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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동양의 평화이론

한자로 푸는 ‘평화’ 1

한자로 푸는 ‘평화’ 1

 
  김승국 (기사입력: 2015/03/27 19:12)    
 
 
김승국(평화 활동가)

 

아래는 2014년 11월에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에 대비하여 준비한 교안이다.

 

1. 平和

 

1) 和
밥이 곧 평화, 밥상 공동체

 

2) 平
평화(平和)는 동양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밥(米)을 사람들(口)에게 균등하게(平) 나누어 준다(和).’는 것을 의미한다. 밥이 공평히 나누어지는 곳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은 밥이 공평히 나누어지는 세상일 것이다. (김대묵, 2006, 80)

 

이에 주목한 공자․맹자는, 요․순과 같은 성군(聖君)이 백성들에게 평화의 밥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성군 대망론’을 제창했다.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평화 공동체 안에서 격양가를 부르는 ‘절성기지(絶聖棄智: 성인과 지식을 버림)의 태평성세’를 구가한다. “나라는 작고 백성도 적다(小國寡民). 그러므로 여러 가지 기물이 있으나 쓸 필요가 없고, 백성들은 죽을 때까지 공동체에서 유리되지 않도록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으나 탈 곳이 없고, 비록 무기가 있으나 쓸 일이 없다(雖
有甲兵無所陳之). 사람들은 옛날처럼 새끼줄로 의사표시를 하게 했지만, 그들의 음식을 달게 먹고(甘其食), 그들의 옷을 아름답게 입고(美其服) 그들의 거처를 안락하게 여기며(安其居), 법이 아니라 옛 풍속대로 즐거워한다(樂其俗). 이웃 나라는 서로 바라보이고(隣國相望) 개짓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를 듣지만 백성들은 죽을 때까지 지역 공동체를 오고가지 않는다.” ( 老子 80장)

 

무기가 있으나 쓸 일이 없는 소국과민의 태평세상에서 음식을 달게 먹고 옷을 아름답게 입고 거처를 안락하게 하며 옛 풍속대로 즐거워하는 게 잘사는 평화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는 소규모 지역자치 공동체에서 ‘평화의 밥을 먹자(甘其食)’는 노자의 말씀은,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21세기의 지구촌 공동체에서 평화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민초들이 경청할 만한 명언이다.

 

전쟁 없는 세상에서 겸애(兼愛)하자고 갈파한 묵자는,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는 대동(大同)사회에서 ‘평화의 밥’을 골고루 나누어 먹자고 부르짖었다.
부국중리(富國重利)주의자인 관자는 “창고가 실해야 예절을 알고(倉廩實則知禮節)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知榮辱).”라고 말했다.(管子 권23)
의식(衣食)이 족해야, 즉 밥을 배불리 먹어야, 예(禮: 종법사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틀)를 안다고 설파한 것이다.

 

앞에서 춘추전국 시대의 현인들이 ‘평화의 밥을 골고루 먹으며 잘사는 평화’를 언급했지만 시공간적으로 먼 느낌이 든다. 고대 중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곁의 시공간에서 이러한 담론을 음미하는 게 의미 있다는 판단에 따라 김지하 선생의 ‘밥상 공동체’론을 요약한다.

 

1) 김지하의 저서에 나오는 ‘밥상 공동체’


① 밥

 

최해월 선생은 “밥 한 그릇이 만고의 진리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여공․한 며느리․한 부엌데기 여성에 의해서 그리고 수없는 남성 농민들에 의하여 벌판에서․논에서․밭에서, 그 암흑 속에서, 굶주림과 천대 속에서, 힘겨운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어 만들어진 <밥>-밥은 한울님의 기본 사업인 <일>, 즉 생명활동 그 자체이며 그 생명활동의 결과요 결정이므로, 곧 영구불변한․영원불멸한 <도>(道) 그 자체라는 말이올시다. <진리>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53쪽) 한울님의 그리고 생명의 활동은 일, 밥 그리고 일의 <창조적인 순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울님과 생명의 활동은 <일-밥-일>의 창조적 순환
입니다. 밥은 물질적인 밥인 동시에 정신적인 밥, 정신의 밥입니다. 영의 밥입니다. 그래서 밥을 우리는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밥은 바로 통일을 의미하는 생명입니다. 생명 곧 통일이며, 생명 곧 밥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나는 밥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즉, 하늘의 밥이요, 그날그날의 민중들이 고되게 노동해서 거두어서 먹는, 그
래서 다시 일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그 밥인 것입니다.(60∼61쪽) 그러면 밥은 어떻게 생산하는가? 밥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혼자서 생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협동적으로 생산하며 공동체적으로 생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생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소비에 있어서도, 그것의 수렴, 먹는 활동, 식사에 있어서도 밥은 여럿이 먹는 것, 공동체적으로 먹는 것입니다. 밥은 ‘밥상’에서 먹는 법입니다. ‘밥상’이라 하는 것은 여럿이서 둘러앉아 먹는 공동체 생활을 말합니다. 따라서 ‘밥상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73쪽) 식사와 노동, 노동과 식사에 있어서 공히 밥상 공동체 또는 노동 공동체(두레)에서 나타남과 같이 밥은 공동체적으로 생산하고 공동체적으로 그것을 수렴해서 나누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에 있어서도 설위(設位) 과정 전체가, 즉 위패를 놓고 거기에 멧밥을 뜨고 차리고 인사하고 음복하는 일체의 과정과 그 뒤에 나누는 과정, 나누어 먹는 과정이 또한 공동체적입니다. 식사와 제사를 아우르는 밥을 통해서 우리가 인식하는,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생명운동, 생명의 회복과 생명의 본성을 인식하는 생명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도 공동체 운동이며 새로운 공동체 건설운동인 것입니다. “혼자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없다.”는 말의 뜻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밥맛이 없는 이유는 바로 ‘독점’ 때문입니다. 독점자들과 소유욕이 강한 자들, 제국들, 대제국들, 오늘날에 있어서 서구 블록이-이와 같이 식사와 제사를 분리시켜 이원적으로 인식하게 하며 거기서 확보된 틈을 통해서 생명의 밥을 약탈․독점하고 그것을 혼자 처먹어 온 그 결과로, 오늘날 서구나 동구의 온갖 형태의 모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위 한마디로 “살맛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난다.” 또는 “먹을 것은 많은데, 살맛이 안 난다.”…이 ‘살맛’이라는 것이 곧 ‘밥맛’입니다. 왜냐하면 밥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밥맛이 없다는 것이 살맛이 없다는 것이고 살맛 안 난다는 것이 밥맛 안 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식사와 제사는 분리해서 보고…거기서 만들어진 틈을 통해서 생명을 약탈하여 혼자서 독점하는 그러한 ‘구조(이 구조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제3세계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제3세계의 민중운동과 공업사회에서 일고 있는 반전․반핵…평화운동은 결국은 하나의 문제로서…밥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해서만 하나로 아우러질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밥맛’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고 ‘살맛’을, 생명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73∼75쪽)

 

위의 문구에서 보다시피 ‘독점자들의 독점 때문에 살맛이 안 난다.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난다. 먹을 것은 많은데, 살맛이 안 난다’는 상황은 현재의 한국 사회를 빼어 닮았다. 신자유주의의 10 대 90의 사회에서 10에 해당되는 독점자들이 독점하기 때문에 살맛이 안 나는 국민들이 태반이다.

 

외형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국민들의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먹을 것이 많은데도 살맛이 안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이유를 밝히며 대안을 세워야 잘사는 평화의 길이 열린 텐데, 2007년 대선의 예비후보들 가운데 이 정도까지 육박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신자유주의-한미 FTA체제에서 소외받는 90의 민중들이 헛배 불러 살맛이 안 나는 현상을 타파하는 게 잘사는 평화의 지름길, 한국 사회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데도 이 길로 국민을 안내하는 예비주자가 눈에 띠지 않는 대선이 살맛을 잃게 한다.

 

2. 서양의 담론

 

‘평화가 밥’은 동양식 어법이며, 이의 서양식 어법은 ‘평화는 빵’이다. 이 ‘평화는 빵’ 어법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경전이 성서이다. 성서의 곳곳에, 하나님 나라에서 평화의 밥을 먹는 밥상 공동체 이야기가 나온다. 성서의 ‘하나님 나라와 밥상 공동체’ 담론을, 박재순 교수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 공동체 를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밥상 공동체 운동이다.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아래와 같은 예수 사건들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해야 한다.

 

① 죄인들과의 밥상 교제(마가복음 2장 19절)

 

예수는 수탈과 압제의 현장에서 죄인들과 밥상 공동체를 이뤘다. 예수가 자신을 ‘잔칫집 신랑’으로 비유한 것은 예수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이 잔치를 벌이는 것, 즉 밥상 공동체 운동이었음을 말해 준다.

 

② 오병이어(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사건(마가복음 6장 41∼44절)

 

예수는 굶주린 군중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는 나눔의 기적을 일으켰다. 예수가 민중들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은 이야기는 당시 상류 귀족들의 잔치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 나눔의 공동체에서 나누면 나눌수록 사랑과 유대는 깊어지고 삶이 풍성해진다.

 

③ 부자와 밥상 공동체 운동(마가복음 10장 17∼22절)

 

예수는 항상 부자들에게 재물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도록 촉구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밥상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④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밥상 공동체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예수의 몸은 함께 나누어 먹는 밥이며, 예수의 피는 함께 나누어 마시는 포도주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운동)로 육화(肉化)된 것을 의미한다.

 

⑤ 하나님의 해방운동

 

밥상 공동체 운동은 단순히 밥을 함께 먹는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중심에서 해방되어 참된 화해의 공동체를 이루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거부하는 반민주적인 사회체제․특권층에 저항하는 민중해방운동이기도 하다. 이 운동은 민중의 사회적․역사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며,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체제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운동이다.

 

박재순 교수가 보기에 ‘인간이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라면 인간 공동체는 어쩔 수 없이 밥상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밥을 나누어 먹는 곳이 하느님 나라요 밥을 독점하는 곳이 지옥이다. 인간은 밥을 독점함으로써 하느님을 떠났고 밥을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간다. 밥을 독점함으로써 타락한 인간 역사는 밥을 나눔으로써 구원된다.’(박재순, 1990, 143)

 

2. 天地人

 

 

3. 中

 

아마 중국인들처럼 ‘中’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중국
인들은 모난 것, 사각형, 뾰족한 것을 기피하고 모나지 않는 것, 둥근
것, 원형, 둥글둥글한 것을 좋아한다. ‘中’의 자원(字源 문자가 구성된
근원)은, <어떤 것을 하나의 선(線)으로 꿰뚫어 ‘속ㆍ안’의 뜻을 나타
냄. 갑골문(甲骨文)ㆍ금문(金文)에서는 특히 군대의 중앙에 세운 깃발
모양으로, ‘속’의 뜻을 보임. ‘맞다, 맞히다’의 뜻일 때에는, 속으로 들
어가는 뜻을 나타냄>이다. 한자 사전의 ‘中’을 찾아 자원(字源)을 찾
으면, ‘中’자가 갑골문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천한 그림을 볼 수 있
다. 둥근 원의 한가운데를 엄정중립의 선(線)이 지나가는 상형문자가
‘中’자이다. 모나지 않는 원만한 세상 속의 중립지대를 상징하는 ‘中’
자는 중립화의 상징적인 단어이다.

 

3-1) 中立

 

‘'중립(中立)’의 뜻풀이는 이렇다. ① 어느 편에도 치우침이 없이 그
중간에 서는 일. 양자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아니함. 중정(中正) 독
립. ② 곧아 한쪽으로 기울지 아니함. ③ 어느 쪽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지 않고, 적대하지 않음. ④ 교전하는 나라(교전국)의 어느 쪽도
편들지 아니함. 교전국 쌍방에 대하여 공평하며, 원조를 하지 않음.
⑤ 국제법상 국가 간의 분쟁ㆍ전쟁에 관여하지 않음. 어떠한 군사동
맹에도 참가하지 않음.

 

4. 朝三暮四/朝三而暮四(『莊子』「齊物論」)

 

‘조삼모사’란 무엇인가? 옛날 저공(猪公)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길렀다. 어느 날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말했다. “아침에는 도토리를 세 개 주고, 저녁에는 네 개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냈다.
저공이 다시 말했다.
“좋다. 그러면 아침에는 도토리를 네 개 주고 저녁에는 세 개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참으로 절묘한 이야기이다.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똑똑하다고 잘난 체하는 원숭이들과 몹시 닯아 있지 않은가!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든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든 하루에 일곱 개인 것은 변함이 없다. 수량, 명분, 실질적인 이득이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원숭이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했을 때는 크게 화를 냈고,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자 무척 기뻐했다.

 

사실 원숭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핏대를 세우고 얼굴을 붉혀가며 다투는 것들 중 대부분이 아침에 세 개냐, 저녁에 세 개냐의 문제가 아닌가?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나는 장자다』(파주, 들녂, 2011) 160~161쪽>

 

5. 矛盾

 

1) 야구,축구 경기의 수비중심 전략(방패) 對 공격중심(창)의 전략 비교
2) 군사전략
3) 무기; 핵무기 對 방어미사일(MD)

 

6. 墨子

 

1) 兼愛(더불어 삶) 對 自愛(이기주의)
2) 非攻; 친구들 사이 싸움; 먼저 공격하지 않고 참는다
공수반(公輸盤)이라는 명장(名匠)이 초왕(楚王)에게 초빙되어 운제(雲
梯)라는 공성기구(攻城機具 성을 공격하는 기구)를 제작했다. 초나라
는 그것을 이용하여 송(宋)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 소문을 들은 묵자
가 제나라를 출발하여 열흘 낮 열흘 밤을 달려가서 초나라로 하여금
전쟁을 단념하게 한다.

 

7. 大同
----大同社會-小康社會

 

중국 성현들의 평화의 담론이 비록 ‘의전론’ ‘반전론’ ‘비전론’으로 갈리지만, 모두 전쟁이 없는 태평성세를 꿈꾼다.

 

‘태평성세’의 어원은『禮記』禮運편에 최초로 보이는 이상사회로서의 ‘大同’이다. 이 때의 同은 平과 和의 뜻이며 大同社會는 평등 ‧ 평화 사회를 의미한다.

 

여불위(呂不偉)는 BC. 239년에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펴냈는데 그는 이 책에서 ‘大同이란 천지만물이 일신동체(一身同體)라는 뜻이며, 천하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천하 만인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1) 묵자의 大同-安生生 사회

 

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인민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난세였다. 그의 이상사회는 전쟁이 없고 생명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천하에 남이 없는(天下無人)’ 安生生 大同社會이었다. ‘天下無人의 安生生 大同社會’는 묵자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구성체’이었으며, 『禮記』禮運 편이 묵자의 安生生 大同社會를 잘 표현하고 있다.

 

기세춘 선생은 자신의 저작 여러 곳에서『禮記』禮運편과 묵자의 安生生 大同社會論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禮記』의 ‘대동사회’는 유가의 사상이 아니라 묵자의 이상사회인 ‘安生生사회’를 설명한 것이다.『禮記』에 이것을 기록한 것은 묵가들이 주장하는 대동사회를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비현실성을 비판함으로써 이와 대립되는 유가들의 ‘小康社會’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禮記』禮運편의 대동사회에 대한 기록과 묵자의 天下無人의 安生生사회에 관한 어록을 비교해 보면 너무도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① 정치적으로 <민주· 평등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예기의 대동사회>


大道之行也
대도가 행해지니
天下爲公
천하가 만민의 것이 되었고
選賢與能
어질고 유능한 자가 선출됨으로써,
講信修睦.
모두가 신의를 중히 여기고 화목한 사회가 되었다.

 

<묵자의 안생생 사회>


* 하느님이 처음 백성을 지으실 때는
지도자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주권자였다.
그러나 백성이 각각 주권자이므로
서로 자기의 義는 옳다 하고 남의 義는 비난하며
크게는 전쟁이 일어나고 작게는 다투게 되었다.
이에 天下의 義를 하나로 통일하고자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選出하여 天子로 삼았던 것이다(『墨子』尙同).

 

* 그러므로 君主란 인민들의 일반적인 契約이다(君 臣萌通約)(『墨子』經說).
* 따라서 농사꾼이든 노동자든 장사치든 유능하면 등용되었으므로
벼슬아치는 항상 귀한 것이 아니고 백성은 항상 천한 것이 아니다(『墨子』尙賢).

 

② 도덕적으로 <겸애의 공동체 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예기의 대동사회>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식만 자애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같이 사랑하였다.

 

<묵자의 안생생 사회>


* 천하 만민은 하느님의 평등한 臣民이다.
* 하느님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하기를 바라고
서로 미워하고 해치는 것을 싫어하신다(『墨子』法儀).
* 남의 나라를 내 나라 보듯이 하고,
남의 집안 보기를 내 집같이 하고,
남의 몸을 내 몸같이 보라!(『墨子』兼愛)
* 천하에 남이란 없다(『墨子』大取).

 

② 경제적으로 <완전고용의 복지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예기의 대동사회>
使老有所終
그렇게 함으로써 늙은이는 수명을 다하고
壯有所用 幼有所長
젊은이는 재능을 다하고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鰥寡孤獨廢疾者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병자들도
皆有所養 男有分女有歸.
모두 편히 부양 받게 되었다.
男有分女有歸.
남자는 모두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묵자의 안생생 사회>

 

* 모든 노동자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소질에 따라 일에 종사하도록 하며(완전 고용),
모든 백성들에게 필요한 대로 충분히 공급해 주고(필요공급)
그 이상의 낭비는 그쳐야 한다(『墨子』節用).

 

*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평등의 정치는
장님과 귀머거리가 서로 도와
장님도 볼 수 있고 귀머거리도 들을 수 있게 하는 정치다.
그렇게 함으로써 처자식이 없는 늙은이도
부양을 받아 제 수명을 다할 수 있고
부모 없는 고아들도 의지할 데가 있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은 성왕의 도리인 것이다(『墨子』兼愛).

 

* 어진 사람이 되려면 힘 있는 자는 서둘러 남을 돕고,
재물이 있는 자는 힘써 남에게 나누어주고,
도리를 아는 사람은 열심히 남을 가르쳐 주어라.
그러면 굶주린 자는 밥을 얻고,
헐벗은 자는 옷을 얻고,
피로한 자는 쉴 수 있고,
어지러운 것이 다스려지리라.
그것을 일러 편안하고 자연스런 삶이 이루어지는 ‘安生生 社會’라고 말한다(『墨子』尙賢).

 

④ 사회적으로는 <노동 절용 공유의 共生社會>라는 점에서 같다.

 

<예기의 대동사회>


貨惡其棄於地也
재물을 땅에 버리는 낭비를 싫어하지만
不必藏於己
결코 자기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으며,
力惡其不出於身也
몸소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不必爲己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 않는다.

 

<묵자의 안생생 사회>

 

* 성왕은 정치를 함에 있어 영을 내려 사업을 일으키되
무기와 같은 실용이 아닌 것을 생산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므로 재물을 낭비하는 풍조가 사라지고
백성들은 피로하지 않고 크게 이롭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군주들은 재화와 노동을 허비하여
사람의 생활에 긴요하지 않는 무용한 일에 사용한다.
그러므로 부하고 높은 사람은 사치하고
고아들과 과부들은 헐벗고 굶주린다(『墨子』辭過).

 

* 그래서 도둑이 들끓는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유를 없애지 않고는 결코 도둑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사유는 자기만을 위한 것일 뿐 자기와
남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墨子』大取).

 

* 유가들은 인간의 근본을 배반하여 노동을 기피하고
게으르고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먹기만을 탐하니.
기한에 얼어 죽고 굶어 죽을 위험에 처해도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그들은 남의 집에 의지해서 살찌고
남의 밭에서 의지해서 술 취하는 자들이다(『墨子』非儒).

 

⑤ 도둑과 전란이 없는 <평화 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예기의 대동사회>


是故謀閉而不興
이처럼 풍습이 순화되어 간특한 모의가 통하지 않으니
盜竊亂賊而不作
도둑과 변란과 약탈이 일어나지 않으니,
故外戶而不閉
대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是謂大同.
이것을 일러 “大同”이라 말한다.

 

<묵자의 안생생 사회>


*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는 “의로운 정치”는
대국이 소국을 공격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지 않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무시하지 않고,
다수가 소수를 해치지 않고,
지혜 있는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고,
부가가 가난한 자에게 교만하지 않고,
장정이 노인을 약탈하지 않는다.
이로써 천하의 모든 나라들은
불과 물과 화약과 병기로써 서로 살상하지 않게 되었다(『墨子』天志).

 

* 지배자들은 전쟁에 나가 남의 재물을 많이 빼앗고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의로운 사람이라고
민중의 마음을 물들인다(『墨子』非攻).

 

* 전쟁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그 아들이 상을 받는 중국의 풍습은
아들을 잡아먹고 그 아비가 상을 받는 식인종과 무엇이 다른가?
인의를 저버린 것은 똑같은데 어찌 식인종만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墨子』魯問)

 

2) 유가의 小康社會

 

『禮記』를 편찬한 劉向은 堯舜시대를 大同으로, 禹, 蕩, 文․武․周公의 三代를 ‘禮治의 小康社會’로 규정한다. 堯舜의 大同時代에는 대도(大道)가 이루어졌으나, 三代에 이르러 大道가 이미 쇠미해졌다. 劉向은 요순의 평화공동체가 존재했던 시기를 大同時代로, 三王의 신분차별이 요구되는 禮治사회가 존재했던 시기를 小康時代로 구분했다.

 

이처럼 劉向 등의 유가들은『예기』의 역사발전 단계를 ‘大同社會→小康社會의 이행’으로 본다. 소강사회를, ‘지속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구성체’의 이상적인 형태로 본다는 뜻이다.[기세춘『동이족의 목수 철학자』(서울, 화남, 2002) 371~372쪽]

 

공자의 목표는 주나라 禮를 부흥시키자는 ‘復禮’였다. 周公이 정비한 周禮는 소강사회의 제도와 예법이면서, 요순의 대동사회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大道는 사라졌지만 대동사회의 목표인 天下一家를 禮治로서 이루어내겠다는 뜻이다. 유가의 이상사회는 天下를 一家처럼 생각하는 小康社會이며, 이 소강사회는 孝悌를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삼는 사회이며, 그리고 孝를 인간일반과 국가에까지 확장한 것이 仁인 것이다. 그러므로 ‘孝悌를 仁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한편 공자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천자의 전쟁은 인정했다. ‘소강사회를 저해하는 패도주의’를 정벌하는 전쟁, 이러한 정벌 전쟁을 일으키는 천자의 부국강병을 인정하였다. 맹자 역시 폭군방벌(暴君放伐)을 주창했다. 천자가 제후를 징계하는 정치행위로서의 전쟁이 정의의 전쟁(義戰)이며, 이러한 의전이 ‘소강사회에서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평화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3) 노자 ‧ 장자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구성체’

 

노자는 전국통일(戰國統一)을 지향하는 ‘유가 ‧ 법가의 부국강병에 의한 대국주의(大國主義)’에 반대하면서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소국과민’은 “소(小)”와 “과(寡)”를 사역 동사로 해석하여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는 당위적 요청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소국과민’은 “隣國相望鷄犬之聲相聞, 甘其食, 美其服, 安其俗, 樂其居”(이웃 나라의 닭과 개의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는 지경이다. 王은 백성들에게 그 고을의 음식을 달게 여기게 하고, 자기 고을의 복장을 아름답게 여기게 하며, 그 풍속을 편안하게 하고, 그들의 주거지를 즐기도록 해 준다)[『史記』卷129「貨食列傳」에서 인용된『老子』의 문장임]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隣國相望鷄犬之聲相聞, 甘其食, 美其服, 安其俗, 樂其居’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구성체가 현대인의 삶 속에서 구현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노자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구성체’인 소국과민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도(道)’ ‧ ‘박(撲)’에서 평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노자에게 자연계는 있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세계이다. 그와 대비해서 인간세, 특히 인위로 조작된 문화 세계는 박진(撲眞)을 깨뜨리고 형평을 잃어 계속 문제가 가중되어 가는 세계이다. 즉 자연계는 그 자체가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인 데 반해, 인간세는 불평 ‧ 불화의 세계이다. 자연은 그 운행이 곧 평화를 회복하는 노력인 데 반해, 인위는 오히려 평화를 깨 나가는 파괴 행위라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만이 근본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길이 된다는 말이다. 노자가 돌아가라는 ‘자연’은 문화 문명이 오염되지 않은 작은 나라 적은 백성(小國寡民)의 조그마한 이상향이었다.

 

노자가 바람직한 인간세를 대동(大同)사회로 확대하지 않고 굳이 작은 나라 적은 백성으로 제한한 것은 바로 인성의 본연, 즉 순박성이 지켜질 수 있는 범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의 이상향을 노자는 다음과 같이 형용했다; “무기가 있어도 사용할 곳이 없고 사람들은 생명을 아껴 위험한 짓을 하지 않는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지 않으며 일이 없으니 행정 사무를 볼 것이 없다.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히 살며 자연을 즐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삶에는 싸움이 없다. 그저 적막하리만큼 평화로울 뿐이다. 이것이 노자가 이상으로 내세운 평화[지속가능한 평화]의 모습이다.[김충열『김충열 교수의 노장 철학 강의』(서울, 예문서원, 1995) 222~225쪽 요약]

 

8. 周易

 

8-1) 乾 괘

8-2) 坤 괘

8-3) 泰 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