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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동양의 평화이론

동양문헌 속의 ‘평화’ (13) - 주역과 ‘평화’ 5

 

동양문헌 속의 ‘평화’ (13)
주역과 ‘평화’ 5

 

김승국 정리

 

歐美의 思考로는 IT 세상의 요구를 결코 따라갈 수 없고 『周易』과도 通話할 수 없다. 歐美의 사고[Thinking]는 저것[彼]과 이것[是]을 둘로 생각하여 分別하라는 ‘1+1=2의 思考(Thinking)’가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본래의 思惟란 피시(彼是)를 하나로 생각하여 融和하라는 ‘1+1=∞(무한대)의 思惟’가 바탕을 이룬다. 融和란 피시(彼是)가 하나[一]가 되는 어울림[和]이다. 피시(彼是)의 둘이 서로 생기고[相生]-서로 이루고[相成]-서로 드러나고[象形]-서로 기대고[相傾]-서로 어울리고[相和]-서로 따르는[相隨] 融和의 생각하기[思惟]가 본래부터 우리가 일구어 온 思惟의 道이다.

 

우리가 일구고 가꾸어 온 思惟의 道는 일즉다(一卽多)-다즉일(多卽一) 즉 여럿[多]이 하나[一]가 되고 하나[一]가 여럿이[多] 되는[融] 어울림[和]의 道이다. 融和의 ‘融’이란 일즉다(一卽多)-다즉일(多卽一)을 한 字로 표한 셈이다. 그리고 融和의 ‘道’란 ‘融和의 이치[理]-融和의 가르침[敎]-融和의 이끔[導]-融和의 방편[方]’ 등을 하나로 묶어 둔 말씀이다. 이러한 融和의 생각하기는 ‘陰陽和而萬物得’이라는 變化의 道를 바탕 삼아 넓혀지고 깊어진다. 이처럼 『周易』은 融和의 思惟로 變化의 道를 스스로 살펴[觀] 새기고[玩] 헤아리고[擬] 따져서[議] 가늠하게[斷]하는 思惟의 길[道]을 넓고 깊게 하여 신사(神思)를 솟구쳐 샘솟게 하는 것이다.


* 출처=윤재근『통어 500』(서울, 나들목, 2013) 18~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