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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평화공동체(도시, 마을)

묵자의 평화 공동체와 평화 경제

김승국

전쟁으로 날을 지새운 (중국의) 전국 시대에 태어난 묵자(墨子)는, ‘겸애(兼愛)’ ・‘비공(非攻)’에 입각한 평화 공동체 운동을 전개했던 사상가이다. 전국 시대의 전쟁이 빚어낸 참상과 그 피해는 엄청나며, 이것은 곧 민생의 파탄으로 연결되었다.

묵자는 침략전쟁의 전반적인 참혹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견고한 투구・예리한 무기를 만들어 죄 없는 나라를 공벌(攻伐)하러 간다. 남의 나라 변경에 침입하여 곡식을 마구 베어버리고, 수목(樹木)을 자르며, 성곽을 허물고, 도랑과 못을 메우고, 희생을 멋대로 잡아 죽이며, 조상의 사당을 불태워 버리며, 백성들을 찔러 죽이고, 노약자를 넘어뜨리며, 나라의 보물을 강탈하면서 끝까지 나아가 극렬하게 싸운다.”({墨子}非功․下)

이와 같은 전국 시대의 전쟁은 토지와 이에 딸린 농노를 차지하기 위한 약탈 전쟁이며, 천하의 패권을 쥐기 위한 겸병(兼倂)전쟁이었다. 이로써 정전제(井田制)는 무너지고 민생은 파탄되었다. 묵자는 당시의 민생 파탄을 ‘삼환(三患, 세 가지 환난)’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백성들에게는 세 가지 환난이 있으니 굶주린 자(飢者)가 먹을 수 없고, 헐벗은 자(寒者)가 입을 수 없고, 고달픈 자(勞者)가 쉴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다.”({墨子} 非樂․上)

전쟁에 의한 삼환에 더하여 민(民)에 대한 형벌이 가혹했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당시의 형벌은 얼굴에 먹물을 뜨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불알을 거세하는 궁형(宮刑), 발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목숨을 끊는 사형(死刑) 등 오형(五刑)이 있고, 오형의 죄목은 각각 500가지로 도합 2천5백 가지 죄목이 있었다고 한다.(刑掌五刑之法 以麗萬民之
罪. 墨罪五百 劓罪五百 宮罪五百 刖罪五百 殺罪五百.({周禮} 秋官/ 司寇))

안자(晏子)는 이와 같은 엄형(嚴刑)주의의 실정을 ‘구천용귀(屨賤踊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온 나라의 시장에서 정상인의 온전한 신발은 값이 싸고, 죄를 지어 발꿈치를 잘린 병신들이 신는 뒤축 없는 신발이 비싸다<晏子曰 此季世也. 國之諸市 屨賤踊貴({左傳} 昭公 3년)>”고 풍자했다. 형벌이 가혹한 탓에 형벌을 받은 병신이 성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

요즈음의 국제 정세로 말하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 묵자의 생존 시에 벌어진 듯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전쟁이라는 직접적 폭력이 민생파탄(三患; 구조적 폭력)을 낳은 데 이어, 민중에 대한 가혹한 형벌(탈레반과 북부동맹의 가혹한 형벌)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동서고금의 전쟁은 계급사회의 반영물이다. 전쟁을 통해 신분사회․부익부 빈익빈의 계급사회 체제가 강화된다. 끊임없는 전쟁의 이익을 얻은 부자의 땅은 동서남북으로 이어지지만 가난뱅이는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된다.<富者連阡陌, 貧者亡立錐之地 ({漢書} 食貨志)>

중국 고대에 전쟁을 주도한 지배계급은 막대한 이익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예(禮)라는 이데올로기 중심의 신분차별 사회를 형성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 의하면,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등의 귀족과 대부 등 지배계급(전쟁 주도 세력)에게는 법이 적용되지 않고 예만 적용되며, 대부(大夫) 이하의 사민(四民)과 천민에게는 예가 적용되지 않고 형벌만 적용되는 신분차별 사회였다. 이로써 법이 적용되지 않고 예(禮)만 적용되는 ‘인(人) 계급’과 예가 적용되지 않고 법(형벌)만 적용되는 ‘민(民) 계급’이 양분되는 계급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계급사회의 양대 구성원인 인과 민을 합하여 ‘인민’이라고 부른다.

{좌전(左傳)} 「은공(隱公) 11년」에 의하면 ‘예(禮)란 민과 인을 차례 짓는 것(序民人)’이다. 이는 인과 민이 분명히 다른 계급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은 분명 귀족이나 대인 등 지배계급을 지칭하고 있다. ‘인’이 술어로 사용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인’은 ‘귀족다움’ 또는 ‘군자다움’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기세춘, 2006, 31, 33쪽)<주1>

이처럼 전쟁(직접적 폭력)이 민생파탄(三患)․가혹한 형벌(구조적 폭력)을 낳으면서, 계급사회(人과 民의 차별이 있는 사회)가 강화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묵자가 고안한 평화의 담론이 ‘비공’ ・‘겸애’ ・‘교리(交利; 交相利)’이다. 묵자는 ‘비공’ ・‘겸애’ ・‘교리’의 세 개의 가치가 상호관계를 가지는 평화 담론을 제시함과 동시에, 이러한 평화 담론을 실천하는 평화 공동체를 내오기 위한 반전평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리고 평화 공동체의 기반을 이루는 평화 경제를 위해 ‘절용(節用)’ ・‘비락(非樂)’을 주창했다.

Ⅰ. 비공-겸애-교리의 상호관계

묵자는 묵자(墨子) 「비공(非攻)․中」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여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 첫째로 전쟁은 계절적으로 여름의 더위와 추위를 피하여 봄과 가을에 빈발하므로, 이것은 농사일에 커다란 장애가 되며 결국 민생의 파탄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공격당하는 측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공격을 하는 쪽에서 보더라도, 전쟁이 빈발하면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사회의 혼란뿐만 아니라, 생산활동에 중대한 타격이 되어 이른바 백성들의 세 가지 근심(三患)은 날로 커지게 된다. 둘째로 전쟁에서 비록 승리하더라도 나아갈 때의 인원과 장비는 돌아올 때의 엄청난 피해가 뒤따르므로 결코 이익이 될 수 없으며, 특히 인명의 손실은 후손이 끊어져서 결과적으로 노동력의 손실을 초래한다. 또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탈하는 겸병전쟁에 대해서는, 비록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그 넓은 토지는 남아돌고, 이것을 경작할 노동력은 부족하게 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묵자는 “오늘날의 위정자(왕공․大人 등의 人계급)가 진정 이익을 바라고 손실을 싫어한다면, 또 안정을 원하고 위험을 싫어한다면 공전(攻戰)만은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침략전쟁은 사회적 재부(財富)와 생산의 파괴를 가져오므로, 처음 의도한 손익계산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묵자의 공리적(功利的) 관점에서 비롯된 ‘비공(非攻)’의 논리이다.(윤무학, 1992, 118)

사회적 손실을 가져와 ‘서로 이익(交利)’이 되지 않는 전쟁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공리적 관점에서 비공론(非攻論)을 묵자가 전개하고 있으며, 이 비공론은 겸애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교리(상호 이익)에 어긋나는 겸병전쟁은 겸애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겸애 차원에서 비공하면 교리(사회적인 상호 이익)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묵자의 중심 사상은 ‘겸애(兼愛)’이다. ‘겸(兼)’은 신분상의 등차를 두지 않는 것이고 ‘애(愛)’의 실질 내용은 ‘이(利)’를 보장해 주는 데 있다. 그것은 남에게 해(害)를 입히거나 자기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태도와 전혀 다르다. 친소․원근의 차 없이 남의 이익을 존중해야 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함께 대할 수 있는 서로의 평등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묵자는 화란(禍亂)이 일게 되는 원인을 ‘불상애(不相愛)’에 있다고 본 것이다. 불상애는 차별애(差別愛)를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가 남을 이롭게 할 줄 모르고 사람에 차별을 두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을 크게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해악 중에 가장 심한 것은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침략하고 귀족이 천민을 박대하는 일이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인인(仁人)’이 반드시 힘써야 할 일은 천하의 이(利)를 일으키고 해(害)를 물리쳐야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인류 공동의 이익 증대를
가리킨 말이다. 박애나 자선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 ‘겸상애(兼相愛)’, ‘교상리(交相利)’할 것이 요청된다. ‘교리(交利)’는 이익의 상호 존중이며 차별 의식이 없는 상태이다. 자리(自利)를 일단 유보하고 타리(他利)에 대한 관심을 높임으로써 ‘겸애’가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남의 이익을 서로 존중하기 위하여 묵자는 또한 ‘비공’의 이론을 전개시켰다. 제후
들 사이에 계속되는 겸병전쟁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은 대중의 이(利)를 침해하는 가장 큰 불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운구, 1991, 168-170)

묵자는 전쟁으로 인한 재화의 낭비와 노동 손실을 지적하고, 전쟁비용으로 적국에게 경제 원조를 해서 적국의 인민을 도와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평화의 길이라고 주장했다.(기세춘, 2002, 271)

하느님께서는 인간관계가 서로 평등하고 아우르는 사랑(겸애)의 관계임과 동시에 서로에게 이익되는 관계(교리)이기를 바라므로, 묵자는 도덕론을 관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경제적인 면에서 파악하여 경험되는 현실세계로 끌어내린다. 즉 인(仁)은 인민을 사랑하는 것이며 의(義)란 인민에게 이롭게 하는 것이다.(기세춘, 1995. 287)

‘애(愛)’는 ‘이(利)’의 보장이고 또한 그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의는 민(民)이 취리(取利)하는 길이고 불의(不義)는 해인(害人)하는 길이다. 墨翟[묵자]은 불의를 가리켜 ‘휴인자리(虧人自利, 非攻)’라 하고 이를 거척(拒斥)하였다. 그중에 가장 큰 불의는 침략전쟁이었다.(이운구, 1991, 17-18)  ‘겸애’는 전체 대중의 ‘이(利)’를 보장해 주는 길이며 그것이 곧 ‘의(義)’였다. 따라서 ‘虧人自利(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손해를 입힘)’하는 침략전쟁을 반대하였다.(이운구, 1991, 72)

‘겸애’의 참뜻은 대중의 이익을 최대로 보장해 주는 것이며, 이를 위해 재화의 증식이 요구된다. 즉 겸애라는 평화의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 대중의 이익․재화 증식(交利․交相利)을 보장하는 평화 경제가 요청되는데, 침략전쟁이 이를 가로막으므로 비공해야 한다는 말이다.

묵자서에서 ‘평화’ 이념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공’에 대한 구체적 대안으로서 제시된 ‘겸애’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비공’은 ‘겸애’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묵가의 ‘겸애’(차별 없는 사랑)는 ‘교리’(상호 이익의 존중)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며, 따라서 ‘겸상애(兼相愛), 교상리(交相利)’는 묵자서 전체를 일관하는 근본 관념이라 할 수 있다.(윤무학, 1992, 121)

Ⅱ. 천하무인(天下無人)의 안생생(安生生) 평화 공동체=대동(大同)사회

‘겸상애(兼相愛) ・교상리(交相利)’는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는 묵자 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민중이 죽어 가는 전국 시대에 묵자는 ‘天下無人’의 기치를 내걸고 반전운동을 주도했다. 그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만민이 평등하고 전쟁이 없으며 생명이 안락하게 살아 가는 ‘安生生 대동사회’였다. 안생생 사회는 노동이 소외되지 않는 공유(共有), 공산(共産), 공생(共生)의 (평화)공동체 사회였다. 묵자는 그것을 위해 유세했고 스스로 공동체를 조직하여 생활함으로써 실천했다. 그의 모토는 겸애, 절용, 평화였다.(기세춘, 2006, 388-389)

묵자의 안생생 공동체의 주인공들은 가난하고, 천하고,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으며, 도둑, 노예, 과부, 고아 등 예수가 말한 이른바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들이며 ‘고난받는 자’들이었다. 묵자에게 이들은 천하 만민이 다 함께 한 가족과 같은 사회(天下無人),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安生生) 공동체의 주인공들이었으며, 예수가 새로운 세상 하늘나라의 주인이라고 축복했던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안생생’은 바로 만민평등의 ‘대동사상’을 (평화)경제적 측면에서 표현한 말이다.<기세춘,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169호(2005. 2. 11.)>

{묵자}의 안생생 사회론은 {예기(禮記)} 의 대동(大同)사회론과 일치한다. ‘대동사회’라는 사회 구성체 논의는 {예기} 「예운」편에 처음으로 보인다. 즉 대동사회의 대도가 쇠미했으므로 성현들이 소강(小康)사회를 열었다는 내용이다. 대동의 일반적인 뜻은 대동소이(大同小異), 대동단결(大同團結), 태평성세(太平盛世)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 중에서 태평성세라는
의미의 어원은 {예기} 「예운」편에 최초로 보이는 이상사회로서의 ‘대동’이다. 이때의 동(同)은 평(平)과 화(和)의 뜻이므로 대동사회는 평등․평화 사회를 의미한다.(기세춘 {평화 만들기} 236호(2006. 6. 13.)

  1. {예기}의 ‘대동’과 {묵자}의 ‘안생생’

{예기} 「예운」편의 대동사회에 대한 기록과 묵자의 천하무인의 안생생 사회에 관한 어록을 비교해 보면 너무도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 정치적으로 ‘민주 ․ 평등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① 예기 의 대동사회

大道之行也(대도가 행해지니)
天下爲公(천하가 만민의 것이 되었고)
選賢與能(어질고 유능한 자가 선출됨으로써),
講信修睦(모두가 신의를 중히 여기고 화목한 사회가 되었다)

      ② 묵자 의 안생생 사회

하느님이 처음 백성을 지으실 때는
지도자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주권자였다.
그러나 백성이 각각 주권자이므로
서로 자기의 의(義)는 옳다 하고 남의 의(義)는 비난하며
크게는 전쟁이 일어나고 작게는 다투게 되었다.
이에 천하의 의(義)를 하나로 통일하고자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선출하여 천자로 삼았던 것이다. (「상동(尙同)」편)

* 그러므로 군주란 인민들의 일반적인 계약이다(君 臣萌通約). (「경설(經說)」편)
* 따라서 농사꾼이든 노동자든 장사치든 유능하면 등용되었으므로 벼슬아치는 항상 귀한 것이 아니고 백성은 항상 천한 것이 아니다. (「상현」편)

    2) 도덕적으로 ‘겸애의 공동체 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① {예기}의 대동사회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식만 자애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같이 사랑하였다.

      ② 묵자 의 안생생 사회

* 천하 만민은 하느님의 평등한 신민(臣民)이다.
* 하느님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하기를 바라고 서로 미워하고 해치는 것을 싫어하신다. (「법의(法儀)」편)
* 남의 나라를 내 나라 보듯이 하고, 남의 집안 보기를 내 집같이 하고, 남의 몸을 내 몸같이 보라!(「겸애」편)
*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 (「대취(大取)」편)

   3) 경제적으로 ‘완전 고용의 복지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① {예기}의 대동사회

使老有所終(그렇게 함으로써 늙은이는 수명을 다하고)
壯有所用 幼有所長(젊은이는 재능을 다하고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鰥寡孤獨廢疾者(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병자들도)
皆有所養 男有分女有歸(모두 편히 부양받게 되었다)
男有分女有歸(남자는 모두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② 묵자 의 안생생 사회

* 모든 노동자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소질에 따라 일에 종사하도록 하며(완전 고용),
모든 백성들에게 필요한 대로 충분히 공급해 주고(필요공급)
그 이상의 낭비는 그쳐야 한다. (「절용(節用)」편)
*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평등의 정치는 장님과 귀머거리가 서로 도와 장님도 볼 수 있고 귀머거리도 들을 수 있게 하는 정치다. 그렇게 함으로써 처자식이 없는 늙은이도 부양을 받아 제 수명을 다할 수 있고 부모 없는 고아들도 의지할 데가 있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은 성왕의 도리인 것이다. (「겸애」편)
* 어진 사람이 되려면 힘 있는 자는 서둘러 남을 돕고, 재물이 있는 자는 힘써 남에게 나누어 주고, 도리를 아는 사람은 열심히 남을 가르쳐 주어라. 그러면 굶주린 자는 밥을 얻고, 헐벗은 자는 옷을 얻고, 피로한 자는 쉴 수 있고, 어지러운 것이 다스려지리라. 그것을 일러 편안하고 자연스런 삶이 이루어지는 ‘안생생 사회’라고 말한다. (「상현」편)

    4) 사회적으로는 ‘노동절용 ․ 공유의 공생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① {예기}의 대동사회

貨惡其棄於地也(재물을 땅에 버리는 낭비를 싫어하지만)
不必藏於己(결코 자기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으며)
力惡其不出於身也(몸소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不必爲己(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 않는다)

      ② {묵자}의 안생생 사회

* 성왕은 정치를 함에 있어 영을 내려 사업을 일으키되 무기와 같은 실용이 아닌 것을 생산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므로 재물을 낭비하는 풍조가 사라지고 백성들은 피로하지 않고 크게 이롭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군주들은 재화와 노동을 허비하여 사람의 생활에 긴요하지 않는 무용한 일에 사용한다. 그러므로 부하고 높은 사람은 사치하고 고아들과 과부들은 헐벗고 굶주린다. (「사과(辭過)」편)
* 그래서 도둑이 들끓는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유를 없애지 않고는 결코 도둑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사유는 자기만을 위한 것일 뿐 자기와 남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대취」편)
* 유가들은 인간의 근본을 배반하여 노동을 기피하고 게으르고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먹기만을 탐하니 기한에 얼어 죽고 굶어 죽을 위험에 처해도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그들은 남의 집에 의지해서 살찌고 남의 밭에서 의지해서 술 취하는 자들이다. (「비유(非儒)」편)

    5) 도둑과 전란이 없는 ‘평화 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① {예기}의 대동사회

是故謀閉而不興(이처럼 풍습이 순화되어 간특한 모의가 통하지 않으니)
盜竊亂賊而不作(도둑과 변란과 약탈이 일어나지 않으니)
故外戶而不閉(대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是謂大同(이것을 일러 ‘大同’이라 말한다)

      ② {묵자}의 안생생 사회

*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는 ‘의로운 정치’는 대국이 소국을 공격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지 않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무시하지 않고, 다수가 소수를 해치지 않고, 지혜 있는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고,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교만하지 않고, 장정이 노인을 약탈하지 않는다. 이로써 천하의 모든 나라들은 불과 물과 화약과 병기로써 서로 살상하지 않게 되었다. (「천지(天志)」편)
* 지배자들은 전쟁에 나가 남의 재물을 많이 빼앗고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의로운 사람이라고 민중의 마음을 물들인다. (「비공」편)
* 전쟁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그 아들이 상을 받는 중국의 풍습은 아들을 잡아먹고 그 아비가 상을 받는 식인종과 무엇이 다른가? 인의를 저버린 것은 똑같은데 어찌 식인종만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노문(魯問)」편)
<기세춘 {평화 만들기}237호(2006. 6. 19.)>

Ⅲ. 묵자의 평화 공동체와 평화 경제

앞에서 {예기}의 ‘대동’과 {묵자}의 ‘안생생’이 닮은 점을 예시했다. {묵자}에서 말하는 천하무인의 안생생 평화 공동체와 {예기}의 대동사회가 유사하다는 말이다. 유사하므로 ‘묵자가 천하무인의 대동사회, (천하인민이 안락하고 평화로운 생을 영위하는) 안생생 평화 공동체를 꿈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평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묵자는 비공-겸애-교리의 상호관계를 말하며 ‘절용’․‘절장(節葬)’․‘비락(非樂)’을 강조한다. 절용․ 비락․절장하는 평화 공동체를 통해 평화 경제를 이룩하자고 강조한다.

‘절용’은 절약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 노동의 결과물인 재화를 호화로운 장례나 음악으로 낭비하거나 전쟁으로 파괴하지 않고 재화 본래의 목적대로 절도 있게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기세춘, 2006, 389) 묵자는 전쟁과 음악도 경제적인 면에서 관찰한다. 즉 전쟁을 칼과 창 등의 소비행위로, 음악을 악기의 소비행위로 파악하는 것이다.(기세춘, 1995, 287) 그는 재화의 본래 목적을 초과한 과시(過示)소비의 대표적인 사례로 전쟁을 든다.

묵자 당시의 전쟁은 생산수단인 농토와 농노를 더 많이 쟁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은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잉여생산을 소비하는 행위이다. 지배계급은 착취한 노동생산물을 과시적 사치와 낭비로 소비하며, 지배를 재창출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은 더 많은 토지의 약탈과 노예를 획득하기 위하여 굶주린 인민을 전쟁으로 내몰고, 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하여 더욱 인민을 착취한다. 봉건제의 농노관계나 자본제의 임노동 관계의 생산적 측면에서 착취의 ‘모습’은 찾을 수 있으나 착취의 ‘원인’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묵자는 그 ‘원인’을 소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생산물의 소비가 생산물의 본래 목적인 인민의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민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목적으로 소비되는 데에 착취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생산물의 본래의 목적을 벗어난 소비, 즉 과시소비가 착취를 낳는 원인인 것이다. 그 과시소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쟁이다.(기세춘, 1995, 320-321)

묵자가 보기에 전쟁이라는 과시소비를 중단하는 것이 평화 경제의 지름길이다. 전쟁중단(非攻)이 인민 상호간에 利를 준다(交利). 이게 바로 의(義)이며 인민을 두루 사랑하는 겸애이다. 이와 같은 비공-교리-겸애의 삼각관계를 떠받쳐 주는 평화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과소소비로서의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다. 전쟁이 인민의 노동력을 지나치게 소진(과시소비)하거나 착취하므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다.

묵자에게 있어서 노동착취의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이라는 ‘노동목적 이외의 소비행위’이었다. 전쟁과 지배계급의 사치만 없다면 노동착취가 생기지 않는다.({묵자} 「사과」편)

묵자는 전쟁비용을 인민의 생활을 위해 쓰면 생산은 더욱 증대하고, 적국을 지원해 주면 전쟁보다 더 이로울 것이며, 적국의 성곽이 무너졌으면 보수해 주고, 곡식과 옷감이 부족하면 나누어 주며, 소국이 침략을 당하면 서로 협동하여 구해 주라고 한다.({묵자} 「비공․하」편)

군비축소를 통해 절약된 전쟁비용(평화 배당금)을 민중의 생활 증진에 쓰면 생산력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평화 경제론을 묵자가 전개하고 있다.

Ⅳ. 몇 가지 문제 제기

지금까지 묵자의 평화 공동체에 관하여 설명했으나, 평화 경제 부문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부족함을 드러낸 것 같다. 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하며, 이러한 차원에서 몇 가지 문제․ 과제를 제시한다.

① 묵자의 평화 경제론을 남북한 사이에 적용하면 좋지 않을까? 남북한 사회가 각기 ‘비공-겸애-교리의 평화 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묵자의 평화 경제론을 실행하면 평화통일의 그날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남북한 각각의 ‘비공-겸애-교리 평화 공동체’를 합성한 ‘한반도의 안생생 대동사회’를 이루면 평화통일이 촉진되지 않을까? 그리고 남북한의 ‘비공-겸애-교리 평화 공동체’를 6․15 공동선언 제2항(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접합될 수 있다는 항목)에 적용하면 어떨까?

남북한이 묵자의 비공 정신에 따라 ⓐ (일본․코스타리카처럼) 평화헌법을 만들고 ⓑ (북유럽 국가들처럼) 전수(專守)방위정책을 구사하며 ⓒ (스위스처럼) 중립국가를 표방하는 가운데 ⓓ 한반도의 비핵화․비핵지대화-군축-평화협정 체결에 성공하여 ⓔ ‘비공-겸애-교리 평화 공동체’를 이루면 ⓕ 6․15 공동선언 제2항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② 묵자가 말하는 천하무인의 대동사회․안생생의 대동사회는 노자․장자의 원시 공동체, 예수의 평화 공동체․초기 기독교의 평화 공동체, 마르크스의 ‘유적존재(Gattungswesen)’․‘Assoziation’과 유사하므로 이와 관련된 연구가 필요하다.

* 노장(노자․장자)은 수고로운 노동도 없고 국가도 없는 태호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 시대의 원시 씨족사회의 무치(無治)를 소망했다. 이것은 {예기}에서 말하는 대동사회보다 더 원시적이다. 또한 묵자의 ‘안생생’ 대동사회는 우(禹)왕 시대에 기계를 쓰는 협업 공동체인 공산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정부와 기계를 거부하는 원시 공산사회를 지향한 노자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묵자와 노자는 다 같이 공산사회를 지향했으므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과욕(過慾)과 경쟁, 초과소비와 전쟁을 거부하고 과욕(寡慾)․협동과 절검․평화를 강조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대체로 이러한 공동체 사회를 원시 공산사회라고
말한다. 공동체 또는 공산사회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이며, 사적 소유가 없는 무소유의 사회이며, 공공성과 개인성이 조화된 순진무구한 사람들의 사회를 말한다. 노장은 이를 무치․무소유․동심(童心)으로 표현했고, 마르크스는 공산사회를 무소외․무소유․유적본질(類的本質, Gattungswesen)이 구현된 사회로 표현했으나 모두 같은 맥락이다.(기세춘, 2006, 413)

*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인들의 연합(Verein freier Menschen)’, 자본주의의 노동 방식인 통합노동(combined labour)이 아닌 연대노동(결합노동, associated labour)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die freie Assoziierung der Arbeiter)’, 즉 ‘Assoziation’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세계적 규모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의 실현에 의하여 국가는 사멸하고 인간의 자기소외가 극복되어 땅(지상)에 평화가 깃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평화 구상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에 의한 평화’이며 ‘Assoziation’이 이러한 평화의 담지자(Träger)이다.(김승국, 1996, 147-148)

* {묵자}는 하느님에 대하여 300여 차례나 말한다. 그중에서 「법의」․ 「천지」, ․「겸애」, ․「비공」 4편에서만 206번이나 하느님 말씀을 한다. 그런데 묵자가 말한 하느님은 약 500년 후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하느님과 너무도 같다. 묵자와 예수는 모두 기층민중 편에 서서 인간해방을 설교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그 사상적 기초는 하느님의 사랑이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다만 두 성자는 처한 상황에 따라 묵자는 현실투쟁을 중시했으며 예수는 우선 위로와 희망이 중요했던 것이다. 묵자에게는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 의(義)였으나 예수에게는 목숨보다 귀중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묵자에게는 투쟁이 중요했고 예수에게는 인내가 더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묵자와 예수는 모두 전쟁과 폭력을 반대했지만, 예수는 용서를, 묵자는 저항을 외친 것이다. 묵자와 예수의 하느님은 그 근본에서 닮았으며 그 뿌리는 채취경제의 원시 시대에 형성된 수렵 기마민족인 동이족의 천민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하느님은 모세의 야훼와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묵자의 하느님과 가깝다. {묵자}의 「천지」․「겸애」․「법의」․「비공」편 등을 읽으면 예수의 산상수훈과 제자들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비슷하다.(기세춘, 1994, 57․87․94)

      ③ 예수의 평화 공동체․초기 기독교의 평화 공동체에서 평화 경제의 틀을 내오기 어렵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Assoziation’에서 평화 경제의 틀을 도출해 내면, 묵자의 평화 경제론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④ ‘안생생의 대동사회’에 입각한 묵자의 평화 경제론이 공동체 경제학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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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1. 활자 매체

* 묵자 {墨子}
* 기세춘 {예수와 묵자} (서울, 일월서각, 1994)
* 기세춘 {천하에 남이란 없다(上)} (서울, 초당, 1995)
* 기세춘 {동이족의 목수 철학자} (서울, 화남, 2002)
* 기세춘 {동양고전 산책(1)} (서울, 바이북스, 2006)
* 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박사학위논문, 1996)
* 윤무학 「墨家의 평화 이념과 실천」, 제5회 한국철학자 연합대회 대회보 {현대의 윤리적 상황과 철학적 대응} (한국철학회, 1992)
* 이운구 {중국의 비판사상} (서울, 여강출판사, 1991)

2. 인터넷 매체

*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에 실린 기세춘 선생의 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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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09호에 실린 필자의 글「잘사는 평화 (9)」(2008.2.10)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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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논어(論語) 에서 민은 항상 치자(治者)와 구별되는 피치자(被治者)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논어}의 「미자(微子)」편에서는 군주의 아들이거나 귀족이 속세를 버리고 은둔한 것을 ‘일민(逸民)’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일인(逸人)’이라고 하지 않고 ‘일민’이라고 했는가? 이는 인 계급이 은둔하여 민 계급이 되었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등문공상(滕文公上)3」에서도 “어찌 인(仁)한 인(人)이 군주로 있으면서 민으로 하여금 항산이 없어 죄에 빠지게 한 후 잡아넣는 일을 하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인은 지배계급이고 민은 피지배계급임을 알 수 있다.<기세춘 {평화 만들기}122호(2004.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