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39) --- 1945년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김승국


제2차 대전 이후에 제기된 중립화론은 단순한 중립화론이 아니라 중립화 통일론이라는 점에서 구한말의 경우와는 뚜렷하게 다른 특성을 갖는다. 중립화와 더불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이중의 과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립화론을 검토할 때에는 이와 같은 복합적 성격에 유의하여 일반적 중립화론의 경우와는 다른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중립화 통일론은 그것이 제기된 국제정치적 배경에 비추어 크게 세 단계로 대별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미ㆍ소 군정 말기에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체방안의 하나로 제기된 것인데,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국내 중도파 인사들 간에 논의된 것 등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둘째 단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 냉전체제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인데, 직접적으로는 휴전협정 체결 전후에 종전처리 방안의 일환으로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오스트리아 중립화 사례(1955)를 염두에 두고 국내외에서 제기된 중립화 통일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로는 1970년대 이후 닉슨 독트린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 정책을 전제로 미국 조야에서 다각적으로 연구ㆍ검토된 것인데, 여기서는 대체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대체방안의 일환으로 중립화론이 제기되었다.(강광식, 189)


위와 같은 3단계별로 나누어 중립화론을 소개한다.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에 따라 미국인과 한국인으로 구분하여 소개한다.
 

1. 첫 번째 단계(분단 고정화 직전)의 중립화론


  1) 한국인의 중립화론


    ① 국내 중도파 인사들의 중립화론


김규식 등의 중도파 인사들은 1947년 8월 2일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에 대응하여, 그들이 전개하던 좌우합작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중립화를 논의했다. 그들은 ‘한국이 미ㆍ소의 완충지대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외국군대 철수 및 외국에 군사기지 제공 금지’를 주장했다. 신탁통치 대신에 미ㆍ소 점령군의 동시 철수를 전제로 한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② 미국인의 중립화론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극동시찰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영구적인 무장 중립화를 보장해야한다’고 건의했다. 웨드마이어의 제안은 조건부적인 무장 영세중립화로서, 소련 점령군이 철수하면 미국 점령군 역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철군의 대안으로 한반도를 무장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2. 두 번째 단계(한국전쟁 이후~1960년대)의 중립화론


  1) 미국인
      
 
   ① 노울랜드(William F. Knowland) 상원의원


노울랜드는 ‘유엔의 신탁통치가 아닌 자유ㆍ독립국가로서 모든 강대국에 의해 중립화가 보장 된다면 한반도 통일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② 미 국무부


미 국무부는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문서를 통해 ‘공산 측이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자유ㆍ독립의 한국을 창설하는 데 동의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중립화를 위한 국제적 보장에 참가할 준비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③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


맨스필드는 극동시찰을 마치고 1960년 10월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방안과 같은 형태로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2) 한국인


맨스필드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론은 국내에 큰 파문을 던졌다. 중립화론을 주장해 왔던 해외교포와 국내 혁신계 인사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한 재미교포 김용중(金龍中)은 남과 북의 정권 당국자에게 공개적으로 통일방안을 제시하기도 했고 유엔에 제의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중립화 통일론으로 일관했다. 그는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나라들과 유엔의 보호하에 영원히 중립되어야 하며 자체로서는 엄격한 중립정책을 유지해 나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중립에 국제적인 보장이 뒤따라야 된다’면서「한국통일을 위한 제언」을 했다.
김삼규(金三奎)는 1951년 동아일보 주필로 재직할 당시 일본에 망명한 이후 줄곧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해 왔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한반도의 모든 정당과 지역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중립화 위원회를 구성한다, 둘째, 통일한국은 모든 나라들의 일반적인 협정에 의해 중립화할 것을 선언한다. 셋째, 남북을 통해 국제관리에 의한 자유총선 실시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넷째, 통일한국은 미ㆍ소 양대 진영의 완충지대로서 중립화하고 중립한국의 주권과 영토의 국제적 보장, 다섯째, 한국통일에 관한 유엔결의는 통일한국의 중립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섯째 초당적 범국민적 중립화운동 전개 등이었다.
1960년 민주당 정권 시기의 사회 대중당은 통일방안에 관한 기본원칙으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통한 영세중립화 통일을 주창했다. 영세중립은 국제회의에서 합의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중립화 통일은 자주통일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김낙중ㆍ노중선, 35~36)


한반도 중립통일론을 원천적으로 규제한 이승만 정권이 4ㆍ19 혁명으로 붕괴되고, 장면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정당ㆍ사회단체가 연계된 혁신 단체들은 중립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한반도 중립화 필요성 발언으로 고무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조직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민자통)와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중통연) 등이었다. ‘민자통’은 1961년 2월 ‘민족통일 건국 최고위원회’를 조직하고 남북협상을 진행할 것을 촉구하면서, 통일방안으로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했다. 광복회 등이 중심이 된 ‘중통연’은 1961년 2월 한반도 통일방안으로 국제적 보장 아래의 한반도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하고 국민운동을 전개했다.(강종일, 54)


일본에 머물던 김삼규 씨가 4ㆍ19 직후 귀국하여 중립화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립화 통일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노중선, 189~206) 그런데 이러한 논쟁도 잠시일 뿐이었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중립화 통일론을 탄압하고, 중립화 통일론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얽어매어 투옥했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단계(1970년대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1) 한국인


재미동포 황인관은 1970년대부터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중립통일의 방법으로 남북한의 입장과 외세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남북한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남북은 ‘공동통일 연구위원회’를 제3국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동 위원회는 영세중립 통일의 전제조건과 중립화에 기초를 둔 통일이념을 창안하고, 중립화를 위한 남북 연방을 수립한다. 외세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미국 주도하에 한반도 중립화 협정을 보장케하고,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미국의 지원 하에 주한 다국적군을 일시적으로 주둔시킬 것을 제의하고 있다.(강종일, 54~55)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의 중립화 필요성을 주장했다.


  2) 미국인


1971년 6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의 청문회에서 포터(William Porter) 주한 미국대사가 중립화에 관하여 언급했다.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은 맨스필드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헨더슨(Gregory Henderson) 교수, 해리슨(Selig S. Harrison) 기자, 라이샤워(Edwin Reishauer) 교수, 바네트(Doak A. Barnett) 교수 등이다.
---------
<인용 자료>
* 강광식『중립화와 한반도 통일』(서울, 백산서당, 2010)
* 강종일「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영세중립화 방안 연구」『시민정치학회보』제3권 (2000년)
* 김낙중ㆍ노중선 편저『現段階 諸統一 方案』(서울, 한백사, 1989)
* 노중선『4ㆍ19와 통일논의』(서울, 사계절, 1989)
----------
*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