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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5) ---역사적인 조건 ③

김승국


1. 광해군의 중립외교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지정학적 특성을 지닌 한반도에서 역대 왕조들은 양국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부심해야 했다. 한반도의 정권들은 대외정책을 펼쳐 나갈 때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변수를 동시에 고려해야만 했다. 서북방에서 중국이나 다른 북방민족과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동남방에서 일본과의 관계까지 악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양쪽에서 긴장을 초래하고 중국과 일본을 모두 ‘적’으로 만들 경우, 정권은 물론 국가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쪽에서 동시에 적을 만들 경우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의 상황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명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란 이후 서북방에서 누르하치의 위협이 커지면서 곤경은 재현되었다.(한명기,  241)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위협이 여전한데 후금(청나라)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 앞에서 임금은 어떠한 대외정책을 펼쳐야했을까?


이러한 역사적 도전에 제대로 응전한 임금이 광해군인 것 같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당사자인 선조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았다. 선조는 명나라를 지성으로 섬기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은 적이 없는 철저한 사대주의자이었다. 이 때문에 북로남왜(北虜南倭)의 국제정세를 평화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임진왜란을 자초했다. 그런데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은 아버지와 달랐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왕세자로 정해져, 선조를 도와가며 임진왜란 중의 국사를 담당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의 참화가 나라와 민중에게 어떠한 고통을 강요하는가를 절실하게 체험한 위정자였다. 명이 조선을 도왔다고는 하나 명이 자신의 국익을 위해 보였던 독선적인 행위들과 횡포를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 또한 광해군이었다. 그가 중화사상의 한계를 직접 체험하고 국제관계를 중화주의적 명분이나 이념 못지않게 전쟁과 평화의 관점에서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시야를 획득한 측면이 분명이 있었을 것이다.(이삼성,  537~538)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의 참화가 심각한 것을 절감한 광해군이 평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아버지(선조)의 대명사대(명나라에만 사대하는) 외교를 탈피한 점이 중요하다.


대명사대를 국가정책의 하나의 근본으로 천명한 조선에서 모든 외교의 시작과 끝은 명나라와의 관계에 있었다. 특히 명나라를 하나의 대국이 아닌 유일한 상국(천자국)으로 보고, 더 나아가 부모라는 개념까지 도입해 ‘군부(君父)’의 나라로 섬겼던 조선사회에서, 대명사대 원칙에 약간이라도 저해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국제관계라면 그것은 단순한 외교 문제를 떠나 국가의 정체성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계승범, 207)


[국가의 정체성을 평화 지향적으로 정립하려는] 광해군은 조선이 명의 ‘이이제이’책 때문에 후금과의 대결구도 속으로 휘말리는 것을 회피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시도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왕조 개창 이후 200년 이상 이어져온 ‘조공ㆍ책봉 관계’ 속에서 명은 이미 조선의 ‘부모지국(父母之國)’으로 인식된 데다 참전을 통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다’는 명분까지 더해지면서 임진왜란 이후의 명은 ‘부모지국’ 이상의 ‘버거운 존재’가 되었다. 더욱이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 선전포고하고 무순(撫順)을 점령한 이후 명과 후금의 대결이 날로 격화되면서 조선의 입장은 한층 난감해졌다. 조선을 끌어들여 활용하려는 명의 책동은 더욱 집요해졌고, 그와 맞물려 조선 내부의 화이론자(華夷論者)들 또한 ‘부모지국을 지원하라’고 채근했다.(한명기, 18)


2. 파병을 에워싼 논란


‘부모지국인 명나라를 지원하라’고 채근한 화이론자(華夷論者)들은 광해군의 신하들이었다.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립외교를 펼치려는 광해군 앞에서, 신하들은 명나라의 말을 들어야한다고 임금을 윽박질렀다. 이렇게 임금과 신하 사이에 외교노선을 놓고 극한적인 대립을 보인 결정적인 계기는 명(명나라)의 파병요청이었다.


당시 후금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명은 공식ㆍ비공식적으로 모두 서너 차례에 걸쳐 조선에 병력을 요청했는데, 비변사를 필두로 거의 모든 신료들이 찬성론을 펴고 광해군이 외롭게 반대하는 형세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광해군은 명 황제의 파병요청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를 서슴지 않은데 반하여, 신하들은 그런 광해군의 왕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수시로 파업을 일삼았다.  


파병 찬성론의 근거는 군부의 나라인 명에 대해 ‘재조지은’을 갚아야 한다는 것과 200년 사대 전통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반대론의 근거는 명의 군사작전은 실패할 것이라는 현실적 정세 판단이었다.(계승범, 47~48)


명나라만 파병을 조선에 요청한 것이 아니라 후금도 도와달라고 광해군에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어느 쪽만 일방적으로 지원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명과 후금은 각기 조선의 지지가 필요했다. 조선을 사이에 놓고 두 나라의 외교전은 첨예하게 맞붙었다. 명은 조선에 지속적으로 군대를 요청했고, 후금은 조선에게 우호조약의 체결을 재촉하면서 명을 돕지 말도록 압력을 가했다.(계승범, 149)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라도 명이나 후금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의 파병 요청과 후금의 압력 사이에서 조선 조정이 고심했던 문제의 본질은 중립의 문제라기보다 양자택일의 문제에 더 가까웠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떤 노선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조정 논의는 1618년 초여름에 명이 후금 정벌 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이 파병 여부 논쟁을 시작으로 광해군이 계해정변(인조반정, 1623)으로 인해 강제폐위 당할 때까지 약 5년간 조선 조정은 외교노선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며, 이 논쟁을 통해 광해군과 양반신료들의 대외인식과 정세인식 수준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또한 이 논쟁이 왕의 강제 폐위라는 극단적인 사건[인조반정]을 통해 마무리 된 사실은 당시 조선사회를 움직인 권위[서인의 권위]의 실체와 관련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계승범, 149~150)
 

대명사대(對明事大)를 하나의 상대적인 외교노선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 가치로 보는 한, 조선이 명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에서 중립적 외교를 추진하는 것은 우선 이론적으로 불가능했다. 교린이니 기미(羈靡)니 하는 정책이 결코 진정한 의미의 중립정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계승범, 208)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중립적 외교를 실행하려고 노력한 광해군의 훌륭함이 돋보인다. 후금과 명나라 사이의 양다리를 걸치는 중립 외교를 전개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외교를 실행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광해군의 대외정책이 더욱 빛난다. 인조반정 이후의 임금들이 소중화주의에 따른 사대주의 외교를 펼친 것과 비교하면 할수록 빛난다.


후금과 명나라의 사이에 낀 엄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이 나아갈 길은, 두 나라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중립외교를 펼쳤어야했는데, 중립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축출하는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친 것을 죄악으로 규정한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서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집단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의 반청친명(反淸親明) 정책이 병자호란을 초래하지 않았나? 인조로 하여금 삼전도에 나아가 오랑캐의 왕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수모를 겪게 한 주범이 당신들 아닌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항복을 불러온 당신들이말로 반역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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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계승범『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서울, 푸른역사, 2009)
* 이삼성『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파주, 한길사, 2009)
* 한명기『정묘ㆍ병자호란과 동아시아』(서울, 푸른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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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