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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3)-중용(中庸)ㆍ중화(中和)

김승국


앞에서 중립의 ‘중(中)’과 관련하여 ‘시중(時中)’을 설명했는데, 중용(中庸)ㆍ중화(中和)도 함께 거론한다.


김충렬 교수가 말하듯이 ‘중(中)’의 개념은 ① 중용(中庸)의 ‘中’ ② 중화(中和)의 ‘中’ ③ 시중(時中)의 ‘中’ 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김충렬, 104)


이 세 측면 중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중용ㆍ중화를, 중립화(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와 연결시켜 기술한다.


1. 중용


단순한 조화ㆍ절충, ‘중간의 자리에 있으면서 양극단의 거리와 조화하는 것’을 중용이라고 일상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일상 언어에서는 맞을지 몰라도 철학적 측면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물ㆍ사태ㆍ상황을 물리적ㆍ기계적으로 중간에 설정하는 것’이 중용이라고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공자(孔子)의 말씀을 들어보자.『논어(論語)의 옹야(雍也)편에 보면 “子貢問, 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자공子貢이 물었다; ‘사師(子張)와 상商(子夏)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師는 지나치고 商은 모자란다.’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그러면 師가 더 낫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이나 같다(過猶不及).”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같다)’은 바로 객관사물의 발전 규율에 대한 일종의 인식이고 이로부터 즉시 일종의 문제를 처리하는 기본적인 요구를 얻어낼 수 있다. 말하자면 바로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다(無過無不及)’는 것이다. ‘무과무불급(無過無不及)’은 바로 ‘中’이면서 (또한) 바로 중용의 기본적인 주장이기도 하다.(錢遜, 133)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중용은 삶의 지침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과유불급이라는 중용의 가르침을, 정치ㆍ국제정치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한반도 중립화를 위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중용이라는 삶의 가치를 한반도 중립노선ㆍ중립화 외교의 기둥으로 삼아 중립화 통일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겠다. 특히 중용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동양사회(동아시아 지역)에서, ‘중용을 떠올리는 중립화 노선’에 따라 중립외교에 나서면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동양 사람들은 ‘중용형(中庸型) 인간’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여긴다. 모로하시 데쓰지는『공자ㆍ노자ㆍ석가「三聖 회담」』<유학ㆍ도가(道家)ㆍ불교를 대표하는 세분의 성인(三聖; 공자ㆍ노자ㆍ석가)이 모여 회담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저서임>에서, 세분의 성인 모두 ‘중용형 인간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내세운다.(모로하시 데쓰지, 122~125)


이러한 중용형 인간들이 ‘동양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모색하는 모임ㆍ회담’을 열면 어떨까? 공자ㆍ노자ㆍ석가의 ‘三聖 회담’ 처럼...그러면 중용형 인간 띠가 동양사회(좀 더 영역을 좁히면 동북아시아)에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동북아시아(한국ㆍ중국ㆍ일본 등) 시민사회의 중립지대에서 활동하는 중용형 인사(人士)들의 현인(賢人) 회의를 개최하면 어떨까? 이 현인회의의 중요한 의제로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논의하면서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대안을 마련하고, 이 대안을 동북아시아 각국이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국제적인 협의체를 만들면 어떨까?


이러한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현실정치(Real Politics)에 무지한 꿈을 펼치는 것’이라는 비판을, 현실 지향적인 정치인들로부터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공자 등이 주창했던 중용 정치를 실현시키지 못한 것은 정치인 자신들의 책임이다. 비무장 영세중립을 실현하고 있는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중용의 정치에 입각한 중립 노선’을 관철하는 모범사례가 있는데도 이를 외면한 채 분쟁을 일으키며 중립화 통일과는 동떨어진 상황을 만드는 정치인들이 다수 존재하는 게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이 중용형 인간이 되지 못하므로 현실정치의 모순을 가중시키는 가운데 한반도 중립화 통일을 한갓 꿈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용형 정치인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주도하는 정치세계가 중심이 된 국제회담을 열 수 있겠다. 중용형 외교관들이 다행히 존재한다면 그들 스스로 중용적 가치관을 담은 ‘한반도 중립화통일 방안’을 국제회의에 상정할 수 있겠다. 현실정치의 권역 안에서 중용의 가치가 정착한다면,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중용의 가치를 중요시한다면, ‘중용형 6자회담’에서 한반도 중립의 길을 모색할 수 있겠다.


이처럼 중용형 국제정치 사회에서 한반도 중립화의 글을 찾는데, 중요한 요소가 중화(中和)의 가치이다.


2. 중화(中和)


공자가 강조하는 중용의 또 하나의 특징은 화(和)이다. 和는 화해(和諧)이고 중용사상의 매우 중요한 한 측면이다. ‘和의 사상은 춘추(春秋)시기 공자 이전에 바로 제기되어 나온 것이다.『좌전(左傳)』의 「소공(昭公) 二十年」은 기록한다; “...제(齊) 나라 임금이 (안자晏子에게) 말하였다: ‘和와 동(同)은 다른가?’ 안자(晏子)가 대답하였다: ‘다릅니다. 和란 마치 국을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물, 불, 식초, 젓갈, 소금, 매실 등을 준비하여 생선과 고기를 요리하는데, 한사람이 장작으로 불을 때면 요리사는 양념을 합니다. 간을 맞추면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지나친 것은 덜어냅니다. 임금(군자)은 그런 국을 먹고 마음을 평정합니다. 군신(君臣)관계도 또한 그렇습니다...이럼으로써 정치가 평정되어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되면 백성들은 불평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됩니다...물에 물을 탄 음식이라면 누가 먹을 수 있겠으며 거문고 연주에 한 가지 음(音)만 퉁긴다면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同이 옳지 않은 이유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안영(安嬰)이 和와 同의 구별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和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같지 않은 사물, 같지 않은 측면의 상호보충ㆍ상호조절이고 총체(總體)上의 화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름, 소금, 장, 식초와 생선 육고기를 함께 놓아 적당한 양의 물을 더하고 적당한 화력으로 불살라 ‘그 모자람을 더해주고 그 지나침을 줄이며(濟其不及, 以泄其過)’, 만약 각종 조미료와 물, 불, 모두 적당하게 쓴다면, 곧 아주 맛있는 국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것이 和이다.
和는 사물의 존재발전의 기초이다. 맛을 조절하는 것이 이와 같고 음악 또한 이와 같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정치를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정치를 하는 것은 곧 반드시 ‘그 틀린 것을 보여주고서 그 옳은 것을 이루고 옳은 것을 보여주어서 그 틀린 것을 없애야 한다(獻其否以成其可, 獻其可以去其否)’는 것이며 임금과 신하 사이의 같지 않은 의견의 상호보충ㆍ상호조절을 거쳐서 정치적 평화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같지 않은 의견사이의 和는 또한 간단한 절충ㆍ조화가 아니라 그 옳은 것을 보여서 그 틀린 것을 없애고, 그 틀린 것을 보여서 그 옳은 것을 이루며, 같지 않은 의견의 상호보충을 거쳐서 정확성과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中과 和는 중용의 두 가지 기본점이고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中은 바로 和의 주장이고, 사물의 각 부분 각 방면이 모두 적당하면서 中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으면 사물은 총체적으로 비로소 화해(和諧)할 수 있다. 그래서 中과 和를 연결시켜 ‘중화(中和)’라고 칭한다. 中和는 중용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공자의 중용사상은 和에 관한 이러한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論語』「子路」편).
명확하게 ‘화이부동(和而不同)’을 하나의 중요한 정치, 도덕 원칙으로 생각하여 제출한 것이다.(錢遜, 133~137)


위와 같은 中和ㆍ和而不同의 사상 즉 중화주의(中和主義)를 중립화(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와 연계 지워 설명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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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김충렬 지음『김충렬 교수의 중용대학 강의』(서울, 예문서원, 2007)
* 錢遜 지음, 백종석 옮김『선진 유학』(서울, 學古房, 2009)
*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 지음, 이순권 옮김『공자ㆍ노자ㆍ석가「三聖 회담」』(서울, 늘푸른 나무,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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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책과 인생』2010년 5월호에 실린 글이다.
*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