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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종교적인 접근

태평천국 운동에서 ‘平和鄕’ 찾기

김승국


들어가는 말

이 글은,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이 주도한 태평천국 운동의 평화지향적인 요소를 발견하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는 에세이이며 본격적인 학술논문이 아니다. 엄격한 학술논문이 아니므로「태평천국 운동에서 ‘평화향(平和鄕)’ 찾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필자는 ‘태평천국(위대한 평화의 천국)’ 운동이 추구하려고 했던 평화로운 이상향을 ‘평화향’이라고 이름 지었다. 태평천국 운동을 평화향 찾기 운동으로 보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필자는 다른 전문가들과 달리 태평천국 운동의 경과ㆍ성패ㆍ투쟁방식ㆍ투쟁양상ㆍ당대의 현실정치와의 관계ㆍ태평천국 내부의 분열 등에는 관심이 없다).

태평천국운동 이외에도 평화향을 꿈꾸는 유토피아 운동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평화롭게 잘 살 수(well-living) 있을 것이라고 믿거나 상상하는 목가적인 이상(理想) 사회ㆍ이상적(理想的) 도시ㆍ이상적 마을ㆍ이상적 공동체ㆍ이상 국가를 ‘평화향’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플라톤(Platon)의『Politeia』에 나오는 이상적인 Polis,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유토피아』에서 그리는 이상 국가, 『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공동체도 평화향에 포함된다.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상에서 실현되는 곳이 있다면 그 곳도 평화향이다. 단,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끊이지 않는 근대 (자본주의)국가는 평화향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근대국가 안에서도 도시ㆍ마을ㆍ공동체별로 평화향을 만들 수 있다.

 ‘평화향’이라는 조어를 통해 태평천국 운동에 접근할 때 학술성의 부족을 지적받을 수 있다. 평화의 관점에서 태평천국 운동에 접근하려는 필자의 노력에 학술적인 부족함이 많겠지만, 21세기의 한국사회에서도 ‘평화향 찾기 운동(‘용산 참사’와 같은 비극이 재발되지 않는 도시의 평화 만들기 운동, 중소도시ㆍ농촌에서 풀뿌리 평화마을 만들기 운동 등)’이 요청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글을 너그럽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그러면 ‘평화향 찾기 운동’으로서의 태평천국 운동에 대한 도입부분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850년 7월부터 1864년 7월까지 지속된 태평천국 운동은, ‘봉건지주 관료의 착취와 서방 열강의 침입’에 저항한 ‘반(反)봉건-반(反)침략’의 농민전쟁으로 발전하면서 ‘신정적(神政的)인 천년왕국’을 지향했다. 19세기 말 조선의 동학 역시 반봉건-반침략(반외세)의 농민전쟁으로 발전했으나, 신정적인 천년왕국을 지향하지 않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신정적 천년왕국의 제사장인 홍수전은 하층농민을 중심으로 조직된 태평군(太平軍)을 이끌고 중국남부 지역의 상당부분을 점령한 끝에 난징(南京)을 천년왕국의 수도[天京]로 삼은 뒤, 난징을 ‘소천당(小天堂; 지상의 작은 천당)’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소천당은 홍수전 방식의 평화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지상의 작은 천당(소천당)은 홍수전이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이상향(태평 유토피아에 의한 평화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므로, 평화의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 소천당을 지향하는 태평천국 운동이 ‘太平(위대한 평화) 천국(하나님 나라)’ ‘태평한(평화로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평화의 시각에서 조명할 수 있겠다. 현실정치(Real Politics)에 입각한 세속적인 평화가 아닌 신정적인 태평천국이 약속하는 ‘유토피아적인 평화’의 측면에서 태평천국 운동에 접근할 수 있겠다. 특히 ‘上帝敎(홍수전이 중국 전통의 上帝 개념에 따라 만든 중국식 기독교)’의 교리로 발표된「천조전묘제도(天調田畝制度)」를 실시하려고 애쓴 태평천국 운동 초반 단계의 ‘신정적이며 유토피아적인 평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뒤에서「천조전묘제도(天調田畝制度)」의 본문을 해독하면서 태평천국이라는 이상 국가에 진입할 것이다).

그리고 태평군이 점령한 지역에 소천당과 같은 평화의 이상향(平和鄕)을 세우는 데는 실패했지만, 태평군이 중국농민(청나라의 봉건제도로부터 초과착취를 받은 농민들)에게 남긴 ‘위대한 평화(太平)군대’의 이미지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다.

태평천국 운동의 영향을 받은 쑤저우(蘇州) 지방의 농민들이 즐겨 부른 노래「不見哥哥回家中(형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네)」와「肦望太平軍(태평군을 손꼽아 기다리네)」는, 농민들 마음속에 ‘太平한(대단히 평화로운) 진짜 천국’이 존재했음을 알게 해준다;

<不見哥哥回家中>
“완두콩은 붉게 꽃피었지만,
한번 떠난 태평군 형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네.
황혼이 지고 새날이 밝는 것을,
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것을 바라보네.
오직 기러기 남으로 날아가고 있을 뿐,
형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네.

완두콩이 붉게 꽃피었지만,
한번 떠난 태평군 형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네.
형을 위해 새 옷을 짓고,
형의 위해 새 집을 지어 기다리네.
오직 기러기 남으로 날아가고 있을 뿐,
형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네.

완두콩이 붉게 꽃피었지만,
한번 떠난 태평군 형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네.
늙은 어머니는 울음으로 머리가 쉬고,
젊은 형수는 통곡으로 두 눈이 붉어졌네.
오직 기러기 남으로 날아가고 있을 뿐,
형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네.

완두콩이 붉게 꽃피니,
좋은 콩삯을 고이 간직하네.
내년에 완두를 심으면,
꽃은 더욱 붉게 피겠지.
태평군 형들, 이 다섯 글자는
영원히 사람들 마음속에 쓰여 있으리.”

<肦望太平軍>
“아침에는 손꼽아 기다리고 저녁에도 손꼽아 기다리네.
태평군이 오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해지니
나도 두렵지 않고 너도 두렵지 않으리.
태평군이 오면 부자는 두려워하리.

이래서 잊고 저래서 잊지만,
태평군이 베푼 은정은 영원히 잊을 수 없네.
장가(張家) 놈은 크다, 이가(李家) 놈은 작지만,
태평군의 좋은 점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왜 태평군이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는가? 농민들의 답은 매우 명쾌하다. 즉 [태평군이 주도하는] 농민정권이 자신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청(淸)나라의 봉건지주 관료들이 강요한 소작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쑤저우 지방의 농민문화에 묘사된 태평천국은 소작료 없는 세상이었고, 따라서 농민정권이 통치하는 기간 중에 농민은 소작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농민문화에 그려진 그러한 모습은 역사적 사실과의 괴리가 있는, 다시 말해, 실제정황과 관계없는 농민들의 주관적 ‘믿음’에 불과하지만, 태평천국 통치의 과거가 농민들에게는 오로지 ‘소작료 없는 세상’으로 기억됐던 것이다.(양필승, 1992, 151-154)

농민들 마음속의 태평군 이미지는, 중국의 전통적인 농민전쟁 군대가 민중들에게 심어준 ‘太平(위대한 평화) 유토피아’와 관련이 있다. 태평천국의 유토피아를 내세운 홍수전이 천왕(天王)을 칭(稱)하며 농민전쟁을 전개한 것과 같은 ‘太平 유토피아에 따른 농민전쟁’은 중국 역사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주로 왕조의 말기에 처절한 고난을 겪는 민중들 사이에서 종말사상이 팽배해질 때,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지식인(홍수전 등)ㆍ무식한 농민(태평천국 운동의 제2인자인 楊秀淸,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경우 朱德)ㆍ노예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냐?’며 왕권에 도전하는 사례가 중국 역사상 무수하게 많다. 왕권에 도전할 때 홍수전처럼 신정적인 태평 유토피아를 유포하는 가운데, 혁명지향적인 종교집단(白蓮敎 등; 태평천국운동의 경우 태평군)을 중심으로 농민전쟁을 일으킨다.

그런데 태평천국운동과 비슷한 농민전쟁을 전개한 동학교도들이 접(接)과 포(包)라는 조직체를 형성하여 정치투쟁에 나서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을 지향하는 투쟁을 전개했으나, 동학농민 전쟁의 지도자들(전봉준 등)이 홍수전처럼 제왕(天王)을 稱하는 제왕 환상을 갖지 않고 오히려 제왕(성군)을 대망하며 ‘일군 만민(一君萬民)의 환상 즉 ‘일군’과 ‘만민’이 사이좋게 사는 왕국과 같은 목가적인 환상을 가진 것(홍수전처럼 제왕이 되려는 제왕 환상이 아니라 제왕에 대한 환상을 가짐)’이 다른 점이다.

Ⅰ. ‘太平 유토피아’에 따른 농민전쟁과 ‘제왕(帝王) 환상’의 역사적 형성


  1. ‘太平 유토피아’의 사상적 배경


    1) 도교

후한 말 황건란(黃巾亂)이나 오두미도(五斗米道)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준 초기 도교의 경전『태평경(太平經)』은 위대한 평화(太平)의 도래를 주장하는 종교적 예언을 담은 경전이다. 이 경전이 ‘태평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지 않았으나 시대의 변화를 불평(不平; 전혀 평화가 없는 세상)ㆍ중평(中平; 어느 정도 평화로운 세상)ㆍ태평(太平; 대단히 평화로운 세상)의 3단계로 나누고 사람은 모두 하늘에서 태어나 귀천이 없다고 선언했다.  

    2) 유교

유교의 경전인『춘추(春秋)』「공양전(公羊傳)의 삼세설(三世說)에 기원을 갖는 태평 유토피아(태평시대의 이상향을 구가하는 관념)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원래『춘추(春秋)』에는 유가학파의 도덕적 평가와 관련된 역사사실의 서술 방법, 이른바 춘추필법(筆法)이 있다는데, 공양 삼세설은『춘추』가 기록한 242년의 기간을 공자의 시대를 기준으로 3개 시기로 구분해 각 시대의 서술 방법을 달리한 것이었다. 이 필법이 기원후 2세기 후한(後漢) 말기의 하휴(何休)에 이르러 삼세 진화설로 전개되었는데, 그의 3개 시기는 어지러운 시대인 거란세(據亂世)에서 평화로 상승하는 시기인 승평세(升平世)를 거쳐 대평화의 이상시대인 태평세(太平世)로 발전한다는 것이다...태평세는 이적(夷狄)이 중국적 질서에 편입되어 천하의 원근ㆍ대소가 하나 된 시대로 서술된다.”(조병한, 2007, 32-33)
       

    3) 불교; 미륵신앙

민중불교의 말법(末法) 사상과 미래불로서 미륵신앙도 난세의 민중을 동원한 유토피아의 기능을 했다.

홍수전이 이끈 태평천국 운동에, 위와 같은 유(儒;유학)ㆍ불(佛;불교)ㆍ선(仙;도교)의 ‘太平 유토피아’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遇)가 유ㆍ불ㆍ선을 통합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민중들에게 전파한 것과 비슷하다. 다만 동학에 없는 묵자(墨子)의 요소가 태평천국 운동에 내포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의 인민들이 고대부터 줄곧 태평(태평한 세상)을 추구한 ‘중국의 유토피아’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조병한, 2007, 30-31)
 
첫째, 유교 경전인『예기(禮記)』「예운편(禮運篇)」에 나오는 대동(大同) 이념으로서 성인군주 통치하 관료국가의 민본(民本)주의적 왕도(王道)정치ㆍ농업사회주의적 공동체 유토피아. 둘째, 도연명(陶淵明)의『도화원기(挑花源記)』기록으로 대표되는 도가(道家), 즉 노장(老莊)사상의 계보에 속한 재야 은둔형(隱逸은일) 지식인의 현실 비판적 사상으로서 관료적 세속권력에 저항하는 유토피아. 셋째, 한 대(漢代) 원시도교(道敎) 이래 근대의 태평천국에 걸치는 민중종교의 영향 아래 미래의 집단적 민중구원을 지향하는 구세종교의 유토피아를 들 수 있다. 또한 국가 교학으로서 유교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하에서 유교ㆍ불교ㆍ도교 3교의 융합이 송대(宋代), 특히 명대(明代) 이래 진행되는 가운데 합법화된 체제종교로서 불교ㆍ도교 이외에 3교가 혼합된 민중교단으로서 비밀 지하교단, 즉 종교적 비밀결사들의 활동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왕조 말기 대규모 반체제 민중반란의 이념적, 조직적 주체 또는 매개가 되었다. 한 대 말기의 황건란(黃巾亂), 원대(元代) 말기 백련교란(白蓮敎亂), 그리고 서구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청대(淸代) 말기 태평천국 등이 대표적인 왕조 말 민중봉기로 집체적 구세종교의 유토피아적 요소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다.(조병한, 2007, 30-310)

이와 같은 민중반란(농민전쟁)을 꾀한 구세종교들은 일반적으로 천년왕국(millenium)을 주창하였으며, 그 교단의 지도자는 대체로 제왕을 칭하는 ‘제왕 환상’을 가졌다. 구세종교의 지도자들은 ① ‘민중 구제’ 기치에 따라 ② 천년왕국을 위한 농민전쟁을 전개하면서 ③ 적(홍수전의 경우 청나라)을 타도하여 ④ 제왕이 되겠다는 환상(자신이 제왕이라는 환상)을 갖고 ⑤ 자신을 제왕(홍수전의 경우 天王)으로 섬기라고 ⑥ 세상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이와 같은 천년왕국의 제왕 환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본다.



  2. 천년왕국과 ‘제왕’ 환상

천년왕국의 영어표기인 milleniumㆍmillenarianismㆍchilasm은 천년왕국론, 천복년(千福年), 천년왕(千年王) 등으로 번역되어 진다. ‘milleniumㆍmillenarianismㆍchilasm’ 속에 제왕(천년왕)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홍수전과 같은 구세종교의 지도자가 천년왕국을 꿈꾼다는 것은 곧 제왕(천년왕)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1) 중국의 천년왕국

‘천년왕국’은 본래 기독교에서 나왔다.『요한 계시록』20:4~6을 해석하면서 나온 것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기독교적 종말론 특히『요한 계시록』의 천년왕국(Christian millenarianism)과 유사한 사상을 중국의 태평천국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의 사상적 핵심을 억압받는 자의 원한(resentment)을 포함하는 혁명의 신의론(神義論)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천년왕국 운동은 정치권력이 있는 곳, 억압받는 자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일어났으며 또 일어날 것이다.(미이시 젠키치, 1993, 12)

미이시 젠키치의 저작『중국의 천년왕국』에서 기술하는 바와 같이 중국 역사상 나타난 천년왕국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① 서기 184년에 발생한 황건란(黃巾亂)이 추구한 도교적 천년왕국 ② 515년에 대승(大乘)의 난이 추구한 불교적 천년왕국 ③ 청나라 말기에 왕도(王韜)ㆍ진치(陳熾)ㆍ하계(何啓)ㆍ호례원(胡禮垣)이 추구한 유교적 천년왕국 ④ 청나라 말기에 의화단이 유교의 바탕 위에서 추구한 ‘유(유교)ㆍ불(불교)ㆍ도교적 천년왕국’ ⑤ 청나라 말기에 기독교의 바탕 위에서 ‘유ㆍ불ㆍ선(도교) 통합’의 기독교적 천년왕국.

이들 중국의 천년왕국 속에 태평(평화)의 유토피아가 내재해 있었으며 태평의 유토피아를 지상에서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농민전쟁을 전개했다. 역사의 종말에서 선악의 결전이 있을 때 드러나는 천년왕국 군대의 놀란 만한 폭력이 태평군(太平軍)에서도 발휘되어 승승장구 북경 근처까지 진입한 것이다.

태평군의 수장이자 태평천국의 天王인 홍수전은 요한 계시록에 따라 세계의 타락→아마겟돈→최후의 심판→새로운 예루살렘(New Jerusalem; 太平聖地)이라는 종말론ㆍ천년왕국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냈다. ‘태평천국’ 천년왕국 운동의 새로운 예루살렘은 난징(南京)이라는 소천당(小天堂; 지상의 작은 천당)이었으며, 난징의 궁중에 칩거한 홍수전은 제사장 역할을 했다. 홍수전이라는 제사장의 제왕 환상이 난징의 소천당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홍수전과 같이 종교적인 마력을 가진 지도자가 농민전쟁(반란)을 주도하고, 제왕을 稱(칭)하며 천년왕국을 지향한 역사적 흐름을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2) 제왕 환상의 역사적 형성(小林一美, 2001, 109-122 요약)

전국시대부터 무명의 백성이 공연히 王을 자칭하면서 정권을 수립했다. 무명(無名)의 서민이었던 진승(陳勝)은 진시황의 아들에게 도전하여 왕(楚王)이 되었는데, 그는 “어찌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종자가 따로 있느냐?”며 누구나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 후 한 대(漢代)에 상당수의 백성들이 왕후장상의 이름을 내걸고 漢 왕조에 반역을 감행하면서 ‘王’을 자칭했다. 이윽고 후한(後漢) 시대에 무명의 인사들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皇帝)’를 자칭했다. 이들은 대개 ‘황건(黃巾’ ‘적미(赤眉)’ ‘요적(妖賊; 종교적 마력을 갖고 반역을 감행하는 賊)’의 무리로서 종교적 권위와 조직을 가진 자들이었으며, 농민전쟁을 주도했다. 

‘요적(妖賊)’이 ‘음양황제(陰陽皇帝), 황제(黃帝), 황제자(黃帝子), 흑제(黑帝), 진인(眞人)’ 등을 稱한 것은, 전국시대의 노장사상이나 전국후기 음양가(陰陽家)의 역사철학ㆍ왕조 교체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음양가의 주요 인물인 추연(鄒衍) 등은 음양 오행설과 천인합일, 천인 감응설을 결부시켜 우주 생성론ㆍ왕조 교체론을 만들어냈다. 한 대(漢代)의 민중봉기 때 ‘태초황제(太初皇帝), 태상황(太上皇), 무상장군(無上將軍)’을 稱한 사람들도 음양가의 우주 생성론과 관계가 있다. 후한(後漢)말의 태평도(太平道)의 교주인 장각(張角)은 음양가적인 왕조 교체론에 입각하여 태평도의 천하가 도래했음을 논증했다[이러한 논증의 신화가 청 나라 말기까지 내려온 끝에, 홍수전이라는 妖賊(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닌 반란자)이 天王을 稱하며 ‘태평의 유토피아에 의한 태평천국’을 선언한 듯하다].

어쨌든 妖賊마저 황제를 선언하는 꼴이 되어 漢 왕조의 멸망~3국 시대에 걸쳐 수많은 황제가 출현했다. 이른바 군웅할거 시대가 펼쳐졌으며 황제를 칭했던 사람들 중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이 3국 시대를 정립했다(조조曹操는 황제가 아닌 王을 자칭했다). 그 뒤 400년이 흐른 隋나라 말기~唐나라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황제(新皇帝)를 자칭하게 되었는데, 新皇帝 중에서 왕후(王侯)귀족 출신자는 단 한사람에 불과했다. 新皇帝의 상당수가 농민ㆍ빈농(貧農)ㆍ빈민 출신이었다.

漢 왕조 멸망 이후 중국의 왕조교체 관련 예언, 천하 변혁의 예언, 역성혁명의 사상 등이 완성되었으며 아주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불교ㆍ마니敎ㆍ백련교(白蓮敎)ㆍ배상제교(拜上帝敎) 등의 영향을 받으며 혁명의 논거ㆍ논리를 더욱 명확히 하는 가운데 2천년에 걸친 중국의 혁명사상이 정립된다[홍수전의 上帝敎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전통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홍수전이 무명 인사이었을 시절에 이미 上帝敎와 비슷한 이름인 拜上帝敎가 활약했으므로, 태평천국 운동의 지도자들이 拜上帝敎에서 암시를 받아 上帝敎라고 이름 지었을지 모른다<홍수전이 맨 처음 만든 모임이 ‘拜上帝會(하느님을 숭배하는 모임)’이다>. 上帝敎가 기독교의 옷을 입었지만 중국의 천년왕국적인 혁명사상ㆍ농민혁명의 전통(대동사상+민중구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혁명사상의 다양화는 송대(宋代) 이후 더욱 현저해지고, 명나라ㆍ청나라 시대에는 한층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만주민족의 정복왕조이었던 청나라 시대에는 ‘反淸復明(청나라에 반대하고 명나라를 복귀시킨다; 홍수전도 反淸復明의 깃발을 내걸고 청나라 군대와 싸웠다)’을 슬로건으로 내건 비밀결사인 천지회(天地會)ㆍ가로회(哥老會) 등이 크게 발전했다. 이들 비밀결사는 유민(遊民)들을 조직하면서 급속하게 발전했다.

비밀결사에 의한 ‘妖賊의 토양’이 비옥해지는 가운데, 홍수전이 세운 기독교 천년왕국이 태평천국이다. 태평천국은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의 슬로건, 종말 시대 구제론[민중 구원론] 등을 특징으로 내세웠으나, 중국 민중운동[농민전쟁]의 전통인 ‘황권(皇權)주의(지도자ㆍ간부가 매우 강하게 권력ㆍ권위를 지향하는 경향)를 강렬하게 계승했다. 天王인 홍수전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上帝敎의 제사장 역할을 하고, 그 아래의 간부가 동왕(東王), 서왕(西王), 남왕(南王), 북왕(北王), 익왕(翼王), 충왕(忠王), 영왕(英王)에 봉(封)해지는 신정적 천년왕국이 ‘태평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Ⅱ. 제사장 홍수전의 환몽

중국 민중운동ㆍ농민전쟁의 전통인 황권(皇權)주의에 따라, 제사장의 성격이 강한 帝王을 자임한 홍수전의 제왕 환상은 그의 환몽(幻夢)에서 나타났다.

홍수전의 환몽을 신비화한 추종그룹은, 홍수전을 神의 아들로 옹립하면서 (정치하는 임금 이상의 존재인) 제사장 황제로 승격시켰다. 태평천국이라는 천년왕국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신의 아들이 된 것이다. 홍수전의 추종그룹이 신비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수전의 환몽’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안길환, 1997, 238-240)

세 번째 과거에 낙방하여 좌절감 속에서 헤매던 홍수전은 그만 중병에 걸렸는데 무려 40일 동안이나 계속 환몽을 꾸면서 잠을 잤다. 그 속에서 그는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영접하러 나왔고 그를 가마에 태워,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장소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강물로 몸을 닦고 배를 짼 다음 더러워진 내장을 바꿔넣었다.
이윽고 홍수전은 아름답게 꾸며 놓은 방으로 안내되었고, 금발에 검은 옷을 걸친 점잖은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그에게 한 자루의 검을 건네주면서 악마를 전멸시키라고 명했고, 다시 왕자(王者)의 표시인 인수(印綏)를 주었다. 노인은 또 그에게 하계를 내려다보라고 하였다. 그곳에는 사악과 죄업이 팽배한 세상이 있었다.
이 노인 말고 또 한 사람의 중년 남자가 나타나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 사람을 장형(長兄)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악령의 무리를 쫓아 여러 곳에서 그들과 싸웠고 수많은 악령을 참살했다. 이런 환상을 보고 있을 때, 현실 속의 홍수전은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챵야오(鏟妖)! 챵야오! 챵야(鏟呀)! 챵야!(악마를 쳐 죽여라! 악마를 목 베라!)”라고 소리치며 방안을 뛰어다녔다.
어느 때는 이 점잖은 노인이 공구[공자]를 붙잡아 놓고 ‘네가 진리를 감추었기 때문에 악마가 설치게 되었다’며 질책하였다. 공구는 몸 둘 바를 몰라하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그 전처럼 서당 선생 노릇을 하고 있던 홍수전은 우연히 7년 전에 선교사로부터 받은『勸世良言(세상사람에게 선을 권면하는 좋은 말)』을 읽고 그 내용이 모두 그 환상과 일치하고 있음에 경탄했다.
그는 비로소 그 점잖은 노인이 천부(天父)이신 여호와 신이며 중년의 남자는 곧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악마란 우상을 가리키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제자매임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후계자로서 이 세상에서 악마를 일소하고 사람들을 죄의 심연 속에서 구원해 내는 사명이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자각했다.
그는 먼저 서당에 안치되어 있는 공자상을 뜯어냈고 ‘대성지성선사공자(大成至聖先師孔子)’란 위패를 때려 부숨으로써 우상파괴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홍수전은 병을 앓는 가운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최진규, 1994, 167)
“손에 건곤의 살벌(殺伐)하는 권한을 잡고
사(邪)를 베고 정(正)을 두어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리.
눈은 서북의 강산 밖에 이르고
목소리는 동남의 해와 달까지 진동하네.
발톱을 펴려 하니 운로(雲路)가 좁고,
몸을 솟구침에 은하수 비낌을 걱정하랴.
풍뢰(風雷)는 3천적의 파도를 일으키고
역상(易象)에 비룡(飛龍)이 바로 하늘에 있네.

바닷가에 잠긴 용(龍) 하늘 놀라게 할까
잠시 한가로움을 틈타 연못에서 도약하네
풍운이 함께 불어오길 기다려
육합(六合)에 비등하여 건곤을 정하리.”

이 두 시는 청조의 통치에 대한 반항의식과 홍수전의 웅대한 뜻이 잘 나타나 있고 제왕이 되고자 하는 포부가 담겨 있다.

홍수전은 환몽을 계기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황상제(皇上帝) 야훼의 대노는 천지창조 이후 노아의 홍수, 출애굽, 예수의 강림으로 나타났는데 야훼가 홍수전에 현현한 것은 예수의 속죄를 이은 네 번째에 위치하여 노아→모세→예수→홍수전이라는 구세주의 계보가 완성되었다.(최진규, 2007, 95)

홍수전은 그리스도교 관련 문헌들을 읽은 후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며,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정복자인 만주족 요괴들을 중국에서 제거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또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지상낙원으로 인도해야 하는 책임도 맡았다고 확신했다.(조너선 스펜스, 2006, 13)


Ⅲ. 上帝敎의 중국적 기독교 이해

上帝敎를 창시한 홍수전으로 하여금 천년왕국의 제사장으로서 민중구원의 책임을 자각하게 한 계기를 제공한 것은, 梁發(중국 최초의 중국인 전도사)이 지은『권세양언』이라는 책이다. 홍수전이 이 책을 읽고 환몽을 되뇌며 ‘야훼(天父)-예수(天兄)-자신(天王)의 3자 관계’를 규정지었으며 태평천국의 구상을 가다듬었다. 그러면『권세양언』의 기독교 이해 방식을 알아보는 게 上帝敎 분석에 앞선 작업이지만, 필자가『권세양언』을 읽은 적이 없으므로, 『권세양언』을 분석하는 작업은 생략한 채 『권세양언』과 上帝敎의 관계에 대하여 기술한 자료를 소개한다.

상제교는『勸世良言』과 중국의 경전에서 동시에 영향을 받았으며 上帝敎와 기독교 사이에는 그 출발부터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홍수전은 기독교 교의를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勸世良言』은 혁명을 선전하는 책이 아니라 현실상황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현실상황에 대한 홍수전의 비판적 인식은 개인적인 경험과 중국의 경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道敎 특히 민간신앙이나 소설 속의 인물ㆍ사상으로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최진규, 2006, 233)
 
『권세양언』은 기독교의 근본주의에 입각하여 上帝만이 眞神이고 기타 일체의 종교와 우상은 邪魔[사악한 악마]이며 외도(外道)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철저히 비판한 점이 특징이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를 믿고 전도하는 일은 洋鬼[서양 귀신]를 따르는 일 즉 從蕃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梁發은 중국의 경전을 인용하면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홍수전도 반고(盤古) 당시부터 중국은 皇天ㆍ上帝를 숭배하였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믿는 것이 從藩이 아님을 역설하였다.(최진규, 2006, 223)

* 반고((盤古); 중국신화에서 판구는 우주에 질서를 가져온 최초의 존재이며, 인류는 그로부터 퍼져나갔다.(조너선 스펜스, 2006, 135)

   1. ‘상제(上帝)’에 대한 해석

홍수전이『권세양언』에서 꿈을 푸는 실마리를 발견한 것은 신천상제(神天上帝)라는 역어에 있다. 신천상제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사용해 온 상제(上帝)라는 개념과 아무 마찰 없이 홍수전의 마음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상제는 최고신이기는 해도 서양의 신과 같은 유일신은 아니다. 홍수전은 중국의 전통적인 인격신 상제(上帝)를, 다른 모든 우상을 엄하게 부정하는 유일신으로 생각함으로써 서양의 신 여호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일체의 우상을 부정하는 것을 제외하면 기독교의 신(God)보다는 전통적인 상제나 천(天)에 가깝고 의지를 지닌 인격신이었다. 특히 인간적인 모습과 함께 천상에 부인과 아들이 있는 것은 민간 도교의 지상신인 옥황상제(玉皇上帝)에 가깝다.
당시에 중국식 God의 개념인 ‘上帝’를 에워싸고 혼선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회는 上帝 또는 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의 신(God)과 같은 의미를 표현하려고 하였으나 올바른 이해를 주지 못한다는 반대가 프란체스코회 등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1715년 교황은 이를 금하고 天主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모리슨의 한역성경은 神ㆍ神爺火華ㆍ神主ㆍ神父 이외에 神天上帝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梁發은『勸世良言』에서 神爺火華ㆍ神ㆍ天父ㆍ神父ㆍ主ㆍ天 이외에 神天上帝ㆍ上帝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구츨라프(Karl F.A. Gtzlaff; 郭士立)는『尙書』에 나오는 惟皇上帝를 참고하여 皇上帝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홍수전의 글에도『原道醒世訓(원도성세훈)』이후에는 上帝 이외에 皇上帝가 많이 사용되고 후에는 天父上主皇上帝ㆍ天父皇上帝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原道醒世訓』을 쓰기 전에 구츨라프가 번역한 성경을 읽었을 가능성도 있다.(최진규, 1994, 177)

홍수전이『권세양언』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백정가』『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등 홍수전의 초기 문헌에는 유교 경전이 빈번하게 인용되었다. 그러나 1847년 2개월 남짓 광동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로버츠(l.J. Roberts; 羅孝全) 밑에서 신구약 등을 읽은 후에 쓴『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희망의 신 황상제와 암흑의 제왕 염라요(閻羅妖)를 대비시키고, 이 염라요가 삼대의 황금시대를 제외하고 진나라 시황제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들을 유혹하였다고 주장하여 진시황 이후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다.(최진규, 2007, 96)

홍수전은 [중국의] 경전에 등장하는 天을 가지고 上帝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유교 경전에는 의지가 있고 호오(好惡)의 감정을 가진 神이 있어서 모든 일을 주재하는 등 기독교의 上帝와 비슷한 上帝가 있는데 홍수전은 ‘道之大原出于天’을 인용하면서 반고(盤古) 이후 삼대(三代)에 이르기까지 군민(君民) 모두가 황천(皇天)을 경배했다고 주장하는 등 자연스럽게『勸世良言』의 神天上帝와 중국 고대의 上帝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상제교는 전통사상을 부정한 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최진규, 2006, 224)

홍수전은 기독교의 우주 만물 창조설에 ‘오직 상제(上帝)만이 만백성을 다스린다’는 중국 전통의 상제(上帝) 신앙을 억지로 결합하여 ‘만물을 창조하는 것은 하늘’이며 ‘이 천지를 개벽하는 참된 신(眞神)은 오직 상제(上帝)뿐’이라고 확신하였다.(김학권, 2000, 306)


Ⅳ. 홍수전의 기독교 이해


  1. 『권세양언』을 통한 기독교 이해

태평천국 운동의 원전인『권세양언』의 저자인 양발(梁發)의 문체가 열성과 희생정신을 반영하고 있지만 ‘대부분 현지의 언어와 맞지 않는 성경역문과 그의 외국인 고용주가 지은 신학논문 위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그의 글은 매우 난삽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끝까지 읽을 수 없게 한다’고 메트허스트가 비판한 바 있지만 梁發이 인용한 성경 역문이 난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梁發 자신도 “현재 성경의 역문에서 채용한 문체는 본토의 방언[현지의 언어]과 너무 거리가 있고 역자가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도치법이나 사용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뜻이 모호하게 되었다. 성경의 가르침 자체가 매우 오묘한 것인데 여기에 문체마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뜻을 분명히 알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반드시 역문을 수정하는 노력을 해서 중국의 방언에 가깝게 한 이후에 출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성경 역문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梁發은 해설부분에서 ‘방언’을 사용하여 쉽게 풀이하려고 노력하였고 특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문제나 중국인에게 직접 관련된 문제를 주로 논함으로써 중국인에 적합한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모리슨 譯 성경은 문어체 문장에다 표현마저 난삽하여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곳이 많았다. 梁發의 경우는 이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밀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홍수전의 경우는『권세양언』에 인용된 성경구절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주위에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어 나름대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오해 내지는 곡해가 발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예컨대 양수청(楊秀淸)을 성신풍(聖神風) 권위사(勸慰師; Conforter)라고 칭한 것이나 삼위일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천부(天父) 상제, 천형(天兄) 예수, 천왕(天王) 홍수전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삼위일체를 상정한 것 등은 이러한 오해에서 비롯하였다.(최진규, 1994, 157-158)

홍수전은 三位一體說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는 上帝의 아들이며 上帝가 아니고, 예수와 上帝는 동일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上帝는 上帝이고 基督은 基督이다”, “上帝가 上主라는 것은 天父上主가 上帝임을 말한 것이지 基督이 上帝라는 것은 아니다”, “太兄께서 분명히 한 太主라는 사실을 밝혔는데 후에 이르러 어찌하여 基督을 上帝라고 오해하는가? 당신들처럼 이해한다면 바로 上帝가 둘이 되는 셈이다”라고 성경에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최진규, 2006, 228)

신학적으로 검증이 안 된 논리를 범부(凡夫)들이 제멋대로 펼치는 데 따르는 악영향은 그리 크지 않겠다. 그러나 태평천국이 홍수전의 왜곡된 성경해석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면 태평천국의 신학적 정당성의 문제가 뒤따른다.

특히 성경의 신학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홍수전이『요한 계시록』의 해석에 천착한 것 같아 이러한 불안은 증폭된다.   


  2. 조지프 에드킨스와의 신학적 갈등

남경(南京)을 천경(天京; 천년왕국의 수도)으로 정하여 화려한 왕궁 안에 칩거한 홍수전은 이후 신약과 구약 성경의 주해에 몰두한 듯하다.

그는 자신을 태양에 비유하여 홍일(紅日)이라 자칭하고, 신 야훼의 예언을 통해 왕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홍수전은 상제 야훼, 천형 예수와 결합되었다. 성경에 대한 주해에서 그는 반복해서 신과 예수는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이는 자신이 형이라고 간주하는 예수는 야훼의 아들이며, 홍수전 자신은 예수에 이은 야훼의 둘째 아들임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천부 야훼, 장남 예수, 차남 홍수전이라는 부자형제 관계가 완성되고 홍수전은 야훼의 전능성을 공유하는 지상의 최고 권위자가 됨으로써 예수에 이은 구세주의 계보를 잇게 되는 것이었다.(최진규, 2007, 100-101)

소천당인 난징(南京)의 구중궁궐 안에서, 예수에 이은 구세주의 계보를 잇는 길을 모색한 홍수전의 강한 집념은 성서 해석을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듯하다. 이러한 결과의 한 가지 사례가 조지프 에드킨스(Joseph Edkins)에게 보낸 친필 응답에 나타난 것 같다.


    1) 홍수전이 조지프 에드킨스에게 보낸 친필 응답(조너선 스펜스, 2006, 462-464)

영국인 선교사 조지프 에드킨스는 1861년 봄에 천경(南京)을 방문한다. 천경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중국어로 출판한 논문「하나님은 육신이 없는 것이 진실이다」한 부를 비롯하여 그보다 짧은 몇 편의 신학 관련 기사를 홍수전에게 제출한다.
홍수전은 시력에 큰 장애가 있어 너무 작은 글자로 된 자료들을 읽지 않으며, 충왕(忠王) 리슈청(李秀成)과는 달리 안경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들한테서 들어서 알고 있던 에드킨스는 크고 분명한 [중국어] 글자로 인쇄하고 ‘큰 필체로’ 서명한 논문을 홍수전에게 보낸다. 에드킨스가 제기한 주장은 하느님의 무형성(無形性)을 강조한 것이며, 이는 주로 “어느 때나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으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그 분을 환하게 드러내셨”다고 한「요한복음」1장 18절에 근거하고 있다. 에드킨스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니케아 신경」과「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중국어] 번역본을 홍수전에게 보내,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아리우스파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여 비난을 받았던 종파이다.
큰 글자로 쓴다는 에드킨스의 전략은 성공한다. 홍수전은 일련의 논평으로 응답한다. 물론 에드킨스가 홍수전의 주장을 납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낸 편지가 “붉은 색으로 수정한 곳과 주석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알고 만족스러워한다[아래의 <사진 1>은 (붉은 색으로 수정한 곳과 주석으로 뒤덮여 있는) 홍수전의 ‘에드킨스에게 보내는 친필 응답’이다]

<사진 1; 홍수전이 조지프 에드킨스에게 보낸 친필 응답>;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91호(2009.12.10)의 글「태평천국 운동에서 '平和鄕' 찾기」에 위의 사진이 실려 있으니 참고할 것.

홍수전이 쓴 수정과 주석의 대부분은 분명 ‘끝이 뭉뚝한’ 붓으로 ‘거칠고 빠르게 써내려간 것’이었다. 홍수전은「요한복음」1장 18절에서 인용한 ‘독생자(獨生子)’라는 단어에서, ‘독(獨)’이라는 글자를 삭제하고 ‘형(兄)’이라는 글자를 삽입했다.<그림 2 참조>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의 또 하나의 아들인 홍수전 자신의 신분이 부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부분에 ‘자식은 아버지를 닮기’ 때문이라는 말을 추가한다.

홍수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드킨스는「요한 계시록」의 구절도 인용했다.「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묘사는 반드시 ‘비유(喩)’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홍수전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홍수전은 답서에서 뭉뚝한 붓을 휘둘러 ‘喩(비유)’를 지우고 ‘實(실제)’을 써넣는다.<사진 2 참조>

<사진 2; 홍수전이 ‘獨生子’에서 ‘獨’을 지우고 ‘兄’을 넣고, ‘喩’를 ‘實(실제)’로 바꾼 부분>;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91호(2009.12.10)의 글「태평천국 운동에서 '平和鄕' 찾기」에 위의 사진이 실려 있으니 참고할 것.

홍수전은 자신이 아리우스파에 대한 에드킨스의 평가가 의도하는 바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 아리우스의 견해가 아타나시우스와 공의회에 의해 철저히 폐지된 과정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공의회에서 내린 그 결정은 잘못되었고 아리우스의 주장이 옳다는 내용으로 짧게 논평을 한다.

홍수전은 에드킨스의 모든 글을 직접 읽었을 뿐 아니라, 그를 반박하는 내용의 시(詩)를 친필로 써 보낸다.<사진 3>
“상제께서 가장 근심하는 것은 우상이라서,
인간은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네.
그러나 그리스도와 짐은 아버지께서 낳으셨으니,
우리는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기에 상제를 볼 수 있었네.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모습대로 아담과 판구(盤古)를 창조하셨으니,
너희가 이 점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아직 용서받을 수 있으리.
형과 짐은 하느님의 존안(尊顔)을 직접 보았나니,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가 조금도 차이가 없었네.
아버지와 형이 짐을 데려가 천조에 앉게 하시니,
이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기쁨을 누리리라.”

<사진 3; 붉은색 붓글씨로 위의 詩를 쓴 부분>;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91호(2009.12.10)의 글「태평천국 운동에서 '平和鄕' 찾기」에 위의 사진이 실려 있으니 참고할 것.
  
  3. 태평천국 옥새(조너선 스펜스, 2006, 24-25)

정방형의 각 변이 20.5㎝인 태평천국 옥새(玉璽)는 대략 태평천국의 통치가 시작되던 마지막 시기인 1860-1861년에 제작되었다.<사진 4>

<사진 4; 태평천국 옥새>;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91호(2009.12.10)의 글「태평천국 운동에서 '平和鄕' 찾기」에 위의 사진이 실려 있으니 참고할 것.

옥새의 문구는 각 행의 첫 글자를 맞추면 말이 되는 이합체(離合體)의 형식이어서, 중국인 학자들은 옥새에 새겨진 이 글자들을 읽고 해석하기 위해, 글자에 담긴 규칙성을 정확히 찾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왕칭청(王慶成)이 제시한 가장 결정판에 가까운 최신 해석은 옥새의 상반부에 있는 중앙의 글자에서 시작하여, 옥새 하반부를 교차해가며 읽어 나가다가(중앙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읽어가며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읽어나감), 옥새 상반부 바깥쪽에 있는 비교적 작은 글자로 끝이 나는 형태이다. 이 방식을 따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온다;

태평옥새[太平玉璽]
천부상제[天父上帝]
천형 그리스도[天兄基督]
천왕 홍(洪), 태양, 풍요로운 땅의 통치자[天王洪日, 主王輿篤]
(그리고) 구세주이며 유주인, 진정한 왕 구이푸[救世幼主, 眞王貴福]
만세토록 고귀하며 영원히 하늘의 총애를 받으며, 영원히 천지를 평정할지니, 은혜로운 조화와 즐거운 평화는 계속되리라[八位萬歲, 永錫天祿, 永定乾坤, 恩和輯睦]

이 옥새를 보면 홍수전이 생각하는 태평 유토피아의 구도를 알 수 있다. 홍수전(天王洪日)이 예수를 형님으로 모시고(天兄基督) 하느님(天父上帝)을 받들면서, 은혜로운 조화와 즐거운 평화(恩和輯睦)가 넘쳐흐르는 천년왕국인 태평천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Ⅴ. 「천조전묘제도(天調田畝制度)」를 통해 태평천국의 ‘平和鄕’ 찾기

위의 태평천국 옥새의 ‘태평 유토피아’ 구도를 자세하게 설명한 태평천국 건설의 설계도가 「천조전묘제도(天調田畝制度)」이다. 홍수전이 이 설계도대로 태평천국을 운영하지 않고 오히려 역행한 것도 있지만, 태평 유토피아의 평화향(平和鄕)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다.

「천조전묘제도(天調田畝制度)」를 종교적으로 보면 上帝敎의 교리에 해당되고,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반봉건적 민주혁명 강령이다. 평화의 시각에서 보면, 지상에 태평 유토피아 왕국(천년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조감도이다. 이 조감도를 잘 파악하면 ‘신정적이며 유토피아적인 평화’가 넘쳐흐르는 ‘평화향(平和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평화향(平和鄕)’을 찾기 위해「천조전묘제도(天調田畝制度)」를 아래와 같이 해설한다.
* 자료 출처; ① 중국어(간체자) 원문=http://gj.zdic.net ② 요약된 한글 해설=미이시 젠키치, 1993, 195-197

  1. 태평천국의 직제

<원문>
凡一军:典分田二,典刑法二,典钱谷二,典入二,典出二,俱一正一副,即以师帅,旅帅兼摄。当其任者掌其事,不当其事者亦赞其事。凡一军一切生死黜陟等事,军帅详监军,监军详钦命总制,钦命总制次详将军、侍卫、指挥、检点、丞相,丞相禀军师,军师奏天王,天王降旨,军师遵行。功熏等臣世食天禄,其后来归从者,每军每家设一人为伍卒,有警则首领统之为兵杀敌捕贼,无事则首领督之为农耕田奉尚。

<해설>
천왕(홍수전)을 정점으로 하여 승상(丞相)ㆍ점검(點檢)ㆍ지휘(指揮)ㆍ장군(將軍)ㆍ시위(侍衛)의 조내관(調內官)이 있고 나아가 군중관(軍中官)으로서 장군(將軍)ㆍ총제(總制)ㆍ감군(監軍)ㆍ군수(軍帥)ㆍ사수(師帥)ㆍ여수(旅帥)ㆍ졸장(卒長)ㆍ양사마(兩司馬)의 하이어라키[hierarchy;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다. 1군 안에 일체의 생사출척에 관한 일은 군수(軍帥)에서 감군(監軍)ㆍ총제(總制)ㆍ장군(將軍)으로 하이어라키를 올라가 天王의 결제를 기다린다. 1가에서 1인의 병사를 내며 일단 유사시에는 군인이 되어 싸우고 일이 없으면 농업에 종사한다.


  2. 토지(田)의 균분(「천조전묘제도」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의 농민혁명 토지강령이다)

<원문>
凡田分九等:其田一亩,早晚二季可出一千二百斤者为尚尚田,可出一千一百斤者为尚中田,可出一千斤者为尚下田,可出九百斤者为中尚田,可出八百斤者为中中田,可出七百斤者为中下田,可出六百斤者为下尚田,可出五百斤者为下中田,可出四百斤者为下下田。尚尚田一亩当尚中田一亩一分,当尚下田一亩二分,当中尚田一亩三分五厘,当中中田一亩五分,当中下田一亩七分五厘,当下尚田二亩,当下中田二亩四分,当下下田三亩

凡分田,照人口,不论男妇,算其家人口多寡,人多则分多,人寡则分寡,杂以九等,如一家六人分三人好田,分三人丑田,好丑各一半。凡天下田,天下人同耕,此处不足,则迁彼处,彼处不足,则迁此处。凡天下田,丰荒相通,此处荒则移彼丰处,以赈此荒处,彼处荒则移此丰处,以赈彼荒处。务使天下共享天父上主皇上帝大福,有田同耕,有饭同食,有衣同穿,有钱同使,无处不均匀,无人不饱暖也。凡男妇,每一人自十六岁以尚受田,多逾十五岁以下一半。如十六岁以尚分尚尚田一亩。则十五岁以下减其半分尚尚田五分;又如十六岁以尚分下下田三亩,则十五岁以下减其半分下下田一亩五分。

<해설>
수확고ㆍ지질에 의해 토지를 9등급으로 나누고 16세 이상의 남녀에게 등급을 안배하여 균분한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이 ‘토지가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밥이 있으면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사용한다’는 이상을 달성한다.


  3. 공산제도

<원문>
凡天下,树墙下以桑。凡妇蠶绩缝衣裳。凡天下,每家五母鸡,二母彘,无失其时。凡当收成时,两司马督伍长,除足其二十五家每人所食可接新谷外,馀则归国库,凡麦、豆、宁麻、布帛、鸡、犬各物及银钱亦然。盖天下皆是天父上主皇上帝一大家,天下人人不受私,物物归上主,则主有所运用,天下大家处处平匀,人人饱暖矣。此乃天父上主皇上帝特命太平真主救世旨意也。但两司马存其钱谷数於簿,上其数於典钱谷及典出入。

<해설>
양사마[兩司馬; 가장 말단의 직책]가 25가(家)로 이루어진 1조의 조직을 통할한다. 사람들은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며, 부인은 실을 뽑아 의복을 짠다. 5마리의 닭, 5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보리ㆍ콩ㆍ마 등의 수확물은 25가의 자가 소비분과 이듬해의 파종분을 남기고 모두 장부에 기입한 후 국고에 들인다. 포백ㆍ닭ㆍ개 그리고 은전(銀錢: 돈)도 마찬가지로 국고에 들인다. 왜냐하면 천하는 天父上主皇上帝[天王: 홍수전]의 커다란 일가이며 모두 天父[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태평의 眞主(홍수전)는 天父의 특명을 받아 이를 관리하고 천하의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분배하여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을 입게 하는 것이다.


  4. 국고와 예배당

<원문>
 凡二十五家中,设国库一,礼拜堂一,两司马居之。凡二十五家中所有婚娶弥月喜事,俱用国库;但有限式,不得多用一钱。如一家有婚娶弥月事给钱一千。谷一百斤,通天下皆一式,总要用之有节,以备兵荒。凡天下婚姻不论财。凡二十五家中陶冶木石等匠,俱用伍长及伍卒为之,农隙治事。凡两司马办其二十五家婚娶吉喜等事,总是祭告天父上主皇上帝,一切旧时歪例尽除。其二十五家中童子俱日至礼拜堂,两司马教读备遗诏圣书、新遗诏圣书及真命诏旨书焉。凡礼拜日,伍长各率男妇至礼拜堂,分别男行女行,讲听道理,颂赞祭奠天父上主皇上帝焉。

<해설>
25가 안에 국고와 예배당을 하나씩 두고 양사마[兩司馬; 가장 말단의 직책]가 맡아 관리한다. 각가의 관혼상제에 들어가는 비용은 일률적으로 이 국고에서 지급하며, 결혼은 자유혼으로 天父[하느님]에게 제사로 고하고 구래의 관례는 모두 폐기한다. 7일마다 돌아오는 예배일에는 25가의 사람이 남녀 별도로 예배당에 모여 양사마의 설교(講道理라고 함)를 듣고 天父에게 기도한다. 예배일 이외에 이곳은 아이들의 학교가 되며 양사마가 신구약 성경, 진명조지서(眞命詔旨書)를 가르친다.


  5. 상벌

<원문>

凡二十五家中力农者有赏,惰农者有詈罚。或各家有争讼,两造赴两司马,两司马听其曲直。不息,则两司马挈两造赴卒长,卒长听其曲直。不息,则卒长尚其事於旅帅、师帅、典执法及军帅。军帽会同典执法判断之。既成狱辞,军帅又必尚其事於监军,监军次详总制、将军、侍卫、指挥、检点及丞相,丞相禀军师,军师奏天王。天王降旨,命军师、丞相、检点及典执法等详核其事。无出入,然后军师、丞相、检点及典执法等,直启天王主断。天王乃降旨主断,或生、或死、或予、或夺,军师遵旨处决。凡天下官民,总遵守十款天条,及遵命令尽忠报国者则为忠,由卑升至高,世其官。官或违犯十款天条及逆命令受贿弄弊者则为奸,由高贬至卑,黜为农。民能遵条命及力农者则为贤为良,或举或赏。民或违条命及惰农者则为恶为顽,或诛或罚。

<해설>
25가 안에 소송이 있으면 양사마[兩司馬; 가장 말단의 직책]가 판결한다. 그 판결에 불복하면 (앞의 ‘1. 태평천국의 직제’에서 설명한) 하이어라키를 아래로부터 좇아서 차례로 상고할 수 있다. 다만 天王[홍수전]의 판정은 절대적이다. 천하의 인민과 관리는 십관천조(十款天條: 10계명을 고친 것)와 명령을 지켜 국가를 위해 진력을 다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관위를 떨어뜨려 농민으로 삼는다. 농사에 힘쓰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농사를 게을리 한 자는 벌한다.


  6. 관리의 채용과 승진

<원문>

凡天下每岁一举,以补诸官之缺。举得其人,保举者受赏;举非其人,保举者受罚。其伍卒民,有能遵守条命及力农者,两司马则列其行迹,注其姓名,并自己保举姓名於卒长。卒长细核其人於本百家中,果实,则详其人,并保举姓名於旅帅,旅帅细核其人於本五百家中。果实,由尚其人,并保举姓名於师帅。师帅实核其人於本二千五百家中。果实,则尚其人,并保举姓名於军帅。军帅总核其人於本军中,果实,则尚其人,并保举姓名於监军。监军详总制,总制次详将军、侍卫、指挥、检点、丞相,丞相禀军师,军师启天王。天王降旨调选天下各军所举为某旗,或师帅,或旅帅,或卒长、两司马、伍长。凡滥保举人者,黜为农。凡天下诸官三岁一升贬,以示天朝之公。凡滥保举人及滥奏贬人者,黜为农。当升贬年,各首领各保升奏贬其统属。卒长细核其所统两司马及伍长,某人时有贤迹则列其贤迹,某人果有恶迹则列其恶迹,注其人,并自己保升奏贬姓名於军帅:至若其人无可保升并无可奏贬者,则姑置其人不保不奏也。旅帅细核其所统属卒长及各两司马、伍长,某人果有贤迹则列其贤迹,某人果有恶迹则列其恶迹,详其人,并自己保升奏贬姓名於师帅。

<해설>
매년 한차례 관리의 결원을 채용한다. 양사마가 25가 안에서 선발하면, 다시 4인의 양사마에게서 올라온 후보자 가운데 선택하는 방식으로 (앞의 ‘1. 태평천국의 직제’에서 설명한) 하이어라키를 좇아 天王이 최종적으로 선임한다. 3년에 한 차례 관리의 승진ㆍ강등을 행한다. 그 순서는 채용의 경우와 같다.


  7. 병제

<원문>
凡设军,每一万三千一百五十六家先设一军帅。次设军帅所统五师帅。次设师帅所统五旅帅,共二十五旅帅。次设二十五旅帅各所统五卒长,共一百二十五卒长。次设一百二十五卒长各所统四两司马,共五百两司马,次设五百两司马各所统五伍长,共二千五百伍长。次设二千五百伍长各所统四伍卒,共一万伍卒。通一军人数共一万三千一百五十六人。凡设军以后,人家添多,添多五家,另设一伍长。添多二十六家,另设一两司马。添多一百零五家,另设一卒长。添多五百二十六家,另设一旅帅。添多二千六百三十一家,另设一师帅。共添多一万三千一百五十六家,另设一军帅。未设军帅前,其师帅以下官仍归旧军帅统属;既设军帅,则割归本军帅统属。

<해설>
오장(伍長)은 4명의 부하로 하고 양사마는 5명의 오장을 통솔하며 졸장(卒長)은 4명의 양사마를 관리한다. 여수(旅帥)는 5명의 졸장을, 사수(師帥)는 5명의 여수를, 군수(軍帥)는 5명의 사수(즉 총 1만 3,125명)를 통할한다. 군수(軍帥)가 평시와 전시 모두 전쟁을 감독하는 책임을 진다.


  8. 예배

<원문>
凡内外诸官及民,每礼拜日听讲圣书虔诚祭奠,礼拜颂赞天父上主皇上帝焉。每七七四十九礼拜日,师帅、旅帅、卒长更番至其所统属两司马礼拜堂讲圣书,教化民,兼察其遵条命与违条命及勤惰。如第一七七四十九礼拜日,师帅至某两司马礼拜堂,第二七七四十九礼拜日,师帅又别至某两司马礼拜堂,以次第轮,周而复始。旅帅、卒长亦然。

<해설>
내외의 관리ㆍ인민은 예배일마다 성경 강독을 듣고 진심으로 天父[하느님]를 경배한다. 태만한 자는 농민으로 격하시킨다. 77, 49번째의 예배일마다 사수(師帥)ㆍ여수(旅帥)ㆍ졸장(卒長)은 휘하 양사마(兩司馬)의 예배당에 가서 성경을 강하여 인민을 교화하고 아울러 사람들이 천조[十款天條: 10계명을 고친 것]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가를 시찰한다.


  9. 병역과 사회사업

<원문>
 凡天每一夫有妻子女约三、四口,或五、六、七、八、九口,则出一人为兵。其馀鳏、寡、孤、独、废疾免役,皆颁国库以养。

<해설>
1가에서 1인 병역에 나간다. 기타 홀아비ㆍ고아ㆍ불구자 등은 역[병역]을 면하며 국고로 부양한다.

이것이 태평천국이라는 중국의 크리스트교적 천년왕국의 도달점이다. 이 제도 자체는 현재의 태평천국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전혀 실행할 수 없었고 농촌의 기존 권력에 의한 왕조체제로 후퇴하여 농민에 대한 조세수탈 기구로 전화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토지가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밥이 있으면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사용한다’는 이념은 태평천국에서 손문을 거쳐 모택동의 신민주주의 혁명에 이르는 한 가닥의 붉은 실(紅絲)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Ⅵ. 결론; ‘평화향(平和鄕) 운동’을 제안하며

지금까지 태평천국 운동의 평화향(平和鄕)을 찾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청나라 지배계급ㆍ외세의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던 중국 민중들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하여 ‘중국식(동양식) 하나님 나라 만들기 사업’에 착수한 홍수전. 이 홍수전의 성서해석ㆍ기독교 이해에 문제가 있지만, 태평천국의 태평 유토피아를 받아들인 중국 하층민의 가슴 속에 천년왕국이 각인되었다. 중국 하층민(민중)의 마음속에 태평 유토피아의 평화향(平和鄕)이 깊이 파고들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쑤저우(蘇州) 지방의 농민들이 즐겨 부른 노래「不見哥哥回家中」「肦望太平軍」속에, 이 노래를 흥겹게 부르고 다니던 중국의 농촌 곳곳에 태평천국의 평화향(平和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1860년대 중국인민의 마음속에 깃든 태평천국의 태평 유토피아를 부활시키면서, 태평천국 찬양가 속의 평화향(平和鄕)을 찾아 나서는 과업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홍수전이 남경(天京)에 세운 소천당(홍수전 방식의 평화향)과 유사한 ‘자그마한 천년왕국(mini 천년왕국)’을 마을 곳곳마다 만드는 ‘평화향(平和鄕) 운동’을 제안한다.  

그리고 평화향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라도 태평천국 운동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태평천국 운동이 중국혁명의 오로라(aurora; 極光)가 되어 혁명가에게 감동을 주며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진 수맥을 다시 찾을 필요가 있다.

태평천국은 비록 패망했지만, 동양에서 건설된 유일한 기독교 국가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태평천국 운동은 ‘원(原) 사회주의 운동’ ‘선진계급의 지도가 없는 구식 농민혁명의 최고 형태이다’는 평가도 주목할 점이다. 이 두 개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태평천국 운동은 기독교적 사회주의ㆍ기독교적 농민혁명의 한 유형이다.

서양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적 사회주의ㆍ기독교적 농민혁명가 아닌 동양의 기독교적 사회주의ㆍ기독교적 농민혁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동양인(태평천국 운동에 동조한 중국민중)이 이해한 방식으로 천년왕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면 동양적(좁게 말하면 ‘동아시아적’) 천년왕국 건설ㆍ태평 유토피아의 실현이 하나의 과제로 떠오른다. 태평천국 운동을 반면교사로 삼아 동아시아적 천년왕국의 조감도를 그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 동아시아적 천년왕국의 평화향(平和鄕)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일이 ‘동아시아의 지속가능하고 영속 가능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칸트(Immanuel Kant)의『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이 유럽의 평화ㆍ유엔 창설의 원전(元典)이 되었듯이, 동아시아적 천년왕국의 원전(原典)을 만들어 동아시아를 평화향(平和鄕)으로 만드는 제2의 태평 유토피아 운동ㆍ제2의 태평천국 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한다. 간단하게 말하여 동아시아판 평화향(平和鄕) 운동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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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1. 단행본

* 미이시 젠키치(三石善吉) 지음, 최진규 옮김『중국의 천년왕국』(서울, 고려원, 1993)
* 북경대 철학과 연구실 지음, 오상무 옮김『중국 철학사 4』(서울, 자작 아카데미, 1997)
* 안길환 지음『쉽게 읽는 중국 사상』(서울, 책 만드는 집, 1997)
* 조경달 지음, 박맹수 옮김『이단의 민중반란』(서울, 역사비평사, 2008)
* 조너선 D. 스펜스(Jonathan D. Spence) 지음, 양휘웅 옮김『신의 아들(God's Chinese Son; The Taiping Heavenly Kingdom of Hong Xiuquan)』(서울, 이산, 2006)
* 小島晋治ㆍ丸山松行 지음, 朴元熇 옮김『中國 近現代史』(서울, 지식 산업사, 1988)
* 小林一美ㆍ岡島千幸 편『ユ―トピアへの想像力と運動』(東京, 御茶の水書房, 2001)


2. 논문

* 김학권「홍수전의 생애와 사상」『中國哲學』제7집(2000.2)
* 양필승「태평천국운동 이후 쑤저우 지방의 농민문화」『中國硏究』(건국대 중국문제 연구소 刊) 제11권(1992.12)
* 이영석「천년왕국에서 공상적 사회주의까지」『내일을 여는 역사』29호(2007년 가을)
* 조경달「갑오 농민전쟁과 유토피아」『내일을 여는 역사』29호(2007년 가을)
* 조병한「무릉도원에서 태평천국까지」『내일을 여는 역사』29호(2007년 가을)
* 최진규「홍수전의 환몽과 상제교의 창립」『史叢』(고려대 사학회 刊) 제43집(1994.12)
* 최진규「太平天國 上帝敎와 基督敎」『역사학 연구』제26집(2006.3)
* 최진규「홍수전, 태평천국의 지도자」『내일을 여는 역사』29호(2007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