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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도시-평화 마을/평화 도시

평화도시의 영성

평화도시의 영성



김승국


Ⅰ. 예수의 예루살렘 行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복 되어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Peacemaker)!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복음 5장 9절).


 

마태복음 5장 9절의 평화 영성에 힘입어 군산시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군산시의 Peacemaker)들이 많이 등장하여 군산시를 평화도시로 만드는데 앞장서길 기원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군산시의 Peacemaker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行에서 평화의 영성을 얻을 필요가 있다.


 

  1. 예수의 예루살렘 行(마태복음 21장 1~17절)


 

예수는 왜 예루살렘에 왔을까. 이 질문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유다교 지배층과 로마군에 저항하러 예루살렘에 왔다. 예수의 예루살렘 도착은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의 도전과 저항을 알리는 신호다....체 게바라 일행의 하바나(Habana) 입성처럼 환호하는 군중이 예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누가처럼 군인을 앞세워 시청 앞을 행진하거나 탱크를 앞세워 한강다리를 건너는 모습과 거리가 멀다. 어린 나귀에 탄 모습은 평화를 사랑하고 폭력을 거부하는 모습이다. 폭력을 문제해결의 궁극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세력에게 예수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서울, 메디치, 2014) 535~539쪽>


 

    1) 성전항쟁(마태복음 21장 12~13절)


 

마르코는 예수의 성전항쟁 사건을 예루살렘에 입성한 다음 날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도하지만 마태오는 그것을 첫날 사건으로 바꾸었다. 12절의 ‘성전 뜰’은 이방인들의 마당을 가리킨다. 예수가 여러 번 예루살렘에 왔었는데 왜 이 시점에 성전항쟁을 벌였을까..성전 안에서 열리게 된 성전시장을 예수가 반대한 것 같다. 「마르코」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예수의 치유 활동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마태오」는 14절에서 보도한다...예수 죽음의 원인은 예수의 치유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항쟁에 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보도된 치유할동보다 성서에서 예수의 유일한 폭력행위인 성전항쟁이 본문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

 

조국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식민 지배에서 시달리는 모습에 예수는 얼마나 괴로웠을까...로마군에 빌붙어 경제적 이익에 매달리던 유다교 지배층이 예수는 얼마나 미웠을까. 점잖은 토론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들의 멱살을 잡고 뺨이라도 후려쳤어야 할 장면이다. 비폭력을 외친 예수이기에 대인(對人) 폭력이 아니라 대물(對物) 폭력으로 마감했을 뿐이다.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서울, 메디치, 2014) 540~543쪽>


 

Ⅱ. 소크라테스, 도심의 거리에서 대화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조용한 사색의 장에서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대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아고라 광장에서, 때로는 푸른 지중해가 한 눈에 보이는 아테네 근처의 바닷가에서, 때로는 지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거리에서 철학을 했을까?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 거리 철학을 왜 문자로 생중계했을까? 그 단서는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역설한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대화법 또는 산파술로 요약되는 질문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가실 정도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주로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든다.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빠졌음을 깨닫고 우물쭈물한다. 큰 당혹감과 혼돈에 빠져든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주시한다. 옳은 답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해결되지 못하고 끝난 문제 – 이것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19730206&logNo=10088022253>


 

소크라테스처럼 도시의 거리를 헤집고 다니며 ‘평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아포리아’를 탐구하는 철학의 영성이 중요하지 않을까?


 

 Ⅲ. 상불경(常不輕) 보살


 

먼 옛날 위음왕 여래의 시대에 상불경(常不輕)이라고 이름하는 보살이 있었다. 이 보살은 만나는 사람만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 합장하고 예배하며 “나는 그대를 존경한다. 결코 그대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대는 보살도를 행하여 미래에 반드시 부처를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때로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오히려 성을 내고 이 보살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돌과 막대기로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 보살은 그런 사람을 멀리 피하여가서 역시 큰 소리로 같은 말을 외쳤다. 이러한 행을 오랫동안 지속한 이 보살이 운명하려 할 때 공중으로부터 위음왕 여래가 설하는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이를 믿고 맡아 지녀 그 공덕으로 6근(眼耳鼻舌身意) 청정을 얻어 그 후 오래 살면서 법화경의 전법에 진력하였다. 이 보살을 욕하고 또는 여러 가지로 박해를 하던 사람들도 이 보살의 부사의한 놀라운 설법을 듣고 자기들의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기들에게 불성을 지각케 하려는 이 보살의 참뜻을 깨닫게 되어 그를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 그 후, 이 보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을 만나 수행하고 법화경을 설하여 마침내 부처를 이룬다. 이 상불경 보살은 곧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불은 이와 같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며 이 경을 해설한 공덕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신다.

<출처=http://ojunstar.com.ne.kr/bubwhoa/dl/bub20.htm>


 

상불경常不輕(항상 타인을 경멸하지 않는) 보살처럼 <인불(人佛) 사상, 즉 사람이 곧 부처라는 사상>에 투철한 시민들의 영성이 평화도시에 필수적이지 않을까?


 

Ⅳ. 원효의 무애가(無碍歌)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 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그들은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민중은 무지와 나약 때문에 어떻게 해도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애써 민중을 외면했다.)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 이상한 모양의 큰 표주박으로 두드리면서 無碍歌를 불러서 붙여진 명칭)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무애가無碍歌=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뜻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노래에 담겨있는 무애사상은 원효의 사생활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고 혹은 석공들의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염(보통사람이 모여 있는)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이와 같이 행적도 뚜렷한 규범이 없었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행적은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에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원효의 저술인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 이 사상이 전개되어 있다. 부처가 지향한 이론이 온갖 모순, 대립과 쟁론이 끊어진 절대조화의 세계인 무쟁(無諍)의 세계임에 비해 원효는 모순과 대립이 있는 현실에서 모든 대립과 모순, 쟁론을 조화, 극복해 하나의 세계로 지향하고자 했는데 , 이것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na4540&logNo=10120110433>


 

신라의 서울인 경주 시내에서 원효가 부른 무애가•무애춤(무애가를 부르며 원효가 춘 춤) 속에 평화도시의 영성이 어려있다. 원효가 권력의 도시 경주를 평화로운 불교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원효의 마음 속에 평화도시의 영성이 가득했다고 보아야한다.


 

그러므로 원효의 화쟁사상을 재현하려는 평화애호 시민들이 현대판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는 ‘평화의 영성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원효 프로젝트는 평화도시 만들기의 필수적인 기획이다.


 

Ⅴ. 보살 예수


 

보살은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형으로서, 대승 운동의 주창자들은 당시 소승이 지향하던 아라한의 이상을 비판하고 보살의 이념을 대안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고루 갖추어, 생사의 세계를 두려워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중생 구제에 헌신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보살은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이로움(自利)과 타인의 이로움(他利)을 동시에 추구하는 자이다.


 

보살은 자비로써 중생의 삶에 동참하고자 한다.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삼고 그들이 진 번뇌의 짐을 함께 지고자 한다. 지혜와 자비, 자유와 헌신이 보살의 생명이고 힘이다.


 

이러한 보살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예수님의 모습에서 불자들은 보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 아래, 이제 보살예수론을 전개해본다.


 

이는 불교적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론(Christology)이라 해도 좋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베드로에게 던지신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불교적•아시아적 관점의 답이라 해도 좋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답했지만, 오늘날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신은 보살 중의 보살이십니다.”하고 답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보살은 우리 종교문화에 매우 친숙한 칭호이며, 예수님을 보살의 이미지로 이해하면 새롭고 더 의미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살예수론을 시도해본다.


 

불교라는 전혀 다른 종교 전통에서 탄생한 보살 개념이, 먼 유대 땅에서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살다가 요절한 청년 예수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엉뚱한 발상 같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저[필자]는 예수님이 불교 문화권에서 탄생했다면 틀림없이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리라 상상해본다. 반대로 만약 보살이 2,000년 전 척박한 유대 땅에 출현했다면 필경 예수님의 모습으로 출현했을 것이며,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상이 도전받고 심화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우리 아시아인이 우리의 언어로 독자적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면, 이러한 아시아적 그리스도론의 한 중요한 형태가 ‘보살예수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 출처=길희성 『보살 예수』 (서울, 현암사, 2004) 188~196쪽 요약.


 

위와 같이 보살예수를 지향하는 평화애호 시민들이 군산시를 평화도시로 만드는데 앞장서길 바란다. 그리고 평화애호 시민들을 배출하기 위한 평화교육의 목표를 ‘보살예수 길러내기’에 두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Ⅵ. 김낙중의 탐루(探淚)

   

 

김낙중 선생의 딸인 김선주가 쓴 책 『탐루』 를 읽어보면 아래와 같은 감동적인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잘려나간 손가락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로 당신이 이 땅위에 창조하고자 하는 새 시대, 새 세계의 깃발을 그렸다. 그 깃발에는 태극기의 태극무늬와 북한 인공기의 별 모양이 함께 들어가 있다. 남과 북이 공존하는 깃발, 그것은 당신의 한평생을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바치겠다는 바장한 맹세가 아니었을까.

 

단지 이후, 아버지가 제일 먼저 선택한 ‘능동적인 양심의 행위’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단독시위였다. 아버지는 눈물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서 반만년 동안 고난을 겼은 사랑하는 겨레의 흰옷을 입었다. 피묻은 잿더미가 아직도 성에 차지 않아 무력북진을 부르짖는 권력자에게 항거하는 뜻으로 전쟁 이후 계속 길러오던 머리를 삭발했다. 가난한 아들들을 건쟁터에 내세우고 후방에서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며 춤과 노래로 소일하는 무리 사이에서, 진정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을 찾기 위해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라고 쓴 등불을 켰다. 그리고 아직 포연이 가시지 않은 부산 광복동 거리거리를 헤매고 다니면서 외쳤다.


 

“눈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눈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전선에서 피를 토하며 최 없이 쓰러져가는 가난한 이 땅의 아들들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며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없는가? 눈물을 거진 사람은 없는가? 이 겨레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세계열강의 분할 정잭을 반대하며, 진정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는가?”


 

머리를 빡빡 깎고 하얀 한복 차림으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눈물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고 외치는 한 청년, 사람들은 아버지를 미친놈이라며 쫓아냈다. 다방이나 술집에 들어가면 주인들은 동냥 나온줄 알고 십 환짜리, 백 환짜리는 던져주며 나가라고 했다. 돈을 거절하면 적어서 그런 줄 알고 몇 푼 더 보태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나는 당신들처럼 돈을 찾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많은 사람 중에 눈물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 왔다”라고 말하면 모두 의아해할 뿐이었다.


 

결국 그 다음 날 아버지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무력북진을 반대하며 평화통일을 주장하니 사상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버지는 하루 종일 북부산서에 잡혀가 시달림을 당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굽히지 않고 “무엇 때문에 살인적 전쟁을 강요하는가. 나는 당신들의 국가적 명령에 항거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삶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며 대들었다. 처음에는 마구 땅땅거리며 따귀를 때리고 야단이던 경찰관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는 아버지의 태도를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우리 정부가 단독 북진을 외친다고 해서 정말 전쟁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니, 걱정 말고 공부나 하라”라며 훈계 방면 형식으로 풀어주었다.

<김선주 『탐루』 (파주, 한울, 2005) 63~64쪽>


 

한국전쟁 중 전쟁의 최후보루인 부산 시내에서 평화의 탐루 행각, 전쟁의 도시 부산을 평화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나선 탐루 행각에서  평화 영성이 돋보인다. 전쟁의 도시 부산에서 평화를 찾아 헤맨 사건으로, 예수의 예수살렘 입성이 떠오른다.

 

 

한국전쟁 당시에 모두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는데, 거의 유일하게 김낙중 선생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Peacemaker)의 역할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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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도시•평화마을 연구자이다.

* 위의 글은, 군산 YMCA가 2014년 7월 2일에 연 [평화마을 학교]에서 필자가 강연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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