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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칼럼-에세이

불안한 시대의 용산 참사

김승국

불안이란, 자기에게 나쁜 일이 지금은 일어나지 않지만 언젠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될 때 생기는 감정이다. 대상이 분명하지 않아서 회피하거나 예방조치를 취할 수 없는 무력감을 동반한다. 


이러한 무력감이 만연한 현대를 ‘불안한 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다. 불안한 시대는 문명․체제의 전환기에 다가온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에 팽배해 있는 가운데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 삶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할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불안한 시대’. 무한경쟁의 시장에서 탈락하여 도시빈민이 되거나  노숙자로 전락하는 불안한 시대. ‘청년실업 대란’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여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불안한 시대. 40대 중후반이 되면 언제 회사로부터 쫓겨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불안한 시대. 유망한 중소기업이 흑자도산하거나 빚에 쪼들린 중소기업 사장이 자살하는 불안한 시대. 미국산 유전자변형(GMO) 식품이나 중국산 저질식품이 먹거리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불안한 시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공포’에 맞선 촛불시위를 통해 국민 건강권을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가 대량 유통되면서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는 불안한 시대. 토건국가를 지향하는 이명박 정권의 속도전을 국민들이 따라잡지 못하며 허덕이는 불안한 시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그 동안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금자탑이 무너져 사회 곳곳에 ‘아노미(Anomie) 현상’이 벌어지는 불안한 시대. 국민들을 절망상태로 모는 정치권의 행각, 의회의 기능마비, 법치의 과잉, 공권력의 남발, 인권개념의 실종 위기에 놓인 불안한 시대. 용산 참사에서 공권력의 과잉진압으로 사람이 죽었는데 ‘죽임의 공권력’은 면죄부를 받고 철거민들이 테러리스트로 내몰리는 가치전도의 불안한 시대. 도심의 상가에 세든 자영업자 누구나 ‘졸지에 철거민이 되어’ 공권력․용역깡패와 싸우다가 억울하게 개죽음 당할 불안감이 있으며, 죽은 뒤에도 테러리스트의 누명을 뒤집어 쓸 개연성이 있는 불안한 시대. 걱정이 태산 같은 세입자들의 마음이 조바조바하여 ‘나도 곧 저렇게 참사를 당할지 모른다’고 마음 졸이는 불안한 시대. 세계화․신자유주의의 모순이 시민들의 신체 속에 축적되어 심신이 고달픈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아우성치는 불안한 시대. 이 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발독재가 ‘만악(萬惡)의 근원’을 이루는 불안한 시대. 이처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총체적인 난국인데도, 이에 대한 감각이 없는 집권층의 불감증으로 나라의 발전이 지체될 가능성이 높은 불안한 시대.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총체적인 난국을 돌파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불안한 시대.


이렇게 불안한 시대에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노력 속에 난국을 돌파할 대안이 내재해있을 것이다. 내재해있을 것으로 믿는 대안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불안한 시대의 현상을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어 불안한 시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가운데 불안한 시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불안한 시대의 실체를 인지한 뒤 이를 지양할 평화의 대안을 마련하는 게 바람직한 수순인 듯하다.

그러면 먼저 불안한 시대의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인문학적인 작업을 시도한다.



Ⅰ. 불안한 시대의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인문학적인 작업



불안한 시대는 세기말적인 상황, 사회의 총체적인 위기, 문명 전환기에 다가오며 지금의 한국사회이야말로 불안한 시대상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19세기말에 유럽문명 위기론이 등장한 상황과 유사하다. 한국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체제․사상의 위기, 삶(삶의 세계; Lebenswelt)의 위기, 실존(Existenz)의 위기에 놓여있다.


이러한 위기가 실존주의적․원초적․근원적인 불안을 가중시키는 가운데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불러들이고 있다. 19세기의 유럽문명 멸망 위기를 경고한 키에르케고르(Kierkegoord)와 같은 철학자가 내놓은 ‘불안’ 개념에 접근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화를 염원하는 유토피아조차 사라지는 종말’이 다가오기 전에, ‘삶의 불안을 극복하는 평화의 사상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불안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립해본다.



   1. 불안 개념



불안 개념은 19세기의 유럽에서 등장했다. 유럽문화의 쇠퇴를 동반하는 유럽사회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불안 개념을 촉발했다. 하나의 문화, (이 문화를 지탱해주는) 사회가 쇠망하는 것은 개개인의 인생에 커다란 그림자를 던져준다. 따라서 이러한 그림자를 먼저 인지한 철학자․사상가들이 나타나 불안한 시대를 예고한다. 철학자들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이성적인 언설이나 종교로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다. 키에르케고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로 이어지는 불안의 철학은 ‘불안이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라고 진단한다.



    1) 키에르케고르의 불안 개념



키에르케고르는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불안은 물론이고, 고대사회와 이교도의 세계에 있어서의 불안에 관해서도 폭넓게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시종일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는 역시 시종일관 이 ‘불안’을 ‘죄’와 관련시켜 그의 메시지를 엮어 나가고 있다. 어쩌면 그가 ‘불안’을 그다지도 파고든 것은, 그의 궁극의 관심사가 ‘죄’의 해명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실제가 그렇다. 그리스도교의 근본개념은 ‘죄’이고, 이 ‘죄’는 ‘원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왔고, 또 이런 죄를 인간이 짊어지고 있음으로 해서 ‘구원’ 역시 가능하고 이루어진다. 성서에 의하면 아담은 하느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이것이 원죄고, 따라서 아담의 후예인 인류는 죄 속에 있고, 그렇기에 불안한 것이다-이런 수학의 공식과도 같은 논리를 키에르케고르는 배격한다. 그는 아담의 죄이거나 후대의 인류의 죄이거나를 막론하고, 그보다 앞선 ‘불안’ 속에서 찾으려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안고 있는 불안과 절망은 바로 인간실존에 불가피한 상황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 시간성과 영원성, 자유와 필연과 같은 모순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절망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그는『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에서는 인간을 절망의 상하에서,『불안의 개념』(The Concept of Dread)에서는 불안의 상하에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인 이상 본질적으로 불안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한성과 시간성과 필연에 묶여있는 동물이거나 무한성과 영원성과 자유를 가지고 있는 천사에게는 불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에 부여된 모순된 구성요소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갈등할 때 인간은 절망과 불안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실존에 나타나는 불안은 공포와는 다르다고 보았다.(이 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공포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인데 불안은 대상 없이 자기 내부에서 구체적인 대상 없이 막연히 일어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은 인간의 심연을 내려다볼 때 경험하는 현기증에 비유하고 있다. 밑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을 내려다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이며, 자기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현기증을 일으키듯이 아찔함을 느낀다. 이 아찔한 현기증이 곧 불안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불안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는데 인간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선택한 자유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식한다. 선택의 자유가 부여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미래는 무서운 가능성이 되어버린다. 자유롭기 때문에 인간은 선택을 해야만 되는데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도 악을 선택할 수도 또한 행운을 선택할 수도 재난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은 책임을 져야 할 위기의 순간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위기를 혼자서 직면해야 되므로 불안한 것이다. 불안은 죄에 앞서 일어나는 심리상태이다. 불안 속에서 인간은 항상 악을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선택도 공공연한 행동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택과 행동은 피할 수 없이 자기가 짊어져야 하지만 인간은 악을 선택할까봐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가능성에 의해 매혹되기 때문이다. 원죄의 본질에 대해서는 자주 검토되어 왔지만 그러나 중요한 카테고리는 무시되어 왔다. 그것은 불안이다. 불안이란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욕망이다. 즉 공감적 반감(a sympathetic antipathy)이다. 공감적 반감은 하나님이 지식의 과일을 먹지 못하게 금지시켰을 때 아담이 느꼈던 감정이다. 이것은 곧 욕망과 두려움이 혼재된 불안의 감정이다. 또한 이것은 아담의 타락후 시간의 세계 속에 살면서(유한적 존재) 영원한 영적 세계를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는 아담의 자손인 인간들이 겪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상황이다.    


키에르케고르를 사로잡은 불안은 무(無)에서 비롯되는 존재론적 불안이다. 그는 이런 불안을 무(無)의 불안이라고 부른다. 이 무야말로 키에르케고르 철학의 아르키메데스적 점이다. 키에르케고르 철학에 체계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무 때문이다. 체계를 시도하는 대신에 그는 무를 내세워 모든 체계를 흔들어댄다. 왜냐하면 유(有), 즉 내재성에서 출발하는 모든 체계는 실존의 운동이 거쳐야하는 질적 변화를 간과하거나 혹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모든 운동을 양으로 환원시켜버린다. 그래서 이교의 철학에서는 무의 불안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2) 하이데거(Heidegger)의 불안 개념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현존재(現存在; das Dasein)는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das In-der-Welt-sein)’이며, ‘그때마다 바로 나의 것(Jemeinigkeit)’이다. 그러한 현존재는 현사실적(現事實的)으로 지금 그리고 여기 던져져 있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이미 언제나 일정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das Gestimmtsein).


그에 의하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다름 아닌 ‘불안(die Angst)’이다. 불안은 현존재의 그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存在可能; das eigenste Seinkönnen)을 열어 밝혀준다(offenbart). 그리하여 ‘불안’은, 현존재가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존재의 본래성(本來性; die Eigentlichkeit seines Seins)’을 선택하고 포착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사람들(das Sein)’은 일상생활 속에서 편안하게 그리고 안심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불안’은, 세계 속에 푹 빠져 있는 현존재를 그러한 몰입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그리고 여기서 일상적인 자명성(自明性)은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갑자기 ‘불편하게(das Un-zuhause)’되고 ‘안심할 수 없게(die Inheimlichkeit)’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불안’ 속에서는 ‘섬뜩하다는 것을 느낀다(Es ist einem unheimlich). 그러나 무엇 앞에서 섬뜩한지는 말하지 못한다. ‘불안’ 속에서는, ‘모든 것이, 그리고 우리 자신마저도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빠져나가 버린 상황에서 붙잡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 어느 존재자(存在者)에게도 매달려 안주할 수 없다.


이때 현존재를 강하게 엄습해 오는 것은 ‘무(無; das Nichts)’라는 것, 그것이다. 불안 속에서 ‘무(無)’가 드러난다는 사실’은, 불안이 물러갔을 때 직접 확인된다. 불안이 무(無)를 드러낸다. 즉 불안 속에서 무(無)가 주어진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現)-존재라고 하는 것, 그것은 무(無) 속에 사로잡혀 있다’. 현존재는 ‘무(無) 속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죽은 자는 인간이다. 인간만이 죽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der Tod)은 ‘무(無)의 사당(祠堂)’이다.



  2. 불안이라는 기분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는 ‘불안이 인간의 근본적인 상황과 아울러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를 개시하는 특수한 기분’이라고 본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어떠한 순간인가? 그것은 불안이란 기분이 인간을 엄습할 때이다. 불안이란 기분이 엄습하는 것과 동시에 키에르케고르에서는 인간은 천진무구한 평화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고 하이데거에서는 인간은 일상적인 안정된 세계에서 더 이상 의미와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불안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자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실존성이 인간에게 싫어도 져야만 하는 짐(Last)과 같은 것이라면, 불안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러한 짐이 지워지는 것이기에 불안은 가장 섬뜩한(unheimlich) 기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그의 실존적인 성격에 있다면, 이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도록 몰아대는 불안이란 기분이야말로 사실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분이라고 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든 하이데거든 양자가 불안이란 현상을 중시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이 실존으로서의 자기에 눈을 뜨는 것은 불안이라는 기분을 계기로 하며, 인간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것도 항상 불안이란 기분 안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불안이란 기분은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에서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개시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Ⅱ. ‘불안한 기분’과 용산 참사



용산 참사의 현장에 가보면 불안한 기분이 든다. ‘나도 저렇게 당할 수 있구나~’ 하는 불안한 기분이 든다. 나도 사랑하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망루에 올라가 처절하게 싸우다가 저렇게 죽을 수 있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든다. 섬뜩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불안한 나의 존재(실존적인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가 된 철거민들이 사망 당일에 느꼈을 아찔한 현기증이 불안의 현주소이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에게 갑자기 죽음이 닥쳐오자 무슨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을까?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가 강조한 실존적인 불안을 느꼈을까? 사고가 난 날 불안이라는 기분이 철거민들에게 엄습했을 때 철거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삶이라는 낯익은 상태에서 졸지에 죽음이라는 낯선 세계로 빠져든 철거민들(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에게 닥친 불안한 기분은 아주 낯선 것이다. 불안은 우리가 낯익은 세계로부터 낯선 세계 속으로 갑작스럽게 떨어져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다.


이러한 불안한 기분을 용산참사와 결부시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낯익은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비(非)민주적이어서 ‘낯선’ 이명박 정권으로 갑자기(단 몇 달 사이에) 전락한 ‘한국 사회의 불안’. 무언가 불길한 감정에 휩싸이는 국민들의 불안한 기분. 용산참사 철거민을 죽음으로 내몬 특공대식 진압이 안겨주는 불안한 기분.


갈수록 불안한 기분이 드는 우리는 이명박 정권과의 낯섦에 익숙해질 시간도 없이, 우리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낯익은 세계를 붙잡을 여유도 없이 용산참사를 당했다. 이명박 정권이 펼치는 낯선 세계가 갑작스럽게 우리들, 우리의 이웃인 용산 철거민들을 덮쳤다. 우리가 발 뻗고 잔 그날 새벽에 낯선 세계의 호위병인 진압경찰이 저승사자로 둔갑하여 용산 철거민 다섯 명을 명부(冥府)로 데려갔다.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불안은 이렇게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겨나고 앞으로도 생겨날 것이므로 불안하다. 철거민을 죽음으로 내몬 이 명박 정권의 공권력을 생각하기만 하면 원초적으로 불안한 기분이 든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불안에 사로잡힌다. 나도 용산 철거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을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게 바로 이명박 정권이라는 낯선 세계와 더불어 겪는 불안한 시대상이다.


그러므로 낯설고 불안한 시대의 불안한 기분에서 벗어나는 게 평안․평화의 지름길이며, 이 길을 찾아나서는 ‘평화의 역정(歷程)’이 이 시대 최대의 화두이다. 이 화두를 붙들고 지금까지 ‘불안한 시대상’을 용산 참사와 연결시키며 철학적으로 분석했다. 철거민들을 비롯한 민중들의 평화적 생존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의 낯익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인문학적인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불안한 기분이 들게 하는’ 용산 참사에 관하여 실존적으로 접근해보자. 실존적인 접근을 위해 용산 참사의 가해자 집단(이 집단의 수장인 이명박 대통령)․피해자 집단 구성원들의 실존(Existenz)에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가 역설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절대고독한 단독자(單獨者)의 실존에 육박하면서 용산 참사를 규명하는 게 바람직하다.



Ⅲ. 용산 참사에 대한 실존적 접근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 신자이었듯이 이명박 대통령도 기독교 신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믿었던 하나님과 이명박 장로가 믿었던 하나님이 다를지 모르지만, 기도하는 ‘장로 대통령 이명박’이 용산 참사를 떠올리며 무슨 기도를 했을까 궁금해진다. 빈 라덴 등의 테러리스트를 싹쓸이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 부시 전 대통령처럼, 이명박 대통령도 도심의 테러리스트(?) 철거민들을 박멸해달라고 하나님에게 졸랐을까? 아니면 장로의 직분으로 되돌아가 회개하는 마음이 생겨 ‘용산 참사는 내 탓!’이라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을까?


아직까지 용산 참사와 관련한 사과 한 마디 없는 것을 보면 대통령에게 회개의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장로 대통령이 회개의 염(念)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다면 양심 불감증에 걸렸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이 대통령이 용산 (참사 때 진압을 진두지휘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감싸고 돈 것을 보면, 회개는커녕 죄를 철거민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선 단독자의 실존적인 회개는커녕 (장로가 보살펴야할 하나님의 자식인) 철거민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사악한 행동(?)’을 선택한 듯하다. 여기에서 실존적인 의미의 원죄와 실정법의 죄에 관한 논의가 가능하다.


아직 용산 참사의 진상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정법적인 ‘죄와 벌의 상호관계’에 관해 단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에 앞서 인간적인 차원 즉 인간의 실존, 인간 본디의 양심․양식(良識), 인격 수양, 인간 됨됨이의 차원에서 죄와 벌을 거론하는 게 좋을 듯하다.


어처구니없게도 공권력이 실정법적으로 철거민들(용산참사의 희생자들)에게 죄를 전가시키고 있으므로,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용산참사 희생자들에게 원죄가 있나? 정권 쪽에 원죄가 있나?’를 규명하기 위한 ‘원죄 묻기’를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고독한 단독자 이명박이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용산참사의 총체적인 책임을 지는 뜻에서) 자신의 원죄부터 캐물어야할 것이다.


이 명박 대통령은 철거민들에게 실정법적인 죄를 묻기에 앞서 ‘이 명박 정권의 원죄’를 물어야할 것이다. 이 명박 대통령이 자진하여 원죄를 묻지 않는다면, 피해자측에 선 민중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중심으로 이 명박 정권의 원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① 정권 출범 이후 끊임없이 불안한 시대상을 만든 원죄 ② 철거민들을 비롯한 민중들로 하여금 불안한 기분을 느끼게 한 원죄 ③ 공권력의 과잉진압으로 사람을 죽여 놓고 죽은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모는 원죄. ④ 부시 정권의 네오콘(Neo Con) 처럼 저항세력을 테러리스트나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로 간주하여 그들의 생명가치를 낮게 평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국가보안법 또는 반테러 법률로 그들의 생명을 억압하거나 ‘경우에 따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원죄 ⑤ 사람 죽인 공권력은 면죄부를 받고 희생자를 범인으로 만든 원죄 ⑥ 용산 참사를 공안의 시각에서 다루며 용산참사 관련 항의자들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사회적인 배제를 시도하는 원죄 ⑦ 용산참사의 원죄가 ‘이명박 式 신자유주의 토목국가’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무리한 도심 재개발 사업을 강행하는 원죄.         


이 명박 대통령에게 원죄를 묻는 것은, 그를 무조건 규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장로 대통령이므로 하나님 앞에선 단독자로서 (키에르케고르처럼) 불안의 원죄 묻기를 하면서 양심의 소리(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daimonion’)를 들으라는 요청이다. 지난 1년 동안 민중들의 삶을 옥죈 결과가 용산 참사로 드러났고 그게 바로 용산 참사의 원죄임을 고백하라는 요청이다.


이러한 요청을 에둘러 하기 위해 실존 철학의 ‘불안’을 화두로 삼은 필자가, 이 명박 정권의 원죄를 물으며 용산참사에 대한 회개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 철학은 ‘불안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마음 씀(Sorge)을 강조한다. 원초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철거민과 같은 이웃의 고난을 마음 조리며 지켜보면서 ‘서로 구원(相互救援)하는 평화 공동체의 정신’이 없으면 시민사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평화 지킴이 노릇을 가장 앞장서서 해야 할 대통령 스스로 역행(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마음을 쓰기보다 1%의 지배계급이 더욱 잘살도록 보장하는 사회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한 시대가 지속될 것이다.    


용산 참사는 불안한 시대의 지속선상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태이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용산 참사는 내 탓!’이라고 회개하며 사과하는 ‘인간 됨됨이가 성숙한 장로 대통령’이 되길 기원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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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54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