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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종교적인 접근

핵무기와 神 (1)-원폭투하를 에워싼 미국사회의 입장

김승국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원폭(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정부의 입장, 원폭투하에 대한 미국 국민ㆍ교회의 태도를 기독교의 측면에서 기술한 구리바야시 테루오(栗林輝夫; 關西學院大學 교수)의 저서『原子爆彈とキリスト敎』(東京, 日本キリスト敎團出版局, 2008)의 핵심적인 내용을 아래와 의역하여 기술한다.



Ⅰ. 미국 사회의 원폭투하에 대한 입장



미국은 일본에 원폭을 투하할 필요가 있었을까? 원폭 없이도 종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미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원폭 투하를 승인하는 분위기이다.
  


  1. 어쩔 수 없었다



* 원폭을 일본의 도시에 떨어뜨리면, 전투와 관계 없는 시민ㆍ여성ㆍ아동ㆍ노인의 대다수가 살해된다. 미국 정부가 이를 인식하면서도 원폭 투하에 나섰다면 그것은 정의의 전쟁에 합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독교의 정전론(정의의 전쟁론; Just War)에 비추어보아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대한 원폭이 정당했다고 말하는 미국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중 한사람인 가톨릭의 윤리학자 맥엘리니(Shawn McElhinney)는 ‘전쟁의 희생을 가능한 한 줄인 점, 시민을 직접적인 공격목표로 삼지 않은 점에서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는 기독교의 정의의 전쟁 기준에 합치한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Shawn McElhinney「Just War, Pacifism and Catholic Tradition」(http://www.haloscan.com/comments/blostopher/8024170924152529281/>(33쪽)



  2. 전쟁을 早期에 종결짓고 미ㆍ일 쌍방의 사상자를 억제하고 인명을 구제하기 위해 원폭을 투하했다



* 미국은 전쟁을 早期에 종결짓고 미ㆍ일 쌍방의 사상자를 억제하기 위해 원폭을 투하했다고 변명하는 미국인들이 상당히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게 아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2쪽).

* 원폭 투하로 사상자를 대폭 줄였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 측의 인명희생도 줄였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는 정확한 선택이었다. 전시중의 미국 육군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원폭은 50만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내용의 글「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를 미국 잡지『Harper's』1947년 2월호에 투고했다(13쪽).
위의 글은, <미ㆍ일 쌍방에서 100만명의 전사자가 속출하는 것을 각오해야할 상황이었다. 일본이 좀더 일찍 항복했더라면 히로시마ㆍ나가사키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투하한 것이므로, 미국측에 잘못이 없다. 원폭사용은 올바랐다. 어쩔 수 없었다>는 내용의 투고이다(14쪽).

*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과 그 이후의 전투전체를 통하여 미국측에서 100만명의 사상자, 일본측에서 200만명의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원폭 사망자 21만 5천명을 빼면 원폭 투하로 45만명의 생명을 구하고, 130만명의 부상자를 줄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측도 33만명의 인명이 구원되었고 67만명의 부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 따라서 원폭은 미국뿐 아니라 일본도 엄청난 생명ㆍ재산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전론(정의의 전쟁론)의 조건인 ‘적군ㆍ아군 모두의 인적ㆍ물적 피해를 최소한으로 멈추게 하는 것’이 요청된다면, 원폭 투하는 이 조건에 충분히 합치되는 것이었다(34쪽).



  3.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 미국은 전쟁을 早期에 종결짓고 미ㆍ일 쌍방의 사상자를 억제하기 원폭을 투하했다고 변명해왔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그게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원폭투하는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사회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로 ‘투하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견해가 일찍이 나왔다(12쪽).



  4. 동양인에 대한 인종편견


일본인(동양인)에 대한 인종적인 편견이 원폭 투하의 요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12쪽). [원폭은 본래 유럽의 나치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개발되었는데, 엉뚱하게 일본인을 향해 투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필자 주].



  5. 인체실험ㆍ임상 실험도 생각함


* 히로시마ㆍ나가사키 시민이 인체실험으로 사용되었다(12쪽).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자마자 미군들이 현장에 투입되어 사진을 촬영하고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한 점 으로 보아, 인체실험의 의도가 투하 이전부터 있었지 않았느냐는 의혹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 주] 



  6. 미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 원폭을 투하하지 않아도 좋았는데 미국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투하했다는 해석도 있다(12쪽).



Ⅱ. 원자 유토피아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여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별로 죄의식이 없는 미국 사회(미국의 교회도 예외는 아닌 듯)의 원폭 불감증의 이면(裏面)에 ‘원자 유토피아(atomic utopia)’가 있는 듯하다.
 


  1. 원자쇼ㆍ 버섯 구름 케이크


* 히로시마 원폭 투하 2달 뒤인 1945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원폭 쇼에 10만명의 관중이 모였고, 뒤이은 순회 흥행이 미국 각지에서 이루어져 인기를 끌었다. 1946년에 비키니 섬에서  이루어진 핵실험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버섯 구름을 본뜬 케이크가 답례품으로 등장하는 등 미국사회가 원자 유토피아의 꿈에 젖었다. 원폭을 가능하게 한 ‘핵(核) 연구’가 평화적 이용에 전용된다면 틀림 없이 미증유의 번영을 미국에 가져올 것이다. 핵 에너지의 경이로운 힘이 밝혀지면서 미국인 모두가 그 가능성에 매료되었다(40쪽).



  2. 미국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


* 1945년 8월 26일의 갤럽 여론조사에 의하면, 당시의 미국 시민들이 원폭투하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원폭투하가 정당했다’에 85%가 찬성했다(63쪽).



Ⅲ. 교회의 입장


미국 사회가 원폭투하를 지지하는 분위기 속에서 미국교회는 어떠한 입장을 취했나? 미국의 교회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도덕적 책임에 대하여, 미국의 기독교 교회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미국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원폭투하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나?(8쪽).


원폭과 관련한 미국교회의 입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4가지 경향으로 분화되었다; ① 평화주의(Pacifism)의 입장. 1949년에 평화주의를 내건 퀘이커가 미국 친우봉사단(AFSC;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를 앞세워 핵무기의 폐기의 공개적으로 제언했다(46쪽). ② 원폭 사용 자제론 ③ 조건부 사용론 ④ 원폭 허용ㆍ용인론


* 당초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를 비난했던 기독교의 주류 교회도 서서히 원폭 지지ㆍ허용 여론에 보조를 맞췄다. 조건부로 용인한다거나 핵폭탄의 재사용이 기독교에 반하지 않는다는 용인론 쪽으로 기울었다.


가톨릭의 예수회 신학자인 에드먼드 A 월슈는 소련이 공격해올 ‘확실한 근거’가 있다면 미국이 핵폭탄을 선제공격용으로 써도 무방하며 공산주의자의 ‘최초의 일격을 앉아서 기다리는 자살행위는 이성(理性)ㆍ신학ㆍ도덕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옹호했다<Gordon C. Zahn「The A-Bomb: Moral or Not?」『Commonweal』(September 29, 1950) p.607>


‘대량파괴 무기는 기독교에 反하며 도덕적으로 절대로 인정될 수 없다’는 당초의 입장에서 핵무기의 사용을 용인하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교회의 입장 변화는, 1950년에 공표된 미국 기독교 연합 협의회의 제2차 답신(答申)인「기독교적 양심과 대량파괴무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The Christian Conscience and Weapons of Mass Destruction: Report of a Commission Appointed by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Christina Century』(December 13, 1950) pp.1489ff.>. 이 답신(答申)은 1946~1950년에 일어난 미국의 정치변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핵폭탄의 재투하(再投下)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47쪽).


미국의 기독교가 정치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지금까지 핵무기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만, 원폭투하에 대하여 비판하는 경향과 찬성하는 경향이 혼재하는 상황이다.



  1. 비판적인 경향; 칼폰 위원회


* 죠지 마샬 원수ㆍ윌리엄 리하이 합동참모총장은 원폭투하가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원폭투하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의 진보적인 교회 사람들은 강한 의분을 표명했다. 미국의 기독교 잡지『Christian Century』는 1945년 8월 15일자의 사설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보다 창조주의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다음호에도 ‘원폭투하의 타겟으로 전쟁터가 아닌 도시를 선택했다. 미국이 정의와 인도(人道)를 설파한 자격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미국 기독교계를 대표한 미국 기독교연합협의회의 공식적인 견해가 1946년 3월에 나왔다. 로버트 칼폰 교수(예일대) 등 미국을 대표하는 신학자ㆍ철학자ㆍ윤리학자ㆍ종교관계자 22명이 모인 ‘칼폰 위원회’가 미국 기독교 연합협의회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종합했다; 우리들은 죄책(罪責)고백부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폭의 사려 없는 사용에 대하여 김은 참회를 표명한다. 경고 없는 원폭투하는 도덕적으로 변명할 여지가 없다<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Commission on the Relation of the Church to the War in the Light of the Christian Faith「Atomic Warfare and the Christian Faith」(New York, 1946) 11쪽>(25ㆍ26쪽)


 ‘칼폰 위원회’는 원폭 투하가 잘못이므로 미국은 일본에 사죄해야한다고 권고했으나, 원폭의 재사용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3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① 기독교의 평화주의에 입각한 첫 번째 그룹은 원폭의 탄생으로 ‘정의의 전쟁’이 없었졌으므로 기독교 교회는 앞으로 일체의 전쟁을 지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② 이러한 절대 평화주의와 선을 그은 두 번째 그룹은, 정의의 전쟁이 장래에 있을지라도 원폭 만큼은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미국 정부가 명언(明言)하도록 압력을 넣어야한다고 호소했다. ③ 세 번째 그룹은, 정의의 전쟁론을 유지하는 가운데 조건부로 원폭 재사용의 길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원폭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미리 선언해버리면 공산주의자가 안심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여 만일 침략이 이루어지면 미국은 핵폭탄으로 보복하겠다고 상대방에게 알려야한다. 핵폭탄의 사용을 암시함으로써 전쟁 자체를 억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29쪽).


* 칼폰 위원회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1946년의 칼폰 답신(答申)에서 핵무기의 재사용을 인정하는 위원은 소수이었다. 그런데 4년뒤 다시 열린 위원회에서는 다수의 위원이 핵무기 찬성쪽으로 돌아섰고 반대는 완전히 소수파이었다. 최후까지 반대한 사람은 전체 위원 19명 가운데 단 두사람(칼폰과 유일한 여성위원인 죠지아 하크네스)뿐이었다(49쪽).



  2.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변신


* 핵무기 반대론자이었던 라인홀드 니버는, 소련에 대한 강경론을 주창하는 반공 투사로 변신했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색채가 농후한 제2차 답신(答申)은 당시의 냉전구조를 추인하고 미국의 대소(對蘇) 선제공격을 배제하지 않는 정치논리를 선택했다. 제2차 답신은 기독교의 평화전통을 언급하지만 ‘적을 사랑하라’ ‘검(劍)을 가진 자는 검(劍)에 의해 멸망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중시하지 않았다(48쪽).



  3. 논쟁


*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의 반핵 청원서에 대하여 코난트(James B. Conant; 하바드대 총장 역임)가 “원자폭탄은 통상의 폭탄과 비교하여 특별히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 없다”며 맹렬하게 반발했다(22쪽).
가톨릭 대학 교수인 프란시스 콘넬은 “원자폭탄과 TNT 폭탄ㆍ대포, 수류탄, 소총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강조했다(85쪽).

* 이에 대하여 니버(변신하기 이전의 니버)는 “미국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죄의 고백’을 일본인에게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4. 원폭 투하 찬미


* 도니 목사ㆍ자벨카 신부<데니안 섬(1945년 8월초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한 전폭기가 주둔했던 미군기지)에서 당시에 근무했던 종군 목사ㆍ신부>는 원폭 투하를 뉘우치면서 ‘미국인들은 2차대전 이후에 삶의 방향을 바꿔야한다’고 주창했는데, 미국의 대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태도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비판한 포스딕 목사를 ‘배반자’ ‘일본 내통자’로 매도한 미국 복음파 연합의 하롤드 J 오겐가 목사, 장로파의 원리주의자인 칼 매킨타이어 목사는, 원폭투하를 일본인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며 찬미했다. 최근에 이라크 전쟁을 열렬하게 지지한 종교우파의 전도사인 제리 폴웰이나 팟 모버트슨은 레이건 정권 때의 핵전쟁 종말예언과 연결시키면서 핵무기 금지운동이 ‘反그리스도’를 이롭게 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75쪽).


* 48쪽; 핵무기 반대론자이었던 라인홀드 니버도 대소 강경론을 주창하는 반공 투사로 변모했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색채가 농후한 제2차 答申은 당시의 냉전구조를 추인하고 미국의 대소 선제공격을 배제하지 않는 정치논리를 선택했다. 제2차 답신은 기독교의 평화전통을언급하지만 ‘적을 사랑하라’ ‘劍을 가진 자는 劍에 의해 멸망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중시하지 않았다.



Ⅳ. 정의의 전쟁론


미국 기독교계 안에서 핵무기 사용-핵전쟁의 정당성을 에워싼 논쟁의 핵심은 ‘정전론(正戰論; 정의의 전쟁; Just War)론’에 있다.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투하된 핵무기가 기독교의 정전론(正戰論)에 비추어 올바른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 <‘전투는 적절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전투원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정전론의 원칙이 있는데,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대한 핵무기 투하는 이러한 원칙을 어긴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 원폭을 일본의 도시에 떨어뜨리면, 전투와 관계 없는 시민ㆍ여성ㆍ아동ㆍ노인의 대다수가 살해된다. 이를 인식하면서도 굳이 원폭 투하에 나섰다면 그것은 정의의 전쟁에 합치하지 않는다. 정전론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정전론에 비추어보아도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대한 원폭이 정당했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다. 그 중 한사람인 가톨릭의 윤리학자 맥엘리니(Shawn McElhinney)는 ‘전쟁의 희생을 가능한 한 줄인 점, 시민을 직접적인 공격목표로 삼지 않은 점에서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는 기독교의 정의의 전쟁 기준에 합치한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Shawn McElhinney「Just War, Pacifism and Catholic Tradition」(http://www.haloscan.com/comments/blostopher/8024170924152529281/>.

육군장관 스미슨이 ‘원폭은 50만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글을 잡지에 기고했다. 맥엘리니(McElhinney)는 ‘미군이 일본 본토에서 결전(決戰)을 벌였을 경우 적어도 20~100만명의 미군 사상자가 나왔다’고 시산(試算)했다(33쪽).


*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과 그 이후의 전투전체를 통하여 미국은 최대 사상자 100만명, 일본측도 200만명의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원폭 사망자 21만 5천명을 빼면 원폭 투하로 45만명의 생명을 구하고, 130만명의 부상자를 줄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측도 33만명의 인명이 구원되었고 67만명의 부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 따라서 원폭은 미국뿐 아니라 일본도 엄청난 생명ㆍ재산을 지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의의 전쟁 조건으로서 ‘적군ㆍ아군 모두 인적ㆍ물적 피해를 최소한으로 멈추게 하는 것’이 요청된다면, 원폭 투하는 이 조건에 충분히 합치된다는 것이다(34쪽).


* 그렇다면 가톨릭의 정전론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ㆍ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논리에 비추어보면 어떠할까?


가톨릭 신학자인 그레그 모게레츠는 ‘제2차 대전중 교황 비오 12세가 도시폭격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다음날『뉴욕 타임즈』의 제1면은 ‘바티칸이 원폭에 유감의 뜻을 표명’이라고 보도했으나 교황이 (원폭) 투하 자체를 비난했다고 전하지 않았다. 또 1946년 바티칸의 『오자바토레 로만』紙도 ‘원폭희생자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기술하면서도 (원폭)투하가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악(惡)을 격파하는 연합국측의 정당한 행위’이었다고 보도했다. 만약 원폭을 포함한 도시 폭격이 가톨릭 신앙에 비추어 잘못이었다면 비오 12세가 주저하지 않고 잘못이라고 말했을 것이고 그런 말이 교황의 사목적 책무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의 가톨릭 교도는 트루만 대통령의 결정이 정당했음을 믿었으며 지금도 믿고 있다. 모게레츠도 기독교의 정전론에 비추어 원폭투하는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결론 내렸다(37쪽).


* 종군 목사의 판단; 도니 목사는 2차대전의 종전 이후에 원폭공격을 신의 이름으로 기원해준 것(원폭을 탑재한 전폭기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가 원폭을 투하하기 위해 출격한 1945년 8월 6일 이른 아침에 교회에 기도하러 갔을 때, 도니 목사가 신의 이름으로 원폭투하의 성공을 기원했다; 필자 주)을 크게 후회했다. 자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전론에 따라 ‘무고한 시민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익혔는데 에놀라 게이가 출격할 때 그런 가르침(아우구스티누스의 정전론)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술회했다(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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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