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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안보론-안보 패러다임 전환

민족 방어

김승국

1. 평화 군축과 ‘민족 방어’

사회과학 논쟁의 핵심 주제인 ‘계급적 관점’과 ‘민족적 관점’이 한반도의 군사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한반도의 군사 문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계급적 관점과 민족적 관점이 반드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므로 현안에 따라 두 가지 관점을 복합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군 ・산 복합체(軍・産 複合體)가 다국적 기업으로서 한반도의 군비확장을 원격조종할 경우 군 ・산 복합체 자본을 계급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 ・산 복합체 자본의 요구에 순응한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획책한다면 민족적 관점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군사 문제 ・평화군축 문제를 계급적 관점에서 조명한 연구성과는 어느 정도 있으나, 민족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물이 많지 않다. 특히 분단국가에 있어서의 평화군축 방법론에 관한 글은 거의 없는 실정이므로 이 문제를 논리화하는 데 약간의 무리가 따른다.

엥겔스(Engels)가 군축론을 제기한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러 형태로 평화군축론을 전개했다. 유럽 사회주의 운동진영 내부에서 벌어진 ‘제1차 대전 참여 여부를 둘러싼 이론 투쟁’이 인터내셔널의 해체를 부를 정도로 ‘전쟁 ・평화론’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은 없다’는 국제 마르크스주의의 명제가, 유럽 각국의 민족문제에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독일의 노동자는 게르만 민족의 장래를 위해 참전하고 영국의 노동자들은 앵글로색슨 민족의 장래를 위해 참전한 끝에 혈맹의 노동자들(마르크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끼리 혈투를 벌였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고 설파한 마르크스(Karl Marx)의 주장이 무색해진 것이다.

생각건대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제공한 민족을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이 주효했다. ‘노동자들에게도 조국이 있다’는 명제가 삶의 현장에서 증명된 셈이다. 이 명제는 2차 대전 때에는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져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스탈린 정권의 ‘조국 방위전쟁론’은 반나치즘 전선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룩하자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서 조국을 방위하면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고 유형, 즉 ‘민족 방위’를 통해 평화군축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중요함을 깨달을 수 있다. 민족의 자주적인 삶을 보장하는 무력 수준을 유지하는 선에서 평화군축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민족의 평화로운 삶을 구가하는 데 필요한 군비 체제를 민족이 자주적으로 결정해야 하며, 이러한 군비체제를 재정립하기 위한 군축 협상을 민족 자주의 이름으로 진행해야 한다. 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힘, 즉 민족 자결의 방어력을 갖추는 수준에서 평화군축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분단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민족 절멸의 무한대 군비확장을 끝장내고, 통일을 지향하는 가운데 민족방위를 담보할 최소한의 무력을 갖추는 쪽으로 군비를 축소해야 한다. 한반도의 ‘나선형(螺旋形) 군비확장 구도’ 를 지양하여, 외세의 입김을 배제하고 민족 스스로 민족의 평화로운 생존권을 확보하는 수준으로 남북한의 군비를 낮춰야 한다.

‘민족 방위를 위한 군축’은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7 ・4 공동성명, 남북 기본합의서, 남북한 비핵화 선언 등에 나와 있다. 다만 위의 성명과 선언서들에 민족 자주의 관점이 조금 부족하기 때문에 민족 자주의 관점을 보완하면서 위의 성명 ・선언서를 실현시키면 된다.

남북한 당국은 남북 기본합의서에 따라 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하여 평화군축을 이룩하자고 약속해 놓고도 실천하지 못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받고 있는 남한 군사 당국에 대한 북한 쪽의 불신으로 군사공동위원회가 열리지 못했다. 또 남북한 비핵화 선언을 남북한이 실현하고 이를 동북아시아 비핵 지대화로 격상시키면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자마자 1994년의 북한 핵 위기가 닥쳐와 전쟁 일보 전까지 치달았다.

남한의 군비확장 구조는 미국의 핵우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처럼 미국의 핵우산을 중심으로 첨단무기 군확체제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군축을 거론할 때는 ‘핵무기-첨단 통상무기 복합체’를 어떻게 축소하느냐가 선결조건이다. 여기에서 미국의 핵우산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한-미-일 3각 군사 공동체가 ‘민족 자주적인 군축’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타파하는 평화군축 운동이 요청된다.

남한은, 한국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되지 못했다. 이 점이 남북한의 군축협상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국전쟁 중 군사주권을 미국에 양도한 원죄 때문에 남북 기본합의서의 상호 불가침 조항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전시 작전권이 없는 한국의 군사 당국이 앞장서서 북한과 군축 협상을 벌일 수 없다. 한국군에 군비확장의 자유는 있으나 군비축소의 자유가 없는 현실이, 민족 자주적인 평화군축의 장애물로 되어 있다. 평화군축 운동세력이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론을 생각할 수 있다. 국민의 평화적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군축론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국방비를 줄이거나 군축을 통한 평화배당금을 민중복지로 전용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 ‘인간 안보(human security)’를 확립하는 차원에서 군축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민족의 자주’ 없이는 큰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국민주권에 의하여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있지만, 분단 때문에 민족사회가 형성되지 않은 미완성의 한국 사회에서 ‘인간 안보를 겨냥한 평화군축’에 성공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평화군축의 주체를 국민국가 단위로 할 것인가 민족 단위로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두 문제가 서로 어긋나지만 운동을 전개할 때 우선순위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한다면 ‘민족’ 단위로 평화군축을 진행하는 쪽이 더욱 포괄적이라고 본다. ‘민족 자주형(民族 自主型) 평화군축’이 통일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2.) 민족방어와 연방제 통일

민족 자주형 평화군축은 연방제 통일의 지름길이다. 민족 자주형 평화군축은 민족방어를 중심에 놓고 이루어져야 한다. 이 민족방어는 자기 민족만 지키는 민족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언급하듯 ‘다른 민족을 존중하는 정치적 고려가 있어야 진정한 방어전쟁이다.’(주1)

타자(他者) 즉 다른 민족 ・국가를 정치적으로 고려하면서 우리 민족의 안전을 방어하는 민족방어가 중요하며, 이에 걸맞은 안보관을 가다듬어야 연방제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다. 위의 ‘타자 즉 다른 민족 ・국가를 정치적으로 고려하는 행위’는 국제평화의 기본적인 요건이다. 국제평화와 민족문제(민족방어)를 동시에 고려(주2)하지 않고는, 세계화 시대에 연방제 통일의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2004년 9월 7일에 작성된 초고를 2007년 11월 11일에 수정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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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전쟁을 방어전쟁과 공격전쟁으로 나누고 전자는 긍정하고 후자는 반동적(反動的)으로 간주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마르크스는 공격전쟁을 반동적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방어전쟁에 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자가 전쟁을 멈출 수 없을 경우 방어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때의 방어전쟁은 부정(不正)하지 않다. 그러나 방어전쟁의 한계는 모호하며, 군사적 이유를 빙자하여 방어전쟁이 공격전쟁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음을 지적한 사람도 역시 마르크스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방어’를 고려해서는 안 되고 다른 민족을 존중하는 정치적 고려가 있어야 진정한 방어전쟁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방어전쟁이라는 공식을 군사에만 한정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일이 잘못된 이유를 지적한 것이다.<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박사학위 논문, 1996) 129쪽>

(주2) 평화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국제적 ・대외적인 원칙이다. 이 원칙은 사회체제의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민족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실현시키고 국제법, 국가 간의 조약 ・협정을 토대로 국가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마르크스는 ‘세계혁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제평화를 교란하는) 전쟁을 회피한다. 마르크스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각국(특히 유럽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약소국이나 약소민족에 대한 자국의 침략 ・정복전쟁 ・간섭전쟁에 반대할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국제평화 문제를 다룬 마르크스는 민족적 억압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며, 민족해방 투쟁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국제평화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원리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이다. “여러 나라 노동자 계급의 단결이, 궁극적으로 국제적인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틀림없다.”(MEW 16, p.530) 이러한 입장에 따라 각국의 노동자는 자국 정부의 침략 ・정복전쟁 ・간섭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만약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서로 다른 국민들 사이의 협력이 필요하다면, 민족적 편견을 갖고 약탈전쟁을 위하여 인민의 피와 재화를 탕진하는 대외정책으로 거대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까?”(MEW 16, p.13)
마르크스에 의하면 각국의 노동자들이 약탈전쟁으로 민중의 고혈을 쏟아 붓게 만드는 대외정책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약소국의 민족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국제평화를 수립해야 한다. 그러므로 혁명적 노동운동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덕과 법률의 소박한 법칙이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지고(至高)의 법칙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대외관계의 수립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 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제1인터내셔널 시기의 마르크스가 채택한 중심과제 중의 하나가, 간섭전쟁에 대한 반대와 민족적 억압에 대한 비판 ・민족해방 투쟁 지원이었다.
마르크스는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강제적 병합’을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또 필요하다면 아일랜드의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강제하는 것이 영국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했다(MEW 16, p.417).
<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박사 논문, 1996) 163~1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