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양키 고홈

일본 서부 지방 탐방기 (2) 김승국 거세된 운동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민중혁명에 성공하지 못한 역사가 운동력의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격동기인 19세기. 일본에서도 농민봉기가 드물게 있었으나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지 못했다. 19세기 말 이웃 나라 조선의 농민봉기가 혁명의 의지를 아시아에 전파한 것과 사뭇 다르다.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봉건제의 힘에 눌린 민초들이 저항의 마음을 지녔지만 이불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는데 그쳤다. ‘이불 속의 저항운동’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불 속에서 지배계급을 규탄하므로 지배계급이 민중을 무시했으며, 그 결과 민중운동이 거세되었다. 물론 일본에도 60년대의 안보투쟁 처럼 빛나는 운동의 전통이 있으나, 이 전통을 계승하는데 실패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실패의 원인 중 하.. 더보기
오키나와인의 반전평화 의식과 비폭력 투쟁 김승국 ‘비무(非武)의 섬’ 오키나와 오키나와의 경우 비무(非武) · 비전(非戰) · 비폭력 사상이 오랫동안 전수되어 왔으며, 이러한 사상을 체화한 오키나와인 특유의 반전평화 의식이 비폭력 투쟁으로 외화되었다. 미군지배 체제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한 오키나와인의 반전평화 의식은 역사적 산물이다. 오키나와는 전통적으로 ‘비무(非武)의 문화’를 지닌 ‘비무의 섬’으로 알려졌다. 물론 류규(오키나와의 옛 이름) 왕조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무력은 갖췄지만, 외세(外寇)의 침입에 대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평화적 외교술을 통해 중국과의 조공관계 · 주변국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1816년 오키나와에 온 바질 홀(Basil Hall)이라는 영국인이 귀국 도중 (세인트 헬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