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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6) --- 사회적인 조건 ③

김승국


1. 나라가 썩어 문드러졌다


필자는 광해군 이후의 조선후기 역사를 조명하면서, 광해군 중립외교를 단절시킨 서인에 이은 노론ㆍ세도정치 집단의 3백
년 지배가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광해군 이전의 조선 전기(前期)부터 ‘민생고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배계급의 무능함으로 인한 망국의 징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징조를 독파한 이율곡의 저서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소개한다.(기세춘, 241~245)


“민생은 생선처럼 썩어 문드러지고
흙처럼 무너질 것이다.
오늘날 민력(民力)을 살펴보면
죽어가는 사람처럼 숨소리가 잦아들어
평시에도 지탱하기 힘들 지경이니
만일 외환(外患)이 남북에서 일어나면
장차 질풍에 낙엽이 쓸리듯 할 것이다.”


위와 같이 임진왜란을 경고하는 발언에 이어 ‘백성이 굶주리면 나라가 아니다’는 통렬한 비판이 계속된다.



“읍과 동리는 적막하고 쓸쓸하여
사람의 연기가 멀리 끊어져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만약 이러한 폐단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근본이 무너질 것이며
국가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궁궐은 환락에 취한 반면에 민(民)은 굶어 죽었다.


“궁궐 안에서는
환락에 취해 밥 먹을 겨를도 없으나
궐문 밖에서는
임금의 은택이 흐르지 않아
슬픈 우리 창생은 무슨 죄, 무슨 허물뿐
기름기는 가렴주구로 말라가고...
기근이 겹쳐
마을마다 길쌈하는 노래가 끊어지고
골짜기마다 가뭄과 홍수로 탄식한다.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고
구제의 손길이 끊긴 버려진 백성이 슬프다.”


이렇게 백성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민은 결국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킨다.


“백성이 항구적인 산업이 없으면
그 본연의 착한 마음을 잃게 되고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절하면
염치를 돌아볼 수 없게 되어
일어나 도적이 되니
어찌 본마음이겠는가?”

  1) 20 대(對) 80의 사회에서 전쟁의 피해가 가중됨


당시 조선은 20 대(對) 80의 사회이었다. 20%의 양반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지만, 80%의 상놈들은 인권이 없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 (광해군 중립외교를 단절시킨 서인 주도의 인조정권이 유발한)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참담한 병화(兵禍)를 겪고 난 이후에 민생은 그야말로 도탄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때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 우선 군사를 정비하고 민생을 돌보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농토의 소유자가 병사를 내는 농병일치의 제도 하에서 20%의 양반이 농토를 겸병(兼倂)하면서도 병역을 면제 받았으니, 80%의 상민(常民)이 가진 농토만으로는 군사를 정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즉 민생이 피폐하여 군사를 정비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1만 명의 군사만 쳐들어와도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20 대 80의 사회에, 전쟁의 화마까지 덮쳐 민생고가 가중되었다. 모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들의 고난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양란(兩亂)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광풍이 조선을 휩쓸고 갔을 때,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겠지만 가장 큰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힘없는 아녀자들이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장수들은 전쟁을 치르는 동한 성욕을 해결하고자 조선 현지에서 조선인 아녀자를 현지처로 삼고 조선 여인들에게 일종의 화대로 부지미(扶持米)를 주었다.
전쟁 기간 중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인들이 일본군에게 겁탈을 당하거나 그런 사태를 피하고자 자살하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임진왜란에 이어 조선을 휩쓴 병자호란 때도 조선의 여인들은 크나큰 고초를 겪었다. 청군[청나라 군인]에게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간 수많은 여인들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림을 당하다 매를 맞거나 병들어 죽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와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이 돌아온 여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음란한 여인을 가리키는 ‘화냥녀’ 또는 ‘화냥년’이라는 말은 병자호란 때 청[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인이라는 말인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했다.(도현신, 258~265 요약)   


2. 망국 100년, 분단 63년


조선왕국의 말년에, 조선의 민중들은 대부분 땅을 갈아먹고 사는 경작농민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농업생산성이 낮았던 관계로 사람들이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가족들이 먹고 남는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농사를 짓지도 않고 먹고사는 왕실 양반관료들의 수가 늘어나고, 또 그들의 가렴주구가 하도 극심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도처에서 들고 일어나서 ‘민란’을 일으켰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민란’이 전국도처에서 일상화되었고, 1894년에 일어난 갑오 농민봉기는 조선왕국 왕실 관료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왕실의 민씨 정권은 드디어 청국 군대를 불러들이게 되었고, 일본은 청군의 출병과 일본 공관 경비를 이유로 조선에 일본군을 출병하게 되었으니, 결국 조선왕국 지배층 내부에서 친청파와 친일파가 갈리어 권력다툼을 하면서, 각기 외세의 무력으로 조선 각지의 민란과 동학군을 진압하려 했었기 때문에 외국군대가 조선 땅에 들어온 것이다. 이 땅에서는 친청파가 불러들인 청군[청나라 군대]과 친일파가 불러들인 일군[일본 군대]이 싸우는 청일전쟁의 결과로 결국 청군이 패하여 일본이 조선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태로 진전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왕국의 국권을 찬탈한 배경에는 1902년의 ‘영일동맹 조약’과 1905년의 ‘미ㆍ일 태프트-카츠라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할 일이다. 약소국가가 과연 어느 강대외세를 믿으면 될까?


그러나 조선왕국의 망국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당시 조선왕국의 왕실 관료들이 자국 내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일으킨 민란과 갑오 농민봉기를 청국이든, 일본군이든, 외세의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하려고 했고, 자기 문제를 자기 힘으로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주적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일본군은 조선왕국의 관군과 더불어 무력으로 동학군을 말살했고, 드디어는 일본군이 조선왕국의 독립권까지를 집어 삼키는 사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왕조 말년에 왕실관료들과 민중 사이의 민족 내부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망국의 비극을 맞았던 우리 민족은 8.15 후의 정국에서 다시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 독립국가를 만들겠다고 남과 북이 각기 미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을 불러들여 동족상잔의 전쟁을 했다. 조선왕국의 망국과 6,25 전쟁의 비극 속에는 ‘외세 의존’이라는 사대주의의 공통성이 있었다. ‘외세의 힘’을 빌려,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성찰이 없었던 것이 우리 민족에게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던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김낙중, 2005)


3.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악순환이 분단체제로 연결됨


민중봉기를 제어할 능력이 없던 노론-세도정치 세력이 외세의 힘을 빌려 봉기를 진압하면서 민족모순이 강화되었다. 계급모순의 발로인 민중봉기를 외세가 진압함으로써 민족모순이 강화되는 악순환이 조선왕조의 멸망을 가져왔다. 19세기 말부터 일어난 계급모순-민족모순의 악순환은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고, 드디어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부터 폭발하여 1950년 한국전쟁의 내재적 원인을 제공했다. 분단체제의 서막이 된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 사이에 평화통일을 위한 중립지대가 사라짐으로써,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광해군 축출(광해군 중립외교의 단절)~인조반정~서인ㆍ노론 집권~세도정치~조선왕조 멸망~분단의 과정 속에서, 중립외교ㆍ중립화ㆍ중립화 통일ㆍ영세중립과는 거리가 먼 사대주의(慕華ㆍ慕日ㆍ慕美사상)가 득세한 끝에 분단체제를 강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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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기세춘『성리학 개론 (下)』(서울, 바이북스, 2007)
* 김낙중「망국 100년, 분단 60년의 해를 보내고, 2006년을 맞으며」『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214호(2005.12.30)
* 도현신 『옛사람에게 전쟁을 묻다』(서울, 타임스퀘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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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