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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동아시아 비핵ㆍ중립화의 밑그림

‘동아시아의 비핵-중립화’ 구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림 1; 동아시아 비핵ㆍ중립화 구도; 생략>를 선보인다. <그림 1>의 ‘비핵(非核)ㆍ중립화(中立化)’는, 지금까지 분리되어 논의되오던 ‘비핵화(한반도 비핵화, 동아시아 비핵지대화)’와 ‘중립화(영세중립화, 비무장 중립화, 무장 중립화)’를 합성한 새로운 구상이다. 비핵ㆍ중립화의 구상이 펼쳐질 공간은 동아시아이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비핵ㆍ중립화’의 구상을 전개하기 위한 밑그림이 <그림 1>이다.
* <그림 1>이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86호(2009.11.5)의 기사「동아시아 비핵ㆍ중립화의 밑그림」의 ‘전문 보기’ 안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위의 <그림 1>의 구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먼저 한국ㆍ일본에서 거론되어온 비핵화ㆍ중립화의 수맥부터 파고 들어간다. 양국의 중립화 논의의 수맥水脈(Ⅰ)과 비핵화 논의의 수맥(Ⅱ)을 타고 들어가 ‘한-일 비핵ㆍ중립화’의 새로운 물줄기를 만든다.

이러한 새로운 물줄기를 지상(현실세계)으로 끌어올려 현실세계(동아시아 지역)를 ‘평화의 옥토(沃土)’로 만든다. 동아시아 지역을 평화의 옥토로 만들기 위한 비핵ㆍ중립화의 장애물(障碍物)은, 북한 핵문제와 미군 재편(GPR: Global Posture Review)이다. ‘북한 핵(核)’과 미군재편은 상호모순 관계이지만, 양자는 동아시아의 비핵ㆍ중립화를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할 극복대상(Ⅲ)이다.

‘한반도의 북한 핵문제와 주한미군 재편 사이의 상호모순(Ⅲ-1)’과 ‘일본의 북한핵 위협론과 주일미군 재편의 상호작용(Ⅲ-3)’ 속에서 ‘주일미군 재편-주한미군 재편의 일체화(一体化)’ 즉 ‘한-미-일 군사동맹화(Ⅲ-2)’가 추진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을 비핵ㆍ중립화 구상으로 지양(止揚; aufheben)해야 할 것이다.

Ⅲ의 극복대상(Ⅲ-1, Ⅲ-2, Ⅲ-3) 사이의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가 높아질수록 동아시아의 비핵ㆍ중립화 구상은 실현되기 어렵다. 따라서 (미군철수 촉진의 효과가 있는) 중립화와 (북한 핵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모색하는) 비핵화의 상호 작용력(作用力)을 높이는 ‘비핵ㆍ중립화(Ⅳ)’를 통해 ‘Post 미군 시대(Ⅴ)’를 앞당기는 게 긴요하다. 이를 위해 중국을 동아시아 비핵ㆍ중립화 대열로 끌어들이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며, 이 작업에 성공한다면 ‘동아시아 비핵ㆍ중립지대화(Ⅵ)’의 틀이 잡힐 것이다.

그러면 위의 총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각론을, <그림 1>의 번호순으로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Ⅰ. 한-일 중립화 논의의 수맥


   1. ‘Korea 중립화’ 논의의 수맥


      1) 중립통일 주장의 흐름

한반도에 대한 영세중립의 주장은 해방 전과 해방 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구한말 조선시대 유길준(兪吉濬: 1856-1914)과 조선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Hermann Buddler)는 1885년 한반도의 영세중립 방안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들은 “조선의 중립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고, 조선이 아시아 강대국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정책이 될 것”이라고 조정에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 영세중립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선은 영세중립 방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조선에서 관세업무 자문으로 근무한바 있는 영국 왕립아시아협회 중국지부 회원(British member of the Chin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인 던캔(Chesney Duncan)은 1889년 8월 그의 저서『Corea and the Power』에서 조선의 엄정한 중립(strict neutrality) 정책은 조선의 진정한 평화(substantial peace)와 실질적 번영(real prosperity)을 가져올 수 있다고 전제하고, 조선정부에 영세중립 정책을 건의했다. 조선 궁내부(宮內府) 고문으로 초빙된 미국인 샌드(William F. Sands)는 1900년 1월 “조선이 영세중립과 자주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스위스나 벨기에와 같이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열강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기와 같은 건의에 따라, 고종은 1900년 8월과 1903년 9월 일본이 조선을 대신하여 열강국가들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제의해 줄 것을 일본정부에 공식으로 요구했으나,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려는 의도로 이를 거절했다.

1945년 해방 후 분단된 한반도의 중립통일을 주장한 학자나 단체는 다양하였으며, 국민의 지지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재미교포 김용중은 1952년『The Voice of Korea』지에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남북한 정부가 한반도의 영세 중립통일 방안을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일본으로 추방된 김삼규는 1953년 ‘한반도는 주변국가의 한 진영에 편입되면, 그 진영에 유리하나 다른 쪽에는 불리하기 때문에 국제적 동의 하에 영세중립국으로 통일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인 김석길은 1961년 4월 ‘한국의 영세중립통일은 오스트리아 식으로 하고, 통일 후 주한외국군은 철수하며, 한국과 외국과의 체결된 군사협정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미동포 황인관은 1970년 ‘남북한 연방제를 통한 한반도의 영세중립 통일’을 제의했다.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한국에 대한 영세중립 발언에 자극 받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民自統)와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中統連)은 1961년 2월 한반도의 통일방안으로 ‘국제적 보장 하에 영세중립 통일’ 정강을 채택하고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통일사회당 김철 위원장은 1971년 2월「국민에게 드림」이라는 글에서 ‘한반도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의 국제적 조약을 통해 남북한의 영세중립 통일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과거 한국인의 영세중립통일에 대한 의식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1961년 1월 15일자 한국일보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32.1 퍼센트가 영세중립 통일을 찬성했다. 그러나 남한의 중립화 운동은 5.16 군사반란 장교들의 탄압과 불법화한 후 40년 동안 중단되었다.

김대중은 1989년 6월 광주교육 대학에서 가진 시국강연에서 “장차 이 나라가 통일이 되면 오스트리아 식 영세중립국가로 가게 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하면서 한반도의 영세중립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의 한반도의 안전보장에 대한 4개국 보장 필요성 언급과, 오스트리아 식 영세중립 가능성 전망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원대한 구상으로 평가된다.


    2) 북한의 중립주장

김일성은 1980년 10월 “고려 민주연방 공화국은 어떠한 정치와 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5년 10월 평양에서 장세동(당시 안기부장)과의 대담에서도 한반도의 중립통일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남북한 군대의 10만 명 감축방안도 제시했다. 그는 1993년 4월 ‘전 민족의 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국가 건설방안’도 제시했다.

김정일도 한반도의 분단은 냉전의 부산물로서, 남북이 각자의 안보를 위해 주변 강대국과 군사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통일된 한반도는 어느 나라와도 동맹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일은 통일된 한반도의 독자적 외교노선으로 ‘스위스식 무장중립(Swiss like armed neutrality)’과 비핵 정책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나라들과 친선관계를 증진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2. ‘일본 중립화’ 논의의 수맥

‘일본의 중립화’는 주로 진보진영에서 평화헌법을 지키는 방법론으로 제기된 듯하다.


<참고 자료>
不破哲三『日本の中立化と安全保障』(東京, 新日本出版社, 1974)
森嶋通夫『北海道新聞』(1979年3月9日付)への寄稿論文
石橋政嗣『非武裝中立論』(東京, 日本社會党中央本部機關紙局, 1983)
澤野義一『非武装中立と平和保障―憲法9條の國際化に向けて』(東京, 靑木書店, 1997)
 
일본의 정당 중에서 사회당이 중립화 논의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비무장 중립’을 일찍이 당론으로 채택했다. 2009년 현재 民社党이 ‘비무장 중립’을 당론으로 내걸고 있다.


<참고 자료>
社會党外交防衛政策委員會『非武装ㆍ平和中立への道』(東京, 1968)


<비무장 중립화에 관한 인터넷 자료>
http://ja.wikipedia.org/wiki/%E9%9D%9E%E6%AD%A6%E8%A3%85%E4%B8%AD%E7%AB%8B

 

Ⅱ. 한-일 비핵화 논의의 수맥


  1. ‘Korea 비핵(지대)화’ 논의의 수맥

1991년 12월 31일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표되기 이전에 한반도 비핵 지대화안이 여러 형태로 나왔다. 1972년 미국의 외교관 커닝험(William Cunninghum) 씨는 ‘미.중.소 3국 간의 조약 또는 미.중.소.일.남북한 6자 조약에 의해 한반도를 비핵 지대화하여, 동북아 비핵화 혹은 군비통제의 합의점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1975년 핼퍼린(Morton H. Halperin) 교수가 ‘남북한 간의 상호 무력 불사용(不使用)을 합의하고 한반도를 핵무기 금지지역으로 설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이것을 미.소.중.일 4개국이 공동으로 또는 별개로 남북한 간의 조약을 찬성하고 이에 동의, 한반도의 비핵 지대화에 대하여 존중할 것을 약속하게 한다’는 안을 제안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한 사람은 일본의 군축문제 전문가인 마에다 히사시로서 1966년에 ‘남북한과 일본 3국이 비핵 3원칙을 약속하고 주변의 미.소.중  3강대국으로 하여금 핵공격 또는 핵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게 한다’는 제안을 했다. 그는 자신의 초기안을 기초로 1979년 좀 더 포괄적인 한반도 평화안을 내놓았다.

일본 사회당의 외교국방위원회는 1966년에 [아시아 태평양 비핵무장 중립벨트 지대의 설정]을 제기하였다.

원래 한반도의 비핵화 구상은 1950년대 후반부터 북한 측에서 일관하여 주장해 왔다.<북한의 비핵 지대화 주장의 경과에 관하여, 김승국『한국에서의 핵문제.핵인식론』(서울, 일빛, 1991) 312~314쪽을 참고할 것>

분단상태인 한반도에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군사적 대립이 상존하고 있음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지만 북한 측에서는 주한미군, 특히 핵무기의 철수를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한반도의 비핵화안을 주장하였다.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아울러 군축안의 일환으로서 비핵화 문제를 제시하였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의 비핵화안을 제시하였다.

이 같은 북한의 비핵화안은 1990년대에도 어김없이 주장되었는데 내용 면에서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종래의 주장은 한반도의 비핵화안을 주한미군의 철수와 연계시킨 데 비하여 1990년대 들어와서는 주한미군의 철수와 함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수락을 전제조건으로 추가한 점이다.

1991년부터 한반도 비핵화안이 남북한 쌍방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1991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4차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한반도 핵문제가 주요 쟁점이 되었는데 북한은 이 회담에서 또 다시 ‘조선반도의 비핵 지대화에 관한 선언(초안)’을 제시하면서 IAEA의 안전조치 수락을 조건으로 주한미군 및 핵무기를 철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남한 측에서도 북방외교를 정치적인 과제로 삼고 있던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고 1991년 12월에 핵무기가 한국에는 없다는 내용의 ‘한반도 내의 핵부재 선언’을 하였다. 한반도 비핵화의 장애 요인인 핵무기가 없다는 핵부재 선언은 남북한 당국이 각각 가지고 있던 국내외적 입지조건과 맞물려서 급속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였고 이로써 1991년 12월 31일에는 남북한 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김명기 외『한반도 비핵 지대화와 국제법』76~78쪽>


  2. ‘일본 비핵화’ 논의의 수맥

일본의 비핵(非核) 3원칙에 입각하여,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비핵지대로 만들자는 논의가 주류이다.

 

Ⅲ. 동아시아 비핵-중립화의 극복대상

‘북한 죽이기ㆍ북한 붕괴’에 주력하는 미군(주한미군ㆍ주일미군)에 결사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가 ‘북한 핵’인 점에서, 양자는 상호모순 관계(Ⅲ-1)이다. ‘북한 죽이기’ 군단인 미군의 전쟁능력 강화 즉 미군재편(GPR)이 더욱 강하게 북한 핵개발을 부채질하면서, 양자의 상호모순이 동아시아 비핵ㆍ중립화의 장애물로 되어 있다. 북한 핵-미군체제(GPR 포함)의 상호모순이 비핵ㆍ중립화의 극복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限), 한반도ㆍ동아시아의 비핵화ㆍ 중립화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핵-미군 체제의 상호모순 관계’를 극복하고 비핵ㆍ중립화의 길로 나아가는 ‘새로운 평화의 힘’을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  

 

  Ⅲ-1. 북한 核-미군재편(GPR)의 상호모순

한-미-일 3각 군사공동체의 최전방인 남한에 주둔하는 주한미군의 북한붕괴 시스템이 날로 강화되고 있다. <최첨단 비핵무기, MD(미사일 방어망; Missile Defense), 핵무기(핵태세 수정보고NPR에 의한 대북 핵공격)의 3박자를 갖춘> 한ㆍ미 연합군의 막강한 전력(戰力)을, 북한의 국력으로 막아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주한미군의 북한붕괴용 군사전략(5027-98 작전계획 등)과 한ㆍ미합동 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방어력이 한계점이 다다르자, 북한은 핵무기 개발이라는 비수를 꺼냈다. 특히 주한미군 재편(GPR)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서두르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북한 핵문제와 주한미군 재편은 상호모순 관계이다. 전쟁수행 능력을 강화하고 있는 미군(미군의 GPR)과 북한 핵무기는 모순이다. 미군이 창(矛)이라면 북한 핵무기는 방패(盾)이다(거꾸로 북한 핵무기의 위력이 강화될수록 북한 핵무기가 창이 되고 미군이 방패가 되는 역전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으나, 현재는 미군이 창이고 북한 핵무기가 방패이다). ‘한ㆍ미 동맹의 북한 죽이기’라는 창(矛)에 대한 방패(盾)로서 북한 핵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양자는 모순관계이며, 이러한 상호모순을 지양(止揚)하기 위해 비핵ㆍ중립화가 필요하다.

<북한 핵무기 개발의 원인을 제공한 미군의 철수를 간접적으로 촉진시키는(직접적인 미군철수 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서 간접적인 미군철수의 효능을 발휘하는)> 중립화 카드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중립화 카드가 비핵화 운동(한반도ㆍ동아시아 비핵화 운동)과 잘 결합되는 구도를 짜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Ⅲ-2. 주한미군 재편(GPR)-주일미군 재편의 일체화/ 한-미-일 同盟軍化

주한미군-북한 핵무기의 모순관계를 일으키는 발단은 미군체제에 있으며, 미군체제는 재편(GPR)중이다. 최근 들어 주한미군 재편과 주일미군 재편이 일체화되는 경향이 드러나면서 ‘한-미-일 군사동맹화’ 쪽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한-미-일 군사동맹체에 대한 방어벽을 쌓기 위해 북한이 핵개발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한미군의 재편 하나만으로도 북한 핵무기 개발의 빌미를 제공하는데, 주일미군의 재편까지 중첩되고 이게 한-미-일 군사동맹체로 이어지므로, 북한 핵무기 개발의 더욱 확실한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Ⅲ-3. 북한 위협론-일본 군비확장-주일미군 재편의 상호작용

1998년 8월 31일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일본에서는 대포동 미사일 발사라고 규정함)에 놀란 일본 사회가 북한 위협론을 실감하기 시작한다. 이미 미국의 북한 죽이기 전략에 따른 북한 위협론[북한=불량국가(Rogue State), 북한=악의 축(an Axis of Evil)]에 심리적으로 익숙해진 일본 국민들은, 대포동 미사일을 통해 북한 위협론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비록 ‘대포동 미사일 위협’이 정략적으로 과장된 것일지라도, ‘북한 위협론(대포동 미사일을 보유한 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논리화한 것)’은 일본인의 잠재심리에 깃들어 있는 전쟁 공포증을 자극했다. 미국(펜타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인 NeoCon)에 의해 가상적인 북한 위협론이 실제적인 북한 위협론으로 둔갑한 맥락을 알지 못하는 일본
국민들은 ‘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유사법제가 필요하다’는 황당한 결론에 동의하고 있다.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영공에 진입한 사실 자체가, 일본의 군사대국화 지향세력에게 북한 위협론의 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일본의 호전세력은 <미-일 군사동맹 체제가 재생산하는 ‘대포동 미사일 위협=북한 위협론의 등치관계’의 이데올로기>를 증폭시키며 신(新)가이드라인ㆍ有事 7法의 전쟁체계를 가다듬어 나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주일미군 재편(GPR)이 진행 중이다.

위의 상호관계, 즉 주일미군 재편과 (북한 핵 위협론을 빙자한 자위대의) 군비확장 사이의 상호관계는 일본열도의 비핵ㆍ중립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러한 장애물을 거두어내고 일본열도의 비핵ㆍ중립화의 길로 나아가 한반도의 비핵ㆍ중립화 흐름과 어울리는 전략을 강구해야할 것이다.

이처럼 요청되는 ‘비핵ㆍ중립화의 전략’을 가다듬기 위한 로드맵(Roadmap)을, 한반도의 상황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Ⅳ. 비핵-중립화


  1. 한반도의 비핵-중립화 로드맵

북한 핵문제를 에워싼 한반도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단기적인 방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단기적인 방안의 승부처는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있다. 그런데 단기적인 방안들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이후의 행보를 막연하게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막연함’은, 중장기적인 밑그림 없이 단순히 6자회담 복귀를 기대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필자가 아래에서 제시하는 중장기적인 밑그림은, 1994년의 제네바협정(‘제1의 제네바협정’)의 요체인 ‘소극적 안전보장(NSA: 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확장한 ‘제2의 제네바협정’을 체결하는 데 중점이 있다. NSA는 핵보유국(미국)이 비핵국가(북한: 제1의 제네바협정 체결 당시 북한은 비핵국가이었음)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보증이다. 그러나 NSA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미국은, 핵태세 수정 보고(NPR: Nuclear Posture Review) 등을 통한 대북 핵 선제공격을 추진해왔다. NPR이 NSA를 죽인 순간에 제1의 제네바협정은 사망선고를 받았다. 사망선고를 받은 제1의 제네바협정을 되살리면서 북한 핵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하는 제2의 제네바협정을 일괄 타결해야 한반도의 난국이 풀린다.

제2의 제네바협정은, 제1의 제네바협정의 소극적 안전보장(NSA)에 ‘비핵+중립+미군철수’라는 ‘적극적 안전보장(PSA: Positive Security Assurance)’을 추가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이렇게 비핵+중립+미군철수를 중심으로 제1의 제네바협정에서 제2의 제네바협정으로 이행하는 구도를 나타낸 것이 <표 1; 생략>이다.
* <표 1>이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386호(2009.11.5)의 기사「동아시아 비핵ㆍ중립화의 밑그림」의 ‘전문 보기’ 안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제1단계

<표1>은 3단계의 이행표이지만 북ㆍ미간의 이견극복 속도에 따라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다. 제1단계의 이행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6자회담에 나온 미국의 첫 화두는 NSA의 재확인이어야 한다. 북한에 핵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시 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파기를 원하는) 북한 측의 ‘원(怨)을 풀어주는 과정’ 없이 6자회담의 지속은 불가능하다. 이어 6자회담이 한두 차례 열리면 미국이 NPR의 적용대상에서 북한을 제외한다는 선언과 함께 북한 붕괴용 각종 작전계획들(5029 등)의 중단을 선언해야한다. 김정일 위원장 등 북한 지도부의 대량살해를 노린 벙커 버스터 핵폭탄의 사용계획도 포기한다고 선언해야 한다.

미국의 북한 죽이기 작전 계획 때문에 켜켜이 쌓인 북한의 ‘한(恨)’을 풀어주는 갈등해소-해원(解寃)이 없으면, 6자회담은 단명에 그칠 것이다. 얼마나 한이 쌓였으면 ‘미국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기 때문에 자위적 차원에서 미국에 맞서보려고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한스러운 발언을 김정일 위원장이 했을까?(2005년 6월 17일 정동영 장관을 면담한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

북한이 수십 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업수이 여김을 당한 ‘한’을 풀기 위해 만든 핵무기는 ‘한(恨)의 핵무기’이다. 이 ‘한의 핵무기’를 없애기 위한 6자 회담이 열리면 ‘북한의 한 풀어주기’를 갈등해소 방안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 사람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 미국식 제로 섬 게임(zero sum game)에 입각한 갈등해소(conflict resolution)방법으로는, 60년 동안 쌓인 북한의 한을 풀어줄 수 없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조선 사람들의 갈등해소 방법을 미국이 터득하는 가운데 북한의 ‘한’을 풀어줘야 북한 핵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 북한을 업수이 여긴 가해자 미국이, 피해자인 북한의 한스럽고 아픈 곳을 살펴주는 상생(相生)의 정신을 발휘하지 않는 한, 제1의 제네바 협정에서 제2의 제네바 협정으로 이행할 수 없다. 미국이 북한의 아픈 곳을 살펴주기는커녕 아픈 곳을 찌르며 ‘폭정(暴政)의 전초기지(前哨基地)’ 타령을 하는 한, 제1의 제네바협정도 지킬 수 없다. 북미 간에 상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NSA에 비핵-중립-미군철수 구상을 얹는 ‘북한 핵’ 해결-평화체제 구축의 길이 열린다.

다행히 6자회담에서 조선식 갈등해소법인 ‘원 풀어주기’와 ‘한 풀어주기’가 이루어진다면, 비핵-중립-미군철수의 3위1체를 통한 제2의 제네바협정이 가시권에 들어올 것이다.

가시권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비핵의 차원에서 1991년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실천해야 한다. 이어 중립을 위해 ①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뒤에 예상되는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북한 핵사찰에서 당사국들(특히 미국)의 중립적인 태도가 긴요하다. 이라크의 대량파괴무기 사찰 때처럼 IAEA가 미국 편에 서면 중립성을 잃게 되면 북한의 반발이 뒤따르므로, 영변 지역 등에 대한 핵사찰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② 제2의 제네바협정 체결 과정에서 6자회담을 비핵화 추진기구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 기구의 중립적인 성격이 매우 중요하다. ③ 비핵화를 추진할 6자회담의 중립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비핵-중립화를 추진한다. ④ 오스트리아 방식의 중립화를 도입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고 그러한 노력 끝에 주한미군의 제1단계 철수를 매듭짓는다. 그리고 미군철수를 위해, 전 세계 미군의 재편 작업(GPR)에 의한 주한미군의 1단계 철수 시간표에 끌려 다니지 말고, 민족주체의 역량으로 주한미군의 1단계 철수를 내리 먹인다.

위와 같은 비핵-중립-미군철수를 유기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비핵+중립’과 ‘중립+미군철수’를 합성하는 발상이 필요하다.


      ① 비핵+중립

비핵+중립의 과정은 미국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북한도 적절한 시점에 핵무기를 철폐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2005년 6월 17일 정동영 장관과의 면담에서 밝혔듯이 비핵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므로, 북한 쪽의 당위이다. 중립 역시 국책에 해당되므로 북한 쪽에서 관심을 가질 만하다. 1980년 10월 10일 조선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연방 공화국 창설 방안]을 발표하면서 남북이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에 따라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국가로 되어야한다’고 역설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중립은 국책이다. 김일성 주석이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이끌면서 비동맹 중립을 제창했기 때문에, 김정일 정권이 비동맹 중립의 ‘중립’ 정책을 한반도에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김일성 주석이 1993년 4월 7∼9일의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 연설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전 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하면서 ‘전 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평화적・중립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자’고 제안했으므로, 김정일 위원장이 중립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북한은 비핵+중립의 가치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문제는 한-미-일 군사 공동체가 비핵+중립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한-미-일 군사공동체 중에서 비핵+중립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쪽이 남한 정부이다.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창한 노무현 대통령의 초심 속에 중립의 맹아가 엿보이지만, 미국의 위력 앞에서 꼬리 내린 균형자론 속에는 중립은커녕 종속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만일 ‘동북아 균형자론’의 불씨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이를 비핵+중립과 연결시키는 연습을 남한 정부가 해볼 만하다.

햇볕 정책의 창안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스트리아 중립방안을 제의한 적이 있으며 남한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주도한 적이 있기 때문에, 동북아 균형자론의 연장선상에서 비핵+중립에 접근해도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문제는 미국과 일본 쪽에 있는데, 미국은 예전에 주한미군 철수를 강구하면서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내부에서 검토한 적이 있으므로 비핵+중립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아무튼 한-미-일 군사공동체를 비핵+중립 쪽으로 유인해내기 위해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실현하고, 이를 총괄하는 기구로서 6자회담을 활용하면 된다. 6자회담의 성격을 비핵+중립 쪽으로 서서히 전환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면 된다. 한-미-일 군사공동체를 6자회담이라는 절구통 속에 집어넣고 비핵+중립의 방아를 찧는다면 한-미-일의 탈출구를 봉쇄할 수 있다.


      ② 중립+미군철수

한반도 주변의 지정학적인 역학관계 때문에 한-미-일의 탈출구를 봉쇄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핵+중립, 중립+외국군 철수에 성공한 해외의 사례가 있으므로 비관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비핵+중립의 모범국가로 스위스(재래식 무장 중립)와 코스타리카(비무장 중립)를 들 수 있으며, 중립+외국군 철수의 모범국으로 오스트리아를 들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지속된 내전을 끝내고 주변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 1536년에 영세중립을 선언한 스위스는, 1815년에 영세중립국으로 공인받은 다음 평화로운 상태에서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이다. 스위스는 영세중립 국가이지만 재래식 무장을 하고 있다. 제2차 대전 때 독일 편에 선 오스트리아는, 패전 이후 소련군.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한 악조건을 벗어나기 위해 ‘외국군 철수’ 차원에서 중립 정책을 펼친 끝에 영세중립 국가가 되었다(1955년에 영세중립 국가 선언). 군대 없는 나라인 코스타리카는 1983년에 비무장 영세 중립을 선언했다. 미국의 앞마당에 위치한 코스타리카는 미국의 압력을 뿌리치는 가운데 비무장 영세 중립국이 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했다. 그 결과 스위스와 달리 무장하지 않은 영세 중립국가로 되었다. 코스타리카에는 군대가 없으며 경비대(시민 경비대 4,300명.지방경비대 3,200명)가 있을 뿐이다.

한반도의 경우 지정학적인 역학관계 때문에 코스타리카와 같은 중립 정책을 지키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무장 중립을 견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스위스식 무장 중립, (외국군을 철수시키는 데 유리한) 오스트리아식 중립을 따르는 게 좋다. 따라서 북한 핵문제의 당사자인 북한 당국이 스위스식 무장 중립(또는 오스트리아식 중립)에 비핵을 가미하는 정책을 수행하면서 미국을 그쪽으로 유인하는 게 바람직하다.

북한의 대변인으로 알려진 김명철 씨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김정일의 시각은 스위스식 무장중립론’이라고 언명했다.<Kim, Myong Chol. 2001. 「Kim Jong Il's Perspectives on the Korean Question」 {The Brown Journal of World Affairs Winter/Spring} 2001 Vol. Ⅷ, Issue 1.>

그렇다면 스위스의 재래식 무장(비핵) 중립을 북한이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북한이 2.10선언(핵 보유 선언) 이후에 ‘핵무장 중립’을 고려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핵무장은 원론적으로 비핵+중립 정신을 훼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북한이 선호하는 스위스식 비핵+중립 모델에 오스트리아의 중립+외국군 철수 모델을 중첩시키면 고차원의 평화구축 방안이 나올 듯하다. 북한이 바라는 외국군(미군) 철수를 에돌아 관철하는 방편으로 중립화(중립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전제로 미군철수가 이루어져야 한다)를 추진하면 예상 밖의 성과를 얻을 것이다.

스위스.코스타리카의 비핵+중립과 오스트리아의 중립+외국군 철수를 접합한 ‘비핵+중립+외국군(미군) 철수’의 한반도화(化)를 이룩하는 고리는 오스트리아의 중립 정책이다. 오스트리아는 제2차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 패전국가가 되었다. 패전국가의 관리 체계에 따라 소련군과 연합군이 동시에 오스트리아에 진주하는 수모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세중립 정책을 채택했다. 오스트리아가 외국군의 철수를 목적으로 한 영세중립 정책에 성공한 모델을 한반도에 적용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실천하는 게 제1단계의 관건이다. 이와 관련하여 셀리그 해리슨(Selig Harrison)의 저서『코리아 엔드게임(Korea End Game)』에 나오는 ‘한반도 비핵 중립화-미군철수의 방법론’을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가 비핵+중립에 미군철수를 중첩시킨 이유는, 주한미군의 60년 주둔 체제가 북한 핵무기 보유의 근본원인이기 때문이다. 남한 땅에 주둔한 주한미군이 주일미군과 합세하여(최근에는 자위대가 가세함) 북한 붕괴용 군사행동을 가속화하는 가운데 수난자인 북한의 임계점이 터진 것이 2.10 선언(2005년 2월 10일에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함)이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인 ‘비핵’과 국책인 ‘중립’을 북한 당국이 실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주한미군.한미동맹이다. 주한미군의 대북 핵전쟁을 예방하는 ‘비핵’과 한미동맹을 지양하는 ‘중립(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이 어울려 비핵+중립을 실현하는 전제조건은, 주한미군의 철수에 있다. 필자가 비핵+중립+주한미군 철수의 3자 관계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제2단계/ 제3단계 로드맵; 생략
   


  2. 일본의 비핵-중립화 모델

필자의 연구부족으로 이 부분은 생략한다.

 

Ⅴ. Post 미군 시대

비핵+중립을 실현하는 전제조건은, 주한미군의 철수에 있다.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주일미군이 철수해야 일본열도의 비핵+중립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런데 주한미군ㆍ주일미군은, 제국 미국의 아시아ㆍ태평양의 지배구도와 관련된 물리력이므로 나가라고 해서 쉽게 떠날 존재가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ㆍ일본의 진보세력이 미군철수를 주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강화ㆍ재편(GPR)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직접적인 미군철수 운동에만 매달릴 수 없는 상황에서 에돌아가지만 ‘Post 미군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 그게 바로 비핵+중립 카드이다. 우선 중립+외국군 철수의 모범국인 오스트리아 방식에 (미국의 압력을 뿌리치는 가운데 비무장 영세 중립국이 된) 코스타리카 방식을 가미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주한ㆍ주일미군이 주둔한 채 한반도ㆍ일본 열도의 중립화가 불가능한데...미군철수 운동을 전개해도 전혀 반응이 없으므로, 미군철수 효과가 있는 중립화 카드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중립화-미군철수의 연계를 강조하는 주종환 선생의 주장과 셀리그 해리슨의『코리아 엔드게임』에 나오는 ‘한반도 비핵 중립화-미군철수의 방법론’을 참고하면 비핵ㆍ중립화를 통한 ‘Post 미군시대’의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비핵ㆍ중립화를 통한 ‘Post 미군시대’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부딪치는 게 중국의 동의이다. 중국의 동의ㆍ지지 없이 동아시아의 비핵ㆍ중립화는 상상할 수 없다. 다행히 중국도 내심으로 주한ㆍ주일미군의 주둔을 원하지 않으므로, 중국의 동의ㆍ지지를 얻어낼 가능성이 있다.     

 

Ⅵ. 동아시아의 비핵ㆍ중립지대화

‘Post 미군시대’의 도래를 은근히 원하는 중국이 ‘비핵ㆍ중립’에 동의한다는 이야기는, 중국도 비핵ㆍ중립화할 뜻이 있다는 것이다. <비핵ㆍ중립의 마지막 관문인 미군주둔 체제를 벗어나 ‘Post 미군시대’를 맞이한> 한반도ㆍ일본이 비핵ㆍ중립화의 길로 나아가고, 중국의 동의까지 얻어내면 동아시아의 비핵ㆍ중립지대화는 실현가능한 상태(可能態)로 된다. 이 가능태(可能態)를 현실태(現實態)로 바꾸기 위한 단계별 전략이 필요하며,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단계별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ㆍ일본 쪽에서 거론되어온 ‘한반도 비핵화ㆍ동아시아 비핵지대화ㆍ한반도 중립화ㆍ일본의 비핵 3원칙 엄수ㆍ일본열도의 중립화’ 논의를 총화하면서 동아시아를 단계별로 비핵ㆍ중립지대로 만드는 전략을 가다듬어야할 것이다. 시ㆍ공간에 따라 동아시아의 단계별 비핵지대화 구상과 단계별 중립화 구상을 조합하는 전략도 마련할 수 있겠다.  

이를 위해 ① 미군철수를 유도하는 비핵+중립 카드를 사용하면서 한반도의 비핵ㆍ중립지대화와 일본열도의 비핵ㆍ중립지대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② 양자의 합성(한반도의 비핵ㆍ중립지대화+일본의 비핵ㆍ중립지대화)에 주력하며 ③ 중국의 동의ㆍ지지를 얻어내며 ④ 마지막으로 미국이 ‘동아시아의 비핵ㆍ중립지대화를 전제로 한 동아시아 다자간 안보 틀’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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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 이 글은, 2009년 10월 24일 오사카에서 열린 ‘제30회 동북 아시아 평화구상 연구회’에서 필자가 강연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