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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일본 서부 지방 탐방기 (3)


김승국

 

두개의 한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인의 관점 역시 분단되어 있다. 북한을 차갑게 보며 혐오하는 한류(寒流)와 남한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한류(韓流)가 공존하는데, 이는 일본인이 갖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평가의 분단을 반영한다. 전자(寒流)의 상징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이고, 후자(韓流)의 상징은 배용준의 ‘겨울 소나타’이다.

필자는 이번에 일본 서부 지방을 돌면서, 두개의 한류(寒流 · 韓流)가 일본사회에 뒤엉켜있으며 일본의 운동권도 예외가 아님을 실감했다. 먼저 일본 운동권의 寒流(북한 혐오증)를 다룬 다음에 韓流를 설명한다.

 

일본 운동권의 북한 혐오증

 

일본의 일반 시민들(재일 동포 제외) 사이에 북한 혐오증이 아주 강하며, 일본의 진보적인 인사들 · 운동가들 역시 상당한 북한 혐오증을 갖고 있다. 필자는 일본의 운동권 친구들에게 ‘당신들은 왜 북한을 혐오하는가? 북한 혐오의 이유를 말해 달라’고 당돌한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 때 마다 일본의 운동권 친구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북한은 문제아’라고 답변하지만 북한 혐오의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는 못한다. ‘그저 남들이 그런 생각을 하니까. 사회 분위기가 그러니까 진보적인 인사들도 부화뇌동한다’고 치부하려 했다. 그래도 무언가 사연이 있을 성싶어 배경을 캐어 보니, 북한 사람들을 피그미나 하등동물로 폄하하는 ‘조센징 의식’이 내재해 있음을 발견하고 필자 스스로 놀랐다.

일제 지배 기간 중 일본인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던 ‘조센징 의식(조선인 즉 조센징은 열등민족이고 일본인은 우등민족이라는 의식)’이 일본사회의 우경화(군사대국화, 평화헌법 파괴 움직임, 야스쿠니 신사 참배대열 급증)와 맞물려 증폭되고 있으며 이러한 심리적인 전선에 진보적인 인사들도 암암리에 포섭되어 있다.

북한 혐오의 심리적인 전선이 급속도로 확대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한 다음부터이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의 모든 언론기관이 총동원되어 ‘북한 악마 만들기 · 북한 죽이기’ 작업에 몰입했다. 일본인 자신이 일제 36년간 수많은 조선인을 납치(강제연행)한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은 채...

일본인 납치 소동이 일어난 무렵에 방일한 필자는 일본의 TV를 켜자마자 경악했다. 그 때 일본의 수많은 텔레비전 방송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납치 사건을 침소봉대하며 ‘북한 악마 만들기’에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너무나 저질스럽고 낯 뜨거운 장면(김정일 위원장을 위한 기쁨조 등에 관한 장광설 정도로는 일본인을 자극할 수 없으므로 더욱 짜릿한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충혈된 장면)이어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수십 개의 텔레비전 방송이 24시간 돌아가며 현대판 조센징인 북한 · 북한 체제 · 김정일 위원장을 난자질한 결과 일본인 사이에 조센징 위협론(관동 대지진 때 조센징 위협론을 선동하며 조선인을 대량학살함)-북한 악마 만들기의 선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본의 진보적인 인사들마저 이러한 흐름에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그들 중 일부가 서서히 북한 혐오증에 물들게 되었다.

이러한 북한 혐오증은, ‘조센징이라는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일본이 군사대국화하고 북한 위협론에 대비한 국방비 증액 · 미국의 대북 전쟁 지원(유사입법 제정 · 자위대법 개정 등)을 해야 한다’는 일본 우익세력의 논리와 직결된다. 일본인 납치 소동의 북한 혐오증이 미국의 ‘북한 악마 만들기(북한=악의 축)’와 연결되면서 미 · 일 동맹의 북한 죽이기(대북 전쟁기획)의 심리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이러한 심리적 전선에 마땅히 저항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를 예비해야할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마저 미 · 일의 북한 죽이기 동맹의 덫에 빠져 북한 혐오증을 드러내고 있다.

재일 동포단체를 제외한 일본의 운동권 중 99%가 반북인사이고 친북 인사(북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주사파라고 규정할 수 없음)가 1% 정도라고 말하면 좀 과장된 통계일지 모른다. 1%의 친북인사 중 필자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그룹 안에서도 친북 성향이라는 이유로 은근히 왕따 당했다. 그가 속한 그룹은 한 · 일 민중연대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단체인데, 그를 경원시하는 걸 보고 일본의 진보인사들 사이에 얼마나 반북의식이 강렬한지를 알게 되었다.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이 전 세계의 진보적 지식을 선점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나 유일한 예외지대가 북한이다. 일본의 서점들에는, 최첨단의 진보이론을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북한 관련 책이 진열된 코너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힌다.
 
 
필자가 8월 1일 히로시마에 도착하자마자 들른 ‘준쿠도'라는 유명한 서점의 북한 코너에 선보인 책의 주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이 주체사상에 물들어 평양이 된다/ 한국은 왜 북한에 약한가/ 북한과 중국간 惡의 연결/ 북한 붕괴 시나리오/ 미국이 생각하는 김정일 제거 시나리오/ 김정일이 일본에 보내는 특공대 스파이 활동의 전모/ 북한이 폭발하는 날을 기다리며/ 사람을 잡아먹는 북한 수용소/ 북한; 광기의 정체/ 북한 최후의 날(만화)/ 테러 국가 북한/ 김정일의 일본에 대한 음모/ 북한, 악마의 정체...

 

한류에 빠진 일본 운동가들

 

배용준의 ‘겨울 소나타’에 열광하는 일본의 아줌마 부대가 춘천을 집단 방문한다는 한류 관련 기사를 많이 보았으므로 이에 관한 부연설명은 생략한다. 필자는 일본의 진보적인 인사들 중에서 독특한 사연을 갖고 한류에 사로잡힌 ‘운동판 한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1) 한류에 미친 운동권 아줌마

 

8월 7일 나가사끼.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의 본부에서 주선한 민박집 주인의 이름은 마쓰모토 세쓰꼬(松本)로서 <신일본 부인회>라는 운동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운동권 아줌마이다. 그녀는 몇 년 전 남편과 사별한 다음 배용준 이라는 한국의 젊은 남자와 열애중이다. 필자가 배용준 보다 훨씬 추남인데도, 그녀는 필자를 배용준으로 착각한 듯 환상적인 대접을 해주었다. 한국 땅에서 건너온 남자를 모두 배용준처럼 사모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한국 사랑을 늘어놓는데 ‘천일야화’ 같았다.

그녀는 지난해에만 3차례 방한했는데 올 가을에도 한국에 갈 예정이라고...필자가 그녀에게 운동권 아줌마 부대를 데리고 오라고 권유하니 환하게 웃었다. 필자는 일본의 운동권 아줌마 부대를 이끌고 장기수 어른들의 청춘이 묻혀 있는 지리산에 오르며 한국민중의 끈질긴 저항을 들려주고 싶다. 진짜 ‘운동권의 한류’를 보여줄 작정이다.

한국에 진짜 미쳐버린 그녀는 나이 예순 둘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 영화광으로서 나도 전혀 모르는 영화 · 드라마 장면을 설명하는데, 맞장구치기도 어려웠다. 겨울 소나타, 슈리, 실미도, JSA, 가을 동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 장금이 등에서 감동받은 장면을 너무나 실감나게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배우 이름도 줄줄이 나왔다; 배용준, 장동권, 원빈, 이병헌, 안성기, 손승헌 등...

그러던 그녀가 나와 헤어지는 날 아침에 중대 선언을 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간부이었던 자기 시아버지가 항일 운동을 하던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특공대 대장이었다고...그러면서 나에게 사죄했다. 김일성을 암살하려던 시아버지의 며느리가 배용준에 미치며 한국의 운동을 성원하는 운동권 아줌마가 되었다니...시아버지가 지하에서 통곡하리라...

 

  2) 한국에 미친 ‘늙은 운동꾼’

 

8월 12일. 기타 규슈(후쿠오카)에서 동침(?)한 데쓰오(哲夫)씨는 73살의 노익장이다. 그는 일본 역사 교과서 반대 투쟁의 원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68살에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한국에 더 깊이 빠졌다고 들려주었다. NHK 한국어 방송을 들으며 공부하는데 너무나 즐겁다고 한다. 한국어의 받침을 일본인이 익히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하자, 그런 어려움을 한국 사랑으로 극복한다고 말했다.

그는 69살에 고려대 어학당에 유학 올 정도의 한국 광(狂)이다. 보통의 한국 광이 아니라 한 · 일 연대에 앞장서는 ‘운동권 한국 광’이니 정감이 두터워질 수밖에...돌아가신 필자의 부친이 데쓰오 씨로 환생한 듯한 착각을 갖고 무중력 상태에서 밤늦게 까지 그와 환담을 하니 더욱 깊은 정이 들었다. 밤 새우며 한국 이야기를 하자는 데쓰오 씨의 강력한 권유를 물리치고 잠이 든 시각은 새벽 2시였다. 그 사이에 일본 술을 몇 병이나 해치웠는지 모른다.

그는 한국 사람들의 역사적인 한(恨),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안다면서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인 차별 사례를 거론하면서 필자에게 진정으로 사죄한다고 거듭 표명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조선인 차별에 가담한 죄(?)를 필자에게 고백하는 듯했다.

 

  3) 요시다 히로노리 씨의 한-일 연대운동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에 참석하는 한국인에게 매년 점심 한 끼를 대접하는 영감님이 있다. 이름은 요시다 히로노리(吉田博德; 85세). 1926년 그가 5살 때 아버지를 따라 전북 김제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14살에 경성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21살에 졸업했다. 경성 사범학교 동급생중 두뇌가 반짝이는 조선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인이 학교 선생으로 발령 받은 다음 일본인에 비해 봉급이 절반도 되지 않는 차별을 받았지만, 요시다 씨는 보통의 일본 사람들처럼 ‘그런 차별이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의 패전이후 재판소에 취직한 다음 노동운동을 30년 동안 하면서 진보적인 의식을 갖게 됨과 동시에 일제의 조선지배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일조(日朝)협회>를 창립(1955년 창립)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자신이 조선 땅에 살면서 ‘일본인 우월의식’에 빠져 조선인 차별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은 점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면서 한-일 연대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60년대 말까지 조총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했으나, 70년대부터 북한에서 일어난 김일성 숭배운동을 따르는 조총련에 실망한 나머지 83년부터 조총련-북한과 멀리했다고 털어 놓았다. 조총련과 거리를 두었지만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는 운동을 나름대로 전개해왔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김영삼 정권 때 비자를 받아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그는 한국 사랑의 열망에 다시 사로 잡혀 72살 때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일간의 연대를 위해 한국말로 의사소통해야함을 깨닫고 늘그막에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말을 한국어로 구사하면서 콧잔등에 땀이 나는 표정에 감복할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 문제를 구체적으로 알려면 한국말을 배워야하지 않느냐며 필자의 손목을 꽉 잡는 순간 한-일 연대의 혈맥이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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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97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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