의 (국제)정치적 분단과 어우러져 한반도 분단의 원류를 이룬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부터 비롯된 사회ㆍ경제적 분단(및 이로 말미암은 민중의 밥상 공동체 해체)을 거론하지 않는 한반도 분단론은 단견에 그친다. 민생고로 인한 밥상 공동체 해체가 사회ㆍ경제적 분단을 낳은 조선 후기의 민중생활사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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