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화연구(이론)-평화학/평화 만들기의 대안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우리 민족의 과제

김승국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잘 사는 길(peaceful well-living)’을 모색하는 것은 통일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필수적이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통일을 절규해 왔으나, 평화롭게 잘 사는 길을 찾는 데 소홀한 점이 있다.

도대체 평화롭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well-living’은 ‘복지’ 등으로 직역되나, 이 말은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well-living’은 소크라테스 이후 그리스 철학자들의 기본적인 질문으로서, 자기반성(self-reflection), 즉 삶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성적인 사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내포한다. ‘아테네 시민들이 영혼을 잘 가꾸는 게(eudaimonia) 그리스 사회를 통합시키는 지름길’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지론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에도 적용된다.

근대사회의 바람직한 ‘well-living’을 강조한 밀(John Stuart Mill)은 ‘배부른 돼지보다 생각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돼지같이 살면서 소크라테스가 되는 걸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 관자(管子)의 지혜를 빌릴 필요가 있다. 중국 고대의 경륜가인 관자(管子)가 말하듯이 ‘의식(衣食)이 족(足)해야 백성들의 의식(意識)이 발달한다.’

이를 평화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면 ‘평화로운 사회를 조성할 만한 물리력(衣食)이 있어야 평화의 의식(意識: 평화의 감수성)이 샘솟듯 올라와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 여기에 사회과학적인 용어를 대입한다면, 평화체제의 하부구조(평화의 경제: 평화로운 사회를 조성할 만한 물리력 ・자원 ・자본)와 상부구조(평화의 의식: 한반도의 경우 평화통일을 향한 민족의 念, 평화통일 이념)의 변증법적인 종합과정이 필수적이다.

1. ‘평화체제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변증법적인 종합’을 추구하는 통일

평화운동과 통일운동을 겸행하는 필자는 ‘평화 없이 통일 없고, 통일 없이 평화 없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 말은 ‘평화와 통일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한편 ‘평화롭게 잘 사는 통일’이어야 한다는 당위도 지니고 있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기본적으로 ‘평화롭게 잘 사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우리 민족의 과제는 ‘평화체제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변증법적인 종합’을 추구하는 ‘평화롭게 잘 사는 통일’을 어떤 경로로 어떻게 이룩하느냐에 달려 있다. 

  1) 국가의 평화와 민족의 평화

필자는 위의 명제를 검증하기 위한 문제제기로서 ‘국가와 평화’ ‘민족과 평화’를 거론하고자 한다. 좁은 나라에서 분단된 민족으로 사는 우리들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선이 모호한 발언을 자주한다. 우리는 남북한이란 두개의 국가(two nations)가 합치면 하나의 민족(one nation)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단순한 판단이다.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웠던 유럽 근대사회의 ‘nation’을 21세기의 한반도에 적용하면서 논리를 전개하니 머리가 아플 뿐이다. 서양식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이 ‘nation’이란 요술방망이에 취해서 ‘two nation’이 통합하는 데 one nation이 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모든 국가에는 국가권력이라는 원동력이 있고, 민족에는 민족의 삶을 지탱해 주는 민족의 생명이 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염원하는 백의민족으로서 민족의 평화적인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왔다. 중국이란 외세에 저항한 고구려인의 기상에서 ‘민족의 평화적인 생존권을 지켜내 나라의 자주를 사수하려는 의지’를 독파할 수 있다. 북한 민중의 ‘고난의 행군’은 민족의 평화적인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고구려인의 자주적인 기상을 연상케 한다.

이렇듯 외세에 시달려 온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면 국가권력과 민족(‘민족의 생명’ ‘민족의 평화적인 생존권’ ‘민족의 자주를 지키기 위한 평화적인 생존권 확보’에서 말하는 민족)은 애써서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생명을 헌신짝처럼 팔아넘긴 국가권력(정권)이 얼마나 많았나? 오죽했으면 조선 시대의 민중들이 ‘민중의 생명, 민족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피난 가는 임금’을 향해 돌팔매질을 했을까?

민중의 평화적인 생존권, 민족의 평화적인 생존권을 외면하고 외세에 빌붙어 정권안보에만 혈안이 된 국가권력(정권)의 숫자가 그렇지 않은 정권보다 훨씬 더 많았던 역사적 현실을 보면, 국가권력과 민족의 생명이 따로 논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더욱 극단적으로 말하면, 국가권력의 평화(정권 안보)를 도모하기 위해 민족의 평화적인 생존권을 내팽개치거나 외세에 손쉽게 넘긴 사례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권력의 핵심인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사실상 미군)에 넘겨주었다. ‘주한미군에게 자주권(국민이 자주적으로 안보문제를 결정하고 실행할 권리)을 상납한 끝에 민족의 평화적인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타개해야 평화통일의 지평이 열린다.

이러한 역사의 오명을 씻기 위해 ‘민족과 평화’의 명제를 다시 가다듬어야 하며, 이 명제가 평화통일 운동의 기본적인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2) 민족과 평화

어떤 이는 ‘민족’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터무니 없는 민족 지상주의로 흐른다. 어떤 이는 ‘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독일 파시즘과 같은 ‘배외적인 파쇼 민족주의’로 전락한다며 민족주의를 경계한다. ‘민족’이란 거대담론에 싫증을 느끼는 일부 인사들은, ‘민족’이란 단어만 나오면 경기를 느끼며 ‘민족주의를 거론하는 통일론’으로부터 도망친다. 어떤 이는 ‘민족이 밥 먹여 주느냐’며 ‘계급’을 우선시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간과하는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민족과 평화를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하는 점이다.

이들은 ① 전쟁을 지향한 민족과 평화를 지향한 민족이 역사에서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② 전쟁을 지향하는 민족과 평화를 지향하는 민족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는지 ③ 이런 상호작용의 한복판에 놓인 우리 민족이 어떻게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지에 대하여 천착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화두로 삼지 않는 한, 미국 등이 우리 민족에게 전쟁을 걸어올 때 속수무책이다. 한반도에서 미국 ・일본 등 외세에 의한 전쟁 위협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는 이때 민족과 평화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3) 분단 민족과 평화

모든 민족이 전쟁을 즐긴 것도 아니요 모든 민족이 평화를 애호한 것도 아니므로 ‘민족과 평화’의 문제를 지나치게 일반화하면 또 하나의 독단(dogma)을 낳는다. 구체적으로 특화하는 설명구도를 가진다면 일반화에 따른 오류를 피할 수 있겠다. 분단 민족을 특화하여 ‘민족과 평화’의 관련성을 규명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노력은, 지구촌에서 유일한 분단 민족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독일 민족과 평화의 문제이다. 독일 민족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보인 파시즘이 제2차 대전을 유발했다. 2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민족은 패전의 보상물로 분단의 고난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 민족은 ‘파시즘에 의한 전쟁’을 재빨리 회개하고 유럽의 평화질서 형성 대열에 합류했다. 전쟁의 가해자 독일이 평화 지킴이(peace-keeper)로 탈바꿈하는 ‘고난의 평화행진’이 없었더라면 독일 통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점이 일본인(일본 민족)의 경우와 다르다.

아직도 전쟁의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혀 ‘과거의 전범국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일본과 독일은 이렇게 다르다. 단순하게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다르다. 전쟁에서 저지른 죄를 회개하지 않은 일본이 유사법제 등을 통해 ‘제2의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고 있는 반면, 독일은 유럽의 평화적인 통합을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는 한반도와도 다르다. 우리 민족은 2차 대전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분단된 비극의 주인공이다. 2차 대전의 전범국가 독일을 징계하기 위해 독일을 분단한 방식을 아시아에 적용했더라면 당연히 일본이 분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본을 반공의 진열장(show window)으로 만들고 한반도를 반공의 제1차 방벽으로 만들기 위한 미국의 전략 때문에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2차 대전의 피해자인 우리 민족이 전쟁으로부터 해방되기는커녕 냉전의 피해자로서 분단이란 전쟁체계의 올가미를 덧씌운 비극은, 독일과 다른 방식으로 ‘분단 민족과 평화’ 문제에 접근해야 함을 알려준다.

둘째, 중국 민족과 평화의 문제이다. 항일 전선의 연장선상에서 중국 통합을 모색한 사회주의 세력이 득세하여 본토를 차지하고, 밀린 세력이 대만을 차지했기 때문에 한반도처럼 중국민족이 분단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를 강화한 미국이 중국을 에워싼 죽(竹)의 장막(bamboo curtain)을 대만에 집중적으로 설치함으로써 분단의 골이 깊어졌다.

그러나 중국 민족은 분단 장벽을 높이려는 외세의 유혹을 뛰어넘는 ‘3통(通)’에 성공한 결과 민족화해 ・교류의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갔다. 중국 민족은, 남북한의 교류 연습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 민족과 다르다.

셋째, 예멘 민족과 평화의 민족이다. 기본적으로 종족 분쟁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예멘의 경우 ‘냉전 이데올로기 투쟁’의 부산물로 남예멘과 북예멘으로 분단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러나 남북한처럼 동족 간에 등을 돌리지 않은 탓인지, 일시적인 통합을 이루었다가 다시 갈등을 겪고 있다. 예멘은 군사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미봉의 통합’에 그쳤기 때문에 갈등이 도졌다. 같은 민족 간에 서로 평화롭게 사는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않은 예멘 통합은 우리 민족의 타산지석이 될 수 없다.

넷째, 베트남 민족과 평화의 문제이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의 분단을 강요한) 미국 對 (베트남의 통일을 염원하는) 민중의 싸움이었다. 이 전쟁을 민중의 승리로 마감함으로써 베트남은 통일되었다. 베트남의 통일 과정을 보면, 일부 학자들이 말하듯이 ‘무력으로 흡수통일’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외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이 통일이라는 점을 더욱 크게 보아야 하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통합한 점을 지나치게 크게 보면 곤란하다. 베트남의 무력 흡수통일론은 ‘북한이 호시탐탐 남침을 노린다.’는 논리와 연결되므로 경계의 대상이다. 또한 베트남의 무력 흡수통일론에 머무는 한 ‘반외세 민족주의가 베트남의 평화를 지켜낸 사례’를 한반도에 적용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각 민족이 맞부딪친 정세, 정세를 헤쳐 나가면서 분단을 극복하려한 의지의 강도에 따라 평화체제 구축의 내용이 다르다. 한반도의 경우 첫 번째부터 네 번째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복잡함 때문에 아직도 분단체제 아래에 있다. 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의 분단 대신 분단된 한반도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결정적으로 반(反)평화적인 분단체제 속에 빠져 들었다.

한반도는, 미국이 중국을 에워싸기 위해 쳐놓은 ‘죽의 장막’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분단체제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는 예멘처럼 냉전 이데올로기가 무력투쟁으로 번질 위기를 여러 번 맛보았다. 한편 (북베트남처럼 무력으로 외세에 항거하고 있는) 북한(의 국가권력)과 (남베트남의 민족 해방파처럼 반외세 ・반미 전선을 구축하려는) 남한의 평화통일 운동세력이 심리적인 제휴를 함으로써 ‘민족주의적인 평화통일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독일 ・중국 ・예멘 ・베트남 민족이 분단을 극복하는 가운데 평화체제를 다졌거나 다지고 있는 사례의 장단점을 한반도의 특수상황에 대입하여 종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여러 분단 민족들이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치밀하게 노력한 점을 배워야 한다. 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의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내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겨우 시나리오의 대강으로서, 2000년의 남북 정상회담 때 6 ・15 공동선언을 내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6 ・15 공동선언은, 우리 민족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연습할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평화와 관련된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이런 결함을 메우기 위해, 6 ・15 공동선언의 제2항에서 밝힌 국가연합 단계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이행하는 과정과 이런 과정의 속도에 걸맞은 평화체제 구축의 방안을 내오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평화를 위한 연습을 게을리 했다는 게 ‘6 ・15 선언에서의 평화조항 누락’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6 ・15 공동선언에서 빠진 ‘평화’의 대장정에 나서는 연습을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평화롭게 잘 사는 통일’의 연습을 민족끼리 시도해야 한다.

2. 민족끼리 평화를 위한 연습을 하자

우리는 지금까지 남북 간의 만남 ・교류 등을 통해 통일의 연습을 해 왔다. 그러나 같은 민족끼리 평화롭게 잘 사는 연습은 불충분하다. 좀 지나친 질문이지만, 분단 이후 우리 민족이 평화를 위한 연습을 해 본적이 있나?

민족끼리 평화를 위한 연습에 게으른 우리의 현실을 꼬집어 본다:
① 분단체제 아래에서 서로 DMZ 부근에서 정전협정 위반을 해놓고(남북한 사이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미국이란 외세가 지켜보는 앞에서 민족끼리 서로 헐뜯지 않았는가?
② 이러한 꼴불견으로 외세가 한반도 사태에 개입하는 빌미를 제공한 점은 없는가? 미국 등의 외세는 분단의 평화적인 관리 정책에 따라 남북한의 갈등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남북한의 군비경쟁을 유발하지 않았는가? 남북한의 군비경쟁은 분단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민족끼리 앙숙이 되는 데 공헌하지 않았나?
③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원수가 되어 분단선이 그어졌다. 이 물리적인 분단선은 이윽고 민족 구성원의 마음속에 새겨진 ‘원수 상(像)’을 만드는 원흉이 되었다. 이 ‘원수 상’이 반북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불구대천의 원수로 급전한 드라마를 역전시키지 않는 한 민족 간 화해 ・평화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하다.
④ 남쪽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 즉 ‘같은 민족이지만 타자(他者)가 된 북한 사람들을 껴안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던지고 싶다. 중국거주 동포를 업신여기는 남쪽 사람들이 북쪽에 있는 타자(他者)를 얼마나 포용할지 의문스럽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를 천대하는 ‘남쪽 사회의 몰인정 ・각박함’을 보면, 이런 질문이 자동적으로 나온다. 남쪽 사회는 북쪽 사람들을 껴안는 연습을 하기 이전에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타자(他者)를 이해하는 정신이 절대 부족한 남쪽 사람들의 정서로 ‘평화롭게 잘 사는 통일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언 발에 오줌 싸기이다.
⑤ 이런 측면에서 남쪽 사람들부터 ‘평화를 위한 도덕 재무장 운동’을 벌여야 한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는, 굶주리고 있는 북한 동포에 대한 지원을 ‘퍼주기’로 낙인찍는 잔인함으로 연결된다. 이는 단순한 정서의 결함이 아니고 도덕력의 결함이다. 통일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돈이 많이 있다고 해서 통일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민족끼리 평화롭게 잘 살겠다는 민족 대단결의 정신이 없으면 참된 통일은 불가능하다.
⑥ 타자(他者)에 대한 배려 ・관용 정신이 부족한 우리들은 민족고유의 ‘평화의 얼’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 서로 품앗이하면서 두레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평화의 얼’을 이어받아 민족끼리 평화롭게 잘 사는 연습을 하지 않는 한, 분단체제의 영속화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요즘의 한국인은 지나치게 폭력 지향적이어서 ‘백의민족의 후예’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전쟁(분쟁)을 기피하며 평화공존을 모색해 온 우리 민족의 고결한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듯하다. 돈의 폭력,권력의 폭력, 힘에 의한 폭력, 언어폭력, 성폭력 등이 난무하는 한국사회에서 “평화” 운운하는 것 자체가 낭만적인 인상을 준다. 빈곤 ・억압 ・인권 탄압 등 구조적 폭력이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평화롭게 잘 사는 통일을 외치는 것은, 바늘구멍을 찾는 일인지 모른다. 어쩌면 평화통일을 거론하기에 앞서 폭력지향적인 한국사회의 변혁이 필요하지 않을까?

3.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민족끼리 평화롭게 잘 사는 연습을 별로 해 오지 않은 우리들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으로 평화통일의 길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준 우리 민족의 따뜻한 배려의 정신 ・타자(他者)에 대한 관용정신을 되살리면서[溫故], 전갈과 같은 국제사회에서 ‘민족의 통일을 위한 평화체제를 창출해 내는(peacemaking) 새로운 길’을 찾아야[知新]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세계적인 차원의 ‘평화’ 담론을 한반도에 적용하여 통일의 대강(大綱)을 짜내야 한다. 정치 ・군사 ・경제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 분단의 틀을 해소하고, 반평화적인 법제(法制)를 손질하고, 평화에로의 발상 연습을 하면서, 민족끼리 평화롭게 잘 사는 ‘평화의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민족 내부에서 이러한 ‘평화의 염(念)’이 불타오를 때, 외세의 입김을 배제하거나 외국군을 내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분단 이후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일상화되었다. 이런 상태는 전쟁 불감증에 사로잡힌 한국민들에게 평화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제공하지 못했다. 전 세계의 화약고인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이 ‘평화’라는 화두로 몸부림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한반도는 민족 절멸용 무기의 저장고이며 하치장이다. 우리들은 동족인 북한 사람들을 수십 차례나 죽일 수 있는 최첨단 무기 위에서 자면서도 태연하게 눈을 감는다. 이렇게 ‘평화’에 무딘 강심장으로는 ‘평화통일’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더구나 부시 정권 등장 이후 한반도에는 전쟁 위기의 일상화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전쟁 위기의 일상화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면, 민족끼리 평화롭게 잘 사는 연습을 하기 어렵다. 우리 모두 평화의 감수성을 높여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맹진하자.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2 ・33호(2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