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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

히로시마 탐방 (12) 2014년 4월 12~18일에 평화도시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영상자료를 중심으로 편집한 동영상 이다. 이 동영상은, 폭심지에서 17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大正屋吳服店(기모노 의류 판매상) 건물(3층)이 붕괴를 모면하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현재는 휴게소•매점으로 사용중) 피폭 유적지 앞에서 촬영한 것이다. 90세의 연로하신 분이 자원봉사의 일환으로 피폭유적지를 안내해주셔서 퍽 송구스러우면서도 감동 받았다. 더보기
평화도시 히로시마 평화도시 히로시마 김승국(평화 활동가) 1945년 8월 6일에 핵무기 세례를 받아 잿더미가 된 히로시마가, 시민들의 투혼에 힘입어 평화의 도시로 거듭났다. 피폭자를 포함한 히로시마 시민들은 군사도시 히로시마를 땅에 묻고 평화도시 히로시마를 새로이 건설했다. 1945년의 패전 때까지 히로시마가 일본 제국주의 군대(천황제 군대)의 사령부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핵무기 투하의 첫 번째 과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천황제 군대의 잔재를 피폭의 유물(피폭으로 무너진 건물 등)과 함께 매장하지 않고는,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었다. 피폭의 상흔을 입은 히로시마의 시민들은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의 기치 아래, 맨 손으.. 더보기
핵무기 이야기 핵무기 이야기 김승국(평화 활동가/ 평화만들기 발행인) 1945년 8월초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투하된 핵무기로 말미암아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다. 핵무기에 의존하는 핵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핵 시대는 핵무기에 의해 인류가 절멸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인간ㆍ자연의 대량학살(genocide)을 예고하는 핵무기. 삼라만상이 무차별하게 파괴되는 핵 겨울을 재촉하는 핵무기. 이러한 핵무기에 관한 공부를 통하여 삶과 죽음, 살림과 죽임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핵무기 체계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논의할수록 생명평화의 가치를 절감하게 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핵 시대의 문명’을 넘어 ‘비핵(非核) 평화의 문명’을 여는 생명평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핵무기와 관련된 평화교육을.. 더보기
세계 평화포럼이 ‘반핵’을 주창한 배경 김승국 세계 평화포럼(이하 ‘WPF’)의 프로그램 중 반핵(핵무기 반대 · 핵무기 철폐)에 관한 것이 많았으며, 반핵운동에 주력하는 일본인들이 대거 참가했다. 그러면 WPF가 ‘반핵’을 주창한 배경을 더듬어 본다; ① 캐나다 국민들 · 뱅쿠버 시민들의 반핵에 대한 관심이 높다. 1960년대부터 뱅쿠버 시민들은 반핵운동을 열심히 해왔으며 캐나다 정부는 핵무기 철폐를 위한 중견국가 그룹을 주도하고 있다. ② 이 것만으로 설명이 불충분하다. 결정적인 것은, 핵무기의 존재의미가 없는 탈냉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등이 최첨단 · 소형 핵무기(사용 가능한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 소련 사이의 핵개발 경쟁으로 점철된 냉전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핵무기의 존재이유가 없고 반핵운동도 사라져야.. 더보기
북한 핵실험 왜 문제인가? 김승국 1. ‘반전반핵’ 구호는 간데없고 핵폭풍만 남아 북한이 2006년 10월 9일에 ‘핵실험(핵시험)'을 공표함으로써, 핵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기 시작했다. 판도라 상자에서 쏟아져 나올 핵의 유령이 한반도를 배회하면서, 평화통일의 발목을 잡는 귀신이 될 것이다. 핵무기의 국적과 무관하게 핵무기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막는 원흉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핵문제에 민감한 남한의 시민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남한의 학생운동・시민운동은 기지개를 켤 때부터 줄곧 “반전 반핵!” “반핵 평화!” “반전 반핵 평화!”를 외쳐왔는데, 이에 어긋나는 핵실험을 북한이 단행한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반전 반핵’의 가치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이다. 1980년대 남한의 대학가에서 “반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