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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개발(발전)과 평화

불안한 씨알,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

김승국     
 
연재를 시작하며

국내외의 민초들이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글과 동영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평화의 대안을 찾는 연재물을 새로 시작한다. 우선 9.11 사태 이후에 우심해지는 불안한 시대의 현상(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폭격, 클러스터 폭탄 등의 신종무기에 의한 피해, 민초들이 당하는 구조적 폭력, 신자유주의의 횡포, 제국 미국의 패권 동요, 미국의 금융불안, 이명박 ‘신자유주의 개발독재 체제’ 아래의 민중고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게재할 것이다. 그리고 불안한 시대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밝히며 주체(불안의 담지자)를 규명할 것이다. 이어 불안한 주체가 어떠한 경로로 불안 증후군에 휩싸이는지를 파헤치면, 불안을 제공하는 세력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물론 불안한 시대를 지양하는 평화의 대안도 다각도로 제시할 것이다. 위의 작업을 가능하면 동영상으로 만들어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의 [평화누리 TV]에도 올릴 것이다.

[불안한 시대의 평화]라는 연재물의 첫 번째 순서로「불안한 씨알,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실음으로써, 불안의 주체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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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씨알,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본문>

씨알들은 불안하다. 뉴타운 재개발의 사슬에 묶여 졸지에 도시 빈민이 될까봐 불안하다. 어엿한 자영업자 사장님(?)이 알거지가 된 뒤 옥탑에 세운 농성장에서 날을 지새우는 싸움꾼이 될지 몰라 불안하다. 뉴타운 재개발이라는 ‘토목국가의 돈놀이 잔치’에 초대받은 세입자 앞으로 철거 통지서가 날아올지 몰라 불안하다. 언제 용역깡패가 들이닥쳐 알뜰살뜰 꾸며온 가게를 박살낼지 몰라 불안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세입자의 농성장 부근은, 용산 참사와 같은 ‘죽임의 난장판’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 지대(불안한 지대)’이다. 이 불안 지대를 에워싼 국가권력(공권력)의 폭력이 살인극을 유발했다.

서울 시내 곳곳의 뉴타운 재개발 사업장은 국가권력의 폭력과 (이에 저항하는 씨알들의) 몸싸움이 직접 대결하는 ‘주거권 전쟁터’이다. 주거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민사회의 화약고이다. 대결의 상황에 따라 ‘제2의 용산참사’가 터질 개연성이 있다고 한다.

주거권을 에워싼 시민전쟁(Civil War)이 서울시 전역에서 진행 중이다. 세입자의 주거권 인정(認定)을 둘러싼 전쟁터는, 시민 누구나 ‘사람 죽이는 공권력의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불안감을 제공한다.

뉴타운 개발과 관련하여 사람 잡는 공권력이 불안의 원흉이다. 물론 사람 잡는 공권력의 배후에 토목국가가 버티고 있으며 토목국가는 재개발 관련 신자유주의 자본(신자유주의에 따라 축적하는 자본)과 유착하고 있다. 따라서 ‘토목국가+토목자본의 복합체’가 불안의 원흉이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이 토목자본은, 신자유주의형(型) 개발 노선을 펼치는 이 명박 정권의 토목국가 사업에 투자하는 대형 건설회사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어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주술에 놀아나는 이 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발독재’의 산물이 용산 참사이며, 이 참사의 사망자가 아직도 저승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시민 누구나 이러한 참사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며, ‘토목국가+토목자본의 복합체’가 시민사회를 위협하며 희생자가 되라고 유혹하고 있는데 있다.

사람 살리는 권력(活人權力)이 아닌 ‘토목국가+토목자본 복합체’의 사람 죽이는 권력(殺人 權力)이 시민사회의 주변을 배회하는 이 시대의 가장 큰 화두는 ‘불안’이다. 그래서 ‘토목국가+토목자본 복합체’의 올가미에 걸린 씨알들의 삶이 원초적으로 불안하다. 불안한 씨알들의 대다수가 무산자(無産者; 프롤레타리아트)에 가까우므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말할 수 있다. 무산자가 아닌 자영업자도 뉴타운 재개발의 덫에 걸리면 무산자가 되므로, 세입자 전체가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처럼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불안한 씨알’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더욱이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서 사는 불안한 씨알들 중 상당수가 ‘고용불안을 안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므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불안한 씨알’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논리의 타당성이 입증된다.

여기에서 ‘불안한 씨알’의 이웃사촌인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는 필자가 처음 개발한 조어가 아니다. 이미 유럽에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에 해당되는 ‘precarious proletariat’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으며 ‘precarious proletariat’를 중심으로 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precariat’는 불안정하다는 뜻의 ‘precarious’와 무산자를 뜻하는 ‘proletariat’가 합성된 조어이다.

카시무라 아이코(樫村愛子)는 ‘precariat’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랑스어 ‘précarité(불안정․不安定化)’는, 기본적으로 고용의 불안정화가 초래하는 생활의 불안정화를 의미한다. 이는 사회의 유동화(流動化)․사회의 해체를 시사하는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사회․인간의 풍부함의 상실을 나타내는 인문사회학적인 용어로 통용되면서 사회적인 슬로건이 되었다.
사회학자인 Bauman은 ‘프랑스어 précarité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Unsicherheit나 Risikogesellschaft(위험사회)이고 이탈리아어는 incertezza, 영어는 insecurity이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이 명백해 드러내는 것은 신분․권리․생활의 불안정성, 영속성․장래의 안정을 불확실하게 하는 것, 신체․自己․재산․인근․공동체의 위험성이라는 세 가지 층위로 이루어진 현상이다.
‘précarité’라는 용어는 이미 1970년대 중반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인 언설로 등장한다. 언론매체나 노동조합 등에 의한 정치적 논의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970년대 말에 사회학자들이 가족․빈곤, 가족의 연대와 관련하여 이 용어를 사용했으나 그 때에는 아직 대량실업이라는 정황은 없었다. 1980년대의 실업에 관한 논의에서 고용의 불안정이 전면적인 주제가 된다. 이게 précarité라는 용어의 전환점이다.
이 용어의 중요한 함의는 ‘불안정성=instabilité’와 ‘취약함=fragilité’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시장의 해체․사회적 기반의 약화와 연결되는 뜻으로 précarité라는 개념을 규정한다.
프랑스의 사회경제위원회가 내린 ‘précarité’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précarité는 안전․보장의 결여이며 특히 고용의 결여이다. 안전․보장의 결여는 확대되어 영속적인 결과를 낳는다. 생존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칠 때 그것은 엄청난 빈곤으로 귀결된다.”
이처럼 précarité는 상태가 아니라 점점 더 악화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용의 상실은 주거․건강의 상실, 교육의 질의 저하, 가정 정황(情況)의 악화라는 다면적인 정황과 연결된다.
그러나 précarité가 ‘précaire(불안정한 사람)’라는 말로 설명되듯이, 개인화(사회현상이나 사회문제가 개인의 문제로 파악되는 것. 예컨대 학대의 배후에 빈곤이 있어도 모친의 심리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를 전제로 기술(記述)된다. 즉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취급된다.
이와 달리 Castel의『Les métamorphoses de la question sociale(사회문제의 변용)』(Gallimard, 1999), Pangam의『Le salarié de la précaire(불안정한 precarité인 샐러리맨)』(2000)은, précarité를 사회문제로 다룬다. Bourdieu는 précarité를 현재의 ‘지배 양식’으로 규정한다.<樫村愛子『ネオリベラリズムの精神分析』(東京, 光文社, 2007) 31~36쪽 참조>

위의 논의를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면, 후기 포디즘(Post Fordism)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신자유주의의 시장중심 원리에 의해 불안한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precariat’이다.

신자유주의가 횡행하는 21세기의 벽두에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를 ‘precariat’라고 총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아래의 불안한 삶을 떨치고 안전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겠다는 투쟁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2004년 10월에 신자유주의형 통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유럽의 precariat에 의한 미들섹스 선언(Middlesex Declaration of Europe’s Precariat)’이 채택되었다. 이어 이 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운동이 유럽의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어서 한국의 운동진영도 이 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이탈리아 등에서 precariat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므로, precariat 운동의 한국화(化)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precariat 운동과 관련된 홈페이지 주소; http://republicart.net).

요약해서 말하면, 서울시 등 대도시의 신자유주의형 뉴타운 재개발은 시민사회의 공동체․시민사회의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이 주범은 ‘토목국가+토목자본 복합체’와 더불어 precariat를 양산하고 있다. 이미 신자유주의 자본에 의해 일차적으로 precariat가 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웃사촌이 뉴타운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들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씨알들도 precariat가 될 수 있는 불안한 시대의 ‘불안한 씨알’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precariat 운동을 펼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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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49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