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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개발(발전)과 평화

평화를 위한 개발(발전)

김승국

개발론의 대가들은 많지만 평화와 관련하여 설명한 학자들은 드물다. 개발과 평화의 관련성에 관하여 요한 갈퉁(Johan Galtung), 아마티아 센(Amartya Sen), 니시가와 쥰(西川 潤) 등이 주목할 만한 글을 발표했으므로, 이들의 저작을 중심으로 ‘평화를 위한 개발(발전)’의 논리를 전개한다.

Ⅰ. ‘개발’의 개념

인류의 정신사에서 개발(development)이 시대의 과제가 된 때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9세기 시민혁명의 시기로서, 이 시기에 ‘개발’, ‘발전’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는 유럽언어로 development(영어), die Entwicklung(독일어), le développement(프랑스어)로 표기되는데, 타동사로서 ‘개발하다’와 자동사로서 ‘발전하다’는 양쪽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헤겔(Hegel)이다. 헤겔은 봉건사회 속에서 움츠렸던 시민사회가 혁명에 의해 자기발전하는 양상을 ‘Entwicklung(이성의 자기전개)’이라고 표현했다. 이성의 자기전개 그 자체를 역사의 진보로 나타낸 것이다. 18∼19세기의 계몽철학은 Entwicklung에 의한 진보의 세기이었으며, Entwicklung에 의한 진보사상이 근현대사의 사상적인 기초
가 되었다. 두 번째는, 제2차 대전의 참화로 황폐된 유럽의 부흥․개발이 과제가 되어 1945년에 국제부흥은행(IBRD)이 설립되었다. 이어 1951년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투를 저지하기 위한 후진국 원조 계획인 ‘Point 4’를 발표했다. 냉전 시대의 개발을 상징하는 ‘Point 4’는, 경제적으로 뒤진 세계에 자유․민주주의라는 복음을 불어넣어 공산주의화를 저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진국이 후진국을 끌어올리기 위해 ‘개발’하는 개발관의 토대가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이 ‘개발’은, 시민사회의 자기전개로서, 즉 자동사로서의 발전이라는 의미가 약하다. 그 대신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사회의 발전 방향에 개입하는 의미로서의 타동사 용법이 중심이다. 이렇게 제2차 대전 이후 선진공업국의 개
발원조는 위로부터의 타동사형 개발체제로 드러났다. 개발은, 동서 냉전체제의 맥락에서 국가 헤게모니, (국가 헤게모니와 연결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었다. (西川 潤, 2006, 3-5)

위와 같이 ‘개발’ 개념은 용법, 정치․사회․경제적 맥락에 따라 자동사로서의 ‘발전’과 타동사로서의 ‘개발’로 나뉜다. ‘development’를 우리말로 옮길 때 발전과 개발을 혼용해도 무방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development’의 주체․객체를 고려할 때 양자의 범주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발전하는 주체, 개발을 당하는 객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므로 전자의
주체를 자동사로서의 발전 개념으로 포괄하고 후자의 객체를 개발 개념으로 설명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구획에 따라 자동사로서의 발전-평화의 연관성을 먼저 설명한 다음에 타동사로서의 개발-평화의 관련을 뒤이어 기술한다.

Ⅱ. 자동사로서의 발전: 갈퉁의 관점

평화학의 관점에서 발전을 바라보는 갈퉁은 ‘발전학(development studies)과 평화학의 접맥’을 Peace by Peaceful Means 의 제3부(“개발이론”)에서 시도한다. Peace by Peaceful Means 의 제3부에서 갈퉁이 제시한 ‘development’에 관한 15가지 명제와 절충적 개발이론에 관한 10가지 명제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여 설명한다. (Galtung, 1996, 127-136)

  1. 발전의 세 가지 정의

갈퉁은 ‘development’의 다섯 번째 명제(제5명제)로서 발전의 문법적 명제를 제시한다. “동사로서의 ‘발전하다’는 타동사가 아닌 오직 자동사나 재귀동사나 상호동사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전은 본질적으로 자기발전(Self-development)이다. 자아(Self)의 자율성을 손상함 없이 타자(Other)가 자아발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자율은 발전의 모든 정의에서 목표이다. 내가 발전하고, 내가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우리가 서로를 발전시킨다. 자신의 자아가(one’s own Self)가 된다는 것은 주어(S)-술어(P)-목적어(O)의 문장에서 주어(S)가 되는 것이지 항상 목적어(O)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갈퉁은 이와 같은 관점에 따라 발전에 관한 세 가지 정의를 내린다.

    1) 문화적 정의(제1명제)
“발전은 특정 문화의 펼쳐짐(unfolding)이다. 즉 그 문화의 부호(code)나 우주관을 구현하는 것이다.”

위의 ‘펼쳐짐’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독일어 ‘Entwicklung’에 아주 명확하게 반영되고, 또한 영어 ‘envelop’의 반의어 ‘develop’에도 잘 나타난다. 그 단어의 의미 파악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꽃에 비유할 수도 있다. 즉 미리 정해진 씨 속의 유전 부호에 의해 결국 꽃이 피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문화 부호나 우주관이 궁극적으로는 문명으로 펼쳐진다.

    2) 욕구 중심적 정의(제2명제)
“발전은 인간의 욕구와 자연의 욕구를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부터 순차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욕구를 가진다. 만일 이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더 이상 인간(human being)일 수 없다. 보다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생명을 가진 존재(being)일 수 없고, 보다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때 더 이상 인간적(human)일 수 없다는 뜻이다. 욕구의 박탈은 고통이다. 비참한 경제적 곤궁에는 욕구 박탈이 뒤따른다. 최소한으로 볼 때, 평화가 전쟁의 부재를 뜻하는 것처럼 발전은 경제적 곤궁의 부재를 뜻한다. 욕구 박탈에서 중요한 특징 하나를 규정해보자. 모든 수준의 발달에는 고통의 요소가 있다. 고통의 극단적 수준은 죽음, 즉 개체의 소멸로서, 이는 육체에 가해진 외상(직접적 폭력) 또는 공기, 음식 등의 필수품 투입의 부족(구조적 폭력)에 기인한다. 그러나 개인의 소멸(죽음) 이전에 착취라는 고통의 수준이 있는바, 이 개념은 발전의 이론과 실제에서 중심적 개념이다.

    3) 성장 중심적 정의(제3명제)
“발전은 경제성장이지만 아무에게도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는다.”

이 정의는 상식적으로 인식되는 발전 개념에 가깝지만,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는다는 중요하고 어려운 단서 조항이 달려 있다. 우리는 여러 비용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자연 공간에서는 고갈, 즉 생명체 및 비생명체의 소멸 그리고 (독성)오염이라는 비용이 나타나곤 한다. 인간 공간에서의 비용은 재생과 번식을 위협할 정도의 욕구 박탈에 나타날 수 있다. 인간 간의 상호 작용 체계인 사회 공간에는 다양성과 공생관계의 결핍이라는 비용이 야기될 수 있고, 이 점은 사회 간의 상호 작용 체계인 세계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설명한 발전의 세 정의, 즉 문화 중심적 정의․욕구 중심적 정의․성장 중심적 정의는 분명히 상호 모순적이다. 어느 한 정의에 따를 때에 발전인 것이 다른 정의에 의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문화의 이면적 의제가 욕구와 성장을 내포하지 않거나, 그중 하나는 있지만 다른 하나는 있지 않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만약 존재한다면 어느 문화, 어느 문명이 진정한 개발문화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갈퉁은 발전의 문화적 정의(발전은 특정 문화의 펼쳐짐이다)로 되돌아간다. 세상에는 복수의 문화가 있으니 그에 따라 복수의 발전이 있게 마련이라며 복수형의 발전(developments)을 중심으로 발전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4명제) 문화․문명의 차이에 따라 드러나는 발전들(developments)의 양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컨
대 서구 문명을 도식화하면 ① 발전=서구의 발전=근대화 ② 발전=성장=경제성장=GNP 성장인데, 이러한 서구의 발전 논리가 구조적 폭력을 양산하여 전 세계에 비평화를 초래했다. 특히 근대화의 공식은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국가의 논리이자 경제성장을 수반하는 자본의 논리이므로, 자본의 논리로 발전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제6명제)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갈퉁은 여섯 가지 경제학파(청색학파, 적색학파, 녹색학파, 분홍색학파, 황색학파, 절충학파)를 총체적으로 평가하면서 평화 지향적인 발전을 위한 이론을 ‘절충적 발전이론에 관한 10가지 명제’이라는 이름으로 내놓는다.

  2. 발전과 평화의 총체적인 접근

갈퉁은 발전학의 총체적인(전체론적인) 접근을 통해 평화학의 지평을 넓히려고 한다. 평화를 위한 발전의 이론이 전체론적(holistic, 총체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발전과 평화의 관련성을 평화학의 시각에서 전체론적으로 다루려는 시도가 그의 저서 Globalization and Intellectual Style-Seven Essays on Social Science Methodology (2003)의 네 번째
에세이에 잘 나타나 있으므로,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설한다.

유엔헌장에 발전․평등․평화의 세 가지 가치가 담겨 있다. 발전은 축적<자본(풍요함 對 빈곤함)의 축적만이 아니라 건강, 교육 및 발전의 여러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의 높낮이를, 평등(마르크스주의적 평등, 자유주의적 평등)은 평등한 정도의 높낮이를, 평화는 직접적 폭력의 존재․부재(不在)를 뜻하며, 이 세 가지 가치의 상호관계가 관심사이다. 이 세 가지 가치는 세 가지 변수의 최종지점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는 어떤 사람․어떤 나라와 결부되어 있으며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세계관(social cosmology)을 반영한다. 사람들이 예견하는 변수들 간의 관계를 세계관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으며, 이 정의를 명제(These)로 치환할 수 있다. 또한 변수를 두 가지 좌표로 나누어 다양한 공간을 형성할 수 있다.

    1) 첫 번째 명제(발전과 평등에 관한 명제)

우선 서로 배제하는 가치를 다룬다. 이때의 명제는 부정적(否定的)으로 정식화된다. 즉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평등을 실현할 수 없다.’거나 ‘평등한 사회는 고도의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부정형의 명제가 나온다. 이 명제는 명제에 포함된 세 가지 조합을 강조함으로써 긍정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 더욱이 이 명제는 공시적(共時的)이자 통시적(通時的)인 것이 될 수 있다. 즉 발전․평등과 관련된 명제를 중심으로 공시적․통시적인 모형을 그릴 수 있다. (이 모형을 그린 그림의 설명은 생략)

    2) 두 번째 명제(발전과 평화에 관한 명제)

더 나아가 부정적으로 정식화된 다음의 명제들을 생각할 수 있다. 즉 ‘고도로 발전된 사회는 평화롭지 않다.’ ‘평화로운 사회는 고도의 발전을 취할 수 없다.’는 명제가 가능하다. 이 명제들에 포괄된 세 가지 가치의 조합에 따라 긍정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 이 명제들(발전과 평화에 관한 두 개의 명제) 역시 공시적․통시적인 모델을 선보일 수 있다. 즉 가난하지만(발전이 덜 되었지만) 폭력이 없는 ‘평화 지향적인 상태(A)’에서 가난하며(발전이 덜 되었으며) 폭력도 존재하는 ‘평화 결여의 상태(B)’로 나아간 다음에, 풍요롭지만(발전이 잘됨) 폭력이 존재하는 ‘평화롭지 않은 상태(C)’로 명제를 이동시키는 통시적인 작업이 가능하다. ‘축적(자본․ 건강․교육 등의 축적)은 적지만 평화로운 단계(A)’에서 ‘폭력이 출현하지만 고도의 축적이 나타나는 단계(B)’를 거쳐, ‘고도의 폭력을 동반하는 단계(C)’로 이행하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여기에 국가, 중앙집권적인 사회조직, 물질적․구조적인 권력을 지닌 사회계층을 변수로 집어넣으면 더 좋다. 이들 조직된 인간집단은, 이와 같은 특징이 결여된 유목민 종족에 비해 조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이 높고 내적축적(內的蓄積)을 위해 자기조직을 원료가공 공장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높다. 전쟁을 위한 조직과 발전을 위한 조직 사이에는 양립성․동일성이 있으며, 양자는 영역국가에서 조우하게 된다.

그런데 ‘전쟁수행이 아닌 경제발전만을 위해 사회가 형성되는 일이 왜 없는지’에 관하여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설명하겠다. 첫째, 전쟁기구가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생산요소(자본․원료․값싼 노동력․노예)의 확보, 제품시장의 확보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둘째, 전쟁기구가 경제적 특권․수탈을 보호하기 위해 투입될 수 있다는 설명이
다. 전쟁․발전의 증대가 (제3의 요소인) 국가 형성에 의한 것이라는 암묵의 전제가 내재해 있다. 즉 국가가 형성됨과 더불어 전쟁․발전의 증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국가 형성의 영역성 때문에 (A)∼(B)로의 이행이 발생한다.

    3) 세 번째 명제(평등 ․ 평화 ․ 비폭력 혁명에 관한 명제)

부정적으로 정식화한 명제로서 ‘폭력을 없애지 않고 평등을 이룰 수 없다.’를 제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네 가지 국면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노골적인 폭력이 나타나지 않는 불평등사회(‘법과 질서’의 사회). 두 번째, 폭력의 국면(혁명적 폭력, 반혁명적 폭력). 세 번째, 불평등사회가 붕괴되어 평등한 사회질서가 만들어졌지만 당분간 폭력에 의해 유지되지 않을 수 없는 국면(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네 번째, 폭력이 불필요하며 평등이 계속 존재하는 국면.

이처럼 발전을 평등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론과 관련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폭력 없는 혁명은 없다.’는 명제의 이론적 근거가 다양하다. 불평등이라는 관계 속에서 지배계급의 기득권이 매우 크다. 여기에서 ‘지배계급의 착취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을 타파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폭력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도출된다. 이와 관련된 기본
적인 문제는, 혁명이 본질적으로 사람을 겨냥한 것이냐 구조를 겨냥한 것이냐는 점이다. 전자는 지도적인 인물이 목표이지만, 후자는 구조를 변화시키는 게 목표이다. 물론 양자는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적인 혁명과 관련하여 비폭력 혁명의 문제가 등장한다. 착취받은 자가 억압적 구조에 관여하는 것(마르크스주의의 구조적인 혁명)을 거부하고, 간디처럼 자신의 대항적인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간디처럼 과거의 착취자에게 원조를 제공하고 그들이 기본적인 불이익을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구조를 상대로 한 비폭력 행동이다. 비폭력이 의거하는 기본 사상 속에, 권력을 뛰어넘는 깊은 통찰이 깃들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억압적 구조의 옹호자에 대한 효과적인 대항력은 동일한 종류의 대항적 폭력이다. 그러나 비폭력적인 대항력은 다르다. 자존심․자립․대담함․자율․자기통제라는 비폭력적인 대항 수단이 있다.

Ⅲ. 타동사로서의 개발

  1. 개발-폭력-평화의 3자 관계
 
자동사로서의 발전은 주체(발전의 주체) 중심이다. 이와 달리 타동사로서의 개발은, 개발의 주체(선진공업국 및 선진공업국에 종속된 제3세계 국가․지배계급)가 객체(민중)를 타자(他者)로 삼아 부려먹거나 착취하는 관계이다. 개발 주체(선진공업국)가 객체(제3세계 국가)를 개발하는 타동사가 ‘develop’이다. 타동사 ‘develop’는 먹히는 개발이요 착취당하는 개발이므로 폭력적이다. 타동사로서의 개발은 폭력성을 머금고 있다. 직접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은폐되는 구조적 폭력을 머금고 있는 게 타동사로서의 개발이다. 타동사로서의 개발이 구조적 폭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구조적 폭력을 지양하는 평화의 과제가 절실하다. 여기에서 개발과 평화의 관련성이 깊어진다.

이러한 개발-폭력(구조적 폭력)-평화의 3자 관계를 잘 설명한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1980년 12월 초순에 요코하마에서 강연한 내용을 요약하며 해설을 곁들이면 다음과 같다.(坂本義和, 1982, 5-13)

개발이라는 구호 아래에서 민중의 평화를 공격목표로 삼는 세계적 규모의 싸움이 전개되어 왔다. 그 결과 개발이 진척된 지역에 사는 민중의 평화가 거의 상실되었다. 개발 주도 세력이 ‘개발=평화’라고 강변하는 평화는 ‘Pax Economica(인간이 경제에 예속됨으로써 얻는 평화)’로서 희소성의 가설에 바탕을 두고 규정된 평화이다. Pax Economica의 본질은 경제대국끼리의 세력균형 질서에 있으며, 이 질서 아래에서 제3세계를 대상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Pax Economica에 의한 개발은, 제3세계 민중의 ‘Subsistence Culture(어떤 사회를 그 사회답게 만드는 물질적․정신적인 기반)’을 파괴한다. 한마디로 Pax Economica에 의한 개발이 제3세계 민중의 평화를 유린한다. 민중의 생존환경(subsistence)이 ‘Pax Economica에 의한 개발’의 공격대상이 된다. 생존환경에 의존하면서 권력자의 개입을 거부하는 ‘민중평화’를 ‘Pax Economica에 의한 개발’이 짓밟으면서 평화의 의미를 독점한다. 본래 평화와 개발은 동떨어진 개념이었지만 유엔 창설 이후 평화가 서서히 개발(development)과 연결되어 왔다. 특히 1949년 1월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저개발지역 원조를 위한 Point 4’ 계획을 발표하면서 ‘평화는 개발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는 통념’이 생겼다.

‘Point 4’는 냉전 시대의 주도권을 쥐려는 미국판 Pax Economica의 개발계획이었으며 주요한 대상 지역이 제3세계이었다. 미국판 Pax Economica의 군사․정치적인 별명이 ‘Pax Americana’이다. Pax Americana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힘에 의한 세계평정’을 뜻하므로 반드시 세계화(Globalization)를 동반한다. 세계화가 없는 Pax Americana를 상상할 수 없다. 이렇게 Pax Americana와 짝을 이루는 세계화 속의 개발은 냉전 시대의 개발과 차원을 달리한다.

  2. ‘세계화 시대’의 개발

세계화는 전 세계를 예전에 없던 치열한 경쟁으로 몰아넣었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강요당한다. 전 세계의 물적․인적 자원을 단기간에 동원하여 특정 개발사업을 위해 편성하거나, 전 세계의 모든 장소․사람에게 개발의 물결이 미치게 하는 기능을 촉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화는 개발의 세계화이다.(戶崎 純, 2002, 42)

    1) 세계화 시대의 개발 개념 변화

1990년대 이후 동서냉전체제의 붕괴에 이은 세계화 시대가 시작되자, 개발 개념이 다시 변화되었다.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틀에서 이루어진 생산․교역이 국경을 넘어 확대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세계화는 경제의 세계화와 의식의 세계화를 동반한다. 경제의 세계화는, 시민사회의 무한한 축적충동․이윤욕에 뿌리내린 타동사형 개발․타율적 개발의 연장선상에 있다.(西川 潤, 2006, 6) 경제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사상은, 1960∼1970년대의 ‘근대화론’을 더욱 진척시킨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나타나고 있다.(西川 潤, 2006, 9)

세계화 추세가 21세기 들어 지구촌의 전역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전 세계의 대다수 국민․주민들에게 타율적인 개발을 안겨 주고 있으며, 개발의 수혜자와 개발에 저항하는 사회계층 사이의 골이 깊어지는 양극화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세계화를 주도하므로 세계화는 곧 ‘미국화’이다. 발전과 관련하여 말하면 세계화=미국화의 발전 노선이 강화되는 것이다.(西川 潤, 2006, 12)

      ① IMF
세계화=미국화의 발전 노선은 주로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구사되고 있으며, 세계화=미국화 발전 노선의 집행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은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삼으면서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겨냥한다.

자본시장 자유화에 곧잘 따르게 마련인 단기성 자금의 출입은 시장을 온통 황폐화시킨다. 작은 개발도상국은 작은 보트와 같다. IMF가 다그치는 방식의 급속한 자본시장 자유화는, 보트 밑바닥에 난 구멍이 메워지기도 전에, 선장이 채 훈련을 받기도 전에, 구명조끼가 보트에 실리기도 전에, 그 나라를 거친 바다로 내모는 것밖에는 안 된다…오늘날 IMF와 세계은행은 세계경제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어버렸다. 비단 그들의 도움을 모색하는 국가들뿐만 아니라, 국제 자본시장에 좀 더 잘 접근하기 위해 그들의 ‘허가서류’를 얻고자 하는 국가들도 그들의 경제처방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 처방은 그들의 자유시장 이념과 이론을 반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결과는 빈곤이었으며, 많은 국가들에 그 결과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이었다.(Stiglitz, 2002, 17-18)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사회 부분에 대한 정부지출의 축소를 동반하므로 빈곤 문제를 중심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대표적인 비판서로 국제아동기금(UNICEF)이 펴낸 {Adjustment with a Human Face}(Oxford: Clarendon Press, 1987)이 있다. 코리나(Corina) 등이 엮은 이 책은 실증연구를 통해 구조조정의 영향이 중립적이지 않음을 밝혀냈다. 즉 임신한 여성․아동 등 연약한 사람들에 대하여 보건․복지 측면의 궁핍화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유엔기구인 국제아동기금까지 나서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주장에 의문을 드러내면서 보조금의 삭감․수입자유화․시장중심주의에 대하여 회의하는 등 구조조정의 기본 원칙을 비판하고 있다.(元田結花, 2007, 52․쪽 55쪽)

      ② 워싱턴 합의
워싱턴 합의는 1982년에 시작된 외환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중남미 경제를 구출하기 위해 제시된 정책이다. 그 당시 전문가들은 중남미의 국가들이 비상조치를 통해 무역수지 흑자를 초래하여 외채이자를 상환한다는 것은, 실질소비를 현격히 감소시켜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저하시키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과감하게 외채를 삭감하고 외자를 새로이 공급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세계은행과 IMF 등 국제금융기구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이 외채 공여국 특히 미국에서 설득력을 얻어 가면서, 드디어 1989년 3월에 미국 재무성은 외채의 삭감과 함께 시장에 기반을 둔 개혁정책을 동시에 실시할 것을 중남미 국가에 권고하는 ‘브래이디 플랜(Brady Plan)’을 발표한다. 이러한 브래이디 플랜을 도출하고 실현에 옮기기 위한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소재하는 국제경제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었던 존 윌리엄슨(John Williamson)은 워싱턴에서 개최된 세미나의 주제 발표 논문에서 중남미 국가들이 외채위기에서 벗어나서 성장의 길을 다시 걷기 위하여 어떠한 정책을 채택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워싱턴의 식자들과 미국 재무성
및 브레턴우즈기관(IMF와 세계은행), 지역개발은행 및 미국 연방준비은행들간에 공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정책을 자기 나름대로 10개의 원칙(재정긴축․재정지출의 우선순위 조정․조세개혁․이자율의 자유화․경쟁적 환율․무역자유화․해외직접투자의 도입자유화․민영화․규제철폐․사유재산권 취득권리 보호)으로 개조하여 소위  ‘워싱턴 합의(WashingtonConsensus)’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NEXT 2006년 1월호, 103-107쪽 요약)

이 합의는 89년에 몰락한 동독, 91년에 해체된 구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에도 마치 ‘성서’와 같이 작용하여 일약 ‘개도국 일반의 경제개발정책 내지 원조정책’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달콤한 ‘복음’은 오히려 10년 넘게 이어 온 구조개혁과 금융위기 등을 부르며 하루아침에 환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침내 많은 식자들과 NGO 대표들은 실효성을 잃어버린 워싱턴 합의를 매장하고 ‘신워싱턴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NEXT 2006년 2월호, 122쪽)

이들 ‘신워싱턴 합의’파는 한결같이 개도국들은 워싱턴 합의에 동조한 적이 없으며, 이러한 정책은 ‘합의’가 아니라 미국이 브레턴우즈기관과 동조하여 중남미 국가에 강압적으로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라고 비난한다. 이는 마치 지난 세기 중반에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을 주장한 정치학자나 경제학자의 이론과 비슷한 주장이다. 또 워싱턴 합의는 그 이론적 근거를 ‘신자유주의 정신’(Neoliberalism)에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워싱턴 합의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개도국 개발정책이라고 주장하고 워싱턴 합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체를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개도국 개발정책으로서 적합하지 않으며, 오늘날의 ‘세계화’도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선진공업국만을 위한 세계화이며, 개도국들이 균등하게 세계화의 이익을 나누어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신세계화’가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NEXT 2006년 2월호, 122∼123쪽)

‘인간의 얼굴을 외면한 개발정책(Adjustments without human face)’이라고 비판받는 워싱턴 합의를 매장하고 새로운 합의를 내오자는 주장이 큰 힘을 얻고 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스티글리츠의 아래와 같은 비판은 주목을 받을 만하다.

        ⓐ 스티글리츠의 워싱턴 합의 비판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스티글리츠(Stiglitz)가 세계은행의 부총재로 지내면서 절감한 워싱턴 합의의 모순을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라는 책에서 폭로했다. 아래는 이 책의 주요 부분을 요약한 내용이다.

시장의 실패, 그리고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 정부가 할 일을 강조했던 케인즈 학파의 IMF에 대한 방향설정은, 1980년대의 시장경제 주문(呪文)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경제개발과 안정에 대한 급진적으로 다른 접근을 예고한 ‘신워싱턴 합의’ ―무엇이 개발도상국들을 위해 올바른 정책인가를 놓고 IMF,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가 일궈낸 합의―의 일환이었다.(p.16.)

워싱턴 합의에 의해 수립된 정책들의 순수효과는 다수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득을 안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경우 상업적 이익 및 가치가 환경, 민주주의, 인권, 사회 정의 등에 대한 관심을 대체했다.(p.20.)

재정긴축, 민영화 그리고 시장자유화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워싱턴 합의에서 나온 정책의 3대 기둥이었다.(p.53.) 워싱턴 합의에서 나온 정책들은 시장경제의 단순한 모델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기는 하되 불안전하게 작동하는 경쟁적 균형 모델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정부는 필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으며 ‘진보적인’ 시장이 완벽하게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워싱턴 합의에서 나온 정책들은 가끔씩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 근본주의’로 불린다.(p.74.)

IMF와 워싱턴 합의에 따른 접근법에 대해서는 좀 더 근본적인 비판이 있다. 이 접근법은, 개발에 사회의 변모가 요구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IMF의 전략이 단지 개발의 전반적인 잠재력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나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곳에서 저지른 실패는 불필요하게 사회의 구조 자체를 침식함으로써 개발 과제를 오히려 뒷걸음치게 만들었다.(p.76.)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반군(叛軍)들의 무장투쟁은 이 지역의 개발을 퇴보시킨 주된 요인이었다. 세계은행의 연구결과, 그런 무장투쟁은 IMF의 긴축 프로그램 때문에 생긴 것들을 포함해 여러 경제적 요인들과 체계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워싱턴 합의에 바탕을 둔 정책들은 분배나 ‘공정성’의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정책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다그친다면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은 통화 침투 경제학을 신봉한다. 궁극적으로는 그 성장의 이득이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흘러 내려간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통화 침투 경제학은 단순한 믿음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역사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없었다.(pp.77-78)

워싱턴 합의에서 나온 정책들을 채택한 다른 지역의 경우 가난한 사람들은 성장의 이득을 덜 보았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성장에 따른 불평등의 완화, 심지어 빈곤의 감소가 수반되지 않았다. 일부 사례에서는 오히려 빈곤이 증가했는데, 이는 점점이 박힌 도시지역 빈민촌이 증명한다.(p.79.)

빈민을 위한 워싱턴 합의 정책들의 어두운 면이 모두 예견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들은 분명해졌다. 고금리를 수반한 무역자유화가 어떻게 일자리 파괴와 실업자 창출의 확실한 처방이 되는지,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다. 적절한 규제구조를 수반하지 않는 금융시장 자유화는 경제 불안정의 거의 확실한 처방이다…그릇된 환경에서 막무가내로 추진되는 재정긴축은 높은 실업과 사회적 계약의 파기로 이어질 수 있다.(p.84.)

워싱턴 합의에 의해 강요된 정책들의 결과는 고무적이지 않았다. 개발은 느렸으며, 성장이 이룩되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생기는 이득은 균등하게 공유되지 않았다…개발도상권 내부에서 그 문제들은 심각했다…그럭저럭 약간의 성장을 이룬 멕시코 같은 국가들에서조차 이득은 대체로 상위 30% 사람들에게 귀속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상위 10%에 더 많이 집중되었다. 밑바닥 사람들은 거의 얻은 것이 없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이전보다 더 못살게 되었다. 워싱턴 합의에 따른 개혁으로 인해 많은 국가들이 더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그 위험은 그것을 극복할 능력이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의해 불균형적으로 감당되었다.(pp.86-87.)

Ⅳ. 개발(발전)론의 평화 지향적인 전환

스티글리츠가 강조하듯이 “필요한 것은 지속가능하며 공정하며 민주적인 성장을 위한 정책이다. 이것이 개발의 동기이다. 개발은 소수의 사람들이 부자가 되도록 돕는 것이 아니며, 국가의 엘리트들만을 살찌우는, 몇몇 무의미하고 보호받는 산업을 창설하는 것도 아니다. 개발은 도시의 부자들을 위해 프라다와 베네통, 랄프 로렌과 루이뷔통을 들여오면서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을 비참한 상태로 방치해 놓는 것이 아니다. 모스크바의 백화점에서 구찌 핸드백을 살 수 있음이, 러시아의 시장경제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발은 사회를 변모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며 모든 사람들이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보건과 교육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Stiglitz, 2002, 251-252)

‘사회를 변모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며 모든 사람들이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보건과 교육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평화 지향적인 개발(발전)론이 새롭게 등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자본 중심형 개발론에서 인간 중심형 개발론에로의 전환이, 평화 경제의 측면에서 요청된다.

제2차 대전 이후 발전도상국의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개발론’은 1970․1980년대에 들어 커다란 전환을 한다. 과거의 개발론(근대화론)이 자본․물질 중심인 데 비하여 새로운 개발론은 인간 중심적이다.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유행한 개발론은 경제규모를 확대하고(경제성장)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자금을 투입하여 사회경제의 기반시설(infrastructure)을 정비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도로․철도․항만․발전소․공항 등의 정비효과가 산업화로 연결되어, 그 효과가 사회 전체에 고르게 미치게 하면(trickle down) 사회 저변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의 빈곤도 결국 해결된다고 상정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발론은 수많은 문제를 초래했다. 경제성장에 의한 공업화에 성공한 국가들도 있지만, 이 공업화는 환경파괴․공해를 가져왔다. 또 경제성장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지지 않은 끝에 빈부의 확대를 불러일으켰다. 특권계급은 부를 얻었으나 사회적으로 발언권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변함없이 가난한 채 경제성장의 은혜를 받을 수 없었다.(藤文彦, 2002, 6-7)

1945∼1960년대의 개발론이 낡은 모델로서 예기했던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새로운 방법론을 1970년대부터 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개발론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발은 단순히 경제규모를 확대하는 것으로만 달성될 수 없다. 과거의 경제성장 중시의 정책은 그 폐해가 크다. 개도국 사람들의 생활개선을 겨냥하려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남자․여자들이 중심이 된 활동을 할 수 있는 과정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개도국 사람들을 제1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藤文彦, 2002, 7-8)

낡은 개발론의 자본 중심 모델과 새로운 개발론의 인간 중심 모델을 비교․평가한 챔버스(Robert Chambers)의 논문(Chambers, 1995)을 보면, 후자의 인간 중심 개발 패러다임이 더욱 평화 지향적임을 알 수 있다. 자본 제1(第一)이 아닌 인간(개인) 제1의 개발(발전)론이 평화 경제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평화 지향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개발 패러다임을 만든 학자들의 논리를 중심으로 평화를 위한 개발(발전)론을 정립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 작업을 위해 참가형 발전론, 인간발전(인간적인 발전)론, 내발적(內發的) 발전론을 소개한다.

  1. 참가형 개발

{Whose Reality Counts?}라는 저서를 펴낸 챔버스는, ‘주체적 참가형 농촌조사법(PRA: Participatory Rural Appraisal)’과 ‘주체적 참가에 의한 학습․행동(PLA: Participatory Learning and Action)’을 제시한다. ‘Participatory’를 두문자로 삼는 PRA․PLA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개발에 참여하는 인간 중심형 개발(발전)론이다. ‘개발’에 스며 있는 타자성(他者性)을 지양하고 자발성을 높이려는 뜻에서 ‘Participatory’를 단순한 참가가 아닌 ‘주체적 참가’로 번역했다.

챔버스의 참가형 개발 모델은, 1970년대 이후에 새로운 개발론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연구자․실무자들의 시행착오 끝에 나온 것이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AC)가 ‘1990년대의 개발협력에 관한 정책성명’을 1989년에 발표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 성명은 “사람들의 생산적 에너지를 자극하고, 모든 사람들이 생산과정에 광범위하게 참가할 것을 장려하며, 이익을 더욱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 개발전략과 개발원조의 중심적인 요소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이 개발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가해야 하고, 사람들이 개발의 편익을 되도록 평등하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이 성명을 강조한다.(藤文彦, 2002, 4)

DAC는 1990년대 말에 ‘저변이 넓은 성장(broad-based growth)’ 개념을 제창하면서, 경제성장의 저변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참가형 발전’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였다.(西川 潤, 2006, 11)

그런데 참가형 개발에 기증자(donor)로 참여하는 측의 태도가 신자유주의를 고수하면 참가형 개발이 신자유주의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더구나 참가형 개발(발전) 모델의 서양적(미국적)인 측면으로 말미암아 서양 중심주의로 인식될 수 있다. IMF의 구조조정 이후 경제적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려는 기증자 측의 정책의도에 변함이 없다. 참가형 개발을 에워싼 정치적 원조는 서양을 모범으로 한 자유주의적인 것을 상정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구조조정의 관(冠)을 쓰지 않아도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기조라는 지적이 있다.(Simon, 2002, 86-92) 인간개발을 위해 개인에게 선택을 위임하는 발상이 신자유주의적 발상과 합치하여, 참가형 개발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떠받치는 수단으로 이용될 여지도 있다. 참가형 개발의 ‘능력배양(empowerment)’, ‘참가’도 신자유주의와 친화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Nicholls, 1999, 158-161)

  2. 인간 개발(발전)론

워싱턴 합의와 같은 ‘인간의 얼굴을 외면한 개발정책’을 지양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개발정책을 지향할 필요성에 따라 ‘인간개발(인간적인 개발; Human development)’론이 등장하게 된다.

‘인간개발’의 발상은 유엔개발계획(UNDP) 등의 유엔기구에서 제기되었고 이를 사상적으로 종합정리한 학자가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이다.

    1) UNDP

UNDP는 1990년도부터 ‘인간개발 보고’라는 연차보고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보고서는 개발의 목적을 ‘인간개발’에 두고, 국제적인 개발협력의 목적을 인간개발 쪽으로 전환할 것을 호소한다. ‘인간개발’이라는 개념을 안출한 배경을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개발이란 GNP의 성장, 소득․부(富)․재화의 생산, 자본축적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소득을 얻는 것은, 그의 인생의 선택일지 모르지만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전체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개발은, 사람들의 선택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다양한 선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건강한 생활을 지내고 교육을 받고 인간다운 생활에 어울리는 자원에 접근할 수단을 갖는 일이다. 더 나아가 정치적 자유, 인권보장, 자기존엄도 중요한 선택이다.” 이 보고서에 또 “인간개발은 인간의 잠재능력(Capability) ―보건․지식의 개선―을 형성하는 것 이상으로 이들 능력을 어떻게 이용하고 발휘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능력의 이용이란 일․여가․정치활동․문화활동 등의 여러 측면에 나타난다. 만약 인간개발의 정도에 따라, 인간능력의 형성과 능력의 이용 사이에 어긋남이 드러날 때 인간의 잠재능력의 커다란 부분이 낭비될 것이다.”(UNDP, 1990, 1)

여기에서 인간개발의 기본 개념으로 ‘잠재능력(Capability)’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아마티아 센의 개념이다. Capacity는 어떤 것을 산출하는 힘을 지칭하나 잠재능력(Capability)은 인간의 여러 활동․상태(doings and beings)를 실현하는 자유․능력을 의미한다(capacity+ability). 잠재능력의 형성․이용은 개인의 능력임과 동시에 공공정책의 책임이기도 하다. 공공정책의 책임이란, 능력의 형성․발휘를 보장하는 정책환경 형성의 책임이다. 이 정책환경의 형성과 관련하여 1993년의 UNDP 보고서는 인간개발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참가(people’s participation)가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 NGO․NPO 등의 시민사회가 개발과정에 참가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1995년의 코펜하겐 사회개발 정상회담을 위해 준비한 보고
서는, 인간개발을 위한 ‘인간의 안전보장(safety net)’이라는 발상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안전보장을 위한 정부․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1995년의 사회개발 정상회담은, 시민사회의 참여 없이 인간개발과 그것을 보장하는 사회개발이 있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 이로써 개발이념이 경제성장에서, 전 세계적인 빈곤․실업․사회분열을 막기 위한 ‘인간 중심형 발전(human-centered development)’ ‘민중중심형 발전(peoplecentered development)’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합의가 성립되었다. 이와 동시에 개발의 주체가 종래의 경제성장 시대에는 정부․기업이었으나 새로이 ‘제3의 개발 주체’로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강조되었다.(西川 潤, 2000, 291-292)

    2) 아마티아 센

19세기에 형성된 고전파․신고전파 경제학의 ‘효용(utility)’을 기초로하는 주관주의적 가치관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 바탕을 두고 있다. 벤담(Bentham)의 공리주의에 의하면 사회적인 쾌락을 최대로 만드는 것이 사회의 이익=행복의 최대화이다. 이러한 공리=효용주의에 대하여 밀(J. S. Mill)은 ‘사람에 따라 효용의 질이 다르다. 효용, 즉 쾌락은 반드시 인간의 행복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 만족한 어리석은 자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한계혁명 이후 한계효용 제로(0)의 상태가 자원의 최적 배분을 보장한다는 정태균형(靜態均衡)의 가설이 신고전파의 가치론이 되었다. 이러한 한계효용설은 벤담의 공리․효용주의를 계승한 것이다. 경제학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 끝없는 욕망=효용=행복의 충족을 겨냥하는 경제인적(經濟人的)인 인간상의 가치관을 만족시키는 학문이 되었다. 효용주의는 어떠한 인간의 어떠한 효용일지라도 등질의 한 단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정치적 민주주의․평등주의적 시장경쟁 사회의 윤리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시장경쟁에서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s)가 일어나 빈부격차․지역격차․공황․실업․독점․과점․투기․공해․환경파괴 등이 확대되는 현상이 인지되었다.(西川 潤, 2000, 297-298)

여기에서 롤스(John Rawls)는 ‘모든 인간은 효용의 극대화를 겨냥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을 부정하고 ‘어떤 사회가 민주적 사회로서 시민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자유, 불리한 구성원에 대한 배려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회원리의 윤리성 문제를 제기한다.(Rawls, 1995)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효용주의를 최고로 삼은 사회이론(합리적 선택론)에 따라 개인의 합리적 행동이 누적된 사회제도의 기초를 이룬다는 생각>에 대하여, (사회 그 자체의 성립의 기초를 이루는) 자유․기회의 평등․약자에 대한 배려를 요구한 점에서, 롤스의 효용주의 비판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롤스의 공리=효용주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서구 전통의 개인주의적 자유․기회의 평등이라는 가치관에 입각하여 복지사회의 일체성을 지키려고 의도하는 규범적 논의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효용주의 비판을 더욱 진전시킨 사람이 아마티아 센이다. ‘Entitlement(權原)’과 ‘Capability(잠재능력)’에 바탕을 둔 아마티아 센의 효용주의 비판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아마티아 센은 ‘권원(權原, Entitlement)’을 ‘어떤 개인이 지배할 수 있는 일련의 선택적인 재산의 집합체’, 즉 ‘어떤 사람이 소비를 선택할 수 있는 재산의 집합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개개인의 권원은, 그 사람의 ‘부존자원(endowment; 소유권)’과 그 사람이 교환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 즉 ‘교환 권원(exchange entitlement)’의 쌍방에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
했다. 어떤 사람의 ‘부존자원’은, 예를 들면 노동자의 노동력이라든가, 지주의 토지보유라는 것이다. ‘부존자원’은 교환을 통해서 선택적인 재산의 집합체를 보유하는 형태로, 권원을 확립하기 위해서 사용된다.(Sen, 1983)

      ① ‘권원’과 ‘잠재능력’

‘권원’은 인간의 권리에 의거하여 인권을 보장하는 물리적 기반을 지칭하는 개념인데, 어떤 사람의 권리행사에 의해 타자가 권원을 상실하여 빈곤․기아가 일어나는 일이 있다. 권원이란 권리의 행사에 의해 획득하거나 상실하는 재화 서비스의 지배 또는 그것들에 접근하는 정황에서 단순한 규범적 개념이 아니다.(A. Sen and A. Hussain, 1995, 제2장)

각국의 경제․정치제도는, 그 제도 속에서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를 지배하는 권원관계를 만들어낸다. 빈곤의 제거는 궁극적으로는 권원의 증가를 의미한다.(繪所秀紀, 2005, 314)

어떤 인간의 권원 정황은 그 인간의 기본활동(functionings)을 결정하게 된다. 인간의 기본적 활동이란 충분한 영양섭취, 요절의 방지, 질병에 걸렸을 때 적절한 의료를 받는 등 삶과 관련된 기본적인 활동에서 자존심을 지키고 행복하며 지역생활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며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활동의 조합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의 잠재능력
(capability)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잠재능력’이란, 인간이 기본활동의 선택을 통하여, 여러 가지 가능한 생활 속에서 선택해가는 것을 가리킨다. 기본활동을 실현시켜가는 능력은 인간의 후생=잘사는 생활(well being)을 실현시키고 더욱 잘사는 생활의 달성 여부는 기본활동의 선택을 실현하는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다.(西川 潤, 2000, 303-304)

아마티아 센에 의하면 ‘well being’은 어떤 사람의 ‘달성(achievement)’, 즉 ‘그 사람의 인생(being)이 어떻게 좋은 것인가’, 즉 ‘인생의 좋은 것’을 나타내는 개념이다.(繪所秀紀, 2005, 322)

아마티아 센은 경제성장을 다루는 통상의 경제학이 빈곤․곤궁․잘사는 생활․기본적 필요의 충족․생활의 질 등 인간생활과 관련된 문제에 대답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개발 경제학이 이런 문제를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Sen, 1988)

개발 경제학은 결국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잘사는 생활․잘사는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느냐는 윤리적인 물음에 대답하는 학문이며, 기본활동의 달성 여하와 관련되어 있다. 기본활동은 단순히 재화․소득에 의한 행동(doing)이나 상태(being)의 실현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본활동의 조합에서 어떤 조합을 선택하는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다. 이처럼 기본활동의 달성․활동 범위의 확대를 개발이라고 생각한다면, 개발/ 발전은 조합을 선택하는 자유의 확대에 다름 아니다.

아마티아 센의 ‘경제개발/ 발전’ 담론은, 거시경제의 성장론에서 크게 벗어나 개인의 자유․인권을 기초로 한 개별적인 지역․사회집단의 잘사는 생활․잘사는 평화에 관한 것이다. 잘사는 생활․잘사는 평화를 위한 개발․발전 담론이 아마티아 센의 인간발전론의 핵심이다. 아마티아 센은 인간발전 중심의 평화주의 노선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마티아 센의 인간발전론은 개인 차원의 잠재능력(Capability)을 과제로 삼기 때문에 민중참여, 시민사회의 개발 주체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펴낸 {Development as Freedom}에서 개인의 자유와 (이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 시스템의 관련을 다루고 있으나 정책환경 문제(공공정책․비영리활동의 연결 문제)가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3. 내발적 발전론

‘development’를 개발로 해석할 때 개발의 주체와 객체가 달라 타율적․외생적(外生的)․외발적(外發的)인 어감이 있으나, 발전으로 해석할 때 발전의 주체와 객체가 일치하므로 자립적․내생적(內生的)․내발적(內發的)인 어감을 준다. 어감상 ‘발전’에는 이미 ‘내발적 발전(endogenous development)’이 내포되어 있다.(주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발적 발전’을 강조하는 이유는, 근대화론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개발과 서구형 근대화가 동의어로 파악되는 단선적인 개발론, 즉 서구형(특히 미국형) 개발이 유일한 개발이라는 논의에 대한 대항 담론 중 하나가 내발적 발전론인 바 ‘또 하나의 발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대화론은 미국형 근대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한편 이를 뒤집은 종속론 역시 미국 중심의 신식민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양자 모두 국제관계를 단일한 단계적 발전계(發展系) 또는 착취․피착취의 위계체계로 보는 점에서 비슷한 형태이다. 양자의 공동된 특징은, 각각의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독립변수로 평가하지 않는 데 있다. (武者小路公秀, 1978, 68)

1970년대에 풍미했던 근대화론에 대항하여, 각 지역․공동체에 자기 고유의 자원․문화․독창력에 대응한 발전의 길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발전은 필연적으로 선전-후진의 단선적 발전의 길을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계통의 길을 걷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내발적 발전론은, 1990년 전후부터 새롭게 일어난 지역주의 발전론의 이론적인 지주가 되었다. 세계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국가의 경계가 낮아지고 새로이 지역주의가 발흥하고 있다. 이 지역주의는, 세계화에 대항하여 유럽이 소규모 세계화(mini-globalization)를 만들어내는 측면, 자기의 자원․문화․독창력를 중시하는 내발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내발적 발전론 보다 약간 늦은 1980년대 중반에 새롭게 등장한 개발 패러다임으로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패러다임이 있다.(西川 潤, 2006, 15)

이를 평화와 관련하여 언급하면, 로스토우(W. W. Rostow)의 5단계 경제성장론(전통적 사회 단계→이륙준비 단계→이륙 단계→성숙 단계→고도 대중소비 단계)을 수용한 제3세계 국가들의 평화 상실(peacelessness)에 대한 평화 경제의 대안으로서 자력갱생의 내발적 발전론이 등장한 측면이 있다.

갈퉁은 자력갱생의 내발적 발전론이 평화유지의 요건이 된다고 강조한다. 갈퉁은 부자 나라 사람들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현재의 생활 양태를 변경하는 것이 긴급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제3세계 나라들이 석유 등의 귀중한 에너지 자원을 자국에서 정제하여 소비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자원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것을 거부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 경우 선진공업국들이 현재의 고도 소비생활 양식을 유지하려면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생활양식의 단순화, 자국에서 얻을 수 있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태양열․地熱 풍력․수력 등)의 활용은 평화유지의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선진공업국들도 자력갱생의 내발적 발전의 길을 긴급하게 모색해야 한다.” (Galtung, 1976, 83-96)

    1) 내발적 발전의 5가지 측면

지금까지 내발적 발전의 총론을 기술했으므로 이제 각론에 들어간다.

‘내발적 발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하마슐트 재단(주2)이 1977년에 출판한 또 하나의 발전 은, ‘악성개발(maldevelopment)을 낳는 경제성장 우선형의 발전’을 대신하는 ‘또 다른 발전’의 내용으로서 아래의 5가지 측면
을 제시한다.(Nerfin, 1977, 10-11)

      ① 기본적인 필요에 관련되어 있다(need-oriented)

이는 발전의 목표가 재물(財物)의 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정신적인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주력한다. 오늘날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피억압 대중의 의식주․교육․위생 등의 기본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게 과제이다. 발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인간이 자기표현․창조․평등․공생 등의 필요,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필요를 충족시켜 가는 데 있다.

      ② 내발적이다(endogenous)

이는 스스로 주권을 행사하고 자기의 가치관․미래전망을 결정할 수 있는 사회의 내부에서 생기는 발전의 모습을 가리킨다. 이러한 발전은 필연적으로 단선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 경제사회 단위의 역사적․구조적 정황에 따른 복수의 발전 모델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발전 모델의 복수성에 대하여 존중해야 한다.

      ③ 자립적이다(self-reliant)

내발성의 기반은 자립성이다. 각 사회의 발전은, 각각의 자연적․문화적 환경 아래에서, 해당 사회 구성원이 지닌 활력을 생기게 하고 그 경제사회가 가진 자원을 이용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립형 경제의 형성은, 국민경제․국제경제(집단적 자력갱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근간은 Carey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지역경제의 자립성이 핵심이다.

      ④ 생태적으로 건전하다(ecologically sound)

지배적인 경제성장 우선형의 발전에서는 환경보전 측면이 자주 무시되고, 자자손손의 세대가 향유할 환경자원․생태계를 파괴하고 다음 세대뿐 아니라 현재의 세대의 빈곤화를 초래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또 다른 발전’은 지방적인 생태계에 다음 세대의 이용에 대한 배려를 추가하며 현재의 세대․다음 세대가 함께 환경자원으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얻고 이를 합리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을 도모한다. 이와 동시에 적정기술을 이용함으로써, 모든 자원에 대하여 사회 성원 모두가 공정한 이용기회를 보장받는다.

      ⑤ 경제사회 구조의 변화에 바탕을 둔다(based on structural transformation)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의사(意思)․정책 결정에 참가하고 스스로 관리할 수 있기 위해서, 사회관계․경제활동․경제활동의 공간적인 분포․권력구조 등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농촌․도시에서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적용되며, 이러한 경제사회 구조의 변화가 없이 ‘또 하나의 발전’을 세계적인 규모로 달성할 수 없다.

    2) 내발적 발전의 특징

위의 5가지 측면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를 내세우는 내발적 발전론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西川 潤, 2000, 32-33)

      ① 내발적 발전론은 유럽․미국에서 비롯된 자본축적론․근대화론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근대화론 패러다임의 경제인상(經濟人像)을 대신하는 전인적(全人的) 발전이라는 새로운 인간상(人間像)을 정립한다. 따라서 이윤획득․개인적 효용의 극대화보다 오히려 인권․인간의 기본적 필요의 충족에 큰 비중을 둔다.

      ② 내발적 발전은 자유주의적 발전론에 내재하는 일원적(一元的)․보편적 발전상(發展像)을 부정한다. 즉 자유주의적 발전론에 수반되는 타율적․지배적 관계의 형성을 거부하고, 이를 대신하여 자율성․상호분배 관계에 기초하여 공생사회 만들기를 지향한다.

      ③ 내발적 발전은 참가․협동주의․자주관리 등 자본-임노동, 국가-대중이라는 자본주의․중앙집권적 계획경제의 전통적 생산관계와는 다른 생산관계의 조직을 요구한다. 국가기구․경제운영의 여러 층위에 있는 노동자․생산자․이용자들의 참가․공동결정․협동관리는, 자본주의․사회주의 쌍방의 경제사회 내부에 협동조합 부문을 육성하며 이들 경제사회 시스템의 중앙집권주의․권위주의적 타율관계를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④ 내발적 발전에서 지역 차원의 자력갱생(self-reliance), 자립적 발전의 체계 형성이 중요한 정책 수단이 된다. 국가․지역․도시․농촌 등 모든 차원의 지역적 산업 연관, 지역 안의 수급 형성에 의한 지역적 발전,지역적 공동성의 창출은, 거대개발․다국적 기업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분업설정․자원 흡수, 단일문화 강압에 대하여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는 경제적 기반이 된다. 지역자립은 동시에 주민․생태계 간의 균형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태계․환경의 파괴는, 주민을 빈곤화하고 자력갱생의 기반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3) 내발적 발전의 사례: 아시아를 중심으로

내발적 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료 관계상 아시아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내발적 발전의 사례를 소개한다. 西川 潤이 엮은 {アジアの內發的發展}에 나오는 아시아지역의 내발적 발전 사례를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① 타이의 개발 승려들

타이의 사회참가형 불교(socially engaged buddhism)를 선도하는 승려들은 아래로부터의 개발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국가체제와 밀착한 보수불교(상좌부 불교)를 혁신함으로써 상좌부 불교 특유의 개인적 해탈에서 벗어나 사회적 실천, 사회개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깨달음(진리)의 내용을 바꿨다. 즉 위로부터의 개발에 대항할 수 있는 마음의 개발, 인간개발 노선을 취했다.

      ②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운동(Sarvodaya Shramadana Movement)

이 운동은, 스리랑카의 전통문화인 불교와 간디주의에 기반을 두고 개인․가족․지역․국가․세계 등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의 ‘깨달음과 행복’을 겨냥한 비폭력운동이다. 사르보다야는 ‘슈라마다나(shramadana; 능력을 서로 나누어 가짐)’라고 불리는 노동 캠프를 조직하고 민중이 주체적으로 개발에 참가하여 자비․지혜 등의 불교적 가치․정신문화에 눈뜨는 것을 장려한다. 최근의 프로그램으로 빈곤경감(PEEP), 여성․빈곤층의 능력배양, 유아보육(ECDP), 농촌기업(REP), 관리능력 연수(MTI), 농업기술 서비스(SRT), 수입향상(IGP) 등을 중시하고 있다.

      ③ 간디와 프레리(Paulo Freire)의 이론에 따른 교육(교육제도 밖의 지역․사회교육): 방글라데시의 BRAC(Bangladesh Rural Advanced Committee)교육 프로젝트,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방식의 교육

      ④ 도시의 내발적 발전: 도시 슬럼(slum)의 자립운동

아시아의 전 지역에서 근대화와 더불어 폭발하고 있는 슬럼의 주거 문제와 관련하여 주민운동의 차원에서 조명한다. 슬럼에 거주하는 도시 빈민층은 ‘주거권’이라는 새로운 인권 개념을 내걸고 다양한 주거생활․생활문화를 창조하면서 주민참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운동에 관여하고 있는 민중조직(PO)과 주민조직(CBO)의 활동을 스리랑카․타이 등에서 검증할 수 있다.

      ⑤ 인도 서북지방의 ‘자영 여성노동자 협회(SEWA)’: 최빈곤 여성의 능력배양 프로그램

인도 서북지방의 구자라트 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SEWA의 최빈곤여성 자립․능력배양 운동이다. SEWA(Self-Employed Women’s Association)는 간디주의자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구성원의 대다수가 차별받는 문맹자이며 일터에서 착취받는 하위 카스트 여성들이다. 이들 여성들은 노점상․ 행상, 가내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등으로 일하고 있다. SEWA는
이들 여성 영세 자영업자들의 협동조합을 운용하고 있다. SWEA의 협동조합은 간디의 스와데시(지역자급) 정신을 따르고 있으나 내발적 발전운동에 다름 아니다. SEWA는, 하위 카스트 여성의 노동권, 생산의 소유권을 옹호하고 여성들의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여성의(더 나아가서는 지역사회․국가의) 경제적 자립에 공헌하고 있으며, 구조적 폭력을 극복하는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⑥ 적정기술의 창출에 주력하는 NGO운동

내발적 발전을 경제기술의 측면에서 떠받치는 적정기술, 중간기술을 인도네시아 중부지방의 현지인에게 습득시키는 운동이다.

      ⑦ 필리핀의 지역산업

필리핀의 뿌리 깊은 경제자립론, ‘또 다른 발전론’과 관련하여 지역산업의 현황을 살펴본다. 필리핀은 1950년대 말부터 민족적 공업화론, 경제자립론의 흐름이 강한 탓으로, 1980년대 이후의 세계화론․IMF의 구조조정론에 비판적이다. 공예품․식품․구두․의류 등의 지역산업이 필리핀 경제를 밑바닥에서 지탱해 주는 존재로서 중요하다. 실제로 지역산업이 제조업 생산물의 99%, 고용의 50%, 부가가치의 25%를 차지하므로 내발적 발전의 측면에서 지역산업을 육성하는 운동이 매우 중요하다.

      ⑧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 있는 촌락의 내발적 역동성

발리 섬의 농촌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세계는 사회집단․사회관계의 네트워크가 중층적으로 짜여 있거나 상호 협동하는 등 내발적 변화의 에너지를 배출하고 있다. 발리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정치적․종교적 측면에 직접 관여하는 공동체 조직인 반자르(banjar), 수바크(subak)라는 수리조합(관개용 수로의 건설․정비 등을 에워싼 의무․경비 부담을 나누는 조합), 쁘막산 뿌라(pemaksan pura)라는 사원의 신도집단(특정의 사원을 유지․관리하거나 제의를 시행하는 신도집단), 수카(seka)라는 자원봉사 집단을 통해 내발적 발전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

      ⑨ 태평양 도서(島嶼)지역의 사회자립 가능성

태평양의 도서지역은 자원의 부족 때문에 대외 의존도가 높고 세계경제 체제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는 운명에 빠져 있다. 요즘 이 지역에서 내발적인 자립을 강구하기 위한 도서 사이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등 새로운 자립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Ⅴ. 결론: ‘개발 지상주의 패러다임’에서 ‘평화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앞에서 설명한 참가형 발전․인간발전․내발적 발전은, ‘개발 지상주의(至上主義) 패러다임’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서 ‘자력갱생을 통한 평화 패러다임’을 제창한다.

개발 지상주의 패러다임은 경제개발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달성 가능한 정책목표라고 생각하는 관념 틀이다. 개발이 실시되는 지역에 사는 인간들의 생존환경(subsistence)이 맨 먼저 희생되는데, 이런 희생도 개발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이와 같은 개발 지상주의 패러다임을 전제로, 개발을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내걸고 국가적인 동원을 도모하는 이데올로기가 개발주의(developmentalism)이다. 개발 최우선이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개발 지상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발주의에서 개발의 주체는 국가이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정책목표를 설정할 때 ‘개발 패러다임’을 은폐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이었다.(戶崎 純, 2002, 42-43)

개발주의란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즉 자본주의)를 기본 틀로 삼지만 산업화의 달성(즉 1인당 생산의 지속적 성장)을 목표로 하고, 그것에 도움이 되는 한 정부가 장기적 관점에서 시장에 개입하는 것도 용인하는 형태의 경제 시스템이다. 개발주의는 명백하게 국가(혹은 유사한 정치적 통합체)를 단위로 설정되는 정치경제 시스템이다. 그 경우,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해서 얼마간의 제약(왕정제․일당 독재제․군부 독재제)이 가해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村上泰亮, 1993, 5-6)

러미스(C. Douglas Lummis)는 이와 같은 개발(지상주의)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Lummis, 1991, 25-57)

      ① 개발주의는 2차 대전 이후의 냉전 시대 초기에 미국의 자본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공작이었다. 공작의 대상은 자본이 진출하는 나라의 민중․유엔․미국 시민 중의 식민지주의 비판세력이었으며, 공작 의 주동자는 미국 정부이었다.

      ② 주로 제3세계의 ‘저개발’ 병(病)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여 해당 사회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자본제 공업국가들의 의식적인 사업이 개발이다.

      ③ 개발 이데올로기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번영으로 유도하는 게 아니라, 자본진출의 목적이 개발에 있음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었다.

      ④ development의 본래 의미는, 씨앗이 싹을 내는 것같이 ‘내부에서 준비하여 짜여진 변화의 전개’이다. 자연과 약속한 상황의 출현을 생각하도록 하는 이 용어가,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환경을 파괴하는 댐 건설․삼림벌채․공업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요용되고 있다. ‘내부에서 준비하여 짜여진 변화의 전개’, 즉 본래적인 도달 가능
성의 실현이야말로 development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가지고 들어온 변화에 의해 그 가능성을 파괴해버리는 것을 개발이라고 부른다. 용어의 의도적인 오용에 의해 파괴가 정당화되고 개발의 구조적인 폭력성이 은폐되어, 개발을 국제사회의 기본적인 공통목표로 하는 이데올로기가 널리 유포되어 왔다. 동서 양진영의 개발경쟁․원조경쟁은 냉전의 중요한 측면
이었다. 냉전 시기에 확립된 ‘개발 패러다임’은 (탈냉전 시기에 급속히 전개되는) 세계화의 기초 조건이 되었다.

이처럼 세계화 시대의 개발 지상주의 패러다임은 구조적 폭력을 낳는 온상이므로, 이를 지양하는 평화운동이 필요하다. 개발 지상주의 패러다임을 평화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운동이 요청된다. 이 운동은 ‘민중들이 자력갱생하며 잘사는 평화’를 증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민중들의 Subsistence(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간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해 가는 틀, 개인과 집단의 본래성을 발현시켜 類로서 영속시키는 조건의 총체) 보호를 제1의 목표로 삼는 평화 경제의 틀을 마련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풍요함=쾌락’을 지향하는 Pax Economica가 아니라, ‘폭력(개발 지상주의의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민중평화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① Pax Economica에 대항하여 ‘Subsistence에 의존하는 민중평화’를 실현하는 담론을 내와야 한다. 이 대항담론은 ‘근대화․개발주의․국가’를 상대화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게 바람직하다. ② 쾌락 지향의 개발 지상주의․개발 패러다임을 취하지 않고 구조적 폭력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개발 패러다임의 모순과 구조적 폭력을 동시에 없애는 작업이 생각보다 어렵다. 이반 일리치의 평화론에 구조적 폭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戶崎 純,2002, 50)이 이를 반증한다. 한편 구조적 폭력의 대가인 갈퉁이 개발 패러다임 비판에 소홀한 점(戶崎 純, 2002, 50-51)을 미루어 볼 때, 개발 패러다임과 구조적 폭력을 연결 지으며 평화를 증진하는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개발 지상주의가 약속하는 쾌락을 쉽게 물리치기 어려운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인간은 욕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③ 개발 지상주의 패러다임 대신에 평화 패러다임을 삶의 가치로 삼는 평화운동을 의식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운동에 앞서 개발 중독․서구 지향적인 개발주의 중독에 걸려 있는 가치관부터 고쳐야 하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은 노릇이다. ‘비서구(非西歐) 제3세계 운동의 기수인 사르보다야 운동이 서구 근대(제국주의)의 주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橫山正樹, 1996, 4)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서구 지향성의 중독은 심대하다. 서구 지향성의 중독에 걸려있는 한 개발주의의 중독에서 벗어나 민중평화를 지향하기 힘들다. 평화․민중평화(민중을 위한 평화)․평화 경제를 말하려면 개발 중독부터 제거해라! 개발 광풍3)을 잠재워라! 그렇지 않으면 개발에 의한 침략(삶․생활세계에 대한 침략)을 허용하게 된다. 개발 중독 상태에서 평화를 위한 개발(발전)을 거론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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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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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계우 「발전 향한 2세대 개혁」 NEXT 200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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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00호에 실린 필자의 글「잘사는 평화 (5 」(2007.11.20)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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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내발적 발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파슨즈(Talcott Parsons)는, 근대화 사회를 내발 발전형(endogenous)과 외발 발전형(exogenous)으로 나눈다. 전자는 근대화의 모델을 자기 사회의 내부에서 천천히 시간을 갖고 자력으로 창출했다. 후자는 자기 사회의 외부에서 모델을 차용하여 근대화를 추진했다. 내발 발전형은 엄밀하게 영국에만 해당되지만, 미국․프랑스․독일이 여기에 준(準)한다. 리비(Levy)는, 전자를 토착적 발전자(indigenous developer)라고 부르고 후자를 지참자(遲參者, latecomers)라고 부른다. 이는 근대화에 착수한 시기에 따른 분류이다.(武者小路公秀, 1978, 60)

(주2) 스웨덴의 하마슐트 재단이 1975년의 유엔 경제특별 총회에 (1970년대 중반의 Oil shock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한 보고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또 하나의 발전’이라는 개념을 제기했을 때, 그 속성 중 하나로 ‘내발적’이라는 단어를 ‘자력갱생’과 함께 처음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