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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파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2) ---역사적인 조건 ⑩ 김승국 1. ‘중립외교의 이정표’를 가로막는 차단막 최명길은 호란(정묘호란ㆍ병자호란)의 위기 극복 대안으로 변통(變通)의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이으려 했다. 변통이란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에 맞추어 때로는 명분을 굽혀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명나라의 적인 후금과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앞날을 대비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이 추구한 실리외교를 조금 절충하여 ‘친명(親明)’의 관계는 유지하고 ‘和金[후금과의 和親]’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이화, 318) 이렇게 광해군 중립외교를 변용한 최명길의 ‘변통’은 고집불통의 척화파에 의해 단절되었다. 최명길은 청의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섰다...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0) ---역사적인 조건 ⑧ 김승국 남한산성 논쟁의 텍스트(Text)를 해석학적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주화파ㆍ척화파의 ‘화(和)’에서 중립의 가치를 찾는 숙제가 남아 있다. 이해는 어린아이의 옹알거림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햄릿’이나 ‘이성 비판’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른다. 거석들, 대리석, 음악적으로 채색된 음색, 몸짓, 단어, 문자, 행위들, 경제 규정이나 헌법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정신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해석을 필요로 한다.(빌헬름 딜타이, 36) 남한산성 논쟁의 주역인 최명길과 김상헌의 몸짓, 말투, 음색, 일거수 일투족, 옹알거림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해석을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의 격렬한 논쟁 속에 스며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의 차이, 세계관ㆍ이념의 차이, 논쟁을 위해 사용하는 한자 단어, 논쟁이 기록..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8) ---역사적인 조건 ⑥ 김승국 1. 광해군의 국제감각을 이어받은 최명길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지 5년 후인 1627년에 후금의 군사가 물밀듯 밀려와 한양을 함락시키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임금인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끝내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인조 정부는 맹약을 어기고 계속 명(명나라)을 지원하면서 후금을 배반했다. 이에 후금은 사신을 보내 강경하게 조선을 힐책하자 후금의 사신을 죽여 우리의 뜻을 보이자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환을 없앤다는 정책에 따라 1636년 조선을 점령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두 전란 때 광해군은 강화도와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이런 현실을 지켜보았다. 이때 광해군의 심정은 어떠했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