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
미국, 유럽에서 평화연구가 착실하게 제도화되는 가운데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일본에 있어서 평화연구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침략전쟁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일본의 평화연구는 이처럼 ‘패전-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탄 피폭(被爆)-전쟁책임’이라는 멍에를 안고 출발한다.
일본에 있어서 평화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과학이 천황제의 주술적(呪術的)인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사회과학적 인식을 기초 지우는 가치 중의 하나로서 ‘평화 가치’가 국민적인 차원에서 승인된 가운데 싹이 튼다. 일본의 평화연구는 천황제 파시즘의 군국지배(軍國支配)가 가져온 전쟁의 참화라는 인류 역사상 없었던 전쟁체험에서 출발한다.(주1)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지닌 일본 평화연구의 전개과정을 기술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우선 평화연구의 원류인 일본 근, 현대의 평화사상과 일본 평화연구의 원점(原點)인 히로시마 피폭-평화헌법을 도입부분으로 설명한다. 1950년대부터 구미(歐美)의 평화이론을 도입한 일본의 평화연구자들은, ‘평화연구의 원점(히로시마 피폭, 평화헌법)’으로 되돌아가 ‘전쟁이 없고 구조적인 폭력이 없는 사회상’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평화연구의 원점’에 서서 근, 현대의 평화사상과(1950년대 이후 도입한) 평화연구의 단절을 극복하려고 했다. 이러한 평화연구의 계승 노력을 기술함으로써 평화학의 지평을 넓힌 일본 평화학계의 공헌을 높이 평가한다.
Ⅰ. 평화연구의 원류로서의 평화사상
일본의 평화연구는 제2차 대전 이전의 전통적인 평화사상과 관련이 깊다. 일본의 과거 역사를 보면 끊이지 않는 내전과 대외침략의 연속이었으나, 일부 선각자, 진보적 지식인, 기독교 지도자, 사회주의자에 의하여 평화사상의 풍토가 형성되어 제2차 대전 이후의 평화연구자들에게 전승된다. 이러한 전승은 평화헌법의 사상적 원류가 된다.
일본 평화사상의 뿌리를 고대의 쇼도쿠(聖德) 태자(太子)(574∼622)<주2>에까지 소급하여 찾는 경향이 있으나,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의 安藤昌益(1703∼62)에서부터 근대의 평화사상이 싹튼다고 볼 수 있다.
1. 근대, 현대 일본의 평화사상
安藤昌益은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이었다. 그는 당시의 지배계급․무가계급(武家階級)을 엄중하게 비판하고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 가운데서 평화의 담지자(擔持者)를 발견한다. 그는 ‘직경(直耕)’ 개념을 중심으로 원시공산제적인 ‘평화 공동체’를 이상향으로 제시한다. 그의 평화론은 계급지배의 부정과 연결된다. 그에 따르면 전쟁은 계급지배와 상업활동에 의하여 발생한다. 그는 군학(軍學)을 부정하고 철저한 군비철폐론을 주창한다.(주3)
메이지(明治)시대 초기의 진보적인 정치가이었던 橫井小楠(1809∼69)은 부국강병론(富國强兵論)에 입각한 전쟁폐지론을 펼친다. 그의 전쟁폐지론은 군비철폐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기본으로 전쟁을 없애자는 것이다. 그의 평화론은, 전쟁이 일어나면 무력이 약한 일본이 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회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적인 전쟁회피론이다.(주4)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제2차 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평화사상[반전(反戰)․비전(非戰), 반군국주의, 염전(厭戰), 징병기피 포함]의 전개는 제1기=청일전쟁 이전의 시대(1870∼80년대), 제2기=청일전쟁의 시대(1890년대), 제3기=노일 전쟁시대(1900년대), 제4기=‘다이쇼(大正) 민주화’시대, 제5기=‘15년 전쟁(1931년∼45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에는 징병령(徵兵令)(1873년)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었는데, ‘병(兵)’은 흉기라고 주장하며 ‘만국공의정부(萬國共議政府)’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한 植木技盛과 ‘지구상 만국 일가족(地球上萬國一家族)’을 말한 中江兆民이 활약했다. 제2기에는 北村秀谷, 加藤万治 등의 ‘日本平和會(1889년 창설)’를 중심으로 한 평화사상이 있었다. 제3기에는 木下尙江, 內村鑑三, 安部磯雄, 幸德秋水 등에 의한 비전(非戰) 사상이 발달했다. 제4기는 군축, 반군국주의의 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제5기의 초국가주의(超國家主義)시대에는 겨우 賀川豊彦의 양심운동, 矢內原忠雄의 예언적(이사야의) 평화론만이 소극적인 저항으로서 빛을 내었다.(주5)
특히 주목할 것은 植木技盛이 기초한 헌법초안 ‘日本國 國憲案’(1881년)이다. 이 헌법초안은 일본에 있어서 민주주의와 평화의 입장에 선 헌법사상의 원류가 되었으며 현행 ‘日本國 憲法’에까지 연결된다. 中江兆民의 {三醉人經綸問答}(1887)도 평화사상으로서 주목된다. 中江兆民은 이 저서에서 상 피에르(St. Pierre), 루소(Rousseau), 칸트(Kant)의 평화론을 소개하고 특히 칸트의 평화사상을 높이 평가했다.(주6)
평화사상의 계보로는 ① 田山花袋, 与謝野晶子, 德富盧花, 中勘助 등의 문학자 ② 吉野作造, 尾崎行雄, 桐生悠悠, 幣原喜重郞 등의 자유주의자 ③ 內村鑑三, 栢木義圓, 矢部喜好, 矢內原忠雄, 賀川豊彦 등의 기독교 교도 ④ 幸德秋水, 堺利彦, 片山潛, 石川三四郞 등의 사회주의자들 등 4그룹으로 구분된다. 이 중 기독교 교도와 사회주의자의 평화사상이 가장 체계적이었으며, 천황사관(天皇史觀)이나 천황 절대주의(天皇 絶對主義)에 근거한 ‘국권의 신장(伸張)’으로서의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데 철저했다. 그들의 사상은 또 악(惡)의 현실을 초월하려는 칼 만하임(Karl Mannheim)의 ‘유토피아’론의 색채도 강했다.(주7)
근대의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도입된 기독교와 함께 기독교 계통의 평화사상이 큰 힘을 갖게 되었다. 미국 퀘이커의 평화주의를 전수받기 전에 칸트의 평화철학이 西周에 의해 소개되었다. 또 北村秀谷과 木下尙江 등에 대한 미국 퀘이커의 영향에 이어 톨스토이의 철저한 평화사상이 큰 영향을 준다. 특히 스위스의 무장 영세중립보다 한 발 나아간 영세중립의 주장이 기독교도 사이에서 출현했는데, 이를 주창한 사람은 安部磯雄이다. 또한 內村鑑三 등의 기독교도가 청일전쟁∼노일전쟁 기간 및 그 이후에 일본 평화사상의 주류가 되었다.(주8)
1901년에 사회민주당을 만들어 영세중립과 군비철폐의 깃발을 높이 내걸었던 安部磯雄에 협력한 사람은 木下尙江․堺枯川, 石川三四郞 등이다. 또한 레닌의 사회민주 노동당에 호응한 幸德秋水를 무시할 수 없다. 기독교파와 사회주의파는 어떤 때에는 협력하고 어떤 때에는 대립했으나 전쟁반대라는 한 가지 점에서는 공통점이 많았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제2차 대전 말기에 일본의 패전이 결정적이었을 때 국민의 대다수가 호전(好戰)에서 염전(厭戰)으로 돌아선 현실이다. 이러한 일본 국민의 염전(厭戰), 반전(反戰) 의식을 반영한 평화헌법 제9조는, 安部磯雄․內村鑑三 등의 일본 평화주의 사상의 단호한 실정(實定)에 다름 아니다.(주9)
Ⅱ. 평화연구의 원점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과 평화헌법
아시아에 대한 가해자임과 동시에 인류 유일의 원폭(原爆: 원자폭탄) 피해자이기도 한 일본인이, 미래의 질서를 마땅히 형성하는 원리로서 평화헌법을 짊어지고 2차 대전 이후에 출발한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사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평화론’ ‘평화사상’ ‘평화운동’은 많건 적건 평화헌법을 의지할 곳으로 삼았으며, 가해자-피해자의 체험이 일본 민중의 염전기분(厭戰氣分)을 양성하여 평화를 지상(至上)의 가치로 하는 정신풍토를 가져왔다. 이러한 일본인의 평화에로의 특별한 지향이 일본의 ‘평화연구’의 기반이 되었다.(주10)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시민에 대한 ‘인류절멸의 범죄’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핵시대가 도래하여 ‘핵전쟁은 절대적인 악(惡)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탄하는 평화의 사상이 제창된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국 헌법(日本國憲法)’의 전문(前文) 및 제9조는, 핵시대의 평화사상을 선취(先取)한다.(주11)
일본의 평화연구자가 세계를 향하여 독자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테마가 몇 가지 있다. 그것은 피폭체험․전쟁체험이며 핵폐절(核廢絶) 운동의 교훈이다. 피폭체험에 의한 ‘핵(核) 알레르기’는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것은 미, 소의 핵군확에 대한 반핵시민운동의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다. 일본은 또 과거에 전쟁의 가해자이었다. 그리고 현재 ‘경제대국’이 된 일본은 아시아 각국에 경제적으로 진출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구조적 폭력’을 낳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평화연구자들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체험을 보편화하여 새로운 평화연구의 지평을 열어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평화헌법을 원점으로 삼아 가치로서의 평화연구를 세계에 발신(發信)하는 것이 일본의 국제공헌이다.(주12)
이와 같이 일본 평화연구의 원점이 된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과 평화헌법을 에워싸고 수많은 논의와 저술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논의․저술의 주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핵’문제와 관련된 주제
① 핵병기: 원자, 수소폭탄의 원리와 구조, 핵병기 개발의 역사, 핵폭발 실험, 핵병기 운반수단, 핵병기와 통신․유도수단(誘導手段), 핵전략. ② 피폭: 원자탄 투하의 역사적 배경, 원자폭탄의 위력, 원자폭탄 피해의 실상․신체적 영향, 사회적 영향․정신적 영향, 피폭자 원호활동, 피폭자 대책․조사활동, 피폭자 운동과 시민활동, 피폭체험의 계승, 핵실험에 의한 피해, 핵실험에 의한 환경파괴. ③ 핵군축: 일본의 비핵(非核) 3원칙, 세계 각 지역의 비핵지대 조약, NPT(핵확산 금지조약), CTBT(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SALT(전략핵병기 제한교섭), START(전략병기 삭감교섭), SDI(전략방위 구상), 핵군축에 의한 평화배당(peace dividend). ④ 핵전쟁 체계와 국제정치: 미, 소의 핵전쟁 체계 ⑤ 핵시대의 전쟁과 평화: 핵시대의 평화공존 ⑥ 핵과 군산 복합체(軍․産 複合體): 다국적 기업과 군산 복합체 ⑦ 핵발전소와 핵무기의 관계: 반핵운동과 환경운동의 접맥 ⑧ 핵과 과학자의 책임 ⑨ 반핵운동: ‘원수폭 금지운동(原水爆 禁止運動)’(주13)
2. 평화헌법과 관련된 주제
일본의 평화헌법은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로 자위전쟁(自衛戰爭)을 포함한 일체의 전쟁을 포기한다는 점. 둘째로 제9조 2항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일본은 정규군대를 보유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점. 셋째로 평화를 인권으로서 보장한 점. 평화헌법 전문에 ‘평화 속에서 생존할 권리’, 즉 ‘평화적 생존권’이 명시되어 있는 점이다. 첫째와 둘째 특징의 공통된 논쟁점은 일본 자위대(自衛隊)의 위상에 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① ‘전수 방위(專守防衛)’ ② 문민통제(civilian control) ③ 방위비를 GNP의 1% 이내로 제한 ④ 핵병기를 갖지도 만들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 ⑤ 무기수출 3원칙(공산권․유엔결의로 금지된 나라․국제분쟁 당사국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 ⑥ 해외파병 금지 ⑦ 징병제의 위헌해석 ⑧ 집단적 자위권의 위헌(違憲) 해석 ⑨ 특별재판소(군법회의)의 금지 등이 일본의 평화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되어 왔다.(주14)
그러나 평화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위의 9가지 금지조치가 서서히 무너져 ‘평화헌법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를 비판하는 평화연구자들의 연구업적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특히 헌법 전문의 ‘평화적 생존권(공포와 결핍으로부터 벗어나 평화 속에서 생존할 권리를 갖는다)’에 관한 독창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평화적 생존권의 내용으로서는, ‘정부의 행위’에 의하여 생기는 전쟁(및 그 준비행위)으로부터의 자유, 그중에서도 각종의 군사적 의무 및 부담으로부터의 자유가 중요하다. 국민은 공권력에 맞서 평화적 생존권을 근거로 사법적 구제를 요청할 수 있다. 1978년의 유엔결의 ‘평화적 생존의 사회적 준비에 관한 선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평화적 생존’의 내용을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빈곤이나 환경파괴 등의 ‘구조적 폭력’으로부터의 자유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상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제2차 대전직후에 ‘평화적 생존권’을 내세운 일본국 헌법의 선구적인 측면이
분명히 드러난다.(주15)
Ⅲ. 평화연구의 전개과정
1. 초창기
1) ‘평화문제 담화회’․‘평화문제 간담회’ 결성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국제사회 속에서 평화에로의 커다란 파동이 일어났다. 그러한 국제사회의 파동은 일본에 파급되었다. 1948년 7월 13일 유엔 교육․과학․문화 기구(UNESCO)와 관련되어 여덟명의 사회과학자가 낸 성명 ‘평화를 위하여 사회과학자는 이렇게 호소한다’(주16)는,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1948년 11월부터 일본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토론을 거듭한 끝에 ≪世界≫지(誌) 1949년 3월호에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일본 과학자의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어서 이 성명의 서명자를 회원으로 한 ‘평화문제 담화회’가 1949년에 설립된다. ‘평화문제 담화회’는 그 뒤 ≪世界≫誌를 무대로 미국․일본의 강화(講和) 문제,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관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정부나 국민을 향하여 여론을 주도했다.(주17)
당시의 평화연구는 ‘연구’라는 명확한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지만 일본의 지식인을 부추겨 여러 가지 지적 구성(知的 構成)을 하도록 함으로써 오늘날의 평화연구와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일본의 지식인들은, 평화헌법 아래에서 ‘평화’가 일본의 국가원리로 되어 있는 한 ‘평화’를 자동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에 빠졌다. 평화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국가’의 문제와 격투하거나 객관적인 연구(전쟁과 평화의 객관적 연구)에 의욕을 보였지만 그다지 제도적(制度的)으로 발전하지 못했다.(주18)
이와 같이 평화연구가 제도적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화연구, 평화운동, 평화교육이 미분화(未分化)된 상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일본이 미국의 점령 아래에 놓여 있었던 연장선상에서 ‘미국의 평화연구’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평화문제 담화회’가 해체된 뒤 ‘평화문제 간담회’라는 소그룹이 1964년에 만들어졌다. 이 그룹은 미국 쪽 평화연구의 영향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볼딩이 이 모임을 만드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일본의 평화연구 그룹은 갈퉁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주19)
이와 같이 일본의 평화연구의 효시가 된 ‘평화문제 담화회’와 ‘평화문제 간담회’는 미국 쪽 평화연구의 영향을 받아 발족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미국의 영향 아래에서 미국, 소련의 핵군비확장 문제․핵전략 등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곧이어 196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의 평화연구가들이 유럽형 평화연구의 조류를 받아들이면서 평화연구의 두 가지 흐름이 섞이게 된다.
2)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의 영향
유네스코의 성명에 호응하여 ‘평화문제 담화회’가 활동을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1955년의 ‘러셀-아인슈타인 선언(Russel-Einstein Manifesto)’에 따라 만들어진 ‘퍼그워시(Pugwash)’를 모델로 한 일본의 ‘과학자 교토(京都) 회의’가 1962년에 발족한다. 이 모임은 나중에 자연과학자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자에도 문호를 개방하여 1975년에는 ‘京都 퍼그워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전면적인 군비철폐를 주장했으며 핵억지 이론을 엄격하게 비판했다.
2. 평화연구의 체제 정비
1) 세계적인 평화연구 조류를 받아들임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 사이에 유럽과 북미주에서 평화연구 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진다. 1959년에 ‘미시간 대학 분쟁해결 연구센터(CRCR)’ ‘PRIO;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 1961년에는 ‘CPRI; 캐나다 평화연구소’ ‘플로닝겐 대학 전쟁학 연구소(Polemological Institute)’, 1963년에는 ‘PRSI; 평화연구 국제협회’(주20) ‘평화연구 역사학회(Conference on Peace Research in History)’, 1964년에 ‘국제평화연구학회(IPRA)’가 발족한다.
이처럼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평화연구소 설립 붐에 자극을 받은 일본의 학자들은 평화연구 그룹 또는 평화연구소를 만들기 위하여 분발한다. 1963∼64년에 국제기독교 대학(ICU)의 객원교수로 일본에 체류한 볼딩 교수와 윌슨(N. Wilson; ‘Quaker International Affairs’의 동아시아 대표)의 영향을 받아 1964년에 ‘東京 평화연구 그룹(The Tokyo Peace Research Group)’을 만든다.(주21)
특히 1964년에 창설된 IPRA는 일본의 평화연구가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IPRA 제1회 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관심을 보여 온 일본의 평화연구가들은 1966년에 ‘일본평화연구 간담회(Japan Peace Research Group)’를 만들고 {平和硏究論集}과 {Peace Research in Japan}을 발행했다. 이 두 기관지는 일본의 평화연구의 ‘지적(知的) 엔진’ 역할을 수행하고 평화연구의 국제적 연계에 진력했다. ‘평화연구 간담회’는 나름대로 일본의 평화연구의 발전을 위한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나, 본래 비공식적인 지적 집단(知的 集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전체에 걸친 평화연구를 전개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주22)
1959년에 미국형 평화연구소인 CRCR과 북유럽형 평화연구소인 PRIO가 동시에 출범하여 상호경쟁 체제에 들어간 사실은 일본 평화운동의 경향을 결정짓는 하나의 외부변수로 작용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평화연구는, ‘분쟁 규제’ 또는 ‘분쟁 해소’에 초점을 두었다. 특히 1956년 미시간 대학에서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이 발간되고 1959년에 ‘Center for Research on Conflict Resolution’이 설립된 이후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연구의 방법이 광의(廣義)의 행동과학이었기 때문에 과학성을 획득한 반면 두드러지게 기술성(技術性)에 빠졌던 것도 부정할 수 없어서 일찍이 평화연구 운동 안팎의 비판을 받았다.(주23)
이러한 비판은 ‘오슬로-프랑크푸르트학파’와 쉬미트(Herman Schmidt)․덴시크(Lars Dencik) 등의 ‘Radical Group’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세계적인 평화연구 진영이 세 쪽으로 갈라진다.(주24)
세 쪽으로 갈라진 평화연구 진영의 논쟁을 지켜본 일본의 평화 연구자들은,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는 ‘당파성’을 지양하고 논쟁점을 분석하는 데 주력하면서 이들 이론의 틀을 일본에 접맥시키는 방안을 모색한다. 1960년대 초반에는 라포포트의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게임 이론’ 등 미국형 평화이론[수리․시뮬레이션 중심으로 행동과학에 따라 분쟁해결을 모색하는 ‘수리 평화학(數理 平和學)’]을 연구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었으나, 1960년대 후반에 갈퉁의 ‘적극적 평화’ 이론이 도입되면서 이들 이론의 절충을 통한 ‘평화연구의 일본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평화연구의 제도화 노력이 결실을 맺어 평화연구의 정착기를 맞이한다.
이와 같은 초창기의 일본 평화연구 가운데서도 우수한 업적이 쌓여 제도화를 향하여 전진한다. 몇 가지 대표적인 저작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坂本義和 지음 {核時代の國際政治}(岩波書店, 1967) ② 石田雄 지음 {平和の政治學}(岩波書店, 1968) ③ 川田 侃 지음 {軍事經濟と平和硏究}(東京大學出版會, 1969) ④ 關寬治 지음 {危機の認識}(福村出版, 1969) ⑤ 武者小路公秀 지음 {平和硏究入門}(講談社, 1969) ⑥ 宮田光雄 지음 {非武裝國民抵抗の思想}(岩波書店, 1971). 또 1967년에는 {國際政治} 제54호(日本國際政治學會 編)와 {年報社會心理學} 제8호(日本社會心理學會 편)가 각각 평화연구의 특집호를 만들어 뛰어난 논문을 실었다.(주25)
1960년대는 미, 일 안전보장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야당, 노동운동, 학생운동 세력에 의한 ‘안보투쟁’이 국민적 차원에서 일어났던 시기이어서 안보 문제를 중심으로 한 평화연구가 활성화되었다.
3. 평화연구의 정착기(1970년대)
1969년에 갈퉁이 발표한 ‘구조적 폭력-적극적 평화’에 관한 논문(「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Journal of Peace Research} No.3)은, 일본에 있어서 평화연구의 초창기와 정착기를 구분 짓는 분기점이 되었다.
1950년대 말경부터 1960년대 중엽에 걸친 시기에, 전쟁(그 최종형태로서의 핵전쟁)의 결여(부재)상태 또는 일반적으로 조직폭력(組織暴力)의 결여상태를 평화로 간주하는 이른바 ‘소극적 평화’의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가면 이러한 평화연구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 이른바 ‘Radical Peace Research’가 대두되어 평화연구자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현상유지적인 평화상황=전쟁결여 상황은 참된 평화로 간주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강하게 대두하게 된다. 그 뒤 이러한 사고방식은 평화연구자 사이에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여 평화연구자의 문제관심은 갈퉁 교수가 말하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로 향하게 되었다.(주26)
1969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국제평화연구학회 내부의 ‘폭력 논쟁’은 평화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적인 평화연구의 이론적 발전이 고양되는 가운데 일본의 평화연구의 뒤떨어짐을 통감해 온 많은 평화연구자들 가운데 제도로서의 평화학회의 발족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회합을 거듭해 1973년 9월에 ‘일본 평화학회(PSAJ: The Peace Studies Association of Japan)’를 설립한다. 또 1973년의 유엔 제28회 총회에서 채택한 ‘평화연구의 과학적 작업에 관한 결의’에 따라 평화연구를 주요 임무로 하는 ‘유엔 대학’을 일본에 설치할 것을 결정했다. 일본 국내에서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다. ‘日本學術會議’는 제9기(1972∼75년)에 평화문제연구 연락위원회를 신설하고 ‘우리나라에 있어서 평화연구의 촉진에 관한 권고’를 채택(1974년)한다. 이 권고는 평화연구의 세 가지 원칙으로서 ‘평화가치관 특히 헌법 전문(前文) 및 제9조의 정신을 전제로 한 과학적․객관적인 연구를 할 것’ 등을 열거하고 있다.(주27)
1973년 ‘일본 평화학회’의 창립을 계기로 일본의 평화연구는 크게 비약하여 정착기를 맞이한다. 창립 당시 40명의 회원으로 출발했던 ‘일본 평화학회’가 현재 800여 명의 회원을 둔 커다란 기구로 변모했다. ‘일본 평화학회’는 1975년부터 기관지 {平和硏究}를 발행하면서 유럽․북미의 평화이론을 일본에 적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平和硏究}의 각 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주제는 다음과 같다:
평화연구의 방법(제1호: 1976년 3월), 평화가치/평화교육(제2호: 1977년 4월), 일본국 헌법-국내체제와 평화(제3호: 1978년 5월), 평화운동의 이론과 행동/유엔 군축 특별총회/세계질서의 諸 問題(제4호: 1979년 6월), 현대 일본의 평화보장/현대 일본의 평화교육(제5호: 1980년 9월), 국제분쟁의 구조와 해결/아시아 평화연구 국제회의(제6호: 1982년 5월), 생활양식과 평화/평화교육학에 대한 전망/ 비군사화(非軍事化)의 탐구(제7호: 1982년 11월), 신국제 군사질서를 해부한다(제8호: 1983년 11월). 2차 대전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 히로시마․나가사키/아시아의 평화질서를 위하여/평화연구의 현 단계와 평화학의 과제(제9호: 1984년 11월), 일본의 평화보장을 찾아서/평화와 지역-아프리카의 기아와 국제정치(제10호: 1985년 11월), 일본형 관리사회와 노동/핵시대의 평화와 제3세계/Apartheid(제11호: 1986년 11월), Ethnicity 문제/지역과 평화/대학에 있어서 평화교육의 현상과 과제(제12호: 1987년 11월), 일본의 ODA를 생각한다/전쟁체험에서 핵군축으로(제13호: 1988년 11월), 언어정치학과 평화의 과제/천황․군대․전쟁(제14호: 1989년 11월), 과학과 평화(제15호: 1990년 11월), Global Democracy(제16호: 1991년 10월), 지방자치체의 평화외교(제17호: 1992년 11월), 냉전 이후의 평화연구(제18호: 1993년 11월), Peaceful Change(제19호: 1995년 6월), 21세기의 대안-평화질서를 찾아서(제20호: 1996년 6월), 지속 가능한 발전과 일본의 선택(제21호: 1996년 11월), 지구 시민사회의 안전보장-냉전 이후 평화질서의 조건(제22호: 1997년 11월), 자율과 평화-오키나와가 제기하는 문제(제23호: 1998년 11월) 등이다.
이처럼 {平和硏究}는 일본의 헌법, 일본인의 생활양식, 아시아의 안보, 일본의 자본주의 사회와 노동, 대학 등 학교에서의 평화교육, 천황제, 지방자치체 차원의 평화추구, 환경, 오키나와 미군기지, 일본의 핵문제 등을 평화학의 논제로 다루면서 ‘평화학의 일본화’를 모색한다.
4. 1970∼1980년대의 평화연구소 설립, 평화강좌 개설 붐
1) 평화연구소 설립
일본의 평화연구소는 구미(歐美)의 연구소와 비하면 규모가 작으나 평화학의 제도화에 큰 공헌을 한다. 1969년에 ‘上智大學 國際關係硏究所’가 설립된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한 평화연구소가 계속 출범한다.
1999년 현재 활동 중인 평화연구소는 다음과 같다:
‘國際基督敎大學 平和硏究所’ ‘明治學院大學 國際平和硏究所’ ‘廣島大學 平和科學硏究센터’ ‘長崎總合科學大學 平和文化硏究所’ ‘創価大學 平和問題硏究所’ ‘津田塾大學 國際關係硏究所’ ‘帝塚山學院大學 國際理解硏究所’ ‘東海大學 平和戰略國際硏究所’ ‘立命館大學 平和博物館’ ‘長崎平和硏究所’ ‘戶田平和硏究所’ ‘廣島平和硏究所’ ‘廣島市立大學 廣島平和硏究所’
이들 연구소는 연구 논문집․영문 소식지(News Letter) 발행, 학술 심포지엄 개최, 소속 대학의 평화학 강좌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 대학 중심의 연구소와는 성격이 다른 평화연구 단체인 ‘軍事問題硏究會’가 1975년에 발족하여 {軍事民論}을 간행했다. 그리고 ‘宇都宮軍縮硏究室’은 월간지 {軍縮問題資料}를 발행하면서 평화군축 문제의 대중화에 노력했다.
2) 대학의 평화학 강좌 개설 붐
1976년 4월 四國學院大學 문학부에서 처음으로 ‘평화학’을 강의한 뒤 평화학 강좌 개설 붐이 일어났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었던 1970년대 중반에 제1차 평화학 강좌 개설 붐이 일어났고, 미국의 핵전쟁론에 반발하여 전 세계적인 반핵평화운동이 전개된 1980년대 초반에 제2차 평화학 강좌 붐이 일어났다.
1996년 4월 현재 ‘평화학’ 강좌를 개설한 대학은 28개, ‘평화연구’를 개설한 대학은 10개이다. <표 3; 평화학 관련 강좌가 있는 국‧공‧사립대학 비율; 생략>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화학’ 또는 ‘평화연구’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학 관련 강좌를
개설한 대학 중 국립대학은 37개교(일본 전체 국립대학의 37.76%) 공립대학 14개교(일본 전체 공립대학의 26.92%) 사립대학 108개교(일본 전체 사립대학의 26.02%)이다.
* 김승국 지음『평화연구의 지평』(파주, 한국학술정보, 2009) 37쪽에 <표3>이 실려 있으니 참고하세요.
이처럼 1970년∼80년대의 ‘평화학’ ‘평화연구’ 강좌개설 붐에 힘입어 수업, 강좌명, 테마의 다양화, 평화 개념이 확산․심화되었다.
3) 평화학 강의 실태
大阪産業大學의 경우 1995년부터 평화학 강좌를 5가지 코스로 분류하여 학생들의 선택지를 넓혔다. 5가지 코스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A코스: 인권문제로서의 평화학(내용=평화학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전쟁과 종군 위안부 문제, 여성과 전쟁-나치즘과 유대인 문제, 전쟁과 인권) ② B코스: 환경문제로서의 평화학(내용=평화학이란 무엇인가, 평화의 이념, 지구환경 문제, 지구와 환경 방사선-빈곤과 세계 시스템, 인간과 환경의 시스템) ③ C코스: 국제문제로서의 평화학(내용=평화학이란 무엇인가, 빈곤과 세계 시스템, 민족과 평화-일본․미국 관계의 현재, 평화의 이념, 핵문제) ④ D코스: 인간학으로서의 평화학(내용=평화학이란 무엇인가, 개인과 평화, 평화에 관한 인류학적 고찰-생명윤리에서 본 평화, 진화사상과 인간, 평화의 이념) ⑤ E코스: 문화론으로서의 평화학(내용=평화학이란 무엇인가, 평화에 관한 인류학적 고찰, 평화의 이념-개인과 평화, 유토피아와 평화, 여성과 평화)<주28)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미국 대학의 평화학 강좌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분쟁해결(Conflict Resolution)’을 일본의 대학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1996년 5월부터 7월에 걸쳐 일본 대학의 평화학 강좌 실태조사를 실시한 岡本三夫의 조사보고서 「日本の大學における平和學關聯講座の第二次實態調査」({廣島平和科學} 제20호, 1997)의 일람표에 의하면 <표4; 일본 대학의 평화학 관련 강좌 실태조사(1996년 현재); 생략>에서 특징이 있는 강좌를 중심으로 요약), 평화학 강좌의 강조점 중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해방에 관한 교육, 연구(약자에 대한 폭력 비판)’가 30%로 가장 많고 ‘전쟁과 군사에 관한 연구, 교육’이 28%로 뒤를 이었다(10년 전의 제1차 조사에서는 후자가 43.4%를 차지했다).(주29) 이는 미국․소련의 냉전 종식에 따라 ‘소극적 평화’보다 ‘적극적 평화’를 지향하는 대학인들의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 김승국『평화연구의 지평』(파주, 한국학술정보, 2009) 40~46쪽에, <표4>가 실려 있으니 참고하세요.
1976년의 첫 평화학 강좌 이후 20년 이상의 성장과정은 평화연구, 평화학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평화학-평화연구가, 연구 그룹 결성→학회 설립→기관지․연구 논문집 간행 등의 제도화를 통하여 이미 일본의 학계, 교육계, 출판계, 언론매체에 침투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평화학, 평화연구의 발걸음은 늦어지고 있다. 특히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탄 피폭 체험을 겪은 일본의 대학에 있어서 평화학 강좌는 아직 세계에 자랑할 만한 규모,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주30) 평화연구소의 전임연구원 수가 매우 적고 재정상의 제약이 있는 상황이다. 또 대학의 평화학 강좌도 전문적인 하나의 과정(課程)으로 이루어지는 사례가 거의 없고 ‘평화학’ 학사학위를 주는 대학도 보이지 않는다. 평화학의 전공과정을
둔 대학원도 존재하지 않는다.(주31)
5. 1990년대의 평화연구 현황
1) ‘미․일 방위협력 지침’과 평화연구
1990년대 초 ‘냉전의 종결’이라는 사태의 전개 속에서 일본국 헌법의 평화주의를 둘러싼 환경․상황이 크게 변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일본이 ‘보통의 나라’처럼 군대를 보유하여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어 ‘미․일 방위협력을 위한 지침: Guidelines for U. S.-Japan Defense Cooperation(1997년에 개정된 新가이드라인)’ 체제가 형성된다. 일본 영토의 주변 지역(특히 한반도)에서 사태가 발생하면 일본의 자위대가 미군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 ‘신가이드라인’은 일본 평화헌법의 공동화(空洞化)를 매듭짓는 전쟁체제이므로, 일본의 평화연구자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의 ‘日本平和學會’ 연구대회 논제를 살펴보면 이러한 위기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포스트(post) 냉전과 평화, 포스트 냉전과 군축(1990년의 연구대회)’ ‘포스트 냉전시대와 일본: 전환기의 일․미 관계와 일본의 진로(1991년 연구대회)’ ‘일본의 과제: 평화의 창출과 PKO의 과제, 55년 체제의 붕괴와 평화의 과제(1993년 연구대회)’ ‘핵억지론과 일, 미안보의 재검토(1995년 연구대회)’ ‘일, 미 안보의 再定義와 오키나와(1996년 연구대회)’ ‘신가이드라인과 오키나와, 일본의 미군기지(1997년 연구대회)’
갈퉁의 분류에 따르면 위의 논제들은 ‘소극적 평화’에 관한 것이나 일본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평화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이다.
2) ‘종군 위안부’와 평화연구
1990년대 초 ‘신가이드라인 전쟁체제’라는 ‘소극적 평화’의 문제군(問題群)이 대두됨과 동시에, (1991년에) 김학순 할머니에 의해 폭로된 ‘종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평화연구자들에게 ‘구조적 폭력-적극적 평화’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특유의 구조적 폭력인 종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평화학자, 여성학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종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인의 ‘전쟁 피해자 의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80년대까지 ‘히로시마 피폭’ 등을 통하여 일본도 전쟁피해 국가라는 피해자 의식이 전쟁책임론을 희석시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종군 위안부 문제로 일본이 가해자라는 의식이 확산되어 가해자의 차원에서 ‘여성과 전쟁’ ‘제국주의 전쟁과 여성’ ‘전쟁과 강간’ ‘여성에 대한 성 학대와 전쟁책임’ ‘군대와 여성’ ‘성 상품화와 군대’ ‘군대의 성적 욕망 장치’ ‘군대와 신체’ ‘국가폭력의 수단인 군(軍)에 의한 여성 수탈’ ‘국가폭력과 매춘’ ‘천황제(天皇制)와 식민지 여성’ ‘종군 위안부와 천황제’ ‘황군(皇軍)의 성차별’ ‘황군과 공창제도(公娼制度)’ ‘국가권력과 여성’ ‘종군 위안부․성병(性病)을 관리한 국가관리 매춘의 체계’ ‘성(性)을 관리한 일본 군국주의’ ‘종군 위안부에 대한 3중의 차별(성차별․민족차별․계급차별)’ ‘종군 위안부의 인권’ ‘종군 위안부에 대한 배상’ ‘종군 위안부에 대한 식민지 폭력’ ‘경제와 여성에 대한 폭력(Gewalt)’ ‘Gewalt의 관점에서 본 종군 위안부’ ‘성(性)을 이용한 일본의 동화(同化) 정책’ 등에 관한 저작,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주32)
Ⅳ. 분야별로 본 평화연구 동향
앞에서 일본 평화연구의 전개과정을 연대별로 살펴보았다. 이제 일본 평화연구의 흐름 속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야 할 몇 가지 분야(평화교육, 평화의 윤리, 평화 심리학, 민주적 평화론, 인간의 안전보장론)를 선별하여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이 중 ‘평화교육’ ‘평화의 윤리’ ‘평화 심리학’은 일본의 평화연구가들이 자국의 사회현실에 접합시켜 ‘평화이론의 일본화’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분야이다.
1. 평화교육
갈퉁에 의하면 평화교육은 직접적 폭력뿐만 아니라 구조적 폭력도 문제로 삼아야 한다.(주33) 이러한 의미에서 인권 교육이나 민족해방 교육, 인구교육이나 자원 에너지 문제․식량문제의 교육, 개발 교육 등도 평화교육의 내용에 포함될 것이다. 또 평화교육은 직접적 평화교육과 간접적 평화교육의 두 가지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다룰 수 있다. 직접적 평화교육이란 전쟁과 평화에 관한 문제를 직접 또는 의도적, 계획적으로 받아들여 생각하게 하고 그와 연관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교육이다. 전쟁체험의 계승, 전쟁원인의 분석, 전쟁방지, 반전평화(反戰平和)의 투쟁,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적 노력, 인종차별이나 민족차별의 문제 등을 테마로 하는 교육이 해당된다. 간접적 평화교육이란,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직접 들어 취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겨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감정이나 의식을 기르는 교육이다. 이는 직접적 평화교육의 토양을 만드는 교육이다.(주34)
일반적으로 간접적 평화교육의 풍부한 토양 위에서 직접적 평화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나, 일본의 경우 세계 유일의 원자탄 피폭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하여 직접적 평화교육의 바탕 위에서 간접적 평화교육을 도입하는 순서를 밟았다. 즉 ‘히로시마 피폭’이라는 직접적 폭력과 관련된 평화교육(‘히로시마型 평화교육’)이 선행되는 가운데 구조적 폭력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히로시마형(型) 평화교육
히로시마-나가사키 평화교육은 ‘원폭교육(原爆敎育)’이라고 불린다. 원폭교육은 인류 최초의 피폭 체험을 계승함으로써 젊은 세대에게 핵전쟁 방지, 핵병기 폐절(廢絶), 전쟁 폐절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다.(주35)
원폭교육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은 長田新 편 {原爆の子}(1951)의 간행이었다. 長田新은 이 책에서 원폭체험을 교재로 한 평화교육의 방법론을 제기했다. 그 이후 원폭에 관한 수많은 평화교재가 나와 원폭교육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피폭자의 증언, 피폭실상의 기록, 피폭 유적, 피폭 자료관이 원폭교육의 교재로 이용되는 등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었다.
특히 히로시마 피폭 교직원이 1969년에 조직한 ‘被爆敎職員の會’는 원폭교육 추진의 모태가 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원폭교육 교재의 자주편성(自主編成) 및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원점으로 하는 평화교육 연구운동의 조직적 발전이다. 1972년에 히로시마 현 교직원조합을 모체로 하는 ‘廣島平和敎育硏究所’가 설립되어 평화교육 연구운동의 중심이 된다. 또 1973년부터 매년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전국 평화교육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으며, 1974년에는 민간교육 연구단체로 ‘日本平和敎育硏究協議會’가 탄생하여 기관지 {平和敎育}을 간행하고 있다.(주36) 그리고 매년 개최되는 ‘日本敎職員組合(日敎組)’의 ‘전국 교육연구 집회’에 평화교육 분과회가 생겨 1973년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예컨대 1997년에 열린 제47차 日敎組 교육연구 전국 집회의 평화교육 분과회에서 40명의 초 중 고등학교 교사들이 36개의 소논문을 발표하는 등 평화교육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주37)
2. ‘평화의 윤리’
‘전쟁과 평화’는 그 원인의 다양성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생활의 모든 측면과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복잡하다. 빈곤, 인구과잉, 환경오염이라는 맞서기 힘든 문제를 제거하지 않는 한 전쟁을 방지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 전쟁은 생활 전반에 침투해 있는 분쟁현상의 소산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가능성을 최대한 살려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의 윤리이다.(주38)
이처럼 평화의 윤리는 ‘전쟁과 윤리’의 문제와 직결된다. 우선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와 윤리의 문제가 떠오른다. 이와 더불어 ‘인격화된 국가’의 윤리, 국가의 윤리와(전쟁에 참여하는) 개인의 윤리, ‘정의의 전쟁론’과 윤리, 자위전쟁(自衛戰爭)과 윤리, 비자위(非自衛) 전쟁과 윤리, 병기와 윤리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주39)
‘평화의 윤리’는 핵무기 사용의 윤리적 정당성, 핵전략(핵억지 전략)의 도덕성(道義性), 핵에 의한 죽음(原爆死)의 윤리적 문제 등 ‘핵윤리(核倫理)’(주40)를 통해 현실적인 과제로 부각된다. ‘핵윤리’의 확립은 평화학의 확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바, 피폭국가인 일본에서도 이러한 측면에서 ‘원폭사(原爆死)’ 연구가 이루어졌다.
원폭사는 자연사(自然死)가 아니라는 데서 윤리의 문제가 생긴다. 원폭사는 핵무기라는 폭력(전쟁) 장치에 의하여 발생한 ‘폭력사(暴力死: violent death)’이다. 1945년의 원폭지옥(原爆地獄)의 경우 죽은 사람의 이름조차 확인할 수 없는 ‘무기명(無記名)의 죽음’이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므로 원폭사는 ‘비인칭(非人稱)의 죽음(impersonal death)’이다. 원폭(原爆)은 인간을 단지 개인으로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유(類: genus)’로서 살육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원폭사는 ‘인류시역(人類弑逆: genocide)’이다.(주41)
이러한 ‘폭력사(暴力死)’는 국가에 의하여 초래된 죽음이므로 ‘정치사(政治死: political death)’이다. 국가를 주체로 한 원폭사는 ‘만 명 단위의 죽음’, ‘백만 명 단위의 죽음(megadeath)’의 선구(先驅)이다.(주42)
3. 평화 심리학
1932년에 프로이트(Freud)가 아인슈타인(Einstein)에게 보낸 편지 ‘Warum Krieg?(왜 전쟁인가?)’로 촉발된 ‘인간의 공격충동’에 대한 논란은 일본의 평화연구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Thanatos)’이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불러일으켜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을 초래했다는 분석은, 일본인의 공격성․호전성(好戰性) 연구에 자극제가 되었다. 독일과 함께 전쟁을 치른 일본인의 공격성에 관한 연구(주43)는 동시에 일본인의 평화 지향적인 심성을 복원하려는 ‘평화 심리학’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일본의 평화 심리학은 이와 같이 제2차 대전의 전쟁책임,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비롯되어 1950년대에는 주로 히로시마 피폭과 강제수용소에 관한 연구 성과를 축적한다. 이어 1960∼1970년대의 ‘안보투쟁’과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에 호응하여 ‘정신분석 등의 심리학이 평화에 공헌하는 길’을 모색한다. 1980년대 이후 평화 심리학은 평화교육의 심리학, 피폭자 연구, 전쟁과 천황 문제 등에 천착하면서 시야를 넓힌다.
‘平和のための心理學者懇談會’가 펴낸 {平和心理學のいぶぎ}(京都: 法政出版, 1990)의 ‘평화심리학 연구 관련문헌 목록’에는 1945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다양한 연구업적이 실려 있다. 이들 문헌의 표제 중에서 주목되는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에 대한 심리적 준비’ ‘파시즘의 사회심리’ ‘나치즘의 심층심리’ ‘히로시마 피폭 직후의 인간행동-원자폭탄, 원자력의 사회심리학적 연구’ ‘죽음을 이기는 공포-피폭자의 고백’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전쟁원인으로서의 국제적 긴장’ ‘전쟁과 평화의 사회심리학’ ‘원자․수소폭탄에 대한 태도-심리학자의 원폭연구 노트에서’ ‘영혼의 살인-강제 수용소와 인간’ ‘강제 수용소에서 인간의 행동’ ‘원수폭(原水爆) 실험에 대한 청소년의 태도와 영향’ ‘욕구불만과 폭력’ '미국 외교의 심리와 행동’ ‘외교문제의 심리학적 측면’ ‘평화를 위한 심리학’ ‘국제관계의 심리’ ‘미국 심리학과 평화의 문제’ ‘집단심리와 전쟁의 제거’ ‘죽음과 죽음의 상징에 대하여-히로시마의 재앙’ ‘사회심리학과 평화’ ‘현대일본의 핵의식(核意識)’ ‘평화의 이념과 인간의 공격성’ ‘사회심리학과 인종차별의 연구’ ‘전쟁의 연구-무력분쟁과 공격성의 인류학적 분석’ ‘민족주의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의 시각’ ‘평화를 위한 심리극(心理劇)’ ‘일본폭격의 영향에 관한 여론조사’ ‘파시즘의 정신구조’ ‘베트남 평화협정과 일본인의 평화관’ ‘과학자의 평화의식에 관한 연구’ ‘비키니 핵실험 사건과 매스컴’ ‘핵과 평화-일본인의 의식’ ‘투쟁성(鬪爭性)과 전쟁-전쟁원인의 심리적 고찰’ ‘인간성으로서의 공격심리’ ‘원폭(原爆)에 의한 정신적 피해’ ‘폭력영상이 시청자의 행동에 미치는 효과’ ‘폭력의 기원-사람은 어디까지 공격적인가’ ‘천황(天皇)의 사회심리-사회조사로 보는 민중의 정신구조’ ‘평화의 심리학과 본능론’ ‘일본인의 공격성’ ‘학생의 평화의식’ ‘베트남전쟁 신경증(神經症)-귀환 미군의 스트레스 연구’ ‘핵병기와 심리학자’ ‘평화교육의 심리학’ ‘어떤 심리 임상가의 평화를 향한 공헌’ ‘청년의 핵에 대한 태도’ ‘일본에 있어서 평화 심리학의 성격과 과제’ ‘평화 심리학의 구상-본능론과 정책론의 검토’ ‘일본 대학생의 핵병기․평화운동에 대한 태도’ ‘심리학에서 본 평화론과 평화연구’ ‘심리학자와 평화의 문제’ ‘핵전쟁의 심리학’ ‘심리과학과 핵전쟁의 위협’ ‘여성과 공격성-남녀의 공격본능의 정신분석’
4. 민주적 평화론
‘민주적 평화(Democratic Peace)’론은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을 주창한 러셋(Bruce Russet)은 저서 {Grasping the Democratic Peace; Principles for a Post-Cold War World}(Princeton Press, 1993) 등을 통하여, 1815년 이후 서구에서 민주국가 간의 전쟁(여기에서의 전쟁은 전사자 1,000명 이상의 주권 국가 간의 폭력이며, 식민지 전쟁과 내전은 제외된다.)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러셋에 의하면 민주국가 간의 평화는 민주제 자체의 성질에 기인한다. 민주제의 구조, 제도, 문화, 규범이 전쟁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국가 간에 평화연합을 만들어 전쟁을 억제해야 한다. 자유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정당화되므로 자유주의 국가가 비자유주의(非自由主義) 국가와 전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주44)
佐佐木 寬은, 러셋의 낙관적인 평화론이 실제로 ‘민주주의 나라가 독재국가에 대한 정의(正義)의 전쟁을 하자는 논리로 슬쩍 바뀌어 결과적으로 무력행사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주45)
일본 평화연구가의 이러한 비판은, 민주적 평화론이 ‘탈냉전형(脫冷戰型) 전쟁(Post-Cold War)’(주46)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이론으로 전락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신(新)가이드라인’ 전쟁체제 구축으로 인하여 (민주주의와 평화를 양립시켜 왔던) 일본 평화헌법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평화헌법의 기능마비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상태에서 평화가 보장되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을 러셋 등 민주적 평화론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5. 인간의 안전보장론
‘인간의 안전보장(인간안보: Human Security)’은 유엔 개발계획(UNDP)이 1994년에 작성한 {Human Development Report}의 기본 개념으로 ‘국가의 안전보장’과 대치된다. 안전보장의 대상이 국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인간 중심주의이다.
‘국가의 안전보장’은 주권이나 영토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주요 관심사이다. 그러나 ‘인간의 안전보장’은 전쟁․폭력․기아 등 생존과 관련된 위협, 부상, 질병 등 신체적인 위협, 실업 등 경제적인 위협, 차별, 억압 등 사회․정치적인 위협을 포괄한다. ‘인간의 안전보장’은 냉전의 종식이라는 시대상황을 반영한 개념이다. 냉전시대에는 핵의 안전보장이라는 국가 중심의 협의의 개념이 통용되었다. 그러나 탈냉전시대에는 질병, 기아, 실업, 범죄, 사회적 마찰, 정치적 탄압, 환경재해 등의 위협에 대처하는 광의의 안전보장 개념이 새롭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경제 안보, 식량 안보, 건강 안보, 환경 안보, 개인 안보, 지역사회 안보, 정치 안보 등은 ‘인간의 안전보장’과 관련된 용어이다.
일본의 평화연구가들이 인간의 안전 보장론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간의 안전보장론이 ‘평화적 생존권’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UNDP의 보고서 {Human Development Report}는 ‘평화 속에서 살 권리’라는 보편적 인권을 기초로 생명의 권리,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로 인간의 안전보장론과 갈퉁의 이론이 매우 접근해 있는 점이다. 인간의 안전보장론에서 강조하는 빈곤, 안정된 고용, 건강, 범죄로부터의 안전, 환경파괴의 공포 등은 갈퉁의 ‘구조적 폭력’과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두 이론이 모두 사회적 불공정(不公正)에서 비롯된 간접적, 구조적인 폭력을 중시하는 점에서 평화이론의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려고 한다.
셋째로 인간의 안전보장론은 광범위한 시민참여, 즉 NGO의 활동을 요구하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의 안전보장’은 인간 개개인(개인)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는 개념이다. 지금까지 개인은 가족, 지역, 기업, 국가라는 네 가지 중간 조직단위를 구성하며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왔다. 그런데 지구가 협소해진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에는 개인(인간)과 지구와의 사이에 끼어 있는 이들 네 가지 조직단위는 서서히 무너지고 개인(인간)과 지구가 직접 대면하면서, 지역은 CBO(Community Based Organization)가 대표하고 NGO(Non Governmental Organization)가 지구의 안전을 책임지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주47)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대인지뢰(對人地雷) 전면 금지조약’을 체결하는 데 공헌한 국제 평화 NGO의 활약에 대한 일본 평화연구자들의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Ⅴ. 결론
-일본 평화연구의 성과․한계․과제
앞에서 전개한 바와 같이 국제 평화연구 운동의 ‘시민권’을 획득한 일본의 평화연구는 ‘일본 평화연구의 원점(히로시마 피폭과 평화헌법)’을 중심으로 평화학을 전개하는 데 공헌했으나 평화의 사상 등의 측면에서 아직도 답보 상태이다. 즉 ‘핵의 공포’에서 출발하면서 새로운 연구 영역으로 자리 잡았으나, 아직 종합적인 학문으로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 평화연구에 대하여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자평한다: “일본에 있어서 평화에 관한 과학적․객관적 연구는, 관계학회․연구자의 노력에 의하여 오늘날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평화연구, 평화학의 발상지인 구미(歐美)와 비교하면 연구자의 층․연구소나 연구 네트워크의 정비상황 등에서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주48)
일본의 평화연구에 있어서 피폭체험에 뿌리를 둔 ‘절대 평화론’과 이에 근거한 ‘종합적 평화보장 구상’에 관한 업적, 일본 헌법 전문․제9조․제13조에 근거한 ‘평화적 생존권’에 관한 업적과 같이 특색 있는 연구가 있다. 그러나 ‘구조적 폭력’이나 ‘적극적 평화’ 등의 새로운 개념은, 모두 외국인 연구자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또 연구의 방법론적 탐구나 이론 모델의 구축, 특히 평화를 위한 ‘Global Simulation․Gaming’의 철학적 기초 연구, 세계 내지 지역차원의 구체적, 단계적인 군축정책 연구와 유엔과의 관계, 세계의 평화질서 형성의 연구 등에 관하여서는 평화국가 일본의 특색 있는 연구를 근거로 삼아 세계의 평화학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주49)
특히 1990년대의 냉전종식 이후 민족분쟁의 빈발, 제3세계에서의 만성적인 빈곤, 지구규모의 자연파괴, 인권억압 증가추세 등 평화연구의 대상 영역이 복잡해지고 중층화(重層化)하는 가운데, 이러한 문제군(問題群)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종합과학으로서의 평화학이 일본에서도 요청되고 있다.
일본의 평화학이 종합과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과제는 ‘평화연구-평화운동-평화교육의 삼위일체’를 이루어내는 평화학의 정립이다. 평화운동이 없는 평화연구가 없고, 평화교육이 없는 평화연구가 없기 때문에 이 3자 간의 균형 있는 발전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경우 1960년대 안보투쟁 기간에는 이와 같은 균형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점차 균형이 깨져 평화연구가 대학이라는 상아탑에 갇히게 되었다. 특히 탈(Post)냉전시대의 국내외 정세의 혼란 속에서 일본 평화연구는 방향성을 상실하여, 평화를 실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의 생산에 소극적이 되었다.
둘째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평화사상의 결여이다. 일본의 평화연구가 5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향성을 상실한 것은 사상적인 기반의 부족에 기인한다. ‘평화의 사상’을 토대로 하지 않고 외국의 선진 평화연구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일본 평화연구의 정체성 상실을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셋째, 과제는 평화학을 체계화하는 문제이다. 평화학은 학문의 역사가 짧은 데 비하여 방만한 주제를 산만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주제를 집중하여 평화학의 성격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종합과학으로 승격되기 어렵다.
일본의 평화연구는 ‘학문 사이의(inter-disciplinary) 연계’가 강한 장점이 있으나, 주제의 집중도가 떨어지므로 이를 극복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일본 평화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평화연구의 제도화에 성공했으나 아직 평화학이 종합과학으로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가 ‘주제의 집중도 결여’에 있다고 본다.
한편 평화학의 체계화는 대학의 개혁이라는 과제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학 간의 제휴, 대학의 국제적 네트워크 속에서 일본 평화연구의 구상력을 새롭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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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편, {平和事典}, (東京: 勁草書房, 1985), 4쪽.
(주2) 불교의 평화사상(‘和’의 사상)을 받아들인 聖德 太子는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17개조의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의 제1조에 ‘以和爲貴’를 명기하는 등 ‘和’가 헌법의 기본이념이었다. <憲法硏究所 편, {平和思想史}, (東京: 法律文化社, 1964), 69쪽.>
(주3) 憲法硏究所 편, {平和思想史}, 71∼72쪽 참조.
(주4) 田畑 忍 편저, {近現代日本の平和思想}, (京都: 미네르바 書房, 1993), 8쪽.
(주5)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편, {平和事典}, 48쪽.
(주6) 芝田進午 편, {戰爭と平和の理論}, (東京: 勁草書房, 1992), 13쪽.
(주7)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편, {平和事典}, 48쪽.
(주8) 田畑 忍 편저, {近現代日本の平和思想}, 1쪽.
(주9) 田畑 忍 편저, 위의 책, 2∼3쪽.
(주10) 臼井 久和․星野 昭吉 편, {平和學}, (東京: 三嶺書房, 1999), 57쪽.
(주11) 제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연합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가 실현되었다. 그 결과 일본에는 새로운 헌법이 탄생했다(1946년 11월 3일 공포). 일본 국민은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한다는 내용의 평화헌법 전문(前文)과 ‘국권(國權)의 발동인 전쟁,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원히 포기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과 그 밖의 전력(戰力)을 보지(保持)하지 않으며, 교전권(交戰權)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헌법 제9조의 평화사상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주12) 臼井 久和․星野 昭吉 편, {平和學}, 60∼61쪽.
(주13) 제2차 대전 이후 일본의 평화사상․평화운동에 있어서 원수폭(原水爆: 원자폭탄․수소폭탄) 금지의 사상과 운동은, 독특한 중추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원수폭 금지 운동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국민적 기반을 가진 평화운동으로 시작되어 세계대회 등을 통하여 국제적인 평화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藤原 修 지음, {原水爆禁止運動の成立}, (橫浜: 明治學院大 國際平和硏究所, 1991), 1쪽>.
(주14) 芝田進午 편, {戰爭と平和の理論}, 232∼234쪽 참조.
(주15) 위의 책, 233∼234쪽.
(주16) 1947년에 발표된 이 성명은, 냉전의 기원이 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에 반대하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성명은 ‘전쟁은 인간성 그 자체의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아니다.’는 등 12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17) 臼井 久和․星野 昭吉 편, {平和學}, 46쪽 참조.
(주18) 關 寬治, 「世界の平和硏究と日本」, {創大平和硏究}, 제8호, (1986), 55∼56쪽.
(주19) 關 寬治, 「世界の平和硏究と日本」, 위의 책, 56∼57쪽.
(주20) 이 조직은 그 뒤 명칭을 ‘평화과학 국제협회(PSSI; Peace Science Society, International)’로 바꾸었으며, ‘PSSI 일본지부’가 결성되어 ‘일본 평화학회’의 창설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다.
(주21) 臼井 久和․星野 昭吉 편, {平和學}, 50∼51쪽 참조. 볼딩 교수와 윌슨은 모두 퀘이커 교도로서 구미(歐美) 평화연구자와 일본 평화연구자 사이의 중개역을 맡는다. 두 사람의 노력에 힘입어 일본의 평화연구 그룹이 IPRA에 가입하게 된다.
(주22) 臼井 久和․星野 昭吉 편, 위의 책, 51쪽.
(주23) 高柳先男, 「‘平和硏究’の新展開」, {國際問題}, No.177, (1974. 12.), 3쪽.
(주24) 평화연구 진영의 三分에 관한 볼딩(Boulding)의 글, 「The philosophy of Peace Research」, {Proceedings of the IPRA Third conference}, Vol.1, Assen, Van Gorcum & Comp.N. V., 1970, pp.5∼19를 참조할 것.
(주25) 臼井 久和․星野 昭吉 편, {平和學}, 52쪽.
(주26) 川田 侃 지음, {平和硏究}, (東京: 東京書籍, 1996), 128∼129쪽.
(주27) 臼井 久和․星野 昭吉 편, {平和學}, 53∼54쪽.
(주28) 大阪産業大學 産業硏究所, {平和學-平和硏究論文集 Ⅱ}, (1996), ⅳ.
(주29) 세 번째 강조점으로는 ‘학습과정과 태도 형성에 관한 연구․교육(심리적․교육적 폭력 비판)’이 12%, ‘생활양식의 재인식에 관한 연구․교육(자연에 대한 폭력 비판)’이 12%, ‘철학적, 윤리적, 신학적, 종교적 평화사상에 관한 연구․교육(평화학의 이론적 근거 부여 또는 체계화)’가 10%를 차지했다.
(주30) 岡本三夫, 「日本の大學における平和學關聯講座の第二次實態調査」, {廣島平和科學}, 제20호, (1997), 250쪽 참조.
(주31) 「平和に關する硏究の促進についてー平和學の歷史, 現狀及び課題」, <일본 학술회의 평화문제연구 연락위원회 보고서(1994. 4. 26.)>, 52쪽.
(주32) 早尾貴紀, 「‘從軍慰安婦’ 問題における暴力のエコノミー」, {現代思想}, (1999. 6.)참조. 종군 위안부에 관한 광범위한 문헌을 집대성한 {‘慰安婦’關係文獻目錄}(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편, 1997)도 참조할 것.
(주33) J. Galtung, 「平和のための平和を体した敎育」, {平和硏究}, 제2호, (1977. 4.) 참조.
(주34) 芝田進午 편, {戰爭と平和の理論}, 243쪽.
(주35) 芝田進午 편, 위의 책, 247쪽.
(주36) 같은 책, 248쪽.
(주37) 日本敎職員組合 편, {日本の敎育}, 第47集, (東京: 一ツ橋書房, 1998), 26∼27쪽.
(주38) Elizabeth Flower, 「Ethics of Peace」, {Dictionary of the History of Ideas}, Vol.Ⅲ, p.443f. 참조.
(주39) 加藤 朗 외 지음, {戰爭-その展開と抑制}, (東京: 勁草書房, 1997)의 제5장 ‘戰爭と倫理’를 참조할 것.
(주40) 浪木 明, 「‘核倫理’に關する諸問題-Joseph S. Nyeの著書の檢討」, {創大平和硏究}, 제9호, (1987)을 참조할 것.
(주41) 長崎總合科學大學 長崎平和文化硏究所 편, {ナガサキの平和學}, (東京; 八朔社, 1996), 67∼69쪽.
(주42) 위의 책, 70∼76쪽.
(주43) 中野久夫와 河田 宏은 {日本人の攻擊性}(東京: 三一書房, 1984)이라는 저서에서 2차 대전 당시 일본 사회의 ‘죽음의 본능(Thanatos)’를 분석하면서 일본 병사(皇軍)의 공격성을 도출해 낸다.
(주44) 永田尙見, 「デモクラディック․ピース論の再檢討」, {平和硏究セミナー論集}, (1998), 83∼84쪽 참조.
(주45) 佐佐木 寬, 「平和硏究の理論的地平」, {平和硏究}, 제20호, (1996), 43쪽.
(주46) 서방 선진국이 비자유주의 독재국가로 지목한 세3세계의 ‘불량국가(Rogue State=유고․이라크․북한)’와 ‘구미(歐美) 자유주의 국가의 평화연합’ 사이의 전쟁이 탈냉전시대의 새로운 전쟁양식이다. 걸프전(이라크와 구미(歐美) 다국적군 간의 전쟁), 유고슬라비아와 나토(NATO)군의 전쟁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주47) 明治學院大學 國際平和硏究所, {PRIME}, No.7, (1997. 9.), 25쪽.
(주48) 「平和に關する硏究の促進について-平和學の歷史, 現狀及び課題」, <일본 학술회의 평화문제연구 연락위원회의 보고서(1994. 4. 26.)>, 44쪽.
(주49) 「平和に關する硏究の促進について-平和學の歷史, 現狀及び課題」, 위의 보고서,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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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편, {平和事典}, (東京: 勁草書房, 1985).
* 憲法硏究所 편, {平和思想史}, (東京: 法律文化社,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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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野久夫․河田 宏 지음, {日本人の攻擊性}, (東京: 三一書房,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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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田尙見, 「デモクラディック․ピ-ス論の再檢討」, {平和硏究セミナ-論集}, (1998).
* 佐佐木 寬, 「平和硏究の理論的地平」, {平和硏究}, 제20호, (1996).
* 明治學院大學 國際平和硏究所, {PRIME}, No.7, (1997. 9.).
* 佐佐木 寬, 「J. ガルトゥング平和理論の生成と展開」, {中央大學大學院 硏究年報(法學硏究科 篇), 제23호, (1994. 2.).
* J. Galtung, 「Cultural Violence」, {Journal of Peace Research}, vol.27, No.3, (1990).
* J. Galtung, 「平和硏究-將來の課題」, {創大平和硏究}, 제8호, (1986).
* 水島朝穗, 「‘平和と人權’考」, {法律時報}, 제71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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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02호(200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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