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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평화학 일반

평화연구의 분화과정

김승국

평화연구(Peace Research) 또는 평화학(Peace Studies)은 본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이 확산되는 가운데 제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기 위한 학문, 즉 ‘인류 생존의 과학’으로서 미국에서 탄생했으며, 볼딩(Kenneth E. Boulding)과 라포포트(Anatol Rapoport)가 산파역을 맡았다. 이들의 평화연구는 ‘동서 문제(미국, 소련의 냉전)’가 빚을 전쟁의 부재(不在), 즉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에 주안점이 있었다. 미국의 평화연구는 곧 유럽에 전파되었으나 유럽의 평화연구는 미국과 다른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면서 ‘오슬로-프랑크푸르트학파(Oslo-Frankfurt Schule)’(주1)를 낳는다. 이 학파의 특징은 갈퉁(Johan Galtung)이 제기한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즉 ‘남북문제’로 파생되는 빈곤, 기아,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억압 등 인간성의 실현을 저해하는 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의 창출에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 사이에 유럽과 북미주에서 평화연구 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진다. 1959년에 ‘미시간 대학 분쟁해결 연구센터(CRCR; Center for Research on Conflict Resolution)’와 갈퉁이 주도하는 ‘PRIO;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Peace Research Institute, Oslo)’가 출범한 데 이어 1961년에는 ‘CPRI; 캐나다 평화연구소(Canadian Peace Research Institute)’와 네덜란드의 ‘플로닝겐 대학 전쟁학 연구소(Polemological Institute)’, 1963년에는 미국의 ‘PRSI; 평화연구 국제협회(Peace Research Society, International)’와 ‘평화연구 역사학회(Conference on Peace Research in History)’,1964년에 ‘국제평화연구학회(IPRA;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Association)’가 발족한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평화연구는, ‘분쟁 규제’ 또는 ‘분쟁 해소’에 초점을 두었다. 특히 1956년에 미시간 대학이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을 발간하고,1959년에 ‘Center for Research on Conflict Resolution’이 설립된 이후 평화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연구의 방법이 광의(廣義)의 행동과학이었기 때문에 과학성을 획득한 반면에 두드러지게 기술성(技術性)에 빠졌던 것도 부정할 수 없어서 평화연구 운동 안팎에서 비판을 받았다.(주2)

이러한 비판은 ‘오슬로-프랑크푸르트학파’와 쉬미트(Herman Schmidt)․덴시크(Lars Dencik) 등의 ‘Radical Group’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세계적인 평화연구 진영이 세 쪽으로 갈라진다.(주3)
* 평화연구의 세 가지 진영을 집약한 <표1>이, 김승국『평화연구의 지평』(파주, 한국학술정보, 2009) 13쪽에 실려 있으니 참고하세요.

1950년대 말경부터 1960년대 중엽에 걸친 시기에는, 전쟁(그 최종형태로서의 핵전쟁)의 결여(부재)상태 또는 일반적으로 조직폭력(組織暴力)의 결여상태를 평화로 간주하는 이른바 ‘소극적 평화’의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가면 이러한 평화연구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 이른바 ‘Radical Peace Research’가 대두되어 평화연구자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현상유지적인 평화상황=전쟁결여 상황은 참된 평화로 간주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강하게 대두하게 된다. 그 뒤 이러한 사고방식은 평화연구자 사이에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여 평화연구자의 문제관심은 갈퉁 교수가 말하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로 향하게 되었다.(주4)

1969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국제 평화연구 학회 내부의 ‘폭력논쟁’(주5)은 평화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아래의 <표 2; 생략>를 참조할 것).
* <표2; 폭력에 관한 이론의 차이>가, 김승국『평화연구의 지평』(파주, 한국학술정보, 2009) 15쪽에 실려 있으니 참고하세요.

그리고 갈퉁은 자신의 구조적 폭력론에 대한 비판(주6)에 화답하는 새로운 이론으로 ‘사회적 우주관(Social Cosmology)’ 이론과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론’(주7)을 내놓는다.

갈퉁은 「Social Cosmology and the Concept of Peace」 {Journal of Peace Research}(No.2, 1981, pp.183∼199.)에서 몇 가지 문명 가운데서 볼 수 있는 평화 개념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평화 개념의 확대를 꾀한다. 그는 현재 지배적인 서양의 평화 개념을 넘어 새로운 지평을 찾으려 한다. 그는 평화 개념과 그것을 낳은 문화 시스템의 관계를 ‘종(種: species)’과 ‘유(類: genus)’의 관계로 본다. 여기에서 그가 상정하는 ‘우주관(Cosmology)’은 문명의 심층에 잠복해 있는 이데올로기, 즉 ‘種’이나 ‘類’의 최종목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숨은 기호체계(記號體系: Code)’를 의미한다. 따라서 평화 개념도 그 문명적 Code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차이가 생긴다. 그리고 그 차이를 그는 ‘동양-서양’이라는 기본축(基本軸)에 따라 분류한다.(주8)

갈퉁은 ‘Pax’라는 평화 개념에 서구적(西歐的)인 발상이 강하다고 본다. 그는 서양에서 전쟁이 없는 ‘소극적 평화’인 ‘Pax’가 지나치게 중요시된 나머지 제국(帝國) 형성(Pax Romana, Pax Americana)의 논리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은 서구적인 평화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며 동양의 평화 개념에서 대안을 모색한다.(주9)

갈퉁에 의하면 동양의 평화 개념은 ‘내향적(內向的)이며 구심적(求心的)’이다. 동양의 평화는 ‘마음(心)의 평화’이다. 힌두교의 ‘샨티(shanti)’ 중국의 ‘和平’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정온(靜穩)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일본의 ‘평화’나 ‘조화’는 현실의 질서에 관하여서도 쓰이므로 특수하다.(주10)

이처럼 동양의 평화 개념을 통하여 자신의 이론적 지평을 확대하려는 갈퉁의 새로운 움직임을 평화학자들이 관심 깊게 지켜보고 있다. 특히 갈퉁의 저서 {Peace by Peaceful Means}(1996)에서 ‘일본의 우주관(Nipponic cosmology; 국가신도(國家神道) 등)’과 평화헌법을 연결시킨 점, ‘헌법 제9조의 교전권(交戰權) 부인(否認)과 문화적 폭력을 관련지음’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주11)

갈퉁은 냉전 이후의 지역분쟁의 상황 등에 입각하여 자기의 이론틀에 수정을 가하여 종교나 언어 등의 문화적 폭력의 문제를 중시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갈퉁은 ‘선민(選民: chosen people)’에 뿌리를 두고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정당화되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 국가 이데올로기․국가통제로 길들여진 점을 지적하고 일본국 헌법 제9조가 교전권을 부인한 점에 주목한다.(주12)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한 국가신도(國家神道)와 같은 ‘일본의 우주관’이 내셔널리즘-국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일본 특유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과 관련하여 ‘교전권 부인’을 설명하는 갈퉁의 참신한 이론 구조가 평화연구자들의 관심을 촉발시키고 있다.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11호(2005.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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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갈퉁(Johan Galtung)이 주도한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와 ‘갈퉁의 영향을 받은 젱하스(Senghaas) 등이 소속된’ 프랑크푸르트 연구자 집단을 ‘오슬로 프랑크푸르트학파’라 부른다. 이 학파는 당시 풍미했던 제3세계 이론․종속이론 등 ‘라틴 아메리카 패러다임(Paradigm)’을 받아들여 구조적 폭력을 분석한다.
(주2) 高柳先男, 「‘平和硏究’の新展開」, {國際問題}, No.177, (1974. 12.), 3쪽.
(주3) 평화연구 진영의 3分에 관하여 Boulding의 글 「The philosophy of Peace Research」, {Proceedings of the IPRA Third conference}, Vol.1, Assen, Van Gorcum & Comp.N. V., 1970, pp.5∼19를 참조할 것.
(주4)) 川田 侃, {平和硏究}, (東京: 東京書籍, 1996), 128∼129쪽.

(주5) 1969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 평화연구협회 제6회 유럽대회: PRSI’를 주도한 아이사드(Walter Isard; 미국 ‘수리형(數理型) 평화학’의 대표자)를 직접 비판한 ‘Radical Critic’이 등장하여 평화연구 운동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이들은 1968년에 PRSI가 주재한 ‘베트남에 관한 대회’에 제출된 논문의 출판을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쉬미트․덴시크 등의 북유럽 ‘Radical Group’이 매우 격렬한 비판을 함으로써 평화연구 운동이 정치적 당파로 분열할 위기에 놓였다. <高柳先男, 「‘平和硏究’の新展開」, {國際問題}, No.177, (1974. 12.), 3∼4쪽.>
마침 그때 베트남 전쟁 중이어서 평화연구의 성격 논쟁이 크게 일어났다. 1970년대에는 갈퉁의 구조적 폭력론이 빈곤과 폭력의 구별을 애매하게 하고 있다는 볼딩의 진화론적 입장에서의 비판이 있어서, 구조적 폭력론과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논쟁이 배경에는 아이사드의 수리(數理) 평화학 지향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바,유럽의 평화연구와 미국의 평화연구 조류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반영했다. <「平和に關する硏究の促進について-平和學の歷史, 現狀及び課題」, 일본학술회의 평화문제연구 연락위원회의 보고서, (1996. 4. 26.), 50쪽.>
볼딩은 갈퉁 이론모델의 정태성, 현실을 무시한 과도한 규범성, 개별적 진화라는 역사적 관점 결여 등을 지적하며 자신의 자유주의적 ‘진화론적’ 평화연구와 대치시켰다. 이에 대하여 갈퉁은 착취․억압의 수직적․구조적 차원의 고찰이 불가결하다고 주장하며 볼딩의 ‘안정적 평화(stable peace)에로의 진화’라는 낙관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는 평화연구의 사상적 입장을 에워싼 논쟁으로서 지금도 논쟁적 의미를 갖고 있다<佐佐木 寬, 「平和硏究の理論的地平」, {平和硏究}, 제20호, (1996), 44쪽>.

(주6) 갈퉁의 구조적 폭력론에 대한 비판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① 폭력의 윤리적, 정치적 관점을 과소평가했다(Jukka Gronow). ② ‘잠재적 실현 가능성(potential possibility)’개념이 불명확하다(Kjell Eide). ③ 개념 틀 내부에 분류상의 모순이 있다(Jean Pierre Derriennic). ④ 갈퉁의 이론이 지나치게 규범적이어서 역사상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Gaston Bouthoul). ⑤ 갈퉁의 ‘평등화’ 가운데 사회의 ‘질’이나 ‘자유’의 문제가 자각(自覺)되어 있지 않다(Kenneth E. Boulding). <佐佐木 寬, 「J. ガルトゥング平和理論の生成と展開」, {中央大學 大學院 硏究年報}(法學硏究科 篇), 제23호, (1994.2.), 199∼201쪽 요약.>

(주7) J. Galtung, 「Cultural Violence」, {Journal of Peace Research}, vol.27, No.3, 1990,pp.291∼305를 참조할 것.
(주8) 佐佐木 寬, 「J. ガルトゥング平和理論の生成と展開」, {中央大學 大學院 硏究年報}(法學硏究科 篇), 제23호, (1994. 2.), 202∼203쪽.
(주9)) J. Galtung, 「平和硏究-將來の課題」, {創大平和硏究}, 제8호, (1986), 69∼71쪽 참조.
(주10) 佐佐木 寬, 「J. ガルトゥング平和理論の生成と展開」, 위의 책, 203쪽.
(주11) 水島朝穗, 「‘平和と人權’考」, {法律時報}, 제71권 1호, 66∼67쪽.
(주12) 水島朝穗, 「‘平和と人權’考」, 위의 책, 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