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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비폭력 운동

오키나와인의 반전평화 의식과 비폭력 투쟁


김승국



‘비무(非武)의 섬’ 오키나와

 

오키나와의 경우 비무(非武) · 비전(非戰) · 비폭력 사상이 오랫동안 전수되어 왔으며, 이러한 사상을 체화한 오키나와인 특유의 반전평화 의식이 비폭력 투쟁으로 외화되었다. 미군지배 체제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한 오키나와인의 반전평화 의식은 역사적 산물이다. 오키나와는 전통적으로 ‘비무(非武)의 문화’를 지닌 ‘비무의 섬’으로 알려졌다. 물론 류규(오키나와의 옛 이름) 왕조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무력은 갖췄지만, 외세(外寇)의 침입에 대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평화적 외교술을 통해 중국과의 조공관계 · 주변국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1816년 오키나와에 온 바질 홀(Basil Hall)이라는 영국인이 귀국 도중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중이던) 나폴레옹을 만나 “류규에 무기가 없다”고 전하자 나폴레옹이 놀랐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옛날부터 ‘백성들의 봉기가 없는 나라’로 알려졌으며, 1945년의 일본 패전 이후에도 ‘오키나와인은 예절을 지킬 줄 알며 온순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은 비굴할 정도로 온순하며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평가로도 들리지만, 어쨌든 오키나와인이 비폭력주의의 길을 걸은 것만은 틀림없다.

비폭력주의의 길을 걸었다고 해서 불의를 묵과하며 묵종하지 않았다. 미군지배 체제에 직면한 오키나와인은 저항적인 비폭력 투쟁을 전개했다. 투쟁의 방식이 비폭력적이었을 뿐, 투쟁의 내용은 권력기구에 대항한 조직적인 대중운동이었다. 미군 통치 아래에서 주권을 빼앗긴 오키나와의 대중운동은, 일본의 평화헌법을 따르는 복귀(일본에로의 복귀) 운동을 비폭력적으로 펼쳤으며, 그 중심체가 ‘복귀협(오키나와현 조국복귀 협의회)’이었다.

일본헌법 전문의 평화주의, 헌법 제9조의 ‘전쟁 포기 · 전력 및 교전권의 부인’을 지도이념으로 삼은 복귀협은, 비폭력주의의 반전평화 운동을 이끌었다. 1969년 11월 13일 ‘사또 수상의 미국방문에 즈음한 오키나와 현민 결의대회’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시위 도중 일본의 과격파 학생운동 그룹(‘核マル’ ‘中核’)이 화염병을 던지며 기동대와 충돌한 끝에 양쪽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복귀협은 ‘폭력은 기지피해와 동일한 죄이며 평화로운 생활을 파괴한다. (미군의) 폭력에 항의한다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자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비폭력주의 운동 원칙을 세웠다. 복귀협의 비폭력주의는 오키나와 대중운동의 유산이 되었으며 복귀협 해산 이후에도 반전평화 운동단체에 계승되었다.
복귀협은 비폭력적 대중운동을 통해 복귀운동에 성공했으며, 이 성공은 복귀 이후의 미 · 일 동맹과 투쟁하는데 커다란 자신감을 불러 있으켰다.

오키나와인의 비폭력적 평화의식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본래 권력에 대한 저항감이 강한 오키나와인은 1899년의 징병령을 어기고 집단적으로 병역기피했다. 그 당시 병역기피는 오키나와만의 특별한 현상은 아니었으며(일본 본토에서도 소수이지만 병역기피자가 있었음), 양심적 병역거부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지만 ‘청일 전쟁 · 러일전쟁에서 죽은 오키나와인의 생명 상실’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었다. 오키나와 민중이 전쟁에 대한 강한 불만 · 혐오감을 갖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주민의 비폭력 평화 운동

 

이어 오키나와 전쟁 기간 중 비폭력적 반전평화 의식이 표출된다. 미 · 일 양국 군대의 주민학살 속에서 싹튼 비폭력 행동의 유산이 오키나와 평화운동의 그루터기가 되었다. 특히 미군에 대한 비폭력 투쟁을 통해 정신적 우위를 확보한 이에지마(伊江島) 주민의 반전평화 의식은 오키나와 평화운동의 새로운 자양분이 되었다.

이에지마는 아주 작은 외딴 섬이지만, 아하곤 쇼우코우(阿波根昌鴻; 1903~2002년)이라는 ‘비폭력 반전평화운동의 거인’을 배출했다. 페루 등에서의 이민생활을 마치고 32살에 귀국한 아하곤 씨는 이에지마에 정착한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4만평의 땅을 구입한다. 이 땅에 덴마크 식 농민학교를 세우려 했으나 전쟁의 그림자가 이에지마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패전색이 짖은 일본군은 오키나와에서 옥쇄하려는 듯 이에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주민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드디어 오키나와 전쟁이 터진 15일 뒤인 1945년 4월 16일, 80대의 탱크를 앞세운 미군 1천명이 이에지마에 상륙한 뒤 아하곤 씨 등의 주민들이 미군의 포로가 되어 도까시끼 시마에서 난민생활을 한다.

난민 생활 중 아에지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청원운동에 성공하여 1947년 3월 이에지마에 귀환했으나, 섬은 미군 비행장으로 변해 있었다. 미군 시설 이외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한 채도 없었고 도처에 사람 뼈가 굴러다니는 폐허의 섬이 되었다. 주민들이 맨주먹으로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는 사이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의 후방 출격기지이었던 오키나와를 아시아 반공전선의 보루로 만든 미군은, 1953년 4월에 토지 수용령을 발표하여 ‘총검과 불도저’로 이에지마 주민들의 땅을 강탈한다.

 

진정투쟁에서 걸식 투쟁으로 선회

 

땅을 잃은 주민들은 살길이 막막했다. 주민들은 1954년 10월 15일, 류규 정부에 토지접수의 중지를 진정하는 투쟁(진정 투쟁)에 나선다. 1955년 5월 진정투쟁 본부(陳情小屋)를 류규정부 청사 앞에 세우고 장기 농성에 돌입해도 미군의 응답이 없자 걸식투쟁에 돌입한다. 7월초에 아사자가 속출하고 100명중 92명이 영양실조에 빠지자 운동의 방식을 걸식투쟁으로 선회한다.

1955년 7월 20일. 생활수단을 모두 미군에게 빼앗긴 이에지마 주민들은 ‘미군 때문에 굶어죽게 된 정황’을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알리며 밥을 얻어먹는 걸식행진을 벌인다. “미군에게 모든 걸 빼앗겨 알거지가 된 우리들을 도와주세요”라고 절규하며... 7.5조의 오키나와 가락에 자신들의 심정을 담은 노래를 부르며...

진정투쟁에서 걸식투쟁으로 이어진 이에지마 농민의 투쟁은, 오키나와 민중운동사의 최고봉인 ‘島ぐるみ(오키나와 섬사람 전체가 달라붙어 미군 지배체제-미 · 일 동맹에 저항한 투쟁)’에 불을 붙였다.

 

‘귀축’미군에 인사하는 비폭력 투쟁

 

그러면 이에지마 농민들은 어떤 사고방식 · 평화의식을 갖고 미군과 싸웠나? 이 투쟁의 지도자인 아하곤 씨는, 진정투쟁에 나설 무렵인 1954년 11월 20일의 주민집회에서 ‘非理法權天(제아무리 강한 나라도 부정한 짓을 하고 하늘을 등지고 국민을 고달프게 하면 하늘이 멸망케한다는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제안한다. 주민들이 이에 동의하면서 ‘非理法權天’은 이에지마 농민운동의 철학이 된다. 이 철학에 바탕을 둔 비폭력 투쟁에 나선 주민들은 ‘미군이 귀축(鬼畜)이라면 우리들은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귀축에게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정중한 인사를 해야한다. 비록 우리 땅을 빼앗기 위해 온 미군이지만 그들을 향해 정중한 인사를 하자’는 캠페인을 벌이자고 결의한다. ‘귀축이자 적’인 미군에 인사하는 비폭력 투쟁이 이에지마 주민투쟁의 출발점이었다.

농민들의 인사를 받은 미군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토지강탈 목적을 숨겼으나 곧장 ‘자신들이 가데나의 특별조사부(OSI) 요원으로서 11월 16일의 폭행사건을 조사하러 왔다’고 이실직고한다. 그들은 본래 토지측량을 방해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을 일으키려 했으나, 지주들이 성심성의껏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런 계획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이렇게 미군들과 비폭력적으로 맞부딪쳐 설복시키면 미군도 꼼짝 못한다는 경험을 한 이에지마 농민들은, 미군과 접촉할 때의 지켜야할 규범(manual), 미군에게 진정할 때 지켜야할 규정 즉 ‘진정규정(陳情規定)’을 만들기 시작한다. 귀축에게 인사하는 비폭력 투쟁의 내공이 쌓이자 ‘진정규정 지키기’로 나아간 것이다.

 

진정 규정...“반미적(反米的)이 되지 말 것”

 

진정규정은 거듭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두 거론할 수 없으므로 주로 미군에 대한 규정을 소개한다; “반미적(反米的)이 되지 말 것.미군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말 것.올바른 행동을 할 것.거짓말을 절대 하지 말 것.집합한 채로 미군을 응대할 때 삼태기 · 낫 · 나무토막 등을 손에 쥐지 말 것[미군이 이런 것들을 흉기로 볼 가능성이 있으므로...].귀보다 더 높이 손을 들지 말 것.큰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말할 것.인도(人道) · 도덕 · 종교의 정신과 태도로 [미군과] 절충하고,[오키나와 주민의 땅을 강제접수하기 위한] 포고령 · 포고 등 잘못된 법규에 얽매이지 말고,도리(道理)를 통하여 제소할 것. 군(軍)을 무서워 말 것.생산자인 우리 농민이 군인을 가르치고 이끄는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하다.”

간디가 영국 제국 군대에 비폭력으로 대응한 방식과 유사한 진정규정이다. 그런데 이 진정규정의 첫마디 ‘반미적이 되지 말 것’이 미묘한 파장을 일으킨다. 만약 한국의 운동진영에게 이 진정규정을 들이대며 ‘반미적인 되지 말 것’을 권유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미와 친미의 2분법이 강한 한국의 미군관과 오키나와인의 미군관은 다른 듯하다. 아하곤 씨가 말하듯이 ‘미군이 이에지마에 온 것은 전쟁 때문인데, 그 전쟁은 일본이 일으킨 것이다. 전쟁이 없었으면 미군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에게 책임이 있으므로 미군에게 욕을 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아하곤 씨와 같은 오키나와 반전운동가의 미군관과 (미국이 개입한 한국전쟁으로 분단된) 한국의 반전 운동가들이 느끼는 미군관은 다를 수 있다. 미군관이 다르므로 미군 · 미군기지 · 미국 반대의 구호도 다르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예민한 부분은 ‘양키 고홈’이라는 구호이다. 이에지마 주민의 진정규정을 따르면 ‘양키 고홈’의 구호가 나올 리 없다.

아하곤 씨가 1984년 6월에 세운 평화 자료관의 이름 ‘ヌチドゥタカラの家’에서, 오키나와인이 ‘양키 고홈’ 구호를 외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생명이야말로 보물’이라는 오키나와의 옛말 ‘ヌチドゥタカラ’을 내세운 발상 속에 오키나와인 특유의 생명평화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군의 생명도 보물이다. 따라서 미군 개인을 배척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양키 고홈’ 구호는 부적절하다.

 

오키나와에서 “양키 고홈!” 구호 외치고 당황

 

이러한 오키나와인의 생명평화 의식 · 미군관을 몰랐던 필자가 2000년 7월 21~23일 오키나와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국제회의-집회에 참석했을 때 당황스런 경험을 했다. 그 때 국제회의 참석자들이 합세하여 헤노코 기지를 향한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대열의 맨 앞에서 한국 대표단이 큰 소리로 “양키 고홈!!”을 외치자 후미의 오키나와인들이 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저 사람들이 갑자기 왜 저래~~~?”하는 표정을 지으며...

“양키 고홈!!”을 외치는 한국 대표단을 향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오키나와인들은 고작 “미군 나가~~”라는 구호를 외칠 뿐이었다. 이런 구호에 이질감을 느낀 한국 대표단의 모 인사는 ‘미군철수를 목청 터져라 외쳐도 미국 놈들이 꿈쩍도 않을 텐데 미군 나가라고 모기 소리를 내면 백년하청이다’며 ‘이불 속에서 만세 부르는 일본식 운동’을 비판했다. 양키 고홈 · 미군철수 구호를 힘차게 외쳐야 속이 시원한 한국인이 보기에 “이불 속에서(?) 미군 나가 주세요~~~”라며 청원하는 듯한 구호가 마음에 들리 없지...

어쨌든 한국 대표단이 “양키 고홈”을 외치면 오키나와인들이 뒤에서 “미군 나가~~”로 화답하는 가두행진을 마친 뒤,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① ‘양키 고홈’과 ‘미군 나가~~’라는 두 구호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② 이 두 구호의 차이는, 한국의 운동권(당시 미국반대 운동의 유력한 구호 중 하나는 “양키 고홈”이었음)과 오키나와 운동권의 전략 · 운동 방식 · 미군관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닌가? ③ ‘양키 고홈’이 없는 오키나와 반기지 운동의 저력은 어디에 있는가? ④ 오키나와의 반기지 운동권이 미군축출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가?

이런 의문점과 관련하여 정유진 씨는 「오키나와에는 왜 “양키 고홈” 구호가 없을까?」(『당대비평』14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① 오키나와인의 ‘생명이야말로 보물’이라는 생명관 ② 미군 문제는 군사 시스템의 문제인 바 군대 자체를 없애는 운동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므로 ‘양키 고홈’ 구호로 만사해결되는 것이 아님 ③ 군대가 구조적 폭력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반(反)기지 운동은 단지 기지를 없애기만 하면 되는 운동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바꾸는 운동이며 따라서 ‘양키 고홈’ 구호는 부적절함 ④ 오키나와에서도 1950~60년대에 토지를 빼앗겼을 때 양키 고홈의 구호를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생산과 생활의 터전인 토지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므로 미군 개인을 공격하지 않았음 ⑤ 미군도 인간이므로 인간존중의 입장을 가져야하므로 ‘양키’라는 차별어를 사용하면 안됨. 전쟁을 준비하는 기지를 반대하는 것이지 미국 사람 개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님. ‘양키’라는 말로 집단화하면 그 속에 있는 개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므로 구체적 인간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짐. 그러므로 상대방(미군 개인)에게 상처를 주는 ‘양키 고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음.

 

‘양키 고홈’ 구호가 없는 비폭력 투쟁

 

위의 글을 통해 오키나와의 <‘양키 고홈’ 구호가 없는 비폭력 투쟁>의 사상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오키나와의 ‘양키 고홈’ 없는 비폭력 투쟁을 일방적으로 높이 보는 것은 아니다. 운동 · 운동구호는 시대상황의 반영물이고 해당 민족 · 국민 · 시민의 기질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경우 1970년 12월 20일의 <고자(コザ) 폭동; 미군지배에 대한 울분이 터져 미군차량 · 미군기지를 불태운 사건>때 ‘양키 고홈’을 부르짖었으나, 1972년의 일본복귀 이후 일본정부에 대한 분노로 말미암아 반미 보다는 반기지 · 반안보 투쟁으로 선회했다.

경우에 따라 “양키 고홈!”을 외치는 한국의 운동이 저력을 지닐 수도 “양키 고홈!” 구호가 없는 오키나와의 비폭력 투쟁이 저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현재 오키나와(헤노코)와 한국(평택)에서 동일한 사안(미군 재편을 위한 새로운 기지 신설 · 기지 확장)을 에워싼 투쟁에 임하고 있지만 투쟁 방식 · 미군관이 다르다. 과연 어느 쪽이 더욱 슬기로운 전략 · 전술로 미군의 기지재편 · 확장을 물리칠지는 두고 볼일이다. “양키 고홈!(한국)”이든 “미군 나가~~(오키나와)”이든 들은 체 하지 않는 미군은 미군기지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동맹의 재편을 서두르고 있다.

 

말이 씨가 된 ‘양키 고홈’

 

그런데...말이 씨가 된다고... ‘양키 고홈’을 외친 한국 사람들의 구호(말)가 씨가 되어 주한미군 병력의 ⅓이 진짜로 고홈(go home)하고 있다. 한편 ‘미군 나가~~’라는 오키나와인의 청원은 씨가 먹혀들지 않은 듯 ‘나갈 염(念)’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헤노코에 최첨단 기지를 신설하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일본-오키나와 운동권이 이불을 박차고 나와 강력한 구호를 외치는 게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힘을 숭상하는 제국의 군대(미군)일수록, 저항하는 쪽의 힘(민중의 힘, 민중의 힘을 반영한 구호의 힘)을 두려워한 끝에 마지못해 양보한다. 마지못해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킨다.

한국에서는 마지못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있으나, ‘철수’의 ‘철’자도 언급하지 않는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철옹성을 깨는 운동의 지혜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에지마 주민들의 걸식투쟁을 재연할 것인가? 아하곤 씨와 같은 비폭력 운동을 지속할 것인가? ‘ヌチドゥタカラの家’의 ‘검(劍)을 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미군을 향한 경구 속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나? 이에지마 농민의 진정규정처럼 미군 개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양키 고홈’ 구호 없는, 반미적이지 않은 반기지 운동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50~60년대 오키나와의 토지강탈에 저항할 때의 구호 ‘양키 고홈’을 다시 외칠 것인가?
‘양키 고홈’ 구호에 문제가 있다면 ‘미군 나가주세요~~~’라는 청원을 앞으로도 지속할 것인가? 이불 속에서 주먹 쥐며 ‘미군 나가~~’를 외칠 것인가? 반미 없는 반기지 운동으로 승부를 낼 수 있나? 기지 문제에만 주목하여 반기지 운동에 주력할 경우, 미군이라는 권력(헤게모니) 장치를 지양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하지 않나?

이와 같은 질문을 오키나와인들에게 제기하며 ‘오키나와의 민중운동’에 관한 연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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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30호에「오키나와에 평화를 (12)」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