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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남양주의 슬픈 역사 이야기 남양주의 슬픈 역사 이야기 김승국(평화 연구•활동가) 6월 12일 남양주의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5월 달부터 남양주에 살고 있는 필자가 생활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느라 남양주의 지리•역사 탐방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나, 더 더워지기 전에 역사 탐방에 나섰다. 여러 유적지 중에서 슬픔을 간직한 곳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먼저 홍릉•유릉의 명성황후 묘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의 浪人들이 사용했던 칼(劍)이 후쿠오카의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 가본 적이 있으며 그 때의 먹구름 같은 감회가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이 칼의 희생자인 명성황후가 묻힌 묘지를 탐방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두 번째 단종의 妃가 잠든 思陵(단종을 깊이 사모한 妃의 陵이어서 ‘思..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43)---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이행 (4) 김승국 중립 지향적인 군사구조 ➁ 앞에서 드러난 ①항과 ②항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하여 ①항과 관련된 문제를 먼저 제기한다. 1. 고종 정부의 군사력이 부족하여 중립화에 실패했나 고종은 1903년 8월 러일 간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듣고 러일 양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유사시 한국을 ‘전시 중립국’으로 간주해줄 것을 요청하는 외교교섭을 추진하였지만 양국은 이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일본은 전시국제법에 있어서 중립국 선언은 스스로 이를 지킬 결심과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이 과연 그러한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빈정거렸다.(정용화 외, 62) [이에 앞선] 조선 정부의 제1차 영세중립 시도는 조병식(趙秉式) 특사를 통해 1900년 8월 일본 정계의 중진 近衛篤麿(‘고노에 아즈마로’라고 읽기도 하..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35) --- 1882∼1904년의 한반도 중립화론 (2) 김승국 1. 고종 정부의 중립화 추진 조선의 영세중립 필요성은 1880년대 초반부터 제기됐으나, 조선정부가 영세중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검토한 것이 아니고, 외국이나 학자의 수준에서 주장되었다. 더 나아가 조선의 정세도 영세중립 정책이 필요한 국제적 환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영세중립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종은 1891년 6월 조선의 지정학적 요인이 스위스와 유사한 점을 감안하여 국제적 보장 아래 조선의 영세중립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은 조선의 영세중립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국이 조선의 영세중립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고종의 영세중립 노력은 실패하게 되었다.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 실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반도를 ..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34) --- 1882∼1904년의 한반도 중립화론 (1) 김승국 스위스가 영세중립국가가 된 1815년을 영세중립의 원년(元年)으로 삼아 한반도 중립화의 조건을 탐색하려는 필자의 방침에 따라, 앞에서 1815년 이전의 중립화론을 펼쳤다. 이제 영세중립 원년(1815년) 이후의 조선 역사 특히 임오군란(1882년)~러일전쟁(1904년) 기간에 제기된 중립화론(주1)을 소개하면서 ‘중립화의 가능조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1. 중립화의 가능조건 중립화가 가능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춰야한다; ① 중립화 대상 국가는 자위력을 갖춰야하는바 군비가 충실해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자립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② 지정학적 위치가 국제중간지대로서 전략상의 요충이거나 열강 간의 완충지대이어야 한다. ③ 중립화 국가는 대내적으로 중립화를 위한 거족적이며 초당적인 국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